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11화 (512/763)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의외로 쏜살처럼 지나갔다. 심지어 잠은 물론 식사도 따로 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말만 한 달이지 실제 느끼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다. 풍경마저 바뀌지 않았다면 지루함을 버티지 못했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풍경은 내가 원하는대로 휙- 휙- 변화했다.

폭포수를 원한다면 폭포수를. 활기찬 거리를 원한다면 사람이 오가는 거리를. 모닥불이 타는 소리를 원한다면 모닥불을.

마치 유튜브에서 화이트 노이즈를 재생한 느낌이 든다. 단순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 3D를 넘어 4D에 가깝도록 생생하다.

덕분에 좀 더 집중을 할 수 있었으며 당초 예정했던 분량보다 더 많은 글을 쓰게 됐다.

어디까지 썼냐면 폴란드 침공 이후의 프랑스 점령은 물론이고 독소전쟁 초반까지.

중간중간 중일전쟁과 미국의 현황을 보여주면서 진행한 일인데도 독소전쟁 파트다. 여기에 그림은 덤이고.

'그런데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진찌로 먹어도 되는 건가. 나는 시간이 한 달 가까이 흘렀음에도 변화가 없는 검은색 구슬을 꺼냈다.

모라가 준 걸 보면 필히 세계수의 씨앗급일 텐데 무슨 용도인지 알 수가 없다.

정말로 영약처럼 신성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건지, 아니면 그 이상의 효능인 건지, 아니면 다른 건지.

모라나 루미너스에게 묻고 싶었지만 사이좋게 끌려갔는지 내 대답에 응하지 않았다.

'설마 한 달 넘게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약간 불안해지긴 해도 아닐 것이다. 이 사태도 뒤늦게나마 알아차렸다지만 히르트 님은 나를 방치할 여신이 아니다.

그러니 시간에 맞춰 문을 개방시켜주실 터. 나는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면 될 것이다.

샤아아-

"응?"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독소전쟁 초반부를 쓰려던 찰나, 신기루마냥 일렁이더니 공간이 모두 사라졌다.

순백의 공간조차도 아닌 한 달 전에 보았던 예배실. 바로 코앞에 모라의 석상이 떡하니 존재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내가 이 공간에 들어온지 한 달이 지났다는 것이다.

'타이밍도 참.'

뭔가 노래방 시간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네. 나는 머쓱함에 쓴웃음을 지었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상식과 동떨어진 공간 속에서 한 달가량 글만 쓰다보니 여기가 현실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단 현실로 돌아온 건 맞구나.'

아까보다 비좁아진 공간하며 모라 신전 특유의 어두운 느낌하며 개인 예배실이 맞다.

긴가민가했는데 정말로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다. 중간중간 딴짓을 했다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 것 같다.

뭐, 그래도 예정된 분량까지 적긴 했으니 큰 상관은 없겠지. 더구나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남은 건 이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는 것뿐. 하지만 대공황의 여파가 가라앉지 않았을 테니 그것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다.

가이스트에게 조언을 주고 마키나에 혁명이 발발했듯이 그와 비슷한 일을 행하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론 머스크처럼 똥만 안 싸면 될 거야.'

나는 그리 생각하며 원고를 정리했다. 만일에 대비하여 본래의 분량보다 더 많은 종이를 갖고 왔는데 그걸 다 사용했다.

어쩌면 종이를 전부 사용해서 공간이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이쪽의 가능성이 더 높겠지.

책상과 의자는 세실리의 도움을 받으면 될 터. 우선은 원고를 파트마다 정리하는 게 우선이다.

이윽고 원고를 모두 정리한 후에는 조심스레 예배실 문을 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응? 아! 아이작!"

밖으로 나오니 미리 말했던대로 세실리가 나를 반겨줬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성직자와 대화하다 나를 보자마자 화색을 띠었다.

나 또한 한 달가량 홀로 있었기에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에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이윽고 좀 더 편안히 포옹할 수 있도록 정리한 원고는 잠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와락!

세실리는 내가 두 팔을 벌리자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듯, 그대로 나에게 달려와 강하게 안겼다.

특유의 향기가 내 후각을 자극하는 건 물론,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이 그대로 밀착된다.

한 달 전까지 이런 포옹은 일상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

자극이 몇 배나 더 심해진 것 같달까. 빈말이 아니라 지금의 포옹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다.

한 달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글만 썼으니 욕구가 쌓일대로 쌓였겠지. 하물며 예정에도 없던 고행까지 겪어서 스트레스도 많이 축적됐다.

여태까지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몸은 너무나도 솔직했다. 보아하니 기본적인 욕구를 억누를 뿐, 완벽히 사라지게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안 돼. 참자. 참아.'

나는 다른 의미의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저 안에 있을 때는 그 어떤 욕구도 일지 않았는데 바깥으로 나오니 한꺼번에 쏠리는 모양이다.

세실리의 체취부터 시작해서 흉부의 존재감, 더 나아가 스킨십 하나하나의 감촉까지. 그 무엇 하나 자극되지 않는 게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숙사로 달려가고픈 마음이었지만 안 된다. 발정난 개새끼마냥 휘두를 수는 없다.

"킁킁. 킁."

"세실리 누나?"

"뭔가 향이 더 짙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이작 기준으로는 한 달이 지나서 그런가?"

세실리도 내 변화를 눈치챈 듯했다. 내 여인들은 나에게 욕구를 자극하는 냄새가 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마 내 욕구가 쌓인만큼 그 냄새도 진해진 모양이다. 페로몬이라면 페로몬이겠지.

"······그런데 아이작."

"응?"

"그······ 괜찮아? 나도 모라 님께 들었는데······"

내가 딴 생각을 하며 최대한 인내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순간 그 말을 듣고 의아해졌으나 이내 그녀가 무슨 뜻으로 말한지 깨달았다.

나에게 비밀로 감추려고 했던 고행길을 세실리에게는 알려줬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지은 거고.

이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걱정 말라는 듯이 세실리의 뺨을 쓸어줬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중간에 고행을 멈추셨거든."

"고행을 멈추셨다고? 어째서?"

"차차 설명할게. 그나저나······"

나는 세실리의 뺨을 쓰다듬어주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소 조용했던 신전이 분주해 보였다.

성직자들이 당황한 얼굴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건 물론, 어디서 단체 예배라도 하는 건지 큰 소리가 가끔 들렸다.

내 기준으로는 한 달이지만 바깥은 이제야 막 하루가 지났다. 그 하루동안 대체 신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졌다.

"신전이 많이 바빠보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 응. 다름이 아니라······"

세실리는 하루동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천천히 설명해줬다. 우선 하루가 '멈췄다'.

미사여구 붙일 필요도 없이 태양과 달이 그대로 정지했다고. 낮과 밤이 그대로 멈춘 것이다.

때문에 각 신전은 본인이 모시는 신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심지어 모라의 신전은 벌이라도 받는 것마냥 수십 개의 벼락이 떨어졌다고. 나는 그걸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것 같네."

"이유를 알아?"

"지금쯤 두 분께서 히르트 님에게 혼나고 있을 거야. 특히 모라 님은 꽤 크게 혼나는 중일 테고."

"······혼나고 계시다고?"

내 대답을 듣고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세실리. 장소가 적합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신 혼란을 수습할 수 있도록 신전의 성직자들에게 대략적으로 알려주는 건 잊지 않았다.

루미너스의 신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건 똑같았지만 모라는 무려 벼락까지 얻어맞은 상황이었으니까.

신권이 높은 세상인만큼 이런 건 재깍재깍 해결해야 좋다.

"뭐야. 히르트 님에게 혼나고 계신 거였어요? 별일 아니었네."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르신 거야? 설마 히르트 님에게 장난을 치신 건 아니겠지?"

"후우······ 모라 님은 언제쯤 철이 드실까."

평소 근엄하고 지배자다운 풍모를 보였던 루미너스와 달리 모라는 천덕꾸러기 같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그때문인지 신자들은 내 말을 듣고 대부분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모라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변함이 없었기에 신자들 입장에서는 머리가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제논 님께서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게다가 내가 그걸 알려주자 몇몇 신자들이 의문을 가졌다. 신탁조차 없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이에 나는 교묘한 거짓을 담은 진실을 꺼냈다.

"히르트 님이 제가 보는 앞에서 모라 님을 끌고 가시던데요?"

"··· ···"

저러니까 다들 수긍하고 넘어가더라.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이렇듯 혼란을 수습한 후에는 원고를 챙기고 기숙사로 복귀했다. 내 기준으로는 한 달만에 재회하는 셈이다.

"아이작!"

기숙사로 돌아가자마자 새하얀 새끼곰 한 마리가 와다다 뛰어온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실상은 무서운 포식자.

나는 나에게 달려오는 마리를 두 팔 벌려 안아줬다. 누가 보면 내가 하루만에 보는 거고 마리가 한 달동안 고행을 겪은 것 같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여야지. 사랑스러운 건 똑같으니까.

'그런데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순백의 공간이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한 건지 점점 더 참기 어려워졌다. 세실리는 괜찮았는데 마리부터 위기가 다가왔다.

어떻게든 숨기기 위해 엉덩이를 엉거주춤 뒤로 빼고 있을 정도. 다행히 마리는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기 바빴다.

"앙!"

"악!"

아참. 뺨을 깨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정신이 확 깨는 기분이다.

"아야야. 누가 보면 내가 아니라 네가 한 달 동안 버틴 줄 알겠네."

"말했잖아. 하루라도 네 뺨을 물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허, 참."

나는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곳에는 아델리아가 뒤에서 우물쭈물거리며 서 있었다.

마리 다음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 덩치만 큰 강아지가 자기 순번만 기다리는 것 같다.

"아델 누나?"

"으, 응?"

"누나도 이리 와."

"······응."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품에 안기는 아델리아. 마리는 그녀가 좀 더 편안히 안길 수 있도록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렇게 내 기준으로 한 달동안 만나지 못한 여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덤으로 마취(?)가 서서히 풀리는지 내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빨리 해결해야 될 것 같은데.

"아이작. 그나저나 모라 님께서······"

"아. 그건 걱정 마. 어떻게 된 거냐면······"

미리 언질을 줬던 고행 부분도 쉽게 지체하지 않고 설명해줬다.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세 여인들.

여기로 오는 동안 세실리가 알려줬다. 내가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는 미래를 듣자마자 전보다 더 성실하게 케어할 계획이었다고.

나뿐만 아니라 트라우마 촉진제나 다름없는 가족들의 안위에 신경 썼을 거라고.

특히 전선에 나서는 데이브와 니콜의 편의를 봐준다던가 예산을 좀 더 풍족히 넣는다던가 등등. 이런 식으로 내조를 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한 계획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지만 모라가 보여준 고행들이 아예 쓸모없는 것도 아니다.

어느 유명한 캐릭터의 말처럼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으며 최악을 상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신들께서도 네 미래를 볼 수 없으시다고? 네가 살았던 세상의 신이 걸어놓은 제약 때문에?"

"응. 내가 이곳으로 넘어옴으로써 내가 살던 세계가 큰 곤혹을 겪고 있나 봐. 자칫하다간 신들끼리 전쟁이 터졌을 수도 있었다네."

"헤······"

상상을 뛰어넘는 스케일에 마리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했다. 다른 사람도 비슷한 반응이다.

뒤이어 마리가 먼저 입을 열면서 각자 어떤 심정인지 하나둘씩 밝히기 시작했다.

"스케일이 장난 아니네. 그래도 이해가 가. 그런데 이거 악마 숭배자가 원인 아니야? 많이 억울하실 것 같은데?"

"세상 하나가 파멸할 수도 있는 거라서······ 모르겠네. 신들의 입장은 다를 수도 있잖아. 우리는 필멸자이니 완벽하게 이해하는 건 어렵겠지."

"결국 악마 숭배자가 원인이네요."

진짜로 결과만 본다면 기승전악마숭배자다. 신들 입장에서는 악마 숭배자 놈들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겠지.

그런데 넘어온 영혼이 알아서 악마 숭배자를 박멸시켜주네? 고깝게 바라보던 시선은 사라지고 예쁨이 뚝뚝 묻어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덩치가 커져도 너무 커져서 사단이 난 거지. 신들 입장에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다.

"그러면 아이작 너는 신들께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일단은? 혹시 몰라 미리 말하지만 난 신들과 대척할 생각은 절대 없어. 유명해질지언정 이대로 사는 게 좋으니까."

"너다운 대답이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막 나갔을 것 같은데."

"그래서 싫어?"

나는 마리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흠칫하더니 이내 피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안 그랬으면 너에게 푹 빠지지도 않았겠지. 뭐, 그래도 오늘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네."

"뭐가?"

"아이작은 내가 욕심을 낸다고 혼자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왠지 몰라도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히히."

마리는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나에게 앵겨붙었다. 레몬에 가까운 체취가 코를 비집고 들어온다.

안 그래도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온 상황인데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과 달콤한 체취까지 묻으니······

"응?"

"흠. 흠."

무언가 딱딱한 느낌이 들었는지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래를 쳐다본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리는 변화가 생긴 내 하체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가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과 달리 음흉하고도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의 표정. 그녀는 장난스러운 투로 나를 놀렸다.

"뭐야. 한 달동안 혼자 있어서 외로웠던 거야?"

"······거기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어."

"알았어. 알았어. 그럼 씻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마리는 그리 말하더니 다른 두 여인에게 눈짓했다. 알아서 다 준비하라는 의미에 가깝다.

이에 세실리와 아델리아도 내 하체를 힐긋거리더니 각자 미묘한 미소를 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기 전, 세실리가 마리에게 의견(?)을 나누는 건 잊지 않았다.

"누가 먼저 할 거야? 마리 네가 먼저 할래?"

"그냥 알아서 해. 아, 이 참에 레오나도 부를까? 한 달 동안 묵혀둔 거라 예상보다 힘들 수도 있어."

"그럼 내가 부를게. 아이작은 그때동안 잘 씻고 있어? 후훗."

무슨 레이드를 뛰는 것도 아니고 저러는 건지. 나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세실리의 뒷모습에 민망해질 수밖에 없었다.

덜컥-

"어?"

"어머. 리나?"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실리가 문을 열자마자 리나와 마주쳤다. 아무래도 노크를 하려던 타이밍에 세실리가 문을 연 모양이다.

리나는 예상치 못한 세실리의 만남에 당황한 것도 잠시, 어깨 너머의 나를 바라보더니 예의 우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에 아이작 있지? 있다면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

"음······ 당장은 곤란할 텐데······"

"?"

세실리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자 리나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어서 세실리가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의견을 구했다.

어차피 원고는 리나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 상태가 상태다 보니 리나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줄 수도 있다.

"저기 테이블 위에 원고가 있어. 대신 정확히 4권 분량만 갖고 가야 돼. 알겠지?"

"알았어."

리나는 내가 말한대로 정확히 4권 분량만 챙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제 폴란드 침공을 보며 안심할 수 있겠지.

이윽고 세실리도 밖으로 나가자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양옆에서 백곰 한 마리와 몸만 커다란 강아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여태까지 그녀들을 위해 잠자리를 가졌다면, 오늘만큼은 잔뜩 쌓여버린 내 욕구를 풀기 위해 벼르는 중이다.

"······나 씻고 올게."

"그냥 같이 씻을까? 나쁘지 않지?"

이유는 몰라도 제일 기대하고 있는 마리.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듣고 피식거렸다.

"마음대로 해."

******

이후로 아이작이 한 달가량 축적된 욕구 및 스트레스를 원없이 풀고 있을 시간.

"감사합니다, 히틀러 님!!!"

바로 옆방에서 리나가 원고를 들어올리며 찬양 아닌 찬양을 하고 있었다.

"민족자결주의를 이용해 폴란드를 침공해주셔서!!"

그동안 눈처럼 쌓이고 쌓인 걱정들이 한꺼번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녀는 원고를 가슴에 꼭 끌어안으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요 근래 아이작이 알려준 민족자결주의를 듣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히틀러가 실은 악당이었다는 진실 이상으로 충격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글이 퍼지게 된다면 스타비르크도 당분간은 찍소리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 터.

남은 건 출판하는 것밖에 없지만 대공황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다. 출판사도 종이 공급에 불황을 겪고 있었으니.

"하아······"

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제 아이작네 기숙사에서 잠도 푹 잔 덕분에 오늘은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오늘 같은 날이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다시 한 번 원고를 꽉 끌어안았다.

쿵-

느닷없이 앞쪽 벽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이에 리나는 흠칫거렸다가 아,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기 침실이었지."

구조상 저 건너편은 침실이다. 그렇다는 말은······

꿀꺽-

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누적됐던 스트레스가 풀려서 그럴까.

아이작이 근 한 달동안 욕구가 쌓인 것처럼, 리나 또한 비슷한 상황이다.

사방에서 일들이 몰아치는데 해소는커녕 숙면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어제 아이작네 방에서 숙면을 취한 덕분에 피로가 전부 날아갔고, 방금 전 스트레스가 몽땅 날아갔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의해 억눌렸던 욕망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만에······'

드르륵-

그녀는 책상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다. 누가 보는 건 아니지만 나쁜 짓을 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이윽고 투시 마법이 설치된 망원경을 쥔 그녀가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켰다.

"하아······ 하아······"

상상만 해도 흥분한 것인지 리나는 달뜬 숨을 내쉬었다. 이게 얼마만의 해소였던가.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다.

뒤이어 그녀는 누가 봐도 잔뜩 풀려있는 미소를 짓더니 이내 망원경을 서서히 눈으로 갖다 대었다.

'저건······ 레, 레오나?! 쟤도 꼬신 거야? 이 짐승!'

모두가 행복한 하루.

'저, 정말 짐승이네. 짐승. 저게 무슨 펭귄이야.'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저 멀리 날아가는 하루였다.

그리하여 각자 피로와 스트레스를 마음껏 해소한 다음 날.

"이거 뭐야? 너 어제 물이라도 쏟았어?"

"으, 으응? 아니? 아닌데?"

"그래? 언제 젖은 거지?"

아이작은 원고에 물이 젖었다가 마른 흔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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