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븐하임으로 향하는 길은 빨랐다. 아르웬에게 연락을 할 수 있던 것도 세실리의 도움을 통했던 거라 중간에 막히는 것도 없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탓에 눈총을 받긴 했다. 특히 마리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하더라.
면회 당시에도 마리를 대동하지 않은데다가 이번 알븐하임도 아리엘만 데려가는 것이다. 당연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지.
그래서 가기 전에 사랑을 실컷 퍼부어주고 떠났다. 어떤 형태의 사랑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덕분에 몸 곳곳에 키스 마크는 물론이고 선명한 치아 자국까지 남았다. 아르웬이 이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해지네.
'갔다 오고 나서는 체리랑 대화도 해야겠지.'
알븐하임으로 가는 것만으로 일은 끝나지 않는다. 동업자이자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후배, 체리가 있다.
종이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피와 강철마저 발간이 힘든데 그녀의 작품은 오죽하겠나. 사실상 그녀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우왕좌왕하느라 유일한 동업자를 케어하지 못했다. 게다가 모두 알다시피 체리는 나에게 과도한 의존증이 있는 상황.
이것도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지. 체리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하겠다.
'일단 편지는 줬으니······'
떠나기 하루 전 그동안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변명처럼 들르겠지만 여러모로 바쁜 일이 많았다고, 알븐하임에 갔다 오고 나서 얘기하자고 편지를 건네줬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에 그녀로부터 답장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선배님은 저와 달리 바쁜 몸이니 이해할 수 있어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저 문장이 정말 신경 쓰였다. 전시회 당시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매달리던 애가 맞나?
이건 분명 무언가가 있다. 체리의 성격상 짧은 답장이 오는 것도 이상한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설마 그녀의 아버지, 레티시 백작이 또다시 패악질을 부르는 건가 싶었으나 그럴 확률은 적다.
어쩌면 체리가 나를 배려하기 위해 저런 말을 덧붙인 것일 수도 있겠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여태까지 체리가 나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지만 한 번 바닥을 찍었던 자존감은 복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핵분열마냥 궁합이 좋은 케이트가 있다면 모를까, 체리 혼자만 있다면 어두컴컴한 분위기만 맴돌 뿐이다.
'······내가 접근한다면 낌새를 느낄지도 몰라.'
이럴 때일수록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시켜 천천히 뒤를 캐야함이 옳다.
만약 누군가 체리와 나와의 연결 고리를 눈치채고 그걸 이용하는 거라면, 그녀의 성격상 꼭꼭 숨기고 있을 테니까.
"체리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응. 얘가 이럴 답장을 할 애가 아니라서. 마리 너도 느끼고 있지?"
"흠······ 확실히 불안하긴 하네. 알았어. 세실리한테도 말해놓을게."
전에 체리와 만남을 가졌던 마리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내 부탁을 기꺼이 들어줬다.
다른 사람이라면 귀찮았겠지만 체리라서 허락할 수 있다고. 너무 불쌍해서 뭐라도 해줘야 될 것 같다나 뭐라나.
"그럼 가기 전에 한 입!"
"아야."
대신 그 보답으로 뺨 깨물기형에 당했지만. 이제는 덤덤하다.
이후로 세실리의 도움을 통해 알븐하임으로 곧바로 넘어갔다. 참고로 공식적으로 방문한 게 아닌, 비공식이었기에 검문소를 거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텔레포트로 넘어갔느냐. 알븐하임의 여왕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만이 알고 있는 텔레포트 좌표가 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좌표였기에 세실리에게 알려줘도 크게 상관없었다.
더구나 좌표 자체도 암호처럼 꼬여있는 탓에 세실리조차 발동하는 데에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확실히 엘프는 이런 분야에 능통하구나. 우리는 아직 간단한 것밖에 못 하는데······"
이걸 알게 된 세실리가 신기해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엘프와 쌍벽을 이루는 마족이라지만 그 뿌리가 튼튼하지 못했다.
알븐하임은 최초의 문명을 세웠다는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초 학문이 매우 탄탄하다.
반면 마족은 반강제적으로 고립된 탓에 그렇지 못했으며 화력만 강할 뿐, 엘프의 마법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많았다.
"학문은 원래 서로 교류하면서 발전하는 거잖아. 헬리움도 개방했으니 서서히 발전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그리 말하니 위로가 되네."
고인물은 썩는다는 말처럼 학문도 다를 바가 없다. 예를 들어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분 논쟁으로 영국이 고립된 적이 있었다.
그 고립 하나로 영국의 수학계가 대륙에 비해 100년 정도 뒤떨어졌다고 했으니 헬리움은 오죽할까.
마족이 엘프처럼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멸망했을 거다.
"왔구나. 그대여. 기다리고 있었다."
세실리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청아하면서도 말끔한 소녀의 목소리.
이에 고개를 돌리자 아르웬이 반갑다는 미소를 띤 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하체의 굴곡을 강조시키는 은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 풍만한 가슴을 강조시키기 위해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와 대조적이다.
"앗! 하얀 엄마다!"
그때 세실리의 가슴을 푹신한 베개 삼아 기대고 있던 아리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이윽고 품에서 빠져나온 그녀가 날개짓을 하며 힘차게 날아가더니 아르웬을 꼭 껴안았다. 아르웬도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띠며 반겨줬다.
······잠깐. 뭐? 날개짓을 하면서 날아가?
"헤헤."
"오랜만이구나, 아리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응! 응!"
모녀가 서로 해후를 풀고 있을 때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차마 감출 수 없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아리엘이 날아갔다.
마법을 이용한 것도 아니고 새처럼 날개짓을 하면서 말이다. 반투명한 날개가 펄럭였던 게 생생히 보였다.
"아리엘이 날 수도 있었어?"
"······나도 처음 봐."
세실리도 나처럼 처음 목격하는 건지 놀란 투로 질문했다. 그러나 나도 처음 보는 거라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날 수 있던 건지, 아니면 최근에 부쩍 성장한 것 때문인지 도통 모르겠다.
저택에서 잠시 지낼 때도 아리엘은 두 발로 아장아장 걸어다녔지, 날개를 펴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저택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귀와 날개를 숨기고 다녔다. 설사 들켜도 머나먼 친척이라 둘러대면 끝이었으니까.
물론 저 반투명한 날개를 보듯이 옷 안에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항상 옷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러나 어머니가 교육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숨기는 게 가능하다고. 아마 그거 때문에 날지 못했던 게 아닐까.
'······나는 못난 놈이구나. 아니, 못난 걸 넘어 그냥 병신이었네.'
요즘 들어 죄책감이 드는 상황이 많아진 것 같다. 아리엘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냥 내 안위만 걱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뭐가 무섭다고 꽁꽁 숨기고 있다가 아리엘의 진짜 성장도 몰랐나. 이건 무책임한 게 아니라 이기적이다.
내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아리엘은 아르웬의 품에 안겨 연신 얼굴을 비벼댔다.
아르웬도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귀여웠는지 빨간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엄마. 엄마."
"그래. 엄마 여기 있단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니?"
"헤헤."
아르웬의 다정한 물음에 웃기만 하는 작은 천사. 유독 아르웬을 잘 따르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태어나고 나서 처음으로 본 사람이 나와 아르웬이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연인들도 잘 따르긴 하지만 아르웬에 비할 바는 아니다.
"흐응. 조금 질투가 나네. 뭔가 진 기분인걸?"
세실리도 묘한 감정이 이는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자기 가슴을 쿠션마냥 쓴 아리엘이니 여러모로 질투가 날 상황이다.
이에 나는 피식거리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애한테 이상한 감정을 가지는 건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그냥 하루 빨리 마리랑 네가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나도 아리엘처럼 귀여운 아이를 가질 텐데."
"··· ···"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은근슬쩍 아랫배에 손을 갖다 대는 세실리. 나는 요망하기 그지 없는 그녀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도 화끈거리는 거지만 아리엘이 이 장면을 못 봐서 다행이다.
만약 그녀가 세실리의 속마음까지 읽었다면 참사가 일어났겠지. 세실리는 여러모로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셋이서 오붓하게 놀아~ 대신 너무 질펀하게 놀지는 말고."
세실리는 끝까지 섹드립을 날리며 떠나갔다.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훠이~ 훠이~ 우리 아리엘 잘 난다~"
"꺄하하하!"
이제는 아예 아리엘을 던졌다 받았다하기 시작한다. 저거 보통 아빠가 하는 행동이지 않나.
또한 아까 내가 본 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듯, 아리엘은 공중에 붕 뜨는 순간 날개를 파닥거리며 천천히 하강했다.
나는 정겹다 못해 흥겨운 그들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가 조용히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냈어? 어디 골치 아픈 건 없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최근 대공황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만 전처럼 힘든 건 없으니. 제일 바쁜 건 미네르바 제국이지 않느냐?"
"······그건 그렇지."
알븐하임은 미네르바 제국발 대공황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나라다.
피해를 안 입었다고 할 수 없지만 경제 자체가 중단된 미네르바 제국보다는 훨씬 낫다.
풍요의 은혜를 입은 땅이라 농작물 수확도 큰 문제가 없었으며 오히려 수출을 하는 중이다.
"우웅······"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을 때, 아르웬에게 안겨있던 아리엘이 입에 손가락을 넣으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보아하니 아르웬의 속마음을 읽은 듯했는데, 나와 어머니로부터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함부로 밝히지 말라고 교육했기에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고행을 받기 전 같았으면 모른 척하고 넘어갔겠지. 하지만 이제는 곤란한 점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해결하고 싶다.
아르웬에게는 미안하긴 해도 책임을 어느 정도 짊어지고 싶었다.
"아리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말해도 돼?"
"안 돼! 절대 안 돼! 말하지 마렴!"
아리엘을 살살 유도하고 있을 때 아르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황함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라 더욱 티가 나는데 삐죽 솟아난 귀까지 빨갛게 물들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정상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건 알겠다.
아리엘은 과격한 그녀의 반응을 보며 황금색 눈을 깜빡거리더니 애 특유의 순수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말하지 말라는데?"
"······그럼 안 해도 돼."
"휴우······"
내가 얼떨떨하게 안 해도 된다고 답하자 아르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까지 감으며 안도할 정도일까.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서 입모양으로 아리엘에게 전했다.
'나중에 아빠한테 말해줘.'
입모양으로 말해도 명석하게 알아들었는지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운 고민이라도 고민은 고민.
가급적이면 그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다. 특히나 아르웬은 다른 사람과 달리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이제 주변인들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 들어주고 싶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게 아니라 책임을 짊어지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큼. 큼. 그럼 곧바로 히르트 님을 뵈러 갈 것이냐? 세계수로 향하는 길은 이미 신도들에게 말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급할 건 없지만······ 천천히 가면서 이야기하자. 그러면 될 것 같아."
세계수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웅장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거목만이 앞을 가득 채웠으며 그 주변은 황금빛 들판으로 에워싸여 있다.
아르웬도 나와 대화하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붉어진 귀는 여전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가 앞장 서겠다고 하면서 자연스레 아리엘을 넘겨받았다. 그러자 내 품에 안겼던 아리엘이 꼬물꼬물거리며 자리를 이동했다.
아리엘이 안착한 곳은 다름아닌 내 등. 정확히는 목마를 태워줬다.
여태까지 느낀 거지만 확실히 몸무게가 늘어난 게 선명히 느껴진다. 히르트 님은 사랑만 주면 된다고 했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빠. 지금 말할까?
그때 아리엘이 소곤소곤거리며 나에게 속삭였다. 방금 전 내가 입모양으로 말했던 걸 알려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나는 그 물음을 듣고 앞서 나가는 아르웬을 쳐다봤다. 착 달라붙는 드레스라서 그런지 아까 전보다 하반신이 더 눈에 띈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음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으나 아리엘도 있고 하니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그동안 힘들었어. 한 가지 일을 해결하니까 대공황이 덮치더라. 개간을 할 때 꼰대들이 얼마나 항의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음심은커녕 죄책감만 쌓여갔다. 나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어서 격한 반응을 보였던 거구······
-그러니까 그만큼 풀어줘야지. 그래야 공평하니까. 다른 사람은 실컷 했을 거 아냐. 나쁜 놈.
······나가 아니라 역시는 역시라고.
-지난번에도 못했던 것까지 이자로 칠 거야. 다 풀어버릴 거라고. 이게 공평한 거겠지?
공산주의 에로프 어디 가지 않는다. 아니지, 이건 평등주의라고 해야 되나.
나는 아리엘로부터 전달받은 속마음에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애 앞에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음? 안 따라오고 뭐하는 것이냐?"
내가 속마음을 전달 받았다는 것도 모르는지 아르웬이 순수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순수함 속에 숨겨져 있는 음험함, 그리고 음탕함을 꿰뚫어 보고 피식거렸다.
"아르웬."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냐."
때로는 밝히지 못할 고민도 있는 법.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르웬에 모른 척해줬다.
-더 있는데 말할까?
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한 거지? 엘프여서 사고 회로가 인간보다 빠른 건가?
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릴 뻔하다가 간신히 억눌렀다.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니. 괜찮아.'
그때 조금 더 들었어야 됐다.
'전부 싹 잊으렴. 아리엘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니까.'
그래야 밤에 받을 '선물'에 대한 충격이 덜 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