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1 - 참 쉽죠?(1)
[역시 그렇······ 뭐?]
전혀 관심 없다는 내 대답에 모건 왕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얼척이 없다는 얼굴을 보아하니 이런 류의 대답은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는 반응이다.
하기야 보통 같으면 유혹에 빠지고도 남았겠지. 여태껏 보여준 모건 왕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니.
더구나 이 세상은 '무력'과 '명예'가 인생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중세, 그것도 판타지 중세다.
산업혁명이 천천히 진행 중에 있다지만 몬스터의 존재로 무력의 중요성은 증가하면 증가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관심 없다고 했느냐?]
"네."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없다고?]
"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무력이건, 명예건, 부건 전부 관심 없다.
이미 다 갖고 있는데 뭐하러 더 가지겠나.
명예? 제논 일대기 및 피와 강철 저자로서 신 바로 아래에 속하는 명성을 갖고 있다.
부? 당장 내가 가진 황금을 뿌리기만 하면 만사무사마냥 경제가 요동칠 정도이며 심지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권력? 전생의 일론 머스크마냥 트위터 한 방에 주식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닌, 나라가 뒤짚어졌다 엎어졌다를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무력. 이 부분은 다소 애매하지만 솔직히 별 의미가 없다.
내 무력이 강한 게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사람의 무력이 말도 안 되게 강하니까.
호위기사, 아델리아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특훈으로 나날이 강해지고 있으며 케이트는 대심문관이다.
세실리와 아르웬은 마법에 한해서 전혀 꿀리지 않는다. 악마 숭배자가 주로 이용하는 주술조차 레오나의 도움이면 끝난다.
마지막으로 본신의 무력은 앞으로 클라크 할아버지가 해결해줄 예정이다. 당장은 바둑에 흠뻑 빠진 나머지 장례를 미루고 있다지만 조만간이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전부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 가지는 원치 않게 얻은 부분이기도 하죠. 저는 이 이상의 명예도, 부도, 권력도 바라지 않습니다."
[······말하는 걸 보면 속세에 통달한 현자처럼 느껴지는구나.]
"이상한 오해를 하실까봐 미리 말씀드릴게요. 저는 속세에 통달한 현자가 아닙니다. 그냥 다 가진 사람이에요."
진실된 대답에 모건 왕이 지은 표정은 실로 볼만했다. 뭐 저딴 재수없는 놈이 다 있냐라는 속마음이 전부 드러났으니까.
그러나 나는 일체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자주 언급했겠지만 전생의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수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부모님마저 사고로 일찍 여읜 바람에 스스로 사회와 단절시킨,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인물.
그나마 연재하던 소설이 내 목숨을 붙잡고 있었지만 악마 숭배자의 농간으로 이 세상으로 넘어왔다.
"지금의 저는 전생에 비해서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전혀 상상치 못한 사랑을요. 그러니 폐하의 제안을 거절하겠습니다. 저는 이대로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 예상보다 포부가 작은 놈이로구나.]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주세요."
모건 왕이 혀를 끌끌 차며 언짢아하자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응수했다. 모건 왕도 내 넉살좋은 대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논 일대기를 작성할 때는 어디까지나 '취미'로 시작했을 뿐, 다른 의도나 포부를 가진 적은 없다.
그게 예언서 아닌 예언서가 된 것도 소위 '억까'에 가까웠지.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피와 강철은 고심에 고심을 거치고 발매했지, 세상을 바꾸겠다! 라는 심보는 아니었다.
대신 돌아오는 리턴값이 상상을 초월했기에 뒷수습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그래도 폐하의 제안은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될 것 같네요."
[음? 원하는 건 다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현실적인 부분 때문입니다."
나와 악마 숭배자는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까지 다다랐다.
내가 아무리 싫어해도 악마 숭배자 쪽에서 분명 수를 쓸 것이며, 이건 내가 죽고 나서도 다를 바가 없다.
전에 세실리가 나에게 고백했을 때, 내가 죽고 나서도 후손을 지키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도 엄연히 한계가 존재한다.
'클라크 할아버지가 손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악마 숭배자에게 위협을 받으며 살았지.'
악마 숭배자는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를 지닌 자라면 무슨 이유던 간에 죽였다.
만약 클라크 할아버지가 악마 숭배자의 고위직을 대부분 초토화시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랬을 터.
더 나아가 제논 일대기를 통해 악마 숭배자의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다시 원상복귀됐을 가능성이 높다.
"폐하께서도 예상하고 있다시피 저는 악마 숭배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설령 그것이 제가 원하지 않은 행동이라 해도요."
[계속 말하거라.]
"그리고 악마 숭배자는 저에게 위협을 가했습니다. 심지어 매우 위험할 뻔한 적도 있었죠."
물리적인 습격은 케이트와 아델리아가 있으니 걱정이 없다. 그러나 주술을 사용한 습격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때 아리엘이 없었더라면 내 영혼은 속수무책으로 강탈당했을 테니까.
'지구의 신이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식일지 모른다.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고 이 세상을 침범할 명분으로 삼았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악마 숭배자는 나와 내 가족을 위협할 세력이다. 최근에는 잠잠하다지만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적어도 악마 숭배자 문제는 제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폐하의 시신을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쉽게 말해 내 제안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이란 말이구나. 아무렴 상관없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모건 왕도 마냥 나쁘진 않았는지 손을 휘저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는 것 같다.
[허나 그 과정 속에서 신들의 과거가 속속 드러나게 될 것이니라. 루미너스가 너를 이곳으로 보냈다지만 정말 숨기고 싶은 과거가 더 있을 텐데 괜찮은 게냐? 아까도 말했지만 신들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속하는 초월자. 네 미래를 읽고 수를 쓸 수도 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들은 제 미래를 읽지 못 하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짐조차 신들이 엿보는 미래에 포함돼 있거늘.]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모라가 나에게 강제로 시켰던 고행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의 일들을 천천히 설명했다.
설명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모건 왕의 얼굴은 놀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놈이었구나! 신조차 미래를 읽을 수 없는 영혼이라니!]
우르릉!
종래에는 박수까지 치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아까 전처럼 알현실 전체가 진동했다.
문제는 내 바로 앞에서 웃었다는 거지. 왕좌에서 웃었을 때는 괜찮은데 바로 앞에서 웃다보니 귀가 멀 것 같다.
[허면 신들이 그대에게 아무런 간섭조차 할 수 없다는 게냐?]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직접적인 접촉을 하면 신들의 신성이 소모되는 건 알고 있어요. 폐하께서는 어디까지 간섭을 받고 계시나요?"
[악마 숭배자와 짐은 신들의 눈을 피한 자들. 그래서 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도 하지 못 한다네. 다만 짐은 이곳에 속박돼 있기에 간혹 말을 흐리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지. 물론 이것마저 기억 자체는 소거하지 못해. 반면 그대 같은 경우는······]
모건 왕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어떤 비유를 하면 될지 고민하는 듯했다.
[정략 결혼으로 보낸 셈이군.]
"······실례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흠? 지금 이 시대에는 정략 결혼이라는 개념이 없는 겐가?]
어리둥절하다는 질문에 모건 왕이 순수함이 듬뿍 담긴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당연히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라 해도 정략 결혼은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지.
더구다나 나를 기준으로 곳곳에서 정략혼을 추진하는 중인데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아무튼 내 말 그대로일세. 악마 숭배자는 나라에서 골을 썩이는 범죄 집단이고, 짐은 그것과 연관된 나머지 유폐된 신하일세. 반면 그대는 정략혼에 가까운 개념으로 보낸 거고.]
"··· ···"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군. 정말 학자가 맞나? 아까 전까지 보였던 총명함은 어디로 간 겐가?]
모건 왕은 생각 좀 하라는 듯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내가 멀뚱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으니 어지간히도 답답했던 모양이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단지 스케일을 크게 키우려다 보니 버퍼링이 걸렸을 뿐이지.
뒤이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후에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신들이 저에게 간섭을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일단은 그런 셈이지. 단, 트집이 잡힐만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걸세. 정확히는 그대의 신변을 최우선으로 두는 거라네. 설령 기억을 완전히 소거시켜도 그대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이라면 다른 차원의 신들도 납득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
"으음······"
[짐이 비유한 건 어디까지나 필멸자를 기준으로 삼은 거라네. 초월자들 입장은 또 다를 수도 있지. 혹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린 적은 없나?]
"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모건 왕을 바라봤다. 실제로 그런 적이 많은 걸로 안다.
내 반응에 모건 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민감한 부분은 일시적으로나마 기억을 막았을 걸세. 완전한 삭제가 아닌 막은 것뿐이니 영혼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 테고.]
"거짓말을 못하기 때문인가요?"
[정확하네. 바다의 신은 봉인되기 직전 신들에게 거짓을 고할 수 없는 저주를 걸었다네. 좋든 싫든 그들은 진실만을 얘기할 수밖에 없어.]
역시 이유가 있었다. 인간적인 신들인데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자체부터가 모순적이었으니.
게다가 모라가 어째서 나에게 되도 않는 고행을 시켰는지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정말 먼 미래에 내가 스스로 손을 잘랐다면 지구의 신들도 절대 두고 보지 않았을 테니.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곧 영혼이 상처 입었다는 뜻.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냥 개복치네.'
신들은 내가 정말 평범하디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제논 일대기를 쓰기 전만 해도 평범하디 평범했다.
문제는 전생의 기억까지 모조리 이전된 탓에 펜을 잡았다는 것. 내 미래를 전혀 읽을 수 없는 신들로서는 당혹스러웠겠지.
그렇다고 툭- 건드렸다가 상처라도 입는다면 지구의 신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에게 진실을 보여줬다는 건······ 신들도 결단을 내렸다는 뜻에 가깝다.
"신들께서는 평소 하지 않던 도박을 한 거로군요."
[정말 드물게도 그렇지.]
"그냥 말로 하시지."
[··· ···]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투덜거리자 모건 왕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 만만치 않은 아이라 하더니 이런 뜻이었나······ 여러 의미로 머리 아프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답답함을 호소하는 모건 왕.
그가 원하는 건 숭고한 운명의 길을 따라 갈 영웅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
평범한 소시민에다가 글을 쓰기 좋아하며, 그것 때문에 뒤늦게 수습을 하느라 바쁘디 바쁜 작가.
내가 신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도 그들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우선 이것만 제대로 답해주게나. 악마 숭배자 놈들을 제대로 토벌할 텐가?]
"악마 숭배자들이 없어져야 저를 포함한 후손들이 안전해지니 해결해야죠."
[좋아. 다른 거 다 필요없고 그거면 됐다네. 생각해놓은 방법은?]
"글쎄요?"
[··· ···]
모건 왕은 슬슬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잔뜩 찌푸린 인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허나 이건 내가 멍청해서 저런 답을 한 게 아니다. 당장은 토벌 열풍으로 잠잠해졌다지만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놈들이니까.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그들의 특수한 힘으로 신의 눈을 피하고 있으니까.
'음? 잠깐만.'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나는 여전히 머리 아파하는 모건 왕에게 질문했다.
"폐하. 아까 분명 악마 숭배자는 신들의 눈을 피한다고 하셨죠?"
[그렇지.]
"그럼 반대로 눈에 들게 하는 방법은 있습니까?"
[음?]
내 물음에 모건 왕이 찌푸린 인상을 풀며 나를 쳐다봤다. 더 말해보라는 듯한 얼굴이다.
"악마 숭배자는 신의 눈을 피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 그러나 어떻게든 신에게 접촉할 수만 있다면 천벌이 내려지는 것으로 압니다. 대표적으로 타락한 추기경 사건으로 유명한 바크 추기경이 있었죠."
[누군지 모른다만 계속 설명해보거라.]
"저는 책으로 악마 숭배자들의 존재를 강제로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상일 뿐 완전히 드러내지는 못했죠. 그러니 신들께서 악마 숭배자를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겁니다."
[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모건 왕은 팔짱을 끼며 애매모호하다는 뉘앙스로 뒷말을 흐렸다. 이어서 나를 힐긋거리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 숭배자들이 신들을 믿어야 할 걸세. 놈들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신들을 완전히 불신하고 있거든.]
"아버지이자 바다의 신을 유폐한 것 때문인가요?"
[가능성이 높을 뿐, 확실하지는 않다네.]
"그러면······"
결론적으로 내가 잘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루미너스, 그리고 다른 신들의 과거를 파헤쳐 글을 쓰는 방법밖에 없겠네요."
소설 집필. 전과 달리 신들이 직접 '보호'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집필이 될 것이다.
모건 왕은 내 답안을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괜찮냐는 뉘앙스로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루미너스가 직접 소멸시킨 신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래도 괜찮겠나?]
"그건 상상력으로 커버하면 됩니다."
[아무리 상상력이라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제논 일대기는 폭넓게 보면 영웅의 일대기이니 괜찮고, 피와 강철은 그대가 살던 세상이었으니 쓰기 쉬웠겠지. 하지만 이건 '신화'야. 필멸자 따위가 신화를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매우 단순했다.
"네."
내 입장에서 신화가 아닌 평범한 판타지 소설이다.
실존 인물을 기반으로 둔 소설.
'필멸자가 틈만 나면 신을 죽이는 곳인데······'
그리고 그런 내 대답에 모건 왕은.
[··· ···]
자기가 뭘 들었는지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