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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56)화 (557/763)

Chapter 555 - 통조림(1)

마리의 흑역사 겸 정실 선언 이후로는 아주 심오한 논의가 이어졌다.

 

피임약으로 막을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 피임을 해야 되는 것인가. 조금 어이가 없겠지만 진지한 이야기다.

 

마리 같은 상황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서로서로 곤란하니까. 그나마 마리는 약혼녀로 공표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물론 언론에서 약간이나마 떡밥을 뿌리고 있기에 사람들은 설마? 하며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공식적인 발표와 추측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따라서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은 안전한 날에만 할 것. 정녕 하고 싶다면 피임약이 아니라 콘돔을 사용할 것.

 

"그냥 네가 루미너스 님이나 모라 님에게 물어보면 안 돼? 그럼 되잖아."

 

여기서 레오나가 수인답다면 수인답게 단순명료한 결론을 꺼냈다. 그걸 듣고 얼마나 어이없어했는지.

 

그러나 저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었기에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특히 레오나와 아델리아는 주기가 짧은 인간이라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악주기만 조심하면 되겠네? 아이, 좋아라."

"나도 마찬가지이니라."

 

세실리와 아르웬은 정반대다. 이들은 주기가 어마어마하게 길어 그 날만 조심하면 됐으니.

 

마음 같아서는 주기 따위 필요없어! 번식이다! 라며 공평하게 대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쓰레기를 넘어선 핵폐기물로 변할 것 같아 관뒀다.

 

레오나의 말대로 신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내 미래를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미래는 볼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나조차도 전혀 몰랐기에 그들이 알려줄 수 없던 것이지, 이제부터라도 꼼꼼히 확인한다면 될 것이다.

 

"그러면 첫번째는 마리고 두번째는 누구야? 난 몇 번째든 상관없어서."

"··· ···"

"··· ···"

 

가끔 가다 레오나 얘는 폭탄을 아무렇지 않게 펑펑 터뜨린다. 본인 딴에는 진지하게 궁금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것이 핵병기에 걸맞는 수준이라 내 심장을 쫄깃쫄깃하게 만들었다.

 

첫번째가 마리로 확정된 상황에서 순위가 중요하나 싶기도 하겠지.

 

중요하다. 내 의견이고 나발이고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아이작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여기서 아델리아는 잽싸게 빠졌다. 애당초 본인은 그런 쪽에 아무 욕심이 없고 나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레오나도 수인 특유의 문화에 입각하여 별 생각 없다고 미리 말해놓았다.

 

다시 말해 남는 사람은 세실리와 아르웬. 장수종으로 유명한 마족과 엘프다.

 

이에 미묘한 기류가 내려앉았을 때쯤, 먼저 입을 연 건 세실리였다.

 

"아르웬 여왕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죄송하지만 두 번째만큼은 절대 양보 못 해요. 아시겠죠?"

 

웃고 있는데 분위기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절대적으로 사수하겠다는 세실리의 의지가 돋보였다.

 

아르웬도 그런 그녀의 기백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원래는 별 생각 없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대가 그리 말하니 경쟁심이 드는구나. 기꺼이 도전을 받아주마."

"도전은 제가 아니라 여왕님께서 해야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러고 보니 이번 제논 축제에 발표할 영화는 우리 알븐하임 쪽의 도움을 받았던 걸로 아는데······ 아닌가?"

"호······ 호호. 배우들은 저희 쪽에서 모집했죠."

 

웅장한 대결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다. 원래부터 라이벌리티를 형성하던 그들인데 이번 일로 더 심해질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아르웬은 정말 관심 없었다는 게 포인트. 세실리가 도발을 하면서 본인도 질 수 없다는 경쟁심리가 생겨난 모양이다.

 

그래도 마리와 세실리의 경우처럼, 아르웬도 세실리가 두 번째라는 걸 내심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저쪽에서 먼저 건드리니 자기도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것 뿐.

 

'좋다고 해야 할지 반대라고 해야 할지.'

 

이렇듯 웅장한 대결이 끝난 후에는 해산했다. 해산하기 전에 각자 마리를 위한 선물을 주는 걸로 끝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리는 보호 받아야 할 산부니까. 그래서 아델리아에게 나보다는 마리를 호위해달라고 부탁했다.

 

안정기에 접할 때까지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됐으니. 아델리아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이제 남은 건 다른 사람, 그러니까 외가와 친정에게 사실을 밝히는 것. 물론 그 전에 주변 지인들부터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난 왜 부른 거야?"

 

우선적으로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 리나다. 그녀는 내 호출에 기꺼이 응해줬다.

 

언제 봐도 생각하지만 우아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내보이는 리나다. 교육으로 만들어진 기품이 아니라는 소리.

 

나는 차를 마시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지은 그녀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마리가 임신했어."

"푸웁! 콜록! 콜록!"

 

폭탄을 터뜨리자마자 리나가 마시던 차를 뿜어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사레가 들린 모양이다.

 

"이, 임신? 갑자기? 피임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리나는 얼굴에 튄 차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다급히 질문했다. 말 속에 온갖 감정들이 느껴진다.

 

이에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설명을 꺼냈다. 그녀는 내가 보름동안 병을 앓았다는 걸로만 알지, 신성을 얻었다는 건 모른다.

 

그래서 신성을 얻었다는 설명에는 경악을, 마리에게 청혼을 했다는 설명에는 감탄을, 신성이 약을 뚫었다는 설명에는 황당함을 드러냈다.

 

"······너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래도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보다는 낫네. 이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고니까."

 

리나도 이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건 있을 법한 사고다.

 

나처럼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거나, 전생을 기억한다 거나 등등. 리나로서는 정말 평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해. 그래서 말인데······"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거지?"

 

역시 리나다. 내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의 입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리나는 턱을 괴며 골똘히 생각했다. 아무래도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니 복잡하겠지.

 

이어서 어느 정도 생각을 마쳤는지 내 옆에 앉아있는 마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일단 축하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이루어냈구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렇겠지. 우선 황실에서도 도울 수 있는대로 도와줄게. 원한다면 언론도 조절하고."

"그러는 너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마리의 질문이다. 저 안에는 리나와 나 사이에 맺어질 정략혼도 포함돼 있겠지.

 

리나는 그 질문을 듣고 나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렴 상관없다는 반응이다.

 

"상관없잖아? 오히려 기간이 앞당겨졌으니까 나나 제국이나 괜찮지."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그러면?"

 

의아하다는 질문에 마리가 씨익 웃는다. 장난기가 다분히 들어있는, 상당히 짓궂은 표정이다.

 

그 표정에 리나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쯤, 마리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들었다시피 이제 피임약으로 막을 수 없거든. 다른 걸 사용하자니 전보다 못할 것 같아서 앞으로 주기를 맞출 거란 말이야?"

"······그런데?"

"세실리는 괜찮아도 너랑 나는 주기를 맞추려면······"

"야!!!"

 

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질렀다.

 

슬슬 질릴 법한 패턴인데도 반응이 너무 맛있어서 못 끊는다.

 

"나 놀리는 게 재밌어? 응? 재밌냐고! 이때다 싶어서 놀리는 거 진짜!"

"재밌는데? 그러게 누가 훔쳐보래? 차라리 당당하게 한 번 하자! 라고 하면 될 걸."

"너 이 씨······ 안 봤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이제 당당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아아악!"

 

2년 전만 해도 살얼음판을 걷던 관계가 맞나 싶다. 이제는 악우라고 할 수 있겠지.

 

물론 마리가 리나를 골탕 먹이는 쪽이고, 리나는 항상 당하는 쪽이다. 아무래도 리나가 이런 부분에 많이 취약하니 어쩔 수 없다.

 

"후우······ 아무튼 잘 알았어. 다만 당분간은 공장 추가 설립 안건에 신경 써야 되서 너희끼리 조정하는 게 좋아. 결혼식은 마찬가지고. 알아본 곳은 있어?"

"딱히 없지만 아마 우리 영지에서 할 것 같아."

"흠. 그게 제일 좋겠네. 악마 숭배자가 테러를 일으키지도 않을 거고 각 국의 인력들이 필사적으로 보호할 테니까. 웨딩 드레스는······ 아니다. 이건 나랑 상의할 게 아니라 너희끼리 해야지."

 

리나와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이야기고, 마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밤일 때문이겠지. 방금 전에는 장난식으로 말했겠지만 주기를 맞춰야 하기에 조율은 필수다.

 

-그, 그 정도야?

-응. 설마 그때도 구경만 할 건 아니지?

-아, 아냐! 그냥 좀 무서워서······

 

다 들리더라.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아니면 내 귀가 밝아져서 그런지 몰라도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대화가 끝나고 방 밖으로 나올 때 얼굴이 붉어진 리나가 내 아랫도리를 힐끔거리는 것도 다 포착할 수 있었다.

 

수치사 할까봐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과연 그때가 되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조금 궁금해졌다.

 

"그, 그럼 앞으로 잘 쉬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잘 가. 내 말 꼭 명심하고."

"며, 명심할게."

 

리나는 돌아갈 때도 엄한 부분을 힐끔거렸다. 저러니까 진짜 변태 같네.

 

어쨌거나 리나와의 대화가 끝난 후에는 각각 케이트와 체리에게 소식을 전달했다.

 

케이트는 처음에 놀랐을지언정 축복을 내려줬으며, 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더라.

 

평범하다면 평범한 반응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지인에 불과하고 외가와 친정이 남아있다.

 

외가의 저택은 수도에 있었기에 직접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허허허허. 사위."

"예. 장인어른."

"뭐라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는 기분을 아는가?"

"··· ···"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그 딸을 채간 놈이 놈팽이다.

 

그것도 어디 하나 모자른 게 없는 놈팽이. 하나하나 따져봐도 빌어먹을 놈팽이의 조건이 너무나 완벽하다.

 

그나마 결점은 주변에 여자가 많은 것. 하지만 마리가 정실로 못 박혔으니 이것조차 해결된 상황이다.

 

"아카데미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규정상 학생이 아이를 가졌다면 자퇴를 할 수밖에 없다네."

"그래서 생각해놓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뭐지?"

"교수로 재직하면 됩니다."

 

이건 아카데미 쪽에서 미리 제안한 사항이다. 만약 여유가 된다면 교수로 재직해달라고.

 

당시에는 엘레나가 있어서 거부했지만, 지금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데다가 마리의 임신까지 겹쳤다.

 

굳이 아카데미에 남아있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남아야 된다. 세실리도 세실리지만 체리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야 됐으니.

 

단 하나밖에 없는 동업자, 체리를 위해서라도 교수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대신 엄청나게 바빠지겠지.

 

"교수라······ 괜찮은 방법이로군. 기숙사도 그대로일 테니 문제가 없을 테고. 하지만 고생을 할 텐데 괜찮은가?"

"사고를 친 놈에게 어울리는 고생이죠."

"하하하! 재미있는 대답이로군. 좋네.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신혼 여행도 보내주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다는 게 아쉽군."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이다. 악마 숭배자들 때문에 밖에 못 나가는 상황이니.

 

나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외가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남은 건 본가 즉, 우리 저택이다. 본가로 돌아가기 전에 마리에게 질문했다.

 

나와 드미트리와 대화하는 동안 마리는 장모님 즉, 사라와 이야기했으니.

 

"장모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어?"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을 알려주셨어. 생각보다 많더라고."

"그래?"

"그리고 안정기로 접어들 때까지 하지 말라는데······ 우리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신성이잖아."

"······이건 나중에 생각해보자."

 

지금의 본가가 중요하다. 레킬리스 공작가는 쿨하게 넘어갔다지만 본가는 사정이 또 다를 수 있었으니까.

 

"뭐?! 그게 정말이니?!"

"네······"

"어머. 어머. 어쩜 좋니! 언제 알았어?"

"그······ 당일에요. 아리엘이 알려줬거든요."

"이게 웬일이니! 웬일이야! 형이랑 누나도 가져오지 않던 소식을 셋째가 데리고 왔네!"

 

그런 거 없더라.

 

어머니는 진심으로 기뻐하시며 환호하셨다. 아버지도 당황하셨을지언정 장인어른처럼 허허 웃어넘기셨고.

 

클라크 할아버지도 내색하지 않을 뿐 즐거워하시는 눈치셨다. 물론 스켈레톤이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것도 한몫했다.

 

"우부부."

 

어머니에게 꼭 안겨있는 릴리는 옹알이를 하기 바빴고.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릴리도 정말 많이 자랐구나.

 

"이것도 유전인 걸까요? 우리도 데이브를 먼저 갖고 나서 결혼했잖아요."

 

어머니가 행복 가득한 얼굴로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속도위반으로 결혼했던 걸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출정을 떠나기 전, 불안한 마음에 저질렀던 일이 형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아주 드문 일도 아니어서 출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바로 결혼하셨다.

 

"유전이라기보다는 아이작이 특이한 거지. 내가 신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것 치고는 나도 그랬다만.]

"뭐, 뭐요?"

 

클라크 할아버지가 툭 던진 한 마디에 아버지가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버지의 저런 표정은 처음 본다.

 

3대가 속도 위반이라니. 여러모로 굉장하다면 굉장한 집안임은 틀림없다.

 

"혹시 이름은 지었니?"

"아뇨. 이름은 천천히 생각하려고요."

"아카데미는?"

"아카데미는······"

 

외가에 전달했던 것처럼 부모님에게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천천히 설명해드렸다.

 

솔직히 달라져봤자 교수로 재직하는 것밖에 없다. 글을 쓰는 건 똑같을 테니까.

 

"대신 피와 강철은 서둘러 연재하려고요."

"언제쯤 완결을 낼 예정이니?"

"결혼식 전에는 해야죠."

"배가 불러오는 건 보통 4개월인데······ 가능하겠니?"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불가능해도 해야죠. 제가 저지른 일인데."

 

통조림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

 

아이작과 마리가 마이샬 영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이었다.

 

피와 강철의 삽화가, 칼즈 즈바사는 지금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사흘에 한 권이라는, 미친듯한 연재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열심히 갈아넣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신은 피폐해져 갔지만 돈주머니는 빵빵해졌기에 울면서 손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고 싶다. 그러나 의뢰주가 아이작이다. 세상에서 가장 저명한 소설 작가.

 

아이작이 친히 할 수 있냐고 부탁한 작업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 칼즈는 아이작으로부터 전달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마리오를 닮았던 인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덥수룩한 수염과 피로에 젖은 폐인 한 명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칼즈 씨. 아이작입니다. 오늘도······(중략)······ 하여 앞으로 피와 강철을 최대한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예상 완결은 대략 40권 언저리 일 것 같습니다.]

 

해석하자면 이렇다.

 

[머지않아 스케치들이 도착할 겁니다.]

 

넌 이제 뒤졌다.

 

[최대한 빠르게 완성해주면 좋겠지만······]

 

시간 내에 완성 못 하면 너는 뒤진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몸을 갈아넣어서라도 삽화를 완성시켜라.

 

[만약 힘드시다면 신전에 제 이름을 대십시오. 칼즈 님을 위해 따로 말을 할 겁니다.]

 

건강 핑계 같은 건 집어치워라. 넌 이제 도망칠 수 없는 노예다.

 

[스케치와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금괴들 또한 도착할 겁니다.]

 

설마 돈을 받고도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지?

 

[매번 어려운 작업을 부탁한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칼즈 님밖에 없습니다.]

 

도망치면 죽을 때까지 쫒아가서 그림만 그리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뒤져라!

 

칼즈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아이작의 편지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허허."

 

처음에는 허탈하게 웃더니.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헣."

 

이내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씨발."

 

통조림은 한 명만 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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