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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57)화 (558/763)

Chapter 556 - 통조림(2)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모든 계획이 꼬인 건 그렇다 치고, 굳이 무리하게 피와 강철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냐고.

 

지금도 사흘에 한 권 꼴로 발매하는데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글을 쓸 필요가 있냐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신들의 숨겨진 과거를 배경으로 둔 차기작도 차기작이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적어도 탐사대가 게리오스 왕국 수도를 탐사하기 직전에 써야 된다. 게다가 앞으로 곧 개최될 제논 축제까지.

 

어차피 피와 강철은 당분간 전쟁 및 외교 이야기밖에 없을 테고, 미국의 참전 이후로는 참교육밖에 남아있지 않다.

 

물론 나치의 홀로코스트, 소련의 물량공세, 미국의 피지컬,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등등. 세세한 건 많다.

 

이와 더불어 각 국의 명장들, 특히 패튼 같이 캐릭터성이 명확한 장군들의 활약도 점차 내보일 예정이다.

 

그러나 아까 말했다시피 마리의 임신으로 시간이 턱없이 촉박하다. 아카데미도 떠날 수 없는 게 체리가 아직 재학 중이다.

 

약속을 깨뜨리는 짓은 하기 싫은데다가 아카데미가 만남의 광장 역할도 하고 있어서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교수로 재직할 거라고 말한 것이다. 대신 당장 시작하진 않고 아카데미에만 머물 수 있도록 부탁할 것이다.

 

준비한 것도 없이 바로 강의를 시작한다면 밑천이 다 털릴 테니까.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창조했다지만 전생의 힘을 빌린 거다.

 

시대를 막론하고 교수들은 대부분 진짜배기 '천재'다. 나로서는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헤일로 아카데미는 알븐하임의 성지보다는 아니지만 저명한 교수들이 모여있는 아카데미다.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마저 범인을 아득히 넘어서는데 교수들은 오죽할까. 말 그대로 명예 교수인 셈이다.

 

'효과는 톡톡히 보겠지만.'

 

굳이 강의를 할 필요는 없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낳을 테니.

 

물론 날먹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얼굴 마담을 할 거면 제대로 할 거라 오리엔테이션 정도는 할 예정이다.

 

그런고로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피와 강철을 최대한 연재할 계획이다. 신성까지 얻었으니 가뿐하겠지.

 

'마리오 아니, 칼즈 씨는······ 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나와 함께 통조림이 될 삽화가, 칼즈 즈바사다.

 

내가 꾸준히 스케치를 보내고 있지만 그의 실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피와 강철의 몰입감을 끌어올리는데에 칼즈의 지분이 약 10% 정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피와 강철은 제논 일대기와 달리 삽화가 없으면 이해 못할 것들이 넘쳐나니까. 당장 전차와 폭격기만 해도 그림이 없다면 이해시키기 어렵다.

 

'편지는 보냈다만 작업 속도를 따라가기는 힘들겠지.'

 

이건 팩트다. 제아무리 칼즈의 능력이 뛰어나도 진짜 통조림에 갇히는 나와 달리 그는 몸과 마음을 갈아야 할 판이다.

 

건강에 우려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전에 내 이름을 대라고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힘들겠지.

 

마음 같아서 칼즈와 함께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

 

하지만 집필을 할 때만큼은 혼자 있고 싶다. 안 그러면 집중이 안 되거든.

 

이건 칼즈도 비슷할 것이다. 보통 예술가들이 집중을 위해서 혼자 있는 편이니까.

 

'혹시 가능할까요?'

 

그래서 모라에게 직접 물어봤다. 마리와 가족들에게는 잠깐 신전에 갔다 온다고 말한 참이다.

 

어째서 루미너스가 아닌 모라에게 물었냐면, 그녀가 안식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정신 관련에 한해서는 루미너스보다는 모라가 더 뛰어나다. 이건 루미너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칼즈라는 예술가를 이곳에 초청할 수 있냐는 말이지?]

'네.'

[불가능한 건 아니야. 신성력이 크게 소모되긴 하겠지만 신성까지 얻은 마당에 의미 없는 말이라서. 대신 너 따로, 칼즈 따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 함께 들어가야 될 거야.]

'음······'

 

그러면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워하겠는데. 특히 칼즈가 나를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건강과 작업을 위해서라도 통조림이 될 필요가 있다. 그가 허락할지가 문제지.

 

마음 같아서는 '너는 내 노예이니 거부권 따위는 없다!' 라며 끌고 가고 싶다.

 

어디까지나 장난이긴 해도 칼즈는 눈물을 머금고 응할 수밖에 없겠지. 내 명성이 명성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

 

'어시 같은 개념은 없겠지?'

 

전생의 웹툰 작가들을 보면 원활한 작업을 위해 대부분 어시스턴트를 고용한다.

 

그러나 이곳은 그런 개념이 아니라 문하생 즉, 스승과 제자밖에 없다.

 

칼즈에게 문하생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업 속도를 고려한다면 없을 가능성이 높다.

 

사흘에 한 권 꼴로 발매하면서도 중간중간 긴 텀을 주는데, 칼즈의 작업 속도가 못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칼즈와 함께 시간과 정신의 방 즉, 통조림이 되는 편이 가장 나은 방법이다.

 

'일단 알겠어요. 이건 칼즈 씨에게 의견을 물어봐야겠네요.'

[만약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거니?]

'어떻게 하긴요. 칼즈 씨의 작업 속도에 맞춰서 발매해야죠. 그래도 상관없어요.'

 

나는 완결만 내면 끝이다. 남은 건 칼즈의 작업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발매하는 것.

 

하지만 회색 사막 탐사대가 언제쯤 게리오스 왕국의 궁전을 탐사하는지 전혀 모른다.

 

엘레나가 예상하는 바로는 최소 반년에서 1년이 소요될 거라고.

 

피와 강철의 완결이 40권 언저리에 끝난다고 가정하고, 일주일에 한 권씩 발매할시 약 150일이다.

 

기간으로 보면 딱 맞긴 해도 칼즈가 버틸 수 있을지가 미지수.

 

피와 강철 연재 기간은 그의 작업 속도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다.

 

[급하게 할 필요는 없잖니? 그 아이의 임신으로 신경 쓸 게 많아졌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마리도 마리지만 악마 숭배자도 거슬려서요.'

[악마 숭배자? 그 놈들은 왜?]

'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거든요.'

 

악마 숭배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다의 신의 부활, 그리고 진실이다.

 

음지에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생활하는 건 신들의 압박 때문일 확률이 높다.

 

시간이 흐르면서 음지를 완벽히 지배하고, 양지로 뻗어나가 세이비어마저 타락시킬 뻔했다.

 

이것만 본다면 단순히 세상을 어지럽히기 위한 악으로만 보이겠지만, 신들의 진실을 알고 나서 시선이 약간 바뀌었다.

 

'피와 강철이 발매된 이후에 악마 숭배자들이 조용해졌어요. 특히 러다이트 사건, 그러니까 기계 파괴 운동 당시 자신들에게 누명을 씌웠던 직조공을 매달았고요.'

[흠.]

'이것만 보면 악마 숭배자들의 목적은 명확해요. 바다의 신이 그러했듯, 인간들이 스스로 무언가 이룰 수 있도록 길을 개척하는 거겠죠. 하지만······'

[그거 때문에 악마 숭배자가 힘을 얻을 수도 있다?]

'비슷해요.'

 

쉽게 말해서 세탁이다. 어쩌면 지금도 알게 모르게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타락한 추기경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영향력은 실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으니.

 

훗날 신들의 과거를 배경으로 둔 책까지 발매했을 때, 악마 숭배자 쪽에서 세탁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때라면 세상도 혼란스러워졌을 테니 악마 숭배자에게 홀리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다.

 

[조금씩 스며들 바에야 차라리 한 번에 쾅! 하고 터뜨리는 게 더 낫다. 이게 네 의견인 거지?]

'네. 피와 강철은 이 세상의 판타지로 남았으면 좋겠거든요.'

[뒷수습을 할 수 있겠니?]

'솔직히 이제 뒷수습을 할 것도 없어요. 남은 건 죄다 전쟁밖에 없거든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2차 세계 대전은 시작됐다. 이제 남은 건 전쟁의 끔찍한 참상 뿐.

 

마키나의 혁명을 이끌었던 공산주의도, 스타비르크의 독립을 이끌 뻔했던 민족자결주의도 없다. 남은 건 파괴와 살육이다.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몇몇 학살극이 남아있으나 공산주의와 달리 반면교사로 내세울 수 있다.

 

[우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겠네.]

'정확해요. 그래서 모라 님에게 여쭌 거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할 수가 없지. 네 선택에 따라 미래가 요동치는데. 굳이 조언을 하자면 악마 숭배자와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클리셰 중에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라는 클리셰가 있다. 원래 나쁜 놈은 아닌데 환경이 그리 만들었다는 설정이다.

 

실제로 악마 숭배자는 신들의 진실을 깨닫고 악마 숭배자가 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루미너스도 홀로코스트에 비견되는 일을 저질렀지 않았는가.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는 퇴색되고 악행을 저지르는 개새끼들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신들의 숨겨진 진실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중요한 건 이해는 할 수 있어도 악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악마 숭배자 중에는 욕망을 위해 악행을 저지른 놈들도 많다.

 

'그리고 저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악마 숭배자들 쪽에서 이리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겠죠.'

[분열을 야기하자는 소리구나?]

'네. 세상이 피와 강철의 연재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면, 악마 숭배자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그래서 목적을 알 수 없다면 분열을 일으킬 계획이다. 놈들이 피와 강철에 호의적이니 가능한 일이다.

 

설사 양지로 나와 목소리를 내도 상관없다. 그 전에 악마 숭배자들 쪽에서 처리할 가능성이 높으니.

 

나로 인해 똘똘 뭉쳤던 악마 숭배자들은, 이제 나로 인하여 두 개의 분파로 갈릴 것이다.

 

[······생각보다 똘똘하네. 뒷수습만 할 줄 알았는데.]

 

모라가 신기하다는 투로 나를 칭찬했다. 하긴 지금까지 나를 지켜본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나 또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생각없이 저지른 게 한두 개여야지.

 

솔직히 이것도 생각없이 저지르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전과 다르게 확실한 '목표'가 존재한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죠. 저도 목표가 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긴. 우리는 네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항상 도와줄 거란다.]

'감사합니다. 잠깐 칼즈 씨를 만나러 갔다 올게요.'

 

이제 남은 건 칼즈와 상의하는 것 뿐이다. 나는 예배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칼즈를 찾아갔다.

 

칼즈는 내가 의뢰를 한 이후 마이샬 영지로 이사했다. 보다 더 빨리 결과물을 받기 위함이다.

 

아. 칼즈의 작업실로 향하기 전 '준비물'을 잊지 않았다. 이걸 통해서 그를 설득할 생각이다.

 

그리고······

 

"······칼즈 씨?"

"예. 제논 님."

"정말 칼즈 씨 맞나요?"

"저 맞습니다."

 

마리오는 어디 가고 폐인 한 명만 덩그러니 남아있더라.

 

마리오가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준의 수염인데.

 

******

 

"괜찮으신 거 맞죠?"

"하하. 보기에는 이래도 괜찮은 거 맞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아. 그러니까 쉬게 해줘.

 

아이작과 만나게 된 칼즈의 속마음이었다. 저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목이 잘리겠지.

 

설령 목이 잘리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확률이 높다. 칼즈로서는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다.

 

"헌데 편지까지 보내주셨는데 어째서 방문하셨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이작이 편지를 보낸 시간이 정확히 이틀 전이다. 그걸 봤을 때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아이작이 자신의 작업실로 찾아온 게 아닌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미처 준비조차 할 수 없었다. 편지에도 곧 찾아갈 거라는 말은 없었으니.

 

마음 같아서는 급하게라도 다과를 준비하고 싶지만 아이작이 만류해서 이렇게 대화하게 된 것이다.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를 노예처럼 취급했으면서.

 

칼즈는 본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는 아이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속으로만.

 

그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아이작은 두 손을 맞잡더니, 이윽고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실은······"

 

아이작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예상치 못한 일(임신) 때문에 피와 강철의 연재를 서두를 수밖에 없다.

 

자신은 괜찮지만 삽화가인 칼즈는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그래서 나와 함께 통조림이 되자. 통조림이 되어서 다 같이 죽자.

 

'······이 새끼가?'

 

누구를 진짜 노예로 생각하는 건가. 물론 그만큼 돈을 지급하고 있지만 몸과 정신이 남아나지를 않는다.

 

손은 하루가 멀다하고 굳은살이 박히거나 갈라지지,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바람에 어지럽지.

 

안 그래도 무리를 하는 바람에 피를 토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고생하자고 제안한다.

 

마음 같아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휴식을 달라고 하고 싶었다.

 

"힘드신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로의 차원에서 칼즈 씨를 위해 금괴를······"

"개처럼 부려주십시오."

 

라고 항의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금괴가 지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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