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15화 (516/763)

군대는 허가만 내려진다면 부대를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관계자라면 모를까, 지휘통제실이 존재하는 막사 안까지는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풍경을 둘러보거나 px에서 물건을 싸게 사는 편이다.

물론 예비역 장성, 그것도 토대를 마련한 영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예언자라 추앙받는 예언자까지.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 선에서 전부 출입이 가능하다. 자그마치 현 군단장과 함께 기사단의 토대를 마련한 분인데 그 누가 이견을 달겠나.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기사단 입장에서는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이 날 수도 있다.

내 한 마디 한 마디로 인해 세상이 오락가락하는데 무언가 어필할 요소가 필요하겠지.

덕분에 나는 데이브와 니콜의 안내에 따라 부대 이곳 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아, 당연하지만 근무지는 절~대로 못 간다.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데다가 누구 하나 챙길 여력도 없는 곳이니까.

"부대에는 기사만 있는 게 아니지?"

"물론이지. 아까 면회장이 엄청 따뜻했잖아? 여긴 하루라도 난방이 돌지 않으면 모닥불밖에 답이 없어서 설비관리사는 필수야. 밖이 워낙 추운 바람에 냉장고는 필요 없고."

"조리병은? 아까 그 아저씨처럼 외부에서 계약하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기사마다 개인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미네르바 제국이 워낙 넓은 데다가 문화도 제각기거든."

"신기하네."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대상에 비해 상당히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진보적이다.

병사마다 주어지는 주방이라니. 이건 전생에서도 상상치 못할 시설이다.

바꿔 말하자면 네이비 기사단의 발언권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자칫하다 야만수인이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제국은 난리가 날 테니까.

"이상한 요리했다가 태워먹은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

"응. 지난번 굴트 씨가 튀김 먹고 싶다고 고기를 넣었다가 폭발했어. 그때 당분간 튀김은 못 만들도록 조치했었나?"

"아마 그랬을 걸? 난 처음에 그거 듣고 화약이 터졌나 싶었다니까."

군대식 이야기에 군대식 헬피엔딩······ 까지는 아니다. 대한민국이었다면 주방을 한 달간 폐쇄했겠지.

그리고 튀김은 조리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위험 요소가 상당히 많다.

물기가 많은 음식을 넣으면 터지고, 떡을 넣으면 터지고, 하여튼 이상한 걸 조금이라도 넣으면 다 터진다.

하지만 튀김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이 빵빵하다는 뜻이다. 냉동이라면 몰라도 튀김은 어지간해서는 꿈도 못 꾸는 음식이다.

'기름 엄청 비싸지 않나?'

무엇보다 기름은 엄청 비싸다. 아니, 비싸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미친듯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식용유의 대량생산은 190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지금은 오죽할까.

언밸런스한 발전도 덕분에 요식업이 발달되었다지만 튀김이 있다는 것부터가 신선하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이 따로 있을 수도 있으니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 사람 다치진 않았어?"

"폭발하는 순간에 마나를 둘러서 화상은 피했어. 재능 낭비지."

"반응 속도 하나는 뛰어난 분이니까."

이후로 데이브와 니콜은 조리병이라는 병과는 따로 없으며, 네이비 기사단 자체가 전투에만 치중된 기사단이라고 한다.

대신 낙오되거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 '생존술'을 알려준다고.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만큼은 철저히 교육한다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은퇴를 하고 나서 야만수인과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거의 없었지만 그들이 먼저 습격하지 않았을 뿐이다.

특히 정찰을 가는 인원들이 매우 위험한데, 가끔 가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오는 부대원들이 많다고.

"그래도 아버지 때보다는 약과지. 야만수인도 야만수인이지만 가끔 엘프 정찰대가 침범한 경우도 있었거든."

"아. 들은 적 있어. 그래도 지금은 나아졌지 않아?"

"글쎄다. 우리가 발견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어서. 그래도 알븐하임의 여왕이 너와 가까우니까 상대적으로 덜하지 싶네."

미네르바 제국은 수많은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알븐하임이다.

종족 전쟁 당시의 인간 연합이 미네르바 제국으로 바뀌었으니 어떤 관계인지 대충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르웬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시시때때로 도발을 진행했으며 북부에도 엘프 정찰대가 자주 등장했다.

알븐하임 입장에서 미네르바 제국이 북부 문제로 골골거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전출을 오고 나서 상당히 뜸해졌다고 들었다.

아르웬이 본격적으로 원로원과 충돌을 빚은 것도 있겠지만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는 뜻일 터.

실제로 군인이었던 아르웬의 수행원, 케이르마저 아버지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누군가 북부 지역이 개판이었다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건가요라고 묻는다?

붉은 사자가 전부 해치웠습니다. 아, 붉은 사자라면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러면서 납득하겠지.

아버지의 무력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언젠가 한 번쯤 보게 되지 않을까.

"평일에 단련을 한다면 주말에는 뭐 하고 쉬어? 책을 읽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요즘에는 바둑하고 놀지. 네가 전파하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유행이야."

"바둑?"

"응. 머리를 써야 되다 보니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는 사람이 더 많아."

바둑이 여기서 유행하고 있구나. 겨울 방학 때 아르웬과 세실리가 하루종일 대국을 뒀던 게 떠올랐다.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서로 만날 일이 없지만 나조차 잊을 정도로 전념했었지.

하물며 둘이 묘한 라이벌리티를 형성하고 있었으니 바둑에 빠져들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릭 선배랑 아나 선배가 서로 붙었을 때가 재미있었는데. 릭 선배가 좆 같이 한다며 판 뒤엎은 거."

"그거 때문에 진짜로 싸울 뻔하지 않았어?"

"지금은 화해했지. 연무장을 새로 갈았지만."

좆 같이 게임하네가 슬슬 유행하고 있나 보구나. 알다시피 고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칭찬이다.

나는 최강의 기사단이어도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야기에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약간의 부조리만 있을 뿐이지 똥군기는 잡지 않는 모양이다. 부조리도 내가 사인을 준다면 나아질 테고.

"크릉."

"응?"

가족들과 정답게 떠들면서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 웬 짐승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방한모를 착용하고 있어서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에는 고양이······ 가 아니라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다. 그것도 원근감을 싸그리 무시할만큼 거대한 호랑이.

저거 뭐야. 저게 왜 있어.

"저, 저, 저건 뭐야? 설마 호랑이야?"

"응? 아~ 저거?"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니콜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다.

뒤이어 그녀가 특유의 쮸쮸쮸- 거리는 소리를 내며 오라고 손짓했다. 마치 길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꼬시는 것처럼.

그러자 놀랍게도 집채만한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멀리 있을 때도 엄청 커보였는데 가까이 다가오니 그 크기가 차원이 달랐다.

"크릉."

"소개할게. 우리 기사단의 명물, 레오야. 순한 애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몬스터야?"

"몬스터가 아니라 짐승이야. 이거 아버지가 데려온 놈 아니었어요?"

또 아버지야? 나는 니콜의 질문을 듣고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깔끔하게 정돈한 수염을 매만지면서 호랑이, 그러니까 레오를 쳐다보고 계셨다.

황금색 두 눈에는 반가움과 신기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 놈이 그 놈인 게냐? 내가 떠나기 전까지 이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어때, 아이작? 귀엽지?"

"우리 레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가끔씩 자기가 몬스터를 사냥하고 온다니까. 덕분에 몬스터 때문에 귀찮은 일은 없어."

"어······"

부대마다 짬타이거, 그러니까 고양이가 있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다.

당장 나도 군복무 시절 고양이들과 뒹굴거렸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 고양이랑 붙었다가 진 후임도 있었고.

하지만 역시 판타지 세계라고 해야 할지, 스케일부터가 남다르다.

2차 세계 대전 때 소련이 전투용 곰을 키웠던 적이 있지만 이건 뭐······ 그냥 다르다.

"크르릉."

내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멍하니 있을 때 호랑이가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무슨 얼굴이 내 얼굴의 2배만 하다. 은어로의 짬타이거가 아니라 진짜로 타이거다.

비록 니콜이 순하다고는 해도 호랑이 특유의 위압감이 어마어마하다. 당연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스윽- 슥-

"······응?"

"그르릉. 그릉."

그런데 얘가 돌발행동을 취했다.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윽고 자기 얼굴을 나에게 비비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진짜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는 소리까지 낸다. 누가 봐도 친밀감의 표시.

벌러덩-

이제는 아예 내 앞에서 벌러덩 드러누워 배까지 보여줬다.

모두 알다시피 짐승이 배를 보여준다는 건 너를 믿겠다는 뜻.

오늘 처음 만났음에도 이 거대한 호랑이는 나에게 무한한 애교를 드러냈다.

"아버지 앞이라서 그런가? 얘가 배를 까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오빠도 봤잖아. 아이작한테 얼굴 비비는 거. 아이작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데이브와 니콜이 저마다 놀라움과 신기함을 담으며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저 레오라는 고양이 아니, 호랑이는 자존심이 강해 함부로 배를 보여주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저 호랑이는 자기 얼굴을 나에게 몇 번 비비더니 이윽고 배까지 훤히 드러냈다.

당최 이게 무슨 전개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퍼뜩 떠오른 게 하나 있었다.

'아. 히르트 님의 축복.'

히르트 님께서 나에게 하사하신 순수한 축복. 순수한 축복은 다른 축복과 달리 일종의 '권능'에 가깝다.

또한 히르트는 자연의 여신. 몬스터가 아닌 자연 속에 포함된 동식물은 모두 그녀의 관할에 속해있다.

다시 말해 이 호랑이도 그걸 느끼며 친밀감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르르릉. 그릉."

"아유. 귀여워라."

그래서 실컷 만졌다. 얼굴도 만지고, 귀도 만지고, 마지막으로 배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기분이 좋아진 건지 골골송을 부르는 것과 함께 꼬리를 살랑거리는 녀석.

종은 다르지만 왠지 레오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귀엽다. 레오나도 머리나 배를 쓰다듬어주면 엄청 좋아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쓰다듬는 걸 넘어 올라타고 싶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금방 관뒀다.

나는 말 그대로 면회를 온 건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니까.

괜히 여기 오래 있다가 기사단에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칠 수도 있다.

"그럼 안녕. 우린 이만 가볼게."

"크릉."

내가 떠나가자 아쉬운지 얼굴을 비비는 녀석. 나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도 내 뜻을 알았는지 어슬렁어슬렁거리며 집채만한 몸뚱아리를 움직였다.

"아, 맞다. 너 이전에 히르트 님을 뵌 적이 있다고 하셨지? 그때 아리엘을 받았고."

"응."

"그래서 그런가 보다. 다른 사람이 손을 내밀면 깨물거든."

"······쟤가 깨물면 손이 없어지지 않아?"

"그래서 마나로 강화하지."

강한 사람만 근무할 수 있는 네이비 기사단다운 대답이다. 나는 여기서 하루조차 버티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입단 테스트부터 지옥을 오간다고 니콜에게 들었다.

"그럼 어디부터 가볼까? 궁금한 곳이라도 있어? 아, 참고로 연무장은 제외하는 게 좋을 거야."

"연무장은 왜 안 된다는 거야?"

"실전을 방불케 해서 그래. 들어가자마자 온갖 파편 덩어리가 너한테 날아올 걸? 우리가 지켜주긴 하겠다만 혹시나 하는 게 있어서."

"··· ···"

진짜로 인자강들만 모아놓은 곳이네. 나는 데이브의 설명을 듣고 연무장은 가지 않기로 정했다.

설명을 듣자하니 순 괴물들만 모여있는 곳이라 가벼운 대련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심지어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로 지냈던 데이브와 니콜마저 처음에 버티기 어려웠단다.

대련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폭풍의 눈일 뿐이고, 그 주변이 죄다 쓸려나간다.

"돈이 엄청 나가지 않아?"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부대 안에 연무장이 있는 게 아니라 밖에 있거든. 밖이라면 원없이 뛰어놀아도 상관없으니까."

"······상식을 한참 벗어나는 부대구나."

"우리 부대가 원래 그래."

이제는 익숙하다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이는 데이브다.

나는 태연하기 그지 없는 그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형이랑 누나가 어디서 생활하는지 보여줄 수 있어?"

"그거야 쉽지. 저기 건물로 들어가면 돼."

"아. 저거야?"

설마설마했는데 네모반듯한 건물이 막사였다니. 심지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외양이라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모반듯한 건물은 효율적인 면에서 상당히 좋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건축 자체도 구조적으로 쉬운데다가 딱딱 분리돼 있으니까. 정겹다면 정겨운 외관이다.

'그냥 쉬기만 하면 될 테니까.'

나는 데이브와 니콜의 안내를 따라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막사에도 난방이 되는지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원래 막사가 따로 없었는데 이것도 새로 신축된 거야. 완전히 개인실이지."

"아카데미 숙소처럼?"

"응. 아카데미 숙소를 본따서 지었다고 들었어. 그전까지는 한 방에 3명이 머물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막사가 가장 최근에 지어졌어."

"정말 많이 좋아졌구나. 나 때는 막사는커녕 천막조차 없었는데."

아버지가 감탄하며 막사 내부를 둘러보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나 때는~ 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 ······ 논!

그러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힘찬 외침.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앞으로 묵묵히 걷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아버지께 설명을 하느라 못 들은 모양이다.

나는 막사 안이면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방금 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작? 뭐해?"

"아. 여기서 소리가 들려서."

머지않아 니콜에게 딱 걸렸다. 그녀는 내가 개인 행동을 하자 인상을 구긴 것도 잠시, 내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내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더니 작게 중얼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는 벤 선배님의 숙소인데? 무슨 소리라도 들렸어?

"어······ 그냥 누가 외치는 것 같아서. 잘못 들었······

내가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쯤, 문 안에서부터 다시 한 번 누군가 크게 외쳤다.

-하일!!

그 말을 듣고나서 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논!!

"··· ···"

절대 들리지 말아야 할, 그리고 절대 외쳐서는 안 되는 말이 문에서부터 들려왔으니.

나는 그 유명한 경례 구호를 듣자마자 심장에 덜컹 내려앉았다. 동시에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다.

이어서 목에 삐걱- 삐걱- 소리가 날 정도로 딱딱히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렸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하. 저 인간 또 저러네. 부끄럽지도 않나?"

"··· ···"

"어서 가자.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이미 너무 많은 걸 봐버렸는데. 나는 니콜에게 끌려가면서도 그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내가 대체······'

내가 뿌린 건 대공황 하나가 아니었다. 대공황에 가려져서 그렇지, 크고 작은 씨앗들이 땅 속에 심어져 있는 상황이다.

만약 몇 개월 후, 아름답게 꽃피웠던 대공황이 점차 시들게 된다면 다른 씨앗들이 싹을 틔우게 될 터.

지금은 단지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만약 저런 게 국가 단위로 번지게 된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히틀러의 칫솔 수염과 스탈린의 카이저 수염을 따라하는 귀족들이 유행하고 있지 않은가.

저 특유의 경례도 이것과 비슷한 일환일 터. 하지만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한 명.

'아르웬······'

히틀러에 깊이 감화(?)하는 중인 공산주의 엘프이자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다.

'······빨리 알븐하임에 찾아가야겠다.'

겸사겸사 히트르 님과도 만나야겠지. 나는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억지로 되돌렸다.

-······일! 제논!

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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