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53 - 도장(2)
이틀이다.
무엇이 이틀이냐면 내가 마리에게 청혼하고나서 흐른 시간이다.
동시에 미리 잡아놓은 숙소에서 머문 시간이기도 하지.
예기치도 못한 프로포즈에 감동한 마리는 한동안 나를 껴안다가 곧장 모텔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틀 내내 몸만 섞었다. 과장 없이 먹고 자고 싸는 행위를 제외한다면 짐승처럼 서로를 탐했다.
성욕이 폭발한 것도 있었지만 마리에게 들으니 그동안 많이 불안했다고.
자기보다 매력이 뛰어난 여인들이 많아 관심을 주지 않을까 걱정했으며, 설령 주지 않는다 해도 납득하고 넘어가려 했단다.
그런데 프로포즈를 해버리니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르르 녹아버리고, 얼어붙었던 불꽃이 다시금 타올랐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더욱 끈끈한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마리에게 신뢰를 줬으며, 마리는 진실된 사랑을 확인했으니 더 없이 행복한 날이었지.
아.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피임은 확실하게 했다.
중간에 마리가 피임 따위는 필요없어! 라며 폭주한 적이 있으나 모라의 충고를 듣고 끝까지 만류했다.
만약 마리가 임신을 한다?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겠지만 다른 여인들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특히 세실리가 약삭 빠르게 다음 타자라며 나를 유혹하겠지. 그나마 마족은 엘프처럼 주기가 엄청 길다는 걸까.
게다가 속도 위반인만큼 결혼식 준비도 서둘러 마쳐야 하며, 피와 강철의 연재도 끝내야 된다.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연재를 할 시간이 없을 테니까. 여태껏 쌓았던 모든 계획이 임신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이다.
"헤헤."
"좋아?"
"응.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이틀동안 짐승처럼 탐하고 다음 날.
우리는 모텔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다만 마리는 내가 직접 업고 갔다.
이틀동안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 걷는 것조차 힘들었으니까. 한 발자국 내딛으니 바로 쓰러지더라.
하기야 이틀동안 거칠게 했으니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건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해야겠지.
반면에 나는 멀쩡했다. 신성까지 섭취했으니 예상했던 일이다.
"쪽. 쪽."
마리가 내 목에 가벼운 키스를 하면서 표식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내 귀를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이미 내 몸에는 그녀가 남긴 흔적이 가득하다.
와이셔츠로 가려서 그렇지, 벗기면 굉장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물론 마리도 만만치 않다. 무릎에 새파란 멍이 든 건 기본이요, 백설기 같은 피부에는 붉은 반점이 가득하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서로가 서로를 짐승마냥 탐한 결과물이다.
"흐응. 너무 좋다."
"얼마나 좋아?"
"그냥 좋아. 이렇게 있는 것만 해도."
내 목에 키스를 남기던 마리가 나에게 완전히 기댄다. 푸근한 목소리를 보면 그녀의 기분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가 오른쪽 밑을 쳐다봤다. 내 목을 감싸안은 그녀의 손.
오른손 약지 손가락에는 어제 내가 선물해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푸른색 보석이 태양빛에 반사돼 반짝거렸다.
1년 전 기념일로 선물한 커플링이 끼워져 있던 자리지만, 그 커플링은 이제 목걸이로 변할 예정이다.
'기분이 묘하네.'
색다른 느낌이다. 평소처럼 관계를 맺었을 뿐인데 첫날밤과 같은 긴장감, 그리고 충만함이 느껴졌으니.
마리도 단순한 만족을 넘어서 탈진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애정이 시들해진 적도 없는데 기름을 부어버렸다고 봐야겠지.
"저 사람 제논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등에 업은 여자는······"
"레킬리스 영애구나. 약혼녀라고 했지?"
모텔에서 나온 시간은 아침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우리 주변에는 지나가는 학생 및 행인들이 많다.
남자가 여자를 업고 가는 것만 해도 시선이 끌릴만한 사항이다.
게다가 나는 제논이고, 마리는 레킬리스 공작가의 여식으로 유명하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도 끌 수밖에 없는 조합. 당연하게도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그런데 하나도 안 불편하네.'
예전이었다면 시선이 부담스러워 서둘러 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자칫하다가 돌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고.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도 나와 마리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계를 하지 않는 건 아니어도 상대적으로 아늑한 기분. 이 상황이 평생 이어졌으면 좋겠다.
"아이작."
"응. 말해."
"내가 첫번째인 거지?"
"네가 첫번째야."
"히히."
마리가 베시시 웃으며 내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준다. 힘이 빠질대로 빠진 상황이라 껴안는 수준이다.
사실 저 질문만 해도 수십 번이 넘었다. 모텔로 들어가 짐승이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마리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이런 말을 하기 민망하지만 첫번째 부인이 된 셈이니.
자기 말로는 기숙사로 가서 당당히 선포할 거라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될지 궁금해졌다.
"마리."
"응?"
"사람들을 불러놓고 뭐라고 할 거야?"
"그건 비밀. 대신 그동안 응어리졌던 내 마음을 한꺼번에 터뜨릴 거라는 것만 알려줄게."
저리 말하니 더 궁금해지네. 나는 장난스레 답한 마리에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평소 당찬 성격을 지닌 그녀이니 기대가 된다. 뭔지는 몰라도 세실리가 가장 놀라지 않을까 싶다.
"빨리 웨딩 드레스 입고 싶다."
"1년만 참······"
"웨딩 드레스에 또 하얀색이······ 히히."
"··· ···"
엄.
이건 그냥 대꾸하지 말아야겠다. 사람마다 행복한 상상을 하기 마련이니까.
미래를 꿈꾸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다. 단지 그 미래의 수위가 높아서 그렇지.
나는 뒤에서 온갖 음담패설 아닌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묵묵히 걸어갔다.
덜컥-
"우리 왔어."
"왔어?"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아델리아가 우리를 반겨줬다. 그녀는 내 등에 업힌 마리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와의 데이트를 위해 며칠 정도 걸릴 거라 말했으니까.
루미너스의 예언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오랜만에 단 둘이서 데이트를 즐기겠다고 말하니 아델리아도 납득하고 넘어갔다.
물론 프로포즈와 관련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 이건 내가 꽁꽁 숨겨놓고 있던 비장의 한 수였으니까.
"등에 업힌 걸 보니 못 걷는 거지?"
"응."
"대체 얼마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부럽네. 일단 마리 너도 침대에 눕자."
"싫어. 싫어. 아이작이랑 붙어있을 거야."
아델리아의 권유에도 마리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거부했다. 도리어 고목나무 매미마냥 나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아이 같은 투정에 아델리아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나를 슥-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달라는 얼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거야. 그 전에 사람들부터 부르고."
"······곧 있으면 수업도 끝나니까 그때 부를게. 일단 마리부터 침대에 눕혀줘."
"들었지?"
"싫은데······"
"어허."
내가 엄하게 다그치자 마리도 그제서야 슬금슬금 힘을 풀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 ···"
"······왜?"
침대에 누운 그녀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묻는다. 사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너무 예뻐서 한참을 쳐다봤다.
시간이 흘러 소녀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여인이 된 마리. 거사를 치를 때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내려다 보니 그 차이가 확연하다.
팔다리는 전보다 길쭉길쭉해지고 키도 많이 커졌다. 가슴과 골반이 커진 건 덤이고.
세실리가 너무 압도적인 거지,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는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나는 그녀를 한참 내려다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이윽고 새하얀 이마에다 가볍게 키스해주고 머리를 쓸어줬다.
그것만으로도 마리는 행복한 건지 베시시 웃으며 내 손을 살포시 잡아줬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반지가 눈에 띠었다.
"아빠~"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있을 때 아리엘이 오도도 달려왔다. 눈꼽이 끼어있는 걸 보아 자다 깬 모양이다.
나는 두 팔 벌리며 달려오는 아리엘을 가볍게 안아줬다. 이어서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아리엘 자다가 일어났니?"
"으응. 엄마 아빠 느껴져서 일어났어."
몸은 커져도 하는 짓은 영락없이 애다. 처음에 사용했던 존댓말도 어느 순간 반말로 바뀌었다.
나는 아리엘의 눈꼽을 정성스레 떼어줬다. 그녀도 눈을 감으며 내 손길을 느꼈다.
등 뒤의 반투명한 날개와 길쭉한 귀가 위아래로 까닥거리는 걸 보면 기분이 좋은 것 같다.
"으부."
찹쌀처럼 말랑말랑한 볼살은 더 중독적이고. 어쩜 이리 귀여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아리엘의 뺨을 가지고 놀다가 침대 위에 앉혔다. 침대 위에 앉히니 이번에는 마리가 그녀의 뺨을 만지기 시작했다.
"아리엘은 어쩜 이리 귀여울까. 나중에 이런 애 낳고 싶다."
"누구를 닮았으면 좋겠어?"
"첫째 딸은 무조건 아빠를 닮는다며? 아들은 엄마를 닮고."
아들이든 딸이든 간에 얼굴 하나만큼은 축복을 받은 거나 다름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기 민망하지만 나도 잘생긴 편이니까.
특히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날카로운 눈매를 닮기 시작했다. 원래는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빨간 머리고, 마리는 백발에 가까운 청은발이다. 머리카락 색 하나만으로도 개성이 철철 흘러넘친다.
"아리엘은 어떻게 생각해? 동생이 엄마를 닮았으면 좋겠어, 아니면 아빠를 닮았으면 좋겠어?"
때마침 아리엘도 있겠다, 마리가 그녀에게 질문을 걸었다.
아리엘은 그 질문을 듣고 눈을 깜빡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꼭 골라야 해?"
"응. 골라야 해."
그리고 아이의 창의력은 새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반은 안 돼?"
"푸핫!"
무슨 치킨도 아니고 반반이라니. 상상을 뛰어넘는 대답이다.
나는 물론이요, 마리마저 아리엘의 창의적인 대답에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푸흐흐흐. 아리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
"그냥 생각난대로 말한 건데? 그리고 진짜 반반이야."
"알았어. 엄마랑 아빠랑 적절히 닮았으면 좋겠다는 거지?"
아이답다면 아이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성장을 했다지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적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아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가르킨 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손가락은 정확히 마리의 배를 향해있다. 그것도 아랫배.
"아냐. 아냐. 진짜로 반반인 걸?"
"······응?"
"뭐가······ 말이니?"
내가 어안이 벙벙해졌을 때 마리가 아리엘에게 물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그녀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아리엘은 평범한 존재가 아닌, 무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천사니까. 우리들이 느끼지 못한 걸 느낄 수 있다.
"엄마 뱃속에 아빠가 느껴져."
"······뭐?"
"아직은 작아. 그래도 엄마랑 아빠가 동시에 느껴져.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아리엘은 나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을 전부 '엄마'라 부른다. 여인들로부터 내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합쳐졌다'라는 발언은 절대 하지 않았다. 반반이라는 말도 그렇고.
다시 말해, 기운이 합쳐졌다는 건······
"······엄마 뱃속에서 뭐가 느껴지니?"
"응. 요만해. 그런데 조금씩이지만 커지고 있어."
아리엘이 앙증맞은 새끼 손가락을 펼치면서 설명했다. 자기 딴에는 제일 작은 걸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와 마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뭔가,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나 잠깐 신전에 갔다 올게."
"어? 어어. 천천히 갔다 와."
정말로 과속 딱지가 붙는 건가.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다급히 신전으로 향했다.
"음? 아. 안녕하세요, 아이작 님. 예배를 드리러 온 건······"
"죄송합니다! 다음에 얘기할게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케이트와 마주했지만 여건상 패스했다.
케이트는 다급한 내 모습에 당황했으나 이내 부드럽게 웃어주며 뒤에서 축복을 걸어줬다.
이윽고 개인 예배실로 들어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조용히 눈을 감아 루미너스와 접신했다.
[왔구나.]
'······아니죠?'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내 질문에 루미너스는.
[축하한단다. 너도 어엿한 아버지가 되겠구나.]
망치로 내 머리를 후려치는 대답을 꺼내셨다.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일단 전후사정부터 파악해야 됐으니.
'피임은 확실히 했는데요?! 조금······ 아니, 많이 거칠게 했다지만 확실히 했다고요!'
[상식적으로 필멸자가 만든 약 따위가 신성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니?]
'··· ···'
피와 강철 연재.
[우리도 너무 큰 미래라 어떻게 조언을 할 수가 없었구나. 미안하단다.]
한 달 아니, 2주 내에 마무리할 이유가 생겼다.
'이제야 독소전인데······'
통조림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