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대공황과 달리 이 세상의 대공황의 기간은 불과 반년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족 전쟁 당시에도 터지지 않은, 전대미문의 대사건인지라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종족 전쟁 이후부터 꾸준히 이어오던 공급이 혁명 하나로 박살나고, 그걸 감당하지 못해 많은 것들이 아래로 떨어졌으니.
만약 천천히 내려갔다면 모를까,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락으로 떨어진 탓에 대부분의 나라가 직격탄을 맞았다.
다행히 아이작의 조언 덕분에 마력 기관이 도입되어 해소될 기미가 보였지만 말 그대로 기미만 보이고 있다.
경제를 완전히 박살내는 건 정책 하나로 충분하지만, 박살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눈물 겨운 노력들이 필요했으니.
세계 최초의 공장이 세워졌다지만 효능이 입증되지도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미네르바 제국 차원에서 실시되는 정책들이 유효하다는 뜻이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필요하다고 부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가라고?!"
나이 지긋한 어느 노인이 역정을 낸다. 풍성한 콧수염과 고집스러운 인상이 특징이다.
또한 그가 입은 작업복으로 하여금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노인은 과연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목에 핏대까지 세우는 걸 보면 필히 심상치 않은 일일 터.
"재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장의 효능이 입증된다면 모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 노인 앞에서 장년인이 담담하게 말을 꺼낸다. 노인과 달리 예복까지 말끔히 차려입은, 귀족스러운 면모를 풍기는 남자다.
역정을 노인과 달리 침착한 태도와 표정. 그러면 그럴수록 노인은 더욱 열불이 나는지 버럭 소리쳤다.
"난 내 고향에 있는 제자들에게 자리까지 물려줬소!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뭐가 되겠나!"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공장의 효능이 입증돼야 여러분을 돌려보내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지금까지 했던 일을 꾸준히 하시면 됩니다."
"저딴 철덩어리가 나보다 더 일을 잘할 거라고?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게다가 저 기계가 만들어 낸 실이 우리 것보다 더 좋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대신 빠르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죠. 현 상황에서는 품질이 아닌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귀족 아니, 공무원과 노인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논쟁을 펼쳤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세계 최초의 공장이 세워진 곳. 다시 말해 마력 기관을 도입한 장소다.
그리고 미네르바 제국이 망가진 공급량을 채우기 위해 전국의 숙련공 및 노동자를 모은 곳이기도 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공급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던 장인들을 모은 것이다. 그래야만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마력 기관이 도입되고 공급난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는 이것이고.
"보상은 충분히 치를 거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취직도 국가가 직접 도와줄 거라 말했고요.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귀족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노인에게 항의했다.
위쪽에서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지만, 솔직히 말해 노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인해 황실이 직접 명령했다지만 대부분의 장인 및 노동자들은 기꺼이 응했다.
자신들이 어떻게든 무너져 가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명감'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금전적 '보상'까지 있었으니.
더구나 국가가 직접 시장 경제를 움직이는 거라 실업자로 전락했던 노동자도 고용시키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다른 노동자들은 전부 납득하고 돌아간 상황입니다. 어째서 당신들이 항의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력 기관이 도입되고, 자동화가 가능한 직조기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공장의 효능이 입증되는 순간 관련 노동자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으니까. 물론 다짜고짜 해고시키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는 섬유 산업에만 마력 기관이 도입됐지, 나머지는 여전히 노동자들이 필요했으니.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 마력 기관이 대신하겠으나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정 힘드시다면 다른 노동자처럼 똑같이 일을 하시는 게······"
"우리 보고 저급한 일을 하라고?"
"장인으로서 쌓은 자존심과 자부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발언은 삼가하게!"
"나는 20년 동안 천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 그런데 저딴 철덩어리가 모두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고!"
귀족 남자가 조심스레 다른 의견을 꺼내자 노인을 포함한 다른 숙련공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걸 본 귀족은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억눌렀다. 아예 대놓고 대우 받으며 생활하고 싶다는 티가 난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마력 기관이 도입된 공장의 효능이 입증된다면? 매우 어려웠던 섬유 제작이 쉬워진다면?
숙련공들이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이 물거품으로 변한다. 그냥 기계를 돌리면 천이 알아서 생성되는데 이들을 고용할 필요가 있나?
저래서 반발하는 것이다. 자신이 이룩한 것들이 전부 의미없는 일로 변할까봐. 여태까지 종사해온 직업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한 이들의 항의다.
"······여러분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저도 잘 압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상황에서 무엇을 하셨는지도 잘 알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공장의 효능이 입증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시던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럼 입증되는 순간 버려지는 건가? 사냥의 의무를 다한 개를 버리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라······"
"우리에게 그딴 보상은 필요없소! 돈은 실컷 벌 대로 벌었는데 무슨 돈!"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를 개처럼 사용하다가 팽하기 위해 우리를 모은 거요?"
이제는 황제까지 들먹인다. 귀족은 울컥한 나머지 버럭 소리칠 뻔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숙련공들이 두려워하는 건 일자리도 일자리지만 명예 그 자체다. 그동안 쌓아올린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데 당연한 이야기.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숙련공 같은 일반인은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베리트 황제도 지도자라는 책임감이 강할 뿐이지 하나하나 일일이 신경 쓸 수 없다.
아이작처럼 신에 준하는 명성을 가졌다면 모를까, 숙련공 따위를 황제가 직접 만나주겠나.
하물며 베리트 황제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인지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막강한 권위를 행사한 황제도 개인에 지나지 않으며, 군주제의 명과 암이기도 하다.
'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보내고 싶지만······'
황제, 베리트가 누누이 강조했다. 저쪽에서 무슨 항의를 하더라도 탄압하지 않고 살살 달래주라고.
마키나의 부르주 5세가 그리 하다가 혁명이 발발하고, 왕정이 무너졌지 않은가.
테르스 왕국조차 혁명이 실패로 끝났는데 마키나는 성공했으니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드워프 노동자 즉, 공장들이 결집해서 왕정을 무너뜨렸으니 조심하는 게 당연하다.
감히 황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으니 까라면 까는 거고.
귀족은 속에서 올라오는 열불을 간신히 가라앉힌 후,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이전에 제논이 직접 마력 기관을 도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따질 거면 황제 폐하가 아니라 제논에게 가서 따지십시오."
"윽······"
"··· ···"
가불기 혹은 필살기를 날리자 숙련공들이 난처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나랏님도 욕할 수 있으나 아이작만큼은 주변에 누가 없어도 눈치가 보인다.
무려 신들이 직접 비호까지 내려주는 그인데 자칫하다가 천벌을 맞을 수도 있었으니.
게다가 귀족의 말도 하등 틀린 게 없다. 마력 기관 도입은 아이작이 가장 먼저 제시했지 않은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라는 속담이 아주 잘 어울리는 상황이다.
"시대의 흐름입니다. 시대의 흐름. 여러분만 기계의 등장에 위협을 받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
"다른 숙련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기계가 대신하는 것들이 많아지겠죠. 단지 운이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괜히 역정을 부려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으니."
뼈를 때리다 못해 산산조각내는 팩트폭격이 귀족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숙련공들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맞딱뜨려야 된다는 사실에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몇 명은 얼굴을 붉히며 분노를, 몇 명은 씁쓸한 현실에 허무함을, 몇 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던함을.
숙련공 이상의 일을 해내는 '마력 기관' 및 '기계'의 등장은 혁신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공장의 효능이 입증되기까지는 최소 일주일이 걸릴 겁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하던 일을 계속 하시다가 효력이 입증되는 순간 돌아가면 됩니다.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일자리를 찾아드리고, 보상이 필요하다면 보상을 말하시면 됩니다."
"··· ···"
"그럼."
귀족은 할 말을 모두 끝내고 본인의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노인 숙련공은 허, 하며 허탈감을 표했다.
"······30년 넘게 쌓은 기술들이 내 머리 위에서 무너지는군."
"··· ···"
"일단 돌아가세. 돌아가서 생각을 해야겠어."
노인의 말에 따라 숙련공들은 힘없이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동하면서 바로 옆에는 에인스가 직접 설치한 마력 기관, 그리고 그 기관을 통해 움직이는 직조기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이 기계가 만든 천은 무려 숙련공들의 생산량보다 3배는 한참 넘어서는, 실로 압도적인 양이다.
심지어 하나를 기준으로 삼은 거다. 앞으로도 쭉 기계들이 다양한 천을 생산할 터.
숙련공들은 저마다 착잡한 눈으로 기계를 바라보다가 휴게실로 돌아갔다.
마키나의 혁명에서 느낀 바가 있었는지 미네르바 제국은 노동자들을 우대해줬다.
덕분에 휴게실이 넓은 건 물론이고 나름 편의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저딴 철덩어리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니······!!"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젊어보이는 숙련공 한 명이 분하다는 목소리로 한탄했다.
다른 숙련공들이 저마다 자글자글한 주름을 갖고 있는 반면, 이 숙련공은 '장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일 터.
혹은 장인 못지 않은 실력을 갖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물론 기계 앞에서는 얄짤 없었다.
"그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소! 우리는 단지 직조라는 직업이 사라지는 게 두려울 뿐인데!"
젊은 직조공의 호소에 다른 장인들도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들은 사실 돈이고 명예고 필요없다. 이미 둘 다 가지고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마력 기관의 등장은 직조공이라는 직업 자체를 흔들리게 만들었다.
아니, 흔들리는 걸 넘어서서 실시간으로 부숴버리고 있다. 직업뿐만이 아니라 명예까지 모두.
수십 년 간 직조 기술을 갈고 닦았던 장인들에게는 이른바 '현타'가 강하게 몰아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직업은 물론 쌓았던 것들이······"
젊은 직조공이 노인에게 간청했다. 그에 다른 직조공들도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노인은 숙련공들 사이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데다가 경력도 높다. 자연스레 리더격의 역할을 맡은 거고.
하지만 노인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뒤이어 그는 콧수염을 살살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애석하지만 대공황에는 우리보다 저 기계가 필요할 거요. 애석하게도 말이지."
"그런······"
"저 망할 기계 하나가 생산하는 천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우리가 하루종일 일한 양보다 더 많소. 당장 오늘 하루만 해도 말이지."
슬프게도 이게 현실이다. 직조기가 생산하는 천의 양은 직조공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럼에도 효능을 입증하기 위해 며칠의 간격을 둔 이유는 별거 없다. 중간에 고장이 잘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잔고장이 많다면 미네르바 제국 입자에서도 상당히 곤란스러워지니 우선은 지켜보자는 입장인 것이다.
여기에 '가성비'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공급이 후달려 물가가 폭등하는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으니.
대량 생산. 더도 말고 대량 생산 하나만 목표치로 삼고 있는 상황이다.
"마음 같아서는 저 기계를 때려부수고 싶지만······ 비겁하게도 난 목숨이 아깝소. 그대들도 똑같지 않소?"
"··· ···"
"··· ···"
노인의 물음에 열정적이었던 젊은 직조공을 포함한 모든 이가 침묵했다.
공장이 개인의 소유였다면 기계를 부수고 쉬쉬했겠지만, 무려 국가 소유다. 황제의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황제의 물건을 숙련공 따위가 손상을 입힌다?
곧바로 교수대로 끌려가서 밧줄에 매달리겠지. 뻔하디 뻔한 결말이다.
"······시위라도 할까요? 공장들처럼?"
누군가 소심하게 건의했지만.
"돌 맞고 싶으면 그리 하시오. 빌어먹게도 대우 하나는 끝내주게 해줬으니 분위기만 안 좋아질 거요."
"평생 받아본 대우보다 훨씬 좋긴 했지······"
"난 생전 처음으로 귀족들이 먹는 음식을 먹었어."
곧바로 묵살당했다.
미네르바 제국은 마키나에서 터진 혁명을 반면교사 삼아 노동자들을 우대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사명감'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마련하기까지. 철저하다면 철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계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시위를 하는 순간 질질 끌려갈 것이다.
끌려갈 때 따가운 눈총을 받는 건 덤이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이렇듯 모두가 낙담하고 있을 때, 가장 열정적이었던 젊은 숙련공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하나 제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 젊은이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시선이 집중되자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기계를 몰래 망가뜨리고 악마 숭배자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흠?"
"왜, 악마 숭배자라면 미친 짓을 하는 놈들이잖아요?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는 걸 막기 위해 인쇄소 자폭 테러까지 했던 놈들인데."
"······자세히 설명해보게."
노인이 흥미가 동한다는 듯이 묻자 젊은 숙련공이 좀 더 상세한 계획을 줄줄 털어놓았다.
다른 숙련공들도 마찬가지. 기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일자리를 잃을 염려도 없다.
공장이 국가 소유라는 것도 괜찮다. 만인의 적이자 공공의 악, '악마 숭배자'가 있지 않은가.
전과가 아주 화려하다 못해 '아름다운' 놈들이라 무슨 짓을 해도 떠넘기기 편하다.
"놈들이 '기계'를 싫어한다는 이미지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제국도 울며 겨자먹기로 저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겠죠. 괜찮지 않습니까?"
"호오······ 괜찮은데?"
"한 번 시도할 가치는 있겠소."
"혹시 모르니 심증조차 잡지 못하도록 해야겠군. 내일 의견을 모아 동의했다고 전달하겠네."
판타지판 러다이트 운동의 시작이었다.
******
러다이트 운동이 터지고 사흘 후.
[속보! 공장에서 일을 하던 직조공. 공장에 목이 매달린 채로 발견돼······]
[직조공의 이름은 에리쉬 판. 30년 간 직조술을 연마한 장인으로, 평소 직조공들의 귀감이 되었던 자이며······]
[제국은 신상 파악에 서둘러 나섰다. 최근 악마 숭배자가 저지른 기계 파괴 공작과 연관이 있는지 파악하는 중.]
진짜 악마 숭배자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