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34화 (535/763)

피와 강철은 지금까지 세계에 수많은 충격을 선사했으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다양한 '무기'를 선보였다.

가장 먼저 프롤로그에서 등장한 총이 어떤 위력을 갖고 있는지, 마키나 혁명에서 사용된 전차가 본래 어떤 역할이었는지, 마지막으로 포병이 어떤 화력을 지녔는지 등등.

이처럼 많고 많은 병과가 등장했지만 사람들이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건 '공군'이었다.

단단하고 무거운 강철 기계가 하늘을 난다니? 새처럼 날개를 펄럭거리는 것도 아니고 대가리 앞에 빙빙 돌아가는 회전기밖에 없는데?

심지어 비행기가 하늘 위에서 폭탄까지 떨어뜨리고, 그걸 맞은 대상이 민간인이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데뷔전인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시 제논다운 발상이라며, 마법으로도 할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했냐고 의문을 자아냈다.

그러나 머지않아 '판타지'라 취급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찌됐든 간에 전쟁 병기였으니.

무엇보다 폴란드 침공으로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다른 부분에 신경이 쏠린 것도 한몫하고 있다.

지금 세상은 히틀러는 개새끼다라는 독자들과 언젠가 갱생할 거다라는 독자들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중이다.

비행기라는 문물 자체가 혁신을 넘어 신화에 다다른 영역 즉, 하늘과 깊은 연관이 있다보니 의외로 큰 관심은 없었다.

단지 하늘을 지배한 인간이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보여주는구나~ 라며 넘어갈 뿐.

게다가 지구와 달리 이 세상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마저 존재하여 판타지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사고방식이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로망 그 자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몬스터가 무서우면 그 몬스터를 조지면 되지!"

"그래!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이거야!"

힘들었지만 보람찬 노동을 끝낸 드워프들을 위한 주점. 시끌벅적하기 그지 없는 주점 안에서 두 드워프가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한 명은 홀쭉한 몸매에다가 다소 풍성한 머리카락 및 수염을 가진 반면, 맞은편의 드워프는 퉁퉁한 몸매와 더불어 대머리였다.

인상과 목소리 또한 서로 대비되었다. 홀쭉한 몸매를 지닌 드워프는 가녀린 외모와 목소리를, 퉁퉁한 드워프는 거칠고 걸걸하다.

물론 서로 술이 들어가니 드워프답게 맛있는 입담을 자랑했지만.

"그래서 형. 이거 만들 거야?"

홀쭉한 몸매의 드워프가 그림 한 장을 스윽- 보여주며 질문했다.

그에 안주거리로 닭다리를 뜯던 퉁퉁한 드워프가 동생에게서 그림을 받았다.

그림의 정체는 이번에 등장했던 하늘에서 내리는 죽음, 폭격기. 폭격기가 민간인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이거랑 똑같이 만들었다가 와이번한테 죽으라고? 너 평소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냐?"

"그, 그런 거 아냐! 그냥 물어본 거지! 지금은 하늘을 나는 기계만 생각해줘."

"흠······"

대머리 드워프, 발락 래프트는 그림을 보며 턱을 긁적거렸다. 술을 너무 마신 나머지 얼굴이 붉었으나 사리분별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엔진을 동력 삼아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비행기. 마법이 아니라 순수한 기술로만 제작한 기계.

하늘은 언제나 선택받은 자만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곳이라 알려져 있다. 실제로 맞는 말이기도 하고.

허나 피와 강철에서는 기술력만 충분히 받쳐준다면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 곳으로 묘사돼 있다.

게다가 전쟁터로도 사용됐다. 독일 공군에 비해 약할지언정 폴란드에도 공군이 있었으니.

"충분히 만들어 볼만한 가치는 있지. 때마침 에인스 씨도 마력 기관의 설계도를 뿌렸잖아. 못할 건 없지."

"그렇지?"

발락의 의견에 동생, 개리 래프트가 싱긋 웃으며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본래 이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고 많은 장인들 중 한 명이었다. 부르주 5세의 폭정에 짓눌려 그 어떤 창작조차 허가받지 못한 장인.

그러나 혁명 이후 에인스는 모든 드워프에게 기술 공유 및 진정한 창작을 허용했다. 종족 단위로 눌려있던 창작 욕구를 제대로 폭발시켰다.

이렇다 보니 현재 마키나에서 온갖 기계들이 뚝딱뚝딱 제작되는 중이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가동되기 시작한 세계 최초의 공장?

드워프는 집단이 아니라 개개인이 마력 기관을 제작할 능력을 갖고 있다. 공급만을 위한 공장에 크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난 안 할 거야."

"아. 어째서?"

"난 그것보다 배를 만들고 싶거든. 생각해 봐. 바다 위에 거대한 강철 괴물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멋지지 않냐?"

하지만 발락의 생각은 개리와 달랐다. 폴란드 침공은 공군뿐만 아니라 해군의 모습 또한 보여줬다.

온몸이 강철로 뒤덮인 배. 그 배에서 쏘아지는 무시무시한 포격들.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영국 해군에게 찌그러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림만으로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애당초 거대한 철덩어리가 바다 위를 둥둥 뜬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이다. 비행기가 '판타지'라면 철갑함은 '현실'에 가까웠으니.

"그 배 위에서 맥주를 마시는 거지! 크으! 어때? 죽이지?"

"난 하늘에서 맥주를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아. 상상만 해도······"

래프트 형제는 상상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은지 잔뜩 풀린 표정을 지었다. 역시 드워프답게 기승전맥주로 귀결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발락이었다.

"하늘을 나는 건 깔끔히 포기해. 차라리 이 형이랑 같이 전함이나 만들자. 그게 더 현실성 있잖아?"

"전함을 만들어서 뭐 하려고? 세계일주라도 하게? 바다에서 크라켄한테 쥐어짜여야 정신을 차리지."

"그러는 너는 드래곤한테 들이박혀야 정신을 차리냐? 드래곤 이전에 와이번한테 갈갈이 찢길 걸?"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단순한 비행기가 아니야. 무려 배를 하늘로 띄우는 거라고."

"흠?"

비행기가 아닌 비행'선'을 만든다는 소리에 발락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그 반응에 신이 났는지 개리가 술술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도 비행 몬스터 때문에 비행기가 발명되기 어렵다는 건 알아. 하지만 여러 무기가 무장된 배라면? 설령 비행 몬스터가 날아와도 버틸 수 있겠지. 여의치 않으면 바다로 비상 착륙할 수도 있고. 내가 괜히 배를 하늘로 띄운다는 게 아니야."

나름 일리 있는 설명이다. 처음부터 무장된 배를 날려보낸다면 비행 몬스터로부터 쉽게 방어할 수 있을 터.

그러나 발락의 생각은 달랐는지 핀잔을 늘어놓았다.

"에이. 그럴 바에야 차라리 철갑선부터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방어력도 훨씬 올라갈 거 아냐?"

"아니지. 일단 배를 먼저 하늘로 날려보낸 후 철갑선을 만들어야지. 당장 바다 속에 뭐가 있는지 밝혀진 게 거의 없잖아? 크라켄이 철갑선마저 우그러뜨리면 어떡하려고? 그때는 하늘로 올라가야지."

"너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배를 무시하는 거냐? 크라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어."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망상만 재잘재잘 늘어놓기 바쁜 취객으로 생각하겠지. 그러나 이들은 드워프다.

에인스가 그랬던 것처럼 만들고자 하는 게 있다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만드는, 괴짜 중의 괴짜라 할 수 있는 종족.

비록 근 300년 동안은 부르주 5세의 폭거로 창작 능력이 퇴보됐지만, 에인스의 마력 기관 이후 반등될 기미가 서서히 보이고 있다.

"철덩어리를 바다 위에 띄우는 것부터 해야지! 무턱대고 하늘로 날아갔다가 날개가 부숴지면? 너는 배가 뭔지는 알고 있냐?"

"절대 아니야! 배를 하늘로 올려보내는 것부터 시작이야! 우리가 바다에 갈 일이 뭐가 있어? 그러니 하늘이 훨씬 낫지!"

드워프 형제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을 이어나갔다. 인상부터 시작해 성격까지 무엇 하나 맞는 구석이 없는 형제의 모습이다.

"무슨 얘기를 하느라 이리 시끄러워?"

"꽤 재미있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우리한테도 한 번 말해 봐."

그런 형제가 눈에 띄었던 건지 주점 내 다른 드워프들이 하나둘씩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래프트 형제는 예기치 못한 관심에 살짝 당황했으나 알코올의 힘을 빌려 당당하게 서로의 의견을 표출했다.

그 결과.

"당연히 강철배가 먼저지! 우리가 바다에 나갈 일이 없다고? 그럼 나가게 만들면 되겠네! 산을 전부 무너뜨리고 바다와 연결시켜!"

"그 지랄할 돈으로 비행선을 먼저 만들겠다! 바다보다는 하늘로 날아가는 게 훨씬 낫지!"

"야이, 멍청한 놈아. 비행 몬스터를 생각하라니까? 해양 몬스터는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는데 비행 몬스터를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주점은 어느 순간 두 개의 파로 나뉘어졌다.

한 쪽은 동생, 개리 래프트를 중심으로 둔 비행선파.

한 쪽은 형, 발락 래프트를 중심으로 둔 철갑함파.

"내일 당장 가이스트로 찾아가세!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지 한 번 가려보자고!"

"좋소! 자네들 이름이······ 래프트 형제? 아무튼 우리가 도와줄 테니 한 번 해보게!"

드워프에게 있어서 명예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것뿐이다.

대신 만들고자 하는 걸 못 만들었을 때의 박탈감은 그 어떤 충격보다 심하다.

마음이 꺾이는 건 물론이요, 심하면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니까.

그래도 단 하나, '로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더 빨리 발명하는 사람이 기술을 나눠주는 거다. 알겠어"

때로는 아주 사소한 다툼이.

"거기에 맥주 하나 추가."

거대한 불길로 번지기 마련이다.

*******

루미너스와 대화를 끝낸 아이작은 곧바로 회색 사막으로 떠나겠다고 했지만, 곧장 떠나는 건 아니었다.

혹시 모를 혼란을 대비하여 각 국, 특히 세이비어와 알븐하임에 미리 말을 해놓아야 했으니.

세이비어는 현재 탐험을 주도하는 나라이기에 그런 거고 알븐하임은 당연하게도 아르웬 때문이다.

전에 아르웬은 아이케르를 비롯하여 다크 엘프, 시리스까지 파견했다고 언급했다.

괜히 혼란만 부추길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언질할 필요가 있다.

피와 강철을 발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발발 이전까지 회색 사막으로 향하면 그만이었으니까.

[피와 강철 15권 발매 이후 칩거에 들어갔던 노스 교수. 이번에는 또다른 발언을 이어나가······]

[폴란드 침공으로 소련 또한 이빨을 드러냈다. 하지만 소련은 속이 빈 강정이라 작은 나라도 점령하지 못할 것.]

[소련은 당분간 헛짓거리를 할 것이다. 군사적 역량도 최악 중의 최악이다. 내 말을 믿어라.]

그런데 지난번 선동했던 사람이 또 한 번 선동하더라. 아니지, 이제는 선동이 아니라 스포일러다.

실제로 피와 강철 16권은 노르웨이 침공 및 겨울전쟁에 대해 보여줄 예정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정신을 못차리고 또 나불거리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피와 강철 16권의 발매!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다!]

그리고 피와 강철 16권이 발매됐을 때,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딱 하나로 축약할 수 있었다.

[병신.]

이라고.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겨울전쟁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전쟁이다.

소련은 단순히 영토뿐만 아니라 군사적, 경제적으로 모든 분야에서 핀란드를 압도했다.

핀란드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소련의 비위를 살살 맞춰주면서 어떻게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안 그래도 바로 아래에서 폴란드가 양측의 합공으로 쥐어터지다 못해 반으로 쪼개졌는데 핀란드로서는 설설 길 수밖에.

하지만 스탈린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핀란드를 소련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다.

[소련의 입장은 이거다. 네 땅이 좀 탐나니까 내놔라. 쥐어터지기 전에.]

평론가의 말처럼 진짜 딱 저런 식이다. 핀란드는 제대로 선을 넘어버린 소련에 딱 잘라 '안 되오'라고 답했다.

그 이후는? 붉은 군대의 물결이 쏟아지는 것밖에 없지. 핀란드도 이를 알고 있어서 대비책을 갖췄다.

멀리서 본다면 다윗과 골리앗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전쟁이다. 당시 사람들도 그리 예상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무난히 점령할 줄 알았던 소련이 고전을 넘어 막심한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핀란드에게는 물자와 병기가 부족할지언정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강했다. 반면에 소련을 보아라.]

[소련은 지도자를 향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 공포가 스스로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추위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존재다. 잠깐 눈을 감는 순간 신과 대면하는 환경.]

소련을 아득히 추월하는 핀란드의 추위. 의외로 빽빽한 숲의 지형. 마지막으로 스탈린의 대숙청.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스탈린의 대숙청이다. 하필이면 겨울전쟁이 발발했을 때가 군부의 숙청이 이루어진지 얼마 안 됐을 시간.

제아무리 팔다리가 튼튼해도 머리가 띨띨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스탈린은 그저 자기 권력을 보존하겠다고 군부의 유능한 인재를 죄다 숙청시켰다.

이처럼 내부적인 혼란이 심한 와중에 핀란드의 '동장군'이 들이닥쳤으니 병사들은 죄다 얼어죽었다.

오죽하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중 반 이상이 동사자일 정도. 반면 핀란드는 조국의 지형과 환경을 잘 이용하면서 분투했다.

[몸만 커다란 돼지가 허우적거리다가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다.]

소련의 현황을 정말 잘 설명해주는 평론가의 말이다. 그만큼 소련은 그 어떤 칭찬조차 못할 정도로 못 싸웠다.

비록 압도적인 체급차를 이용해 어찌 저찌 승리했지만 본래의 목표로부터 한참 멀어진 승리다.

핀란드 점령은커녕 영토 및 산업 지대의 10%밖에 못 가져왔으니까.

그야말로 피로스의 승리에 딱 어울리는 결말이다.

[도대체 스탈린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기에 일선의 장교들조차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가?]

[황제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남자. 그 이름이 바로 강철의 원수, 스탈린이다.]

사람들은 스탈린의 실책을 비난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전선에 나서는 장교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따기 위해 윗사람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일이 잦다.

그러나 소련의 경우는 달랐다. 앞에서는 핀란드군과 동장군이 떡하니 대기하고, 뒤에는 스탈린의 총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두려움에 잡아먹혀 아무것도 못하다가 얼어죽거나 핀란드군의 총에 맞거나 둘 중 하나를 맞이했다.

말 그대로 스탈린의 명령 거부가 '죽음'과 동일시된 상황. 독자들은 스탈린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우면 저럴까, 라며 측은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스탈린에게 쓴소리를 뱉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고 보니 스탈린의 절친.]

[절친이기에 저런 소리가 가능했던 거지만, 스탈린도 보로실로프를 숙청하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후폭풍이 올 거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인간 백정에게도 저런 면모가 있다니 의외라면 의외다.]

물론 스탈린의 절대권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던 사람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스탈린의 절친이자 동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바로 그 사람이다.

겨울전쟁에서 스탈린에게 '네가 유능한 장군들을 다 죽여서 이 꼴이잖아!'라며 소리쳤던, 강심장 중의 강심장.

심지어 스탈린이 들은 척도 안 하자 접시를 집어 테이블에 내동댕이쳤단다.

현실적으로 보로실로프를 숙청하면 군부가 산산조각나고, 스탈린 본인마저 위험했겠지. 그걸 배제하더라도 서로 친했던 건 사실이다.

[핀란드는 패배했지만 승리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단결하고, 압도적인 전력 차에도 굴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련보다 핀란드에게서 배울 점을 찾아야 한다.]

[비록 패배했지만 핀란드는 많은 것들을 얻었다. 이건 패배가 아니라 교훈으로 남을 것.]

핀란드에 대한 평가는 당연하게도 소련보다 훨씬 좋은 편이다. 아예 극과 극을 달리는 중이다.

소련보다 더한 추위와 더불어 소련의 자멸이 합쳐졌다지만 핀란드가 잘 싸운 건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것 같은 저격수, 시모 해위해가 인기를 끌었다.

'저격'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 세상에도 존재할 뿐더러 레인저가 저격수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니까.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걸 통해 얻는 교훈도 있다. 소련도 지금은 망가졌지만 내실을 잘 다진다면 옛날의 위상을 찾을 것.]

안타깝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러시아가 딱 겨울전쟁의 소련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아주 기이한 현상. 이처럼 겨울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부여했다.

아무리 강한 국가여도 내실이 튼튼하지 못한다면 소련꼴이 나기 쉬우며, 반대로 핀란드처럼 똘똘 뭉친다면 불가능한 일도 해낼 수 있다고.

더구나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여서 폴란드 침공의 이야기가 약간이나마 수그러 들 정도다.

[혹시 히틀러가 소련의 이런 면모를 보고 공격을 하는 게 아닐까?]

또한 소련이 속 빈 강정이었다는 게 드러나자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가설이 제기되었다.

히틀러의 궁극적 목표, '레벤스라움'을 위해서는 소련 침공이 필수다라는 게 이유다.

[절대 아니다. 가짜 전쟁이어도 히틀러는 영·프 연합과 전쟁 중이다. 양쪽에서 가해지는 공격은 치명적.]

[한 쪽에서 공격을 받아내는 것도 힘든데 어지간한 국력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의견은 머지않아 무수한 반박에 휘말렸다.

현실적으로 '양면전쟁'은 파멸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첫번째 이유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도 양면전선을 펼쳤다가 패배하지 않았는가.

[소련 침공을 위해서는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해야 된다. 10년도 가지 않는 조약은 조약으로서 의미가 없다.]

[여태까지 외교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합병한 히틀러다. 미쳤다고 그러지는 않을 것.]

두 번째로는 결정적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맹신하지 않는다지만 조약마저 깰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하지만 히틀러가 상상하던 것보다 또라이였다는 게 문제지. 소련의 서기장마저 경악하게 만든 본좌가 바로 독일의 총통이다.

2차 세계대전은 여러 의미에서 '상식'이 모두 파괴되는 전쟁이다. 애당초 전쟁에 상식이 통하는 경우가 몇몇 없으나 기본적인 골자는 유효하다.

그 골자들마저 와르르 무너지고 있으니 독자들, 특히 전문가들로 하여금 충격을 넘어 경악이겠지. 지금도 분석하고 난리지 않은가.

그냥 아침 드라마 본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여기에 아침 드라마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고작 추위 때문에 저만한 피해를 입는다니. 말도 안 된다. 그냥 핑계일 뿐이지 않나?]

아주 가끔 가다가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어디서 불과 마나를 발견하지 못한 원시인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

곧바로 저지당했다. '전개'가 아닌 '상식'에서 나오는 헛소리는 칼 같이 차단당했다.

그렇다면 전개와 관련된 헛소리는 어떻게 취급할까. 말도 안 된다고 매장을 당할까.

원래라면 그랬다. 특히 히틀러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라도 한다면 득달 같이 달려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노스의 선동 아닌 예언 이후에 그 기류가 살짝 변화했다. 전개에 대한 예측은 말이 안 되더라도 용인하자고.

제논 일대기의 주인공, 제논과 달리 히틀러는 완전히 별개로 두어야 된다고. 비슷한 행보를 보일 거라고 단언하지 말자는 여론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기류를 만든 선지자(?), 노스는 현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소련이 진짜 왜 지는 거야? 아무리 내부가 망가져도 체급 차이가 있는데!!"

본의 아니게 두번째 예측이 성공해버려 극심한 혼란에 빠진 상태다.

지난번에는 폴란드 침공에서의 학살을 예언했고, 이번에는 겨울전쟁에서 소련의 민낯을 전부 까발렸다.

당연히 사람들은 노스의 안목에 열광했다. 입으로 똥만 싸는 줄 알았는데 역시 과거의 명성이 헛된 게 아니라면서.

정작 관심 아닌 관심에 노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막 저지른 게 죄다 들어맞고 있다.

'이, 이러다 왕실에서도 나를······!'

테르스 왕국의 전직 작가, 노스는 얼마 남지 않는 머리를 감싸안으며 불안에 떨었다.

원래 이런 헛지거리가 가능했던 이유는 제논의 명성을 깎으려는 이유도 있지만 '뒷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아닌 왕실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 인사들. 그 인사들이 직접 말하길, 뒷배가 될 테니까 마음껏 저지르라고.

어떻게든 제논을 '바깥'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하라고 말이다. 처음에는 찝찝했지만 보상도 주어졌기에 허락했다.

그런데 모든 게 꼬여버렸다. 히틀러는 정말로 학살자였고, 소련은 요란하기 그지 없는 빈 수레였으니.

'다, 다른 거! 다른 거를 해야 돼!'

테르스 왕실 입장에서는 이 새끼가 자신들을 이용하는 건가? 싶을 것이다. 그러면 쥐도 새도 없이 끌려갈 터.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현재 마리아 여왕의 성격이 온화한 것과 별개로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왕실에는 마리아 여왕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애당초 테르스 왕실은 제논에게 덤볐다가 망신만 당했다.

'독일의 다음 상대. 다음 상대는 분명······'

노스는 피와 강철 지도를 살펴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비록 군사에 대해 아는 건 1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또다른 헛소리를 할 수 있다.

현재 폴란드는 쥐어터졌고 핀란드는 소련과의 처절한 전쟁 끝에 겨우겨우 휴식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준비된 나치 독일의 창 끝이 어디로 향햐느냐. 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다.

'프랑스. 프랑스밖에 없어. 이건 문외한인 나여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어.'

독일 해군에 대한 묘사는 딱 이렇게 나와있다. 차마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로 얄팍하다고.

반면 영국의 해군의 세계 전체를 정복할 정도로 막강하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영국은 바다 건너의 섬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국에서 지원군이 온다더라도 육지에서 싸우겠지.

노스는 여기까지 생각이 그치자 골똘히 생각했다. 군사에 대해 까막눈이라지만 '상식'은 갖고 있는 그다.

'역사적으로 국력이 비슷한 국가끼리 붙는다면 장기전으로 흘러갔어. 게다가 나치 독일은 소련과 달리 속이 가득 차 있다. 프랑스는 예로부터 육군 강국이라고 묘사됐고.'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이게 정상이다. 국력이 서로 비슷한 국가끼리 서로 전쟁을 벌인다면 최소 수 개월은 소요된다.

설령 한 쪽에서 자멸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썩어도 준치라고, 최소 2달 이상 버틸 여력은 남아있으니.

하물며 프랑스와 나치 독일 두 국가 모두 강대국이다. 대신 히틀러가 주인공이니 나치 독일이 승리하긴 하겠지.

순간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게 패배한다는 선동을 지껄일까 생각했으나 곧바로 묻어버렸다.

'좀 더 비상식적인.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필요해.'

나치 독일이 프랑스에게 패배한다는 건 그리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국력이 비슷한 두 국가 사이의 전쟁인데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한 쪽이 압도적으로 패배해야 된다. 노스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어느 쪽이 이기기보다는······ 그래. 차라리 전쟁이 2개월 내에 끝나는 걸로 잡자. 여기서 더 줄여서 6주 정도로 할까?'

강대국과 강대국 사이의 전쟁이 6주만에 종료된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다 못해 인지부조화가 올 정도의 가설.

정말 소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행보다. 전쟁은 전력이 비등할수록 길게 늘어지는 법이다.

'하다못해 폴란드 침공이 한 달이나 걸리고 겨울전쟁이 4개월 넘게 이어졌는데.'

규격 외의 전술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강대국을 6주만에 꺾는 건 불가능하다.

아닌 말로 테르스 왕국이 미네르바 제국을 6주만에 점령한다는 것과 다를 게 있나.

이게 맞다. 노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 정도면 제논을 바깥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야.'

이처럼 어느 한 예언가 아닌 예언가가 자기 저택에서 꿍꿍이를 펼치고 있을 때.

"이 정도면 됐겠지? 사막은 처음 가는데."

"화장품이라도 빌려줄까? 피부 다 타면 어떡해?"

"피부가 타면 타는 거지, 뭐."

"시끄럽고 이거나 가져가."

아이작은 회색 사막으로 떠날 채비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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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에게는 곧장 출발한다고 말했지만, 무작정 짐 싸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내가 앞으로 향할 곳은 회색 사막, 그것도 서쪽 전반을 지배했다는 게리오스 왕국의 유적지다.

현재 유적지를 탐사하느라 수많은 인력이 모이는 중인데 무턱대고 갔다가 괜한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게 아니라 몰래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대신 케이트를 통해 세이비어 측에 말은 해놓았다.

또한 아르웬에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시리스를 심어놓았기에 반드시 정보를 알려줘야한다.

[회색 사막으로 간다는 말이냐?]

"네. 루미너스 님께서 부탁하셨거든요."

마지막으로 저택에서 클라크 할아버지와 만남을 가졌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회색 사막을 횡단했던 사람.

지금은 탐험대가 대부분 공략을 해놓았기에 위험한 건 없지만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다.

톡-

[아.]

"하하."

겸사겸사 바둑을 두는 건 잊지 않았다. 원래 바둑이 담소를 나누면서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놀이다.

클라크는 내가 허를 찌르자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머리카락도 없는 해골이신데 버릇인 모양이다.

[루미너스 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걸 보면 분명 누군가 만나라고 하셨겠구나. 아니니?]

"네. 맞아요.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고 하시던데요?"

[싸가지가 없다라······ 루미너스 님 입장에서는 그럴만도 하겠지.]

"만나신 적이 있으세요?"

클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돌을 조심스레 놓았다.

순간 저걸 왜 저기에 놓는 건가 의아했지만 그의 말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만난 적은 있지. 좋은 경험도 나쁜 경험도 아니었단다. 말 그대로 경험이었지만 규모가 큰 경험이었지.]

"말씀드릴 수는 없으시죠?"

[이 할애비는 너와 달리 말재주가 없어서 말이다. 직접 만나는 편이 더 좋겠구나.]

자기 여행담을 술술 풀어놓았을 때는 언제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보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손자야.]

"네?"

[너희 세상에서는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다고 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클라크 할아버지가 뜬금없이 전생에 대해 질문하셨다.

그 질문에 살짝 의문을 가졌으나 곧이어 백돌이 놓이는 걸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네. 존재가 불분명한 신을 믿고 있죠. 다만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지, 신이 존재한다는 건 확실해요."

이곳에서 환생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았겠지. 하지만 이제는 믿고 있다.

그렇다고 신실한 신자가 됐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존재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마나와 마법은 어째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냐?]

"네?"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더라도 마나와 마법은 그대로 있어야 하지 않느냐?]

나는 클라크의 다음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헷갈렸으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신의 존재가 불분명하기에 신성력이 없는 건 괜찮다.

그러나 마나와 마법이 없는 건 생각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마법은 원래 신들의 힘이라고 책에서도 나와 있었고······ 마나는 원래부터 있던 거였으니까.'

신화에 기록된 바로는 그렇다. 마법은 원래 신들이 사용하던 능력 중 하나다.

그 능력이 천사로 이어지고, 천사가 스스로 날개를 떼어내 엘프가 되면서 전수된 것이다.

여기서 마족은 상황이 약간 다른데, 외부적인 요인으로 강제적인 진화를 이룩한 거라 누구에게 전수받았는지 알 수 없다.

마족들 스스로도 태어나자마자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해답을 찾는 건 쉽지 않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마나나 마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단 하나도 없는 게냐?]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신화에서는 신들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법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신화에서 등장하는 인간 마법사 특징. 미치거나 대부분 정신이 온전치 않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를 비롯한 매체가 아닌 신화에서 등장하는 마법사다.

대게 지식을 탐하려다가 좋지 못한 꼴을 맞이하는 편이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마법은 눈속임에 불과해요. 어떤 신묘한 능력이 아니라 교묘한 속임수를 이용하는 거죠. 당연히 마나도 없고요."

[흠. 이해가 안 가는구나. 물론 마법이 없기에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할 수 있는 거겠지. 그래도 아예 존재조차 불확실한 건 의문이 들어.]

"저희가 신의 의도를 어찌 알겠습니까. 전 여기 놓겠습니다."

[이런 씹.]

내가 백돌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해버리자 클라크가 머리를 감싸며 탄식했다.

아무리 진중한 대화를 한다지만 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한동안 어디에 백돌을 놓을지 끙끙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돌을 던졌다.

패배를 인정한다는 표현. 나는 미소를 지으며 흑돌을 천천히 수거했다.

"한 판 더 두실래요? 출발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았거든요."

[됐다. 평생동안 몸만 쓰느라 손자한테는 안 되는구만.]

클라크는 투덜투덜거리며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시가를 입에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한 박하향이 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리엘이 있을 때는 어느 정도 눈치를 봐야했지만 이제는 그런 거 없다. 마음대로 피울 수 있다.

나는 달콤하기 그지 없는 세계수잎 시가의 향기를 맡다가 바둑판을 정리했다.

[후우······ 손자야.]

"네. 말씀하세요."

[가기 전에 너희 세상의 신은 어떤 분인지 한 번 말해줄 수 있느냐? 듣다보니 조금 궁금해서 말이지.]

"음······"

하루라도 손자와 같이 있고 싶은 걸까. 나는 클라크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했다.

지구의 신은 이 세상과 달리 골라서 설명할 수 있을만큼 많다. 애당초 지역마다 다채로운 신화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그리스·로마 신화, 북유럽 신화, 이집트 신화가 있다. 이 세 가지만 풀어서 설명해도 며칠은 걸릴 터.

마지막으로 현재는 기독교와 불교가 세상을 양분하는 중이다. 이러니 하나를 골라서 설명하기 난감하다.

"어떤 걸 원하세요? 이 세상의 신들처럼 인간적인 신들? 아니면 불분명한 신? 한 번 골라보세요."

[음? 그게 무슨 말이냐? 마치 신이 10명 이상 되는 것마냥 말하는구나.]

"세 자리수가 넘는데요?"

[··· ···]

내 말에 클라크가 눈을 깜빡거린다. 해골의 눈구멍 속의 황금색 빛이 반짝거린다는 뜻이다.

당장 인도의 신들만 해도 뭐 이리 많냐? 싶을 정도로 무식하게 많다.

이어서 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치아 사이로 연기를 내뿜으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하는 세상인지······ 그래도 종교전쟁 같은 건 없겠구나.]

"발이 채일 정도로 많았어요. 성지 하나를 두고 100년 동안 전쟁을 한 곳도 있고."

십자군 전쟁이라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두고 지배권을 얻기 위해 박터지게 싸운 전쟁이다.

대신 거칠기 짝이 없는 전쟁이라기보다는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난 상황에 가깝다.

이 전쟁을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권이 믿는 신이 동일하다는 가설이 제기되기도 했고.

[어째서냐? 신이 그렇게나 많은데?]

"엄청 복잡하고 긴데 설명해드릴까요?"

[됐다. 머리 아픈 일은 바둑만으로 충분해. 후우.]

클라크는 다시 한 번 뿌연 연무를 내뿜으며 시원함을 표출했다.

하기야 신화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조차 고역인데 길고 긴 역사를 알려줄 시간도 없다.

"뭐, 아무튼 전 이만 가볼게요. 혹시 주의해야 될 건 없나요?"

[사막에 대한 조사는 다 했을 테니 이건 넘어가고, 충격에 대비하라는 말밖에 못하겠구나. 워낙 충격적인 진실들이 파묻혀 있으니까.]

시가를 뻐끔뻐끔거리는 걸 제외하면 진지한 조언이었다. 그것 참 해골이신데 맛있게 흡입하신다.

도대체 어떤 진실이 묻혀있길래 주의까지 하는 건지. 더욱 궁금해졌다.

"네. 귀담아들을게요."

[전에 말했듯이 신을 너무 맹신하지 마렴. 지금도 어떤 의도를 지닌 채 너를 그곳에 보내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신들이 세상을 멸망시켰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콜록! 콜록!]

예상을 한참 벗어난 질문이었는지 클라크가 화들짝 놀라며 기침을 토했다.

이미 죽은 몸이니 사레가 들린 건 아닐 테니 정말 심하게 놀란 모양이다.

이어서 그는 한동안 속을 다스리는 듯하더니 약간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세상이 멸망했는데 무덤덤해?]

"네. 일단 신화이긴 해도 신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건 너무 자주 일어난 일이라서요."

틈만 나면 대홍수를 일으켜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지구의 신들이다.

특히 북유럽 신화 같은 경우는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해 개고생을 하다가 전부 헛짓거리가 됐고.

클라크는 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작디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성격파탄자만 있는 거니?]

너무나도 정확한 평가였다.

******

"머지않아 제논 님께서 이곳을 방문하실 겁니다."

회색 사막 원정대의 책임자, 데이모스가 정중한 말투로 소식을 전달했다.

그 소식을 전달 받은 게리오스의 마지막 왕, 모건 왕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게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알겠다. 좋은 소식 고맙구나. 난 또 뒤진 줄 알았지.]

왕좌 위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건 그대로였지만, 현재 모건 왕의 두 손에는 '피와 강철'이 쥐어져 있다.

제논 일대기를 완독한 지는 오래였으며 최근에는 데이모스가 전달한 피와 강철을 열심히 읽는 중이다.

약간 빠지는 모양새였으나 데이모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자신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럼 조만간 제논 님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그대의 노력에 감사를 표하마. 이만 나가도록.]

빨리 가라는 듯이 손을 휘적거리는 모건 왕. 귀찮다는 기색을 대놓고 표현하고 있었다.

데이모스는 그런 모건 왕의 행동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알현실 밖으로 나섰다.

이윽고 데이모스가 알현실 밖으로 나서고, 알현실의 커다란 대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하여 알현실에는 피와 강철을 조용히 정독 중인 모건 왕 혼자 남게 됐다.

[그래서······]

홀로 남게 된 모건 왕이 작게 중얼거리며 책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얼굴을 가렸던 책이 내려가려짐과 동시에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무슨 생각인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알현실에는 아무도 없다. 이건 확실하다.

그러나 모건 왕은 마치 누군가 있다는 듯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팟!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뻥 뚫린 천장에서부터 황금색 빛이 알현실 중앙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은 밝기에도 모건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하는 눈초리에 가까웠다.

[난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다.]

놀랍게도 빛으로부터 어느 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로 호의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모건 왕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익히 알고 있다. 이에 콧방귀를 뀌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전쟁의 신께서 짐의 부탁을 들어줬을 때가 언제였더라? 육신이 멀쩡했을 때면 몰라도 지금은 억제만 하고 있는데 말이지.]

[그 아이와 만나서 무엇을 얘기할지부터 고민하는 게 좋을 텐데.]

목소리 아니, 루미너스는 모건 왕이 비꼬든 말든 할 말만 전달했다. 둘 모두 서로를 향한 호의는 1도 없는 모습이다.

이에 모건 왕은 피식거렸다.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내 영혼에 제약이란 제약은 다 걸어놓고 말은 잘하는군. 입을 실로 꿰매놓고 비명을 지르라는 건가?]

[··· ···]

[뭐, 듣자하니 예언자라는데 난 잘 모르겠어. 대신 진실이 저 멀리까지 알려지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일세.]

모건 왕은 한 방 먹였다는 듯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미너스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 충고하도록 하지.]

[충고?]

충고라는 단어에 모건 왕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지만 자그마치 신이다.

신은 결코 허투로 충고하지 않는다. 무려 미래를 읽으니 여기에 기반한 것일 터.

뒤이어 루미너스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건 왕에게 '충고'를 건넸다.

[그 아이는 네 예상을 한참 웃돌 것이다. 네가 예상하는 모든 걸 부순다고 장담할 수 있지.]

과대평가 같으면서도 과대평가가 아닌 루미너스의 평가. 아이작이 들었다면 특유의 어벙한 표정을 지었을 법한 평가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건 왕은 허- 하며 감탄하더니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거 기대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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