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라는 건 참 무섭다. 깨끗한 호수에 잉크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따라가게 되니까.
하지만 유행은 짧고 굵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문화로 분류하지 않고 하위격으로 따로 놓는다.
만약 그 유행이 오랫동안 이어진다면 문화로 남을 수도 있겠지. 그럴 확률이 몹시 희박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집필한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도 이와 비슷하다. 제논 일대기부터 이어져 온 파급력은 꾸준히 진행되는 중이다.
제논 일대기로 인해 번진 유행이라 하면 단연코 마족의 인지도 상승이다.
악마라 취급받던 마족이 제논 일대기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들의 진면목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논 일대기에 묘사된 듯이 인내심이 매우 강하며 순정남 혹은 순정녀로서의 이미지가 박혔으니.
특히 결말부에 보여준 진의 희생으로 그 절정을 찍었다.
유행처럼 짧고 굵은 게 지나간 게 아닌, 마족이라는 종족 자체가 인류로 편입된 것이다.
이때문인지 몰라도 몇몇 유행이 생겼는데 다름아닌 마족과 교제하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는 것.
전까지만 해도 접촉조차 꺼리던 사람들인데 제논 일대기 이후 유행처럼 번졌다.
마족들도 사람과의 교류가 늘어나서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정~말 희박한 확률로 유행을 넘어 문화로 편승되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 극소수다.
만약 제논 일대기의 인기가 시들시들했다면 유행마저도 불가능했겠지.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당장 칫솔 수염과 카이저 수염이 유행하는 꼬라지를 봐라.
제논 일대기 집필 당시 유행했던 게 마족의 인지도라면, 피와 강철은 유행할 게 많아도 너무 많다.
그 절정이 바로 마키나, 정확히는 마키나의 혁명이고. 지구에도 없던 드워프식 공산주의가 새로 탄생했다.
'유행이라 하니까 확 와닿네.'
아버지와 함께 면회를 갔다가 저택으로 돌아온 지금. 나는 침대에 누워 그때 일을 상기했다.
부대 막사에서 들었던 나치식 경례. 그 경례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나치식 경례는 원래 귀족들이 사용하던 인사법이다. 그 인사법이 이탈리아를 거치고 나치 독일로 들어선 거다.
그걸 미대 낙제생이 써서 문제였지. 웃긴 건 정작 본인도 검소한 면이 있어 나치식 경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상이라고 다르지 않아.'
드워프에게 공산주의가 퍼졌을 때는 얼탱이가 없었을 뿐이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부르주 5세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업보이기도 하고 소련과 완전히 똑같은 체제도 아니었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드워프주의가 새로 탄생한 거다. 드워프에게만 갖고 있는 종족 특징을 잘 활용한 사상.
이렇듯 내가 집필한 책의 특정 부분이 유행으로 번지고, 더 나아가 문화에 깊숙히 침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드워프식 공산주의처럼 이롭게 변한다면 모를까, 민족자결주의처럼 골칫덩어리로 변할 수도 있다.
파시즘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해악성이 드러나 괜찮아도 다른 부분이 문제다.
'하일 제논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천만다행인 건 그 인사를 면전에서 듣지 않았다는 것.
시간상의 문제로 막사만 구경하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데이브와 니콜이 부조리를 당하지 않도록 최고참 몇 명에게 사인을 해줬다.
그러더니 아예 고개를 넙죽 숙이며 잘 챙기겠다고 하더라. 혹여 하일 제논이라 할까봐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그러진 없었다.
'유행할만한 게 또 뭐가 있을까?'
돌아온 이후에는 앞으로 어떤 게 유행할지 예측했다. 정확히는 '문화'로 변질될 수 있는 부분이다.
문화로 변할만한 것 중에 하나는 단연코 사상이다. 스타비르크에 민족자결주의가 번진다고 생각해보자.
미네르바 제국은 어떻게든 진압할 가능성이 높고 자연히 서로 무력 충돌을 빚겠지.
그렇게 된다면 스타비르크는 진정한 의미의 '민족성'을 갖게 될 것이다. 그 민족성은 문화가 되어 더욱 결집시킬 터.
'솔직히 유행처럼 따라 하는 건 괜찮아.'
지구, 특히 유럽에서 나치식 경례를 하거나 나치를 코스프레했다가는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더욱이 독일이나 나치에게 호되게 당한 러시아에서 그런 행위를 벌인다?
벌금을 넘어 적당한 교화(구타) 이후 감옥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만큼 민감하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다르다. 종족전쟁이 터졌지만 2차 세계대전만큼 규모가 크지 않으며 피해도 적다.
물론 수인이 인간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적이 있으나 홀로코스트에 비할 바는 안 된다.
그러니 누군가 나치식 경례를 해도 너 뭐하냐? 라는 식으로 낄낄 웃어넘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2차 세계대전은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니까.
부끄러워할지언정 인상을 팍- 쓰며 제지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쁜 문화가 될 여지를 차단해야겠지.'
내가 원인이 된 나쁜 문화는 이미 한 번 체험했다. 어머니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던 진의 장례식.
작가인 내 입장에서는 단지 작품성을 망치는 생떼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도로 내 작품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몰입은 둘째치고 나쁜 문화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 않는가.
지금도 틀 자체는 비슷하다. 예를 들면 미국판 문화대혁명이라 칭해지는 '매카시즘'을 꼽을 수 있다.
공산주의를 배제하겠다며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지만 실상은 미국의 국력을 크게 깎아먹은 사건.
갑자기 웬 매카시즘이라 할 수 있는데, 매카시즘 자체가 냉전 시기에 공산주의를 '이용'한 거다. 다시 말하지만 배제가 아니라 이용이다.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었기에 명분이 충분했으나 그 과정이 너무나도 가혹했다. 단순한 마녀 사냥에 지나지 않았다.
뭐, 가끔 가다가 진짜로 간첩이 있었다지만 숙청된 사람이 너무 많은 바람에 얻어걸린 거고.
'딱 유행까지. 유행으로만 남아야 돼.'
제논 일대기의 등장인물들을 사칭한 사람이 실제로 등장한 것처럼, 그걸 역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분명 나타날 것이다.
저 새끼는 미래의 히틀러가 될 놈이다! 저 놈은 스탈린처럼 인간 백정이 될 놈이다! 저 놈은 파시즘을 신봉하는 놈이다! 등등.
너무 막나간 것 같기는 해도 위상이 위상이다 보니 막나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발발할 수 있는 사건이다.
유행을 넘어 문화로 변모하고, 그 문화로 인해 피해가 애꿎은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내 업보라면 업보겠지.
'억울하게 마녀 사냥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지. 만약 그런 사람이 등장한다면 내가 직접 구해주고.'
여기서 본인을 진심으로 히틀러라 믿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건 좀 골치 아프겠네. 이건 그냥 그 사람의 업보라고 하자.
나는 내가 뿌려놓은 씨앗들을 골똘히 떠올리면서 노트에다가 정리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일단 대충 골라놓을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정리를 한다고 해서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 어떤 형태로 발아할지 아무도 모른다.
원래라면 신들에게 물어보면 될 테지만 아무래도 최근 그 일로 인해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나 스스로 일들을 해결하고, 신성력이 모자랄 때만 교단을 찾아갈 계획이다.
똑똑똑- 덜컥-
노트에다가 정리를 하는 도중에 누군가 침실로 들어왔다. 급한 일인지 몰라도 노크를 하자마자 열어버렸다.
이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리니 이게 웬 걸. 아리엘이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돋아난 새싹이 살짝 기울어지고, 반만 드러난 얼굴에는 호기심이 듬뿍 담겨있었다.
음. 저러니까 정말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네. 나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니, 아리엘? 아빠한테 할 말 있어?"
"히히히."
내가 말하자마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오도도 달려오는 아리엘. 저러다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철푸덕-
"아콩!"
진짜로 넘어졌네. 나는 발이 꼬인 바람에 넘어진 아리엘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낑낑거리며 일어나는 그녀의 무릎을 털어주고 번쩍 안아들었다.
확실히 조금씩 성장은 하는지 전보다 약간은 더 무거워진 느낌이다. 머리 위의 새싹도 살짝 자란 것 같고.
"괜찮니?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아프지는 않아?"
"안 아파. 그런데 아빠."
"응?"
"나 엄마 보고 싶어."
내 품에 안긴 채 똘망똘망한 눈으로 요구하는 아리엘. 나와 똑 빼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 요구를 듣고 잠깐 떨떠름해졌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떤 엄마?"
엄마가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애매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레오나에게도 엄마라 부르지 않았던가.
아리엘은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얀 엄마!"
"······하얀 엄마?"
하얀색이 특징인 사람은 마리와 아르웬 둘밖에 없는데.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아리엘이 자기 귀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아리엘처럼 귀가 긴 엄마! 엄마 보고 싶어!"
"아. 아르웬?"
"응!"
내 말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하얗고 귀가 긴 엄마는 아르웬인 모양이다.
아리엘이 기억을 못하는 건 아니다. 원래 아이는 창의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특징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아델리아는 눈동자가 하늘색이라 하늘 엄마라 부르고, 세실리는 푹신하고 뿔 달린 엄마라고 부른다.
"아르웬은 갑자기 왜 보고 싶어?"
머지않아 알븐하임으로 갈 예정이긴 했어도 아리엘이 보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다.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나 싶어서 물어보니 그녀가 특유의 힘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엄마 보고 싶어!"
"······하긴. 한창 엄마 보고 싶을 나이지."
아무래도 태어나자마자 마주한 사람이 아르웬이라 그런 모양이다. 겨울 방학 이후로 못 만난 지 꽤 오래 됐으니 보고 싶을 만하지.
나는 피식거리며 웃었다가 머릿속으로 일정을 떠올렸다. 피와 강철 10권을 발매했으니 11권을 내면 되는데, 아직 공급량이 부족해서 시간이 필요하다.
머스크에게 들어보니 인쇄소에 마력 기관을 도입시킬 예정이라고. 그러나 종이 같은 경우는 원자재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나가 친히 나섰다. 종이 공급을 위해 수많은 실업자들을 그곳으로 보낼 거라고.
다른 작품이라면 몰라도 피와 강철은 검증된 베스트셀러였으니 임금을 빵빵하게 줘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가능하면 히르트 님을 뵙고 싶다. 모라로부터 고행을 겪고 있을 때 그녀가 뒤늦게 알았다는 식으로 끌고 갔으니.
또한 모라의 손을 잡았던 손에서 발견한 검은색 구슬. 이 구슬의 정체도 묻고 싶었다.
여러모로 알븐하임에서 할 일이 많다. 그동안 반강제적으로 독수공방을 했던 아르웬도 달래줘야 하고.
"그래. 알았어. 언제 가고 싶니?"
"아리엘은 빨리 가고 싶어."
"녀석도 참."
나는 나와 닮은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며 애정을 표현했다.
그녀도 독심술을 통해 내 마음을 깨달았는지 가슴에 자기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오랜만에 시리스 씨를 불러야겠네.'
시리스를 소환하기 위한 소환지는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걸 통해 시리스를 소환한 후, 알븐하임으로 향하면 될 터.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내 행방을 알려주는 건 잊지 않았다. 이건 조만간 기숙사로 돌아가 말할 예정이다.
"아빠. 아빠."
"응? 왜 그러니?"
"그냥 불렀어. 헤헷."
일단 지금은 아리엘을 귀여워해주자.
******
[······해서, 곧 있으면 알븐하임으로 갈 예정이야. 대신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개인 방문이니 주변 사람에게만 알려줘. 알겠지?]
"알겠다. 부담 가지지 말고 오거라."
[고마워. 챙겨갈 건 있어?]
"없느니라. 나는 그대만 오면 충분하니."
[알았어. 사흘 내로 갈게.]
뚝-
국가 지도자 사이에서나 사용되는 통신 구슬의 빛이 점차 사그라든다. 아르웬은 빛이 완전히 꺼진 구슬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온단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가.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근심 걱정이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다.
"하아······"
눈을 조용히 감고 편안하게 등을 기댄다. 오늘따라 의자가 더 푹신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최근 대공황으로 인해 업무량이 폭증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대공황으로 직격탄을 맞은 나라가 대부분이나 알븐하임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여왕으로의 즉위 이후 주변국과 교류를 시작했지만, 원로원의 반대 때문에 큰 축을 담당하지 못했으니까.
지금도 식량 문제로 인해 개간을 해야 되는 땅이 늘어났을 뿐, 공급량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엘프는 마법을 손발처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마력 기관만큼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아이작도 대공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마력 기관이라 언급했다. 그만큼 마력 기관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일 터.
자국민들도 무려 아이작이 그리 말했으니 다들 심도 깊게 파악하는 중이다. 비록 설계도가 아직 알븐하임으로 넘어오지 못했지만 조만간이다.
'당분간은 일 생각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구나.'
물론 이것도 아이작이 오는 순간 다 사라질 생각들이다. 하루종일 아이작 생각만 하면 된다.
무엇보다 한 가지. 아르웬은 지금까지 꾸준히 준비 중이었던 '선물'을 떠올렸다.
아이작을 위한 선물이자 피와 강철 속에 등장한 복장을 모티브로 한 의복. 그 의복을 보자마자 이거다! 라고 생각했지 않았는가.
그 복장을 받고 기뻐할 아이작을 상상하니 온 몸이 저절로 떨리는 기분이다;.
'그리고 밤에는······ 으히히.'
다른 의미로 떨리긴 했다. 아르웬은 선물을 받은 아이작과 이후의 일을 상상했다.
선물을 받은 아이작이 감동한 나머지 하루종일 자신을 탐한다. 첫날밤 못지 않게 엉망진창으로 당하면서 쾌락을 만끽하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짜릿한 계획인가! 상상만 하는데도 벌써부터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다.
겨울 방학 당시 바둑에 푹 빠져버린데다가 레오나에게 양보하느라 한 번도 못했으니 쌓일대로 쌓인 상태.
엘프의 전통에 따라 의식마냥 준비하는 것? 그 날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르웬은 헤픈 웃음을 지으며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갔다.
그 선물이 아이작에게 다른 의미의 감동을 준다는 걸 생각치도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