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33화 (534/763)

[······왔니?]

개인 예배실에서 기도를 하자마자 루미너스가 인사를 건넸다.

지난 일 때문인지 부드러우면서도 조심스러운 목소리. 다행히 꺼려하는 기색은 아니다.

여러번 말했지만 나는 신들과 대적할 마음은 없다. 서로서로 윈윈인 관계를 원하고 있으니 앙금은 풀어야겠지.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에게 단단히 혼났지만······ 잘 지내고 있었단다.]

신이어도 어머니에게는 항상 약한 법. 게다가 그때 하루가 멈췄다는 증언이 있었지 않았는가.

단순히 호통으로 끝난 게 아니라 모든 권능이 일시적으로 멈춘 셈이다.

'목소리를 보니 많이 혼나신 것 같네요.'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덕분에 다른 의미로 인간적인 것도 깨달았고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사과하겠습니다.'

루미너스도 내가 모라에게 가했던 폭언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역겹게도 인간적이라는, 신들에게 무례하다 못해 천벌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폭언.

그러나 당시 내 멘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신들이 가장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

정상 참작은 충분히 될 수 있다는 말. 게다가 이후에 모라는 히르트에게 잡혀갔지 않았는가.

따라서 폭언에 대한 사과만 할 예정이다. 물론 루미너스가 아니라 모라에게 직접 가야겠지.

'모라 님께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너에게 했던 일에 대해 후회하는 중이지. 나중에 방문한다면 진심으로 사과할 거라고 하더구나.]

'조만간 찾아뵙겠다고 대신 전달해주세요. 모라 님과는 풀어야 할 게 많으니까요..'

무려 신을 전령 취급하는 것과 다름 없으나 잘못은 그쪽이 저질렀다. 히르트가 괜히 대노한 게 아니다.

하물며 나에게는 제약이 걸려있다. 저쪽에서 먼저 나선다면 지구의 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물론 이걸 이용해 갑질을 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그럴 배짱도 없다.

[고맙구나. 우리가 너에게 저지른 잘못이 많은데······ 정작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신성력밖에 없으니.]

'괜찮아요. 그런데 궁금했던 부분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니?]

'회귀가 가능하다면, 어째서 시간을 되돌릴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거죠?'

실제로 아차하는 순간에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도 있고.

그 날에는 화가 머리 끝까지 간 나머지 생각치도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의문으로 남았다.

참고로 히르트와 만났을 때도 생각하지 못한 발상이었다. 신과 필멸자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했던 부분이 컸다.

[지구의 신들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로 시간을 되돌린다면 너에게 간섭을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더구나 정당한 대가 없이 회귀를 시도한다면 우리의 신성이 크게 소모되거든.]

'복합적인 이유군요.'

[그런 셈이지.]

이래나 저래나 지구의 신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곳은 신들은 물론 신도들의 숫자도 엄청 많으니까.

신도 한 명 한 명이 양분이 되어 신의 영향력이 증가한다. 이건 신학에서 배웠던 내용이다.

당장 하느님만 해도 인구의 반 이상이 믿는데 그 강대함은 상상을 초월할 터.

'그나저나 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요?'

[홀로코스트······]

'네?'

루미너스는 잠시 말을 흐리더니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지구 인류사 사상 최악의 학살. 홀로코스트는 언제 등장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의외라면 상당히 의외인 질문이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안부 차에 방문하라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예상에서 한참 벗어난 질문이기도 하다.

'그건 왜요?'

그래서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라 나도 모르게 받아친 것이다.

고행 사건 이전까지 서로서로 편하게 대한 것도 있고 모라와 달리 루미너스는 나에게 잘못한 게 마땅히 없다.

굳이 있다면 전쟁의 신이었다는 걸 숨기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이용해 전쟁의 불씨를 키우려고 했다는 것.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날이 잔뜩 선 목소리로 루미너스에게 질문을 날렸다.

'홀로코스트가 등장하면 전쟁이 터질지 않을까봐 그러는 거예요?'

[광기로 가득 찬 게 전쟁이지만 정작 전쟁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들이 선포하는 거란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광기에 찬 자가 시행하는 학살이었지.]

'··· ···'

정말 명쾌한 반박만 돌아왔다. 저 반박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와 달리 나치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구멍투성이나 다름없었으며 독일인의 복수심만 키웠으니.

비록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사회였으나 당시만 해도 유대인은 스스로를 그 나라의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이를 교묘히 이용한 거지, 시간만 흘렀다면 자연스레 이스라엘도 건국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건 왜 묻는 거예요?'

[그걸 쓰기 전에 네가 잠깐 찾아가야 할 곳이 있거든.]

'찾아가야 할 곳이요? 그게 어디죠?'

[싸가지 없는 놈이 있는 장소란다.]

'?'

대답을 들었지만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약간 놀라웠다.

평소 온화한 말투를 사용하는 루미너스 입에서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오다니.

말투에서조차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날 정도다. 대체 누구길래 저런 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디인지 모르는데요?'

[회색 사막 원정대가 떠났던 곳 있잖니?]

'게리오스 왕국이요?'

게리오스 왕국 탐사는 지금까지 꾸준히 유지되는 중이다.

한때 서쪽을 전부 점령했다던 게리오스 왕국이 너무 넓은 바람에 오래 걸리는 거라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엘레나와 신디의 부재 또한 늘어났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오랫동안 이어지는 건 덤이고.

'그곳으로 가라고요?'

[그래. 물론 당장 가라는 건 아니란다. 홀로코스트가 등장하기 전에만 가면 돼.]

'이유는요?'

역사상 최악의 학살극, 홀로코스트를 집은 이유도 알 수 없고 게리오스 왕국으로 가라는 이유도 알 수 없다.

원래 같았으면 별 생각없이 기꺼이 부탁을 들어줬을 테지만, 루미너스의 숨겨진 이명과 고행 사건을 알고 나서 꺼려졌다.

그러니 루미너스가 합당한 이유를 대지 않는 이상 게리오스 왕국으로 갈 이유가 없다. 어차피 나에게 간섭을 하는 순간 지구의 신이 나설 터.

한 마디로 나를 '설득'시켜야 된다는 의미다. 과연 루미너스가 나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다.

[··· ···]

루미너스는 내 물음에 한동안 대답을 꺼내지 않았다. 연결이 끊겼나 싶어 눈을 떠도 석상은 여전히 금빛으로 빛나는 중이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는 의미다. 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루미너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거.]

'과거요?'

[그 자식 흠흠.]

순간 그 자식이라 말할 뻔했던 걸 헛기침으로 무마하는 루미너스. 어지간히도 그 사람이 싫은 모양이다.

[그 자가 과거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알려줄 거란다. 또한 너에게도 제안을 걸 수도 있겠지.]

'제가 루미너스 님과 다른 신들의 과거를 알아서 무슨······'

좋은 거라도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말을 멈칫거렸다.

루미너스가 많고 많은 것들 중에 '홀로코스트'를 지목한 이유가 과거와 연관돼 있는 거라면?

머릿속을 스친 의문이다.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예 대놓고 집어준 수준이다.

'······루미너스 님?'

[말하렴.]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솔직하게 대답해줄 수 있나요?'

[괜찮단다.]

홀로코스트는 나치 독일 즉, 국가가 행한 일이다. 국가 전체가 광기에 빠졌다면 어찌 되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 전체가 광기에 빠져 학살극을 일으킨 건 역사적으로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단순한 학살을 넘어선 '도축'에 가까웠다.

그래서 수많은 나라들이 비난하고 또 비난한 것이다.

'제가 그걸 알게 되면 루미너스 님에게 긍정적인 건가요, 아니면 그 반대인가요?'

하지만 국가가 아닌 '신'이 그에 준하는 학살을 저질렀다면······ 솔직히 말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일례로 신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대홍수'가 있다. 대홍수 하나로 9할이 넘는 인구가 쓸려나간다는 재앙.

혹은 신이 직접 인간들에게 천벌을 내리기 위해 역병을 흩뿌린다던가 몇 년 내내 가뭄이 들게 하는 등.

신에게 있어서 필멸자의 목숨은 파리와도 같다. 두려울지언정 자연재해마냥 피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구태여 홀로코스트를 집은 걸 보면 그 재앙을 한참 넘어선 무언가가 있는 게 확실하다.

[둘 다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단다. 네 선택에 따라 갈릴 테니까.]

루미너스는 애매모호한 질문을 꺼냈다.

아무래도 내 미래를 정확히 읽을 수 없으니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나에게는 그저 책임을 어깨 위에 얹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에도 책임을 떠넘기는 건가요? 차라리 집필을 중단하라고 하세요.'

[그건 절대 아니란다. 그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잖니?]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네가 쓰는 글마다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니 우리 과거도 조금이나마 밝히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

'··· ···'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제논 일대기뿐만 아니라 피와 강철까지 2연타로 터지니 신들도 많이 불안할 것이다.

모라가 그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고행으로 다 말아먹었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날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는 없다.

그러니 차라리 시원하게 밝히자. 다만 내 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서.

'······여러분들이 직접 말하기 어려운 과거인 모양이네요.'

[··· ···]

내 직언에 루미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알다시피 침묵은 긍정의 의미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괜한 부담감을 얹혀주는 느낌이다. 차라리 피와 강철까지만 쓰고 끝내면 되지 않나.

대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이러는지 도통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냥 피와 강철까지만 딱 쓰고 끝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돈도 돈대로 벌었는데?'

[심심하다고 제논 일대기를 쓴 애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양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구나.]

'··· ···'

또 할 말 없어지게 만드네. 솔직히 저 말에 반박할 거리도 없다.

정말로 심심해서 다른 작품을 쓸 거 같거든. 손이 근질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루미너스는 내 침묵에 웬일로 약하게 웃더니 이윽고 진지하게 말을 열었다.

[본질적인 이유는 머지않아 우리의 과거가 드러날 것 같아서 그렇단다. 과학의 발전력이 예상을 한참 추월했거든.]

'과학과 여러분의 과거가 무슨 상관이죠?'

[그에 대한 해답은 그 자식이 알려줄 거란다.]

'거 참. 사람 궁금하게 만드시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시원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갈게요. 루미너스 님도 솔직하게 대답하셨으니까.'

[고맙구나. 언제 출발할 예정이니?]

'쌓아놓은 비축분도 상당히 많으니까······'

때마침 홀로코스트가 터지는 독소전쟁까지 끝낸 참이다.

'내일 당장 가도 상관없을 것 같네요.'

그러니 내일 가도 괜찮겠지.

내 시원시원한 대답에 루미너스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착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디 우리를 미워하지 마렴.]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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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간. 마키나의 어느 한 주점.

"철덩어리를 바다 위에 띄우는 것부터 해야지! 무턱대고 하늘로 띄웠다가 날개가 부숴지면? 너는 배가 뭔지는 알고 있냐?"

"절대 아니다! 배를 하늘로 띄우는 것부터 시작이야! 우리가 바다에 착륙할 일이 있어? 차라리 하늘이 훨씬 낫지!"

두 드워프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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