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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555)화 (556/763)

Chapter 554 - 도장(3)

속도위반이라는 말이 있다. 예정에도 없던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 즉, 혼전임신을 지칭하는 은어다.

 

전생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말이지만 이 세상은 그런 은어가 없다. 자동차조차 발명되지 않았는데 과속은 무슨.

 

대부분 기어코 사고를 쳤다며, 그러게 조심 좀 하지라고 핀잔을 주는 편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처럼 연애를 하던 사람들에 한해서다. 그 외의 경우는 상황마다 저마다 다르다.

 

또한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경우가 대다수다. 처음에는 몸이 안 좋다고 느끼다가 배가 점점 불러오고나서 깨닫는 것이다.

 

공교육을 펼치고 있다지만 귀족에 비해서는 좋다 할 수 없고, 이 때문에 간혹 케이트와 같은 사례가 발생한다.

 

그렇다 해서 임신을 미리 확인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병원 역할을 하는 신전을 방문하면 끝이다.

 

신성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 증상만 듣고 바로 눈치챈다. 워낙 많이 접해봤어야지.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정성을 들여 확인하는 편이다. 확인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신성력으로 산모의 몸 곳곳을 파악한 후, 느껴지는 영혼이 2개 이상이면 임신이다.

 

아마 아리엘도 그런 방식으로 마리의 임신을 파악한 걸로 추측됐다.

 

"마리가 임신했어."

"··· ···"

"··· ···"

"··· ···"

 

루미너스로부터 확인사살까지 받고 돌아온 기숙사.

 

나는 애인들을 전부 불러모아 덤덤한 목소리로 마리의 임신을 밝혔다.

 

세실리, 아델리아, 레오나, 마지막으로 부탁에 응하여 도착한 아르웬까지.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니 참 많구나. 내가 얼마나 망나니인지 새삼 실감이 간다.

 

"임신? 마리가 아이작의 새끼를 밴 거야?"

 

고요한 침묵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레오나였다. 이런 부분에만 눈치가 살짝 모자란 그녀다운 반응이다.

 

대신 동그랗게 떠진 황금색 눈동자를 보아하니 놀란 건 확실하다. 아이가 아닌 새끼라 말한 것도 그렇고.

 

아무튼 레오나가 입을 엶으로서 하나둘씩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세실리.

 

"······언제?"

"어제였을 거야. 아리엘의 말을 듣고 간 거라."

"······피임은? 원래 꼬박꼬박 피임하잖아."

 

세실리는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면서 전후사정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떨리는 눈동자와 목소리를 보아하니 제 마음을 숨기기에는 힘든 것 같다.

 

"그······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신성을 섭취했잖아. 루미너스 님은 필멸자의 약따위가 신성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셨어."

"······그, 그렇구나. 추, 축하해?"

 

세실리가 차마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마리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마리에게 선뜻 첫번째를 양보했다지만 알게 모르게 욕심을 품고 있던 그녀였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겠지.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견제 겸 욕심이지, 양심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족한테는 어떻게 말하려고? 니콜한테 맞아죽는 미래가 벌써부터 보이는데?"

"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휴. 그래도 축하해. 앞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났네. 좀 더 열심히 단련해야겠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단지 내 곁에 있으면 된다는 소망만으로 만족하는 아델리아다. 마리가 임신하든 말든 개의치 않겠지.

 

본인은 아이를 갖지 않아도 괜찮다지만 글쎄다. 과연 그 다짐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 지켜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과 수인의 가임기는 주기가 짧다고 들었노라. 기간도 12개월이었던가?"

"보통 10개월이야. 엘프와 마족이 12개월이고."

"그렇구나. 아무튼 축하하니라. 조만간 산모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겠다."

 

아르웬도 의외로 시원한 면모를 보여줬다. 그녀는 마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는지 만져봐도 되냐고 허락까지 구했다.

 

엘프는 극악의 주기로 인하여 임신이 매우 어렵다. 하프 엘프여도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겨우 1일밖에 되지 않았으니 티가 나지도 않았다. 정말 신기해서 저러는 것이다.

 

"음? 그런데 반지는 또 언제 바꾸었느냐?"

 

마리의 옆자리에 앉아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르웬이 무언가 발견했다.

 

보아하니 마리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한 것 같다.

 

평소 눈썰미가 좋은 아르웬의 말에 다른 여인들도 저마다 마리의 손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리는 싱긋 웃더니 반지를 보여주며 당당히 폭탄을 터뜨렸다.

 

"아이작이 나한테 청혼했거든."

"··· ···"

"··· ···"

 

또다시 좌중을 집어삼키는 고요한 침묵. 왠지 몰라도 방금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깔린 듯했다.

 

보통 같으면 청혼 이후에 임신을 밝히는 편이나 앞뒤가 뒤바뀐 상황.

 

"······청혼까지 했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세실리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마리의 약지 손가락을 향하고 있다.

 

마리는 세실리가 어떤 심정인지 파악한 듯, 가슴을 쭈욱 펴면서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나도 몰랐는데 이틀 전이 나와 아이작의 기념일이었대. 그때 아이작이 나에게 청혼했어."

"어떻게 했는데?"

"기사처럼 무릎을 꿇고,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를 보여줬지. 그리고······ 으히히."

 

올라가던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던 마리가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이다.

 

세실리는 그런 표정을 보고 혀를 쯧, 하고 차며 퉁명스러운 반응만 보였다. 재수없다는 심정이 역력하다.

 

동시에 어딘가 후련해 보인다. 이제 욕심을 완전히 접을 수 있다는 다짐이라도 한 걸까.

 

"부럽네. 청혼에다가 임신까지. 이게 도장이 아니면 뭐겠어?"

"훗. 부럽지? 나는 인간이라 세실리 너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을 걸?"

 

정실 주도권을 완전히 쟁취했다고 판단했는지 마리가 세실리를 도발했다. 그에 세실리가 울컥하며 몸을 흠칫 떨었다.

 

뒤이어 그녀는 한동안 얼어있다가 이내 일자를 그렸던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게. 그래도 난 마족이라 몇 십년이 흘러도 미모를 유지할 수 있잖아? 난 천천히 노리지 뭐."

"··· ···"

"신성까지 얻었으니 아이작의 수명도 늘어났을 테고······ 여러모로 서로에게 윈윈이네?"

 

역시나 세실리. 절대 만만치 않은 여자다.

 

실제로 신성을 얻은만큼 수명도 대폭 늘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따로 묻진 않았지만 확인해볼 필요는 있지.

 

마리는 세실리의 반격에 잠깐 정지했다가 입술을 댓발 내밀며 툴툴거렸다. 본인도 놀린 게 있으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축하해. 나도 청혼 받고 싶다."

"··· ···"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를 쳐다보는 세실리. 말을 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에 멋쩍게 웃어주니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입모양으로 말한다.

 

'기다릴게.'

 

다른 사람들도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공식적으로 내 애인이라 밝혀진 여인에게만 해야 하는 걸까.

 

속으로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쯤, 세실리의 반격에 토라져 있던 마리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의 헛기침으로 이목이 집중되고, 나 또한 고개를 돌려 마리를 쳐다봤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할게. 나 사실 이때까지 많이 불안했어."

"··· ···"

 

담담하게 서두를 꺼냈으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마리가 갖고 있던 불안감.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전에도 가끔 가다 마리가 저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너를 소홀히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줬다.

 

"당장 주위를 봐. 나보다 훨씬 괜찮은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은 걸? 미모? 몸매? 직위? 능력?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야. 내가 내세울 수 있던 건 단 하나. 아이작이 제논임을 알기 전에 고백했다는 것. 그거 하나 뿐이었어."

 

하지만 신뢰는 의심을 하면서 생기는 것이고, 사랑은 서로가 맞추면서 확인하는 감정이다.

 

마리로서는 그 두 가지 모두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을 터. 내가 언제 떠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작은 나 혼자 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그걸 깨닫고나서 속이 후련해졌지만 여전히 불안했지."

"··· ···"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무려 도장을 두 개나 새겨줬는 걸?"

 

마리는 왼손을 들어 청혼 반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자기 배를 살살 매만졌다.

 

각각 신뢰와 사랑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도장들. 지금까지 마음 속에 꾹꾹 담아놓았던 불안요소들이 전부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저것마저 완벽한 건 아니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증표일 뿐, 가끔 가다 흔들릴 때도 있을 테니까.

 

그때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준다면 그녀가 원하는 행복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재수없을 수도 있고, 화가 날 수도 있고, 무례할 수도 있는 말을 꺼내려고 해. 그래도 될까?"

 

마리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허락을 구했다. 우선 말을 놓을 정도로 친한 세실리, 아델리아, 레오나다.

 

이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이어서 마리는 아르웬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래도 될까요, 여왕님?"

"난 괜찮다. 그리고 이제 말을 놓아도 상관없을 것 같구나. 어차피 우리 모두 아이작의 여인들이니."

"그래도 될까?"

"물론."

 

다행히 이번 일을 기점으로 서로 친해질 계기가 될 듯하다. 미소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마리는 긴장을 풀려는 듯 가슴을 두어번 두드리더니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어서 내가 부축하려 나섰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내 부축을 거절했다.

 

"후우······"

 

긴장을 풀기 어려웠는지 마리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보아하니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용기를 복돋아 주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붙잡았다. 고된 일과는 거리가 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손.

 

마리도 내가 손을 잡아주자 안정이 되는지 떨림이 서서히 멎는다. 뒤이어 그녀는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가 씨익 웃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나 싶어할 때, 마리가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턱-

 

가장 먼저 의자 위로 올라간다. 그러더니 모두가 앉은 테이블에 한 쪽 발을 올리는 게 아닌가.

 

정말 무례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었지만 미리 말을 해놓았기에 당황으로 그칠 수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청혼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하늘 높게 뻗더니, 오른손을 허리에 척 얹으며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외쳤다.

 

속을 턱 막히게 만들었던 응어리가 전부 입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내가 아이작의 정실이다!"

 

그동안 묵혀놓았던 울분을 모두 토해낸 그녀의 모습은.

 

"내가 첫번째라고! 이 년들아!"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아, 물론.

 

"······미안."

"괜찮아. 괜찮아. 사람마다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잖아? 오늘 시원하게 분출했으니 당당해져도 돼."

"으으으······"

 

앞으로 평생 안고 갈 '흑역사' 하나가 적립됐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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