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32화 (533/763)

케이트가 의무가 있다며 떠났을 때가 반년 전이다.

대공황 이전, 그것도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떠났으니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셈이다.

본래 그녀는 아델리아처럼 호위를 자처하고 있었다. 실제로 나를 습격할 뻔했던 악마 숭배자를 조지기도 했고.

하지만 클라크 할아버지와 면담 아닌 면담이 끝나고, 이후에 내 조언을 듣더니 홀라당 떠나버렸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어도 세이비어 입장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겠지.

실제로 그런 소문을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러나 세이비어 쪽에서도 케이트를 어떻게 할 수 없다.

타락한 추기경을 본인이 직접 조져버렸을 뿐더러 교황과 맞먹는 신성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중이었으니까.

아무튼 케이트가 다시 돌아왔다는 건 내 호위로 돌아왔다는 뜻에 가깝다.

"아, 안녕하세요. 로라 루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케이트 혼자만 온 게 아니더라. 10살 남짓돼 보이는 어린 소녀까지 함께 데리고 왔다.

갈색 머리카락에 눈동자를 지닌 소녀. 장래가 매우 기대가 되는 외모가 눈길을 끌었다.

심지어 케이트가 직접 본인의 후임이라고 말했으니 범상치 않은 소녀일 터.

대체 케이트는 반년 사이 무슨 일을 하고 다녔던 걸까.

"안녕. 꼬마 숙녀님. 내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야. 혹시 들어본 적 있니?"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나는 무릎을 굽히며 눈높이를 맞췄다.

내 정중한 인사에 로라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네······ 제논 일대기의 작가님······ 맞죠? 저 제논 일대기 엄청 좋아하는데······"

"그러니? 고마워."

"아, 아니에요! 제가 더······"

로라가 두 손을 내저으며 당황스러워한다.

잔뜩 긴장한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는 소녀와의 인사 이후 굽혔던 무릎을 펴며 케이트를 바라봤다. 그녀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물어볼 게 많아도 너무 많다. 일단 안으로 들여보내는 게 낫겠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클라크 씨께서는······"

"클라크 할아버지는 현재 저택에 계세요. 아직 장례식도 치르지 않았고요."

"아. 다행이군요."

케이트가 반색한다. 클라크 할아버지와 껄끄러운 사이인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클라크 할아버지를 뵙고 싶으신가요?"

"네. 여쭈어 볼 것도 있는데다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부족한 게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나중에 한 번 여쭈어 볼 게요."

"감사합니다."

현관에서 간단한 안부 인사 이후 곧바로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왁!"

"꺄악!"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숨어있던 아리엘이 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래키는 게 아닌가.

케이트는 그녀의 존재를 알기에 움찔한 반면 로라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아리엘의 때아닌 장난에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마리가 그녀를 번쩍 안아들었다.

"아리엘. 손님한테 그런 장난하면 못 써."

"엄마는 아빠한테 맨날 이러지 않아?"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리에게 되물었다.

실제로 마리가 나에게 저런 장난을 많이 치는 편이다.

평소 내가 무뚝뚝한 나머지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정말 맛있다고 하던가.

아무래도 아리엘은 마리의 그런 모습을 보며 배운 것 같다. 당연히 마리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그, 그건 엄마가 아빠한테 치는 장난이라서 할 수 있는 거란다. 손님한테는 절대 그러지 마. 알겠니?"

"우웅. 알겠어."

"나, 날개? 처, 천사예요?"

로라가 심히 당황한 목소리로 케이트에게 묻는다. 케이트는 아리엘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로라는 처음이다.

이에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쳐다봤다. 알려줘도 되냐는 눈치인 것 같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내렸다. 그러자 케이트가 로라를 바라보며 사근사근하게 이야기했다.

"네. 히르트 님께서 아이작 님에게 선물해주신 수호자죠. 보다시피 아이작 님의 피가 섞여있기에 자식이기도 하고요."

"와아······ 천사라니······ 저 천사 처음 봐요! 제논 일대기에서도 진이 천사로 변하지 않나요?"

로라는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답게 외전에 나온 내용까지 언급했다.

물론 천사는 신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영영 태어나지 못하는 존재다. 이건 제논 일대기에도 언급한 사항이다.

"잘 아는구나. 서로 인사해보겠니? 아리엘?"

"안녕!"

"아, 안녕······!"

힘차게 인사한 아리엘과 달리 소심하게 인사하는 로라.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여기 앉으세요. 로라는 옆에 앉고."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아델리아는 손님이 왔으니 주방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맛있는 쿠키가 나오겠지.

게다가 여러모로 할 이야기가 많다. 나는 대화할 준비가 끝나자마자 지체없이 케이트에게 질문을 날렸다.

"그동안 뭐하고 계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로라가 후임이라고 하셨지만 궁금한 부분이 너무 많네요."

"아. 네. 어떻게 된 거냐면······"

케이트는 반년 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세세히 알려줬다.

우선 로라가 악마 숭배자에게 피해를 받은 아동이었다는 것.

마을 전체가 악마 숭배자였던 곳에서 모진 학대를 받았다고 설명해줬다.

그러고 보니 마을 전체가 악마 숭배자에게 빠져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이후로 더 끔찍한 상황이 존재해서 살짝 묻힌 감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다.

'악마 숭배자는 주로 외진 마을이나 빈민가를 노린다고 했으니.'

악마 숭배자는 왕래가 심각할 정도로 적고 궁핍한 자를 노린다고 들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시대상이 시대상인 데다가 통신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과 빈민가를 일일이 신경 쓸 수 없을 뿐더러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있다.

"로라. 등을 보여줄 수 있겠니?"

"네."

케이트의 부탁에 로라가 등을 돌리더니 옷을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흠칫거렸지만 머지않아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아이한테······"

자그만한 로라의 등에는 온갖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채찍질로 인한 상처는 물론이요, 화상 자국을 비롯하여 둔기에 짓눌린 자국까지.

명백한 고문의 흔적이다. 등에 남은 자국만 해도 저 정도인데 다른 곳은 더 심할 터.

요즘에는 활동이 뜸한 탓에 넘기고 있었지만, 악마 숭배자는 결코 용납받지 못할 종자들인 게 확실하다.

"이처럼 로라는 옛날부터 악마 숭배자에게 홀린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있었습니다. 구조 이후에도 '계시'는 언제 받냐며 묻기도 했죠. 타락이 심할 정도로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타락이 진행됐다는 건······"

"영혼이 어둠으로 물들었다는 뜻입니다."

악마 숭배자는 어떤 원리인지 몰라도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존재들이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타락한 추기경, 바크가 그 예다.

그러나 어떤 원리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주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다만 신자들도 입을 모아 말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영혼이 '타락'했다는 것.

깨끗한 물에 새까만 잉크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듯이, 점점 혼탁해져 종래에는 물이 더러워진다.

당연히 그 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전혀 모른다.

"보통 같으면 타락이 진행된 영혼은 즉시 성화로 정화해야 하지만······"

케이트는 그리 말하며 로라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옛날의 그녀였다면 곧장 진행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가 종자를 가지듯이 로라를 후임으로 지목했다.

"아이작 님께서 말씀했듯이 로라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저지른 자입니다. 그것도 반강제적으로 죄를 저지르게 만들었죠."

"··· ···"

"그래서 이겨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신이 구원할 수 없는 영혼은 없으니까. 곁에서 함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그녀는 로라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대견스럽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루미너스 님에게 계시를 받았습니다. 창문에서 뻗어나온 빛이 정확히 로라를 향한 거였죠. 거짓된 계시가 아닌, 진짜 계시를 받은 겁니다."

"그러면 타락은······"

"네. 타락도 완전히 씻겨져 나갔습니다. 로라처럼 타락이 덜 진행된 자는 성화가 아닌, 기도를 통해 정화할 수 있는 거죠. 교단에서도 뒤늦게서야 알게 된 겁니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과거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성장이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전까지 케이트는 광신도적인 면모도 면모지만 '부화뇌동'이라는 사자성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교단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그에 어긋나면 문답무용으로 행동하는 광신도.

타락한 추기경 사태도 이와 비슷하다. 다행히 내가 루미너스에게 확답까지 받아서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애먼 사람을 잡을 뻔한 것이다.

"아닙니다. 클라크 씨의 충고, 그리고 아이작 님의 조언이 아니었더라면 개안조차 하지 못 했겠죠. 두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케이트는 내 칭찬에도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반년 사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내가 알던 그녀가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다.

"로라도 케이트 씨의 뒤를 이어 이단심문관이 되는 건가요?"

"예. 로라가 말하길, 자신처럼 악마 숭배자에게 고통 받는 사람을 구원하고 싶다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은 물론 무력이 반드시 필요하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정도로 성숙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클라크 씨에게 가르침을 받으려고 한 겁니다."

"클라크 할아버지도 흔쾌히 수락할 거예요."

설령 거부하더라도 내가 부탁할 거다. 장례식 같은 건 뒤로 미루면 되겠지.

겸사겸사 케이트와 바둑도 하고. 나는 뿌듯하기 그지 없는 그녀의 성장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로라의 교육은 케이트 씨가 도맡은 건가요?"

"네. 로라뿐만 아니라 악마 숭배자에게 고통 받았다가 구원받은 자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럼 로라는 케이트 씨로부터 어떤 걸 배웠니?"

나는 기습적으로 로라에게 질문을 날렸다. 그러자 아델리아가 구워준 쿠키를 오물거리던 로라가 화들짝 놀란다.

마치 다람쥐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 같은 모양새여서 절로 흐뭇한 미소가 새어나왔다.

이어서 로라는 쿠키를 우물거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셨어요. 친구한테 폭력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그렇구나."

"그리고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상대는 몬스터들과 악마 숭배자들 뿐이라고 하셨어요."

"··· ···"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나는 로라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튀어나오자 눈을 깜빡거렸다.

저거 어디선가 많은 들어본 말인데. 광신도 하면 바로 떠오르는 캐릭터가 내뱉을 법한 말 아닌가.

이에 다급히 케이트를 쳐다보자 의외로 그녀도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아하니 로라가 잘못 답한 모양이다.

"로라. 그게 아니잖니?"

"아닌가요?"

"그래.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상대는 대화가 불가능한 몬스터, 그리고 완전히 타락한 악마 숭배자들 뿐이란다. 알겠니?"

"명심할게요."

아닌가! 역시 케이트는 케이트였던 건가!

나는 듣기만 해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대화에 헛웃음을 흘렸다.

부화뇌동에 가까운 사고 방식은 고쳐도 저 놈의 광신도적 면모는 절대 고칠 수 없는 듯하다.

그래도 지난번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대화가 불가능한 몬스터라 한 이유는······'

보나마나 클라크 할아버지 때문이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교육은 아무 문제가 없어보이네요. 그러면 케이트 씨는 꾸준히 교육을 하시는 건가요?"

"당분간은 그럴 예정입니다. 하지만 악마 숭배자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 아이작 님의 곁을 지킬 겁니다. 오늘은 루미너스 님이 부탁하셔서 방문한 거고요."

"루미너스 님께서 따로 말씀드린 건 없으신가요?"

"예. 단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신전에 방문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흠."

나는 케이트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그녀는 아직 내가 모라로부터 고행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걸 밝히고 싶지만 케이트가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이건 넘어가야겠네.'

세실리도 신실한 모라의 신자이나 케이트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녀만큼 '광신'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최근 바쁜 일이 많은 것 같으니 이 이야기는 묻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알겠어요. 조만간 찾아뵈려고 했는데 한 번 가야겠네요."

"그럼 언제 방문할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며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죠."

어디 한 번 무슨 말을 하는지나 들어보자.

이리하여 아무런 망설임없이 루미너스의 신전에 도착하고.

[홀로코스트······]

'네?'

[홀로코스트는 언제 등장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루미너스로부터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

[그 전에 네가 잠깐 찾아가야 할 곳이 있거든.]

'찾아가야 할 곳이요? 그게 어디죠?'

[싸가지 없는 놈이 있는 장소란다.]

'?'

전혀 알 수 없는 부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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