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10화 (511/763)

땅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린 모라가 누군가에게 호출당했다.

상황으로 보나 익숙한 목소리를 보나 히르트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데려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

히르트는 이 상황을 전혀 몰랐던 모양인데 아무래도 주신급에 해당하는 신이다 보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모양이다.

권능 비슷한 힘을 사용했다지만 모라는 이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반면 히르트는 세계수의 힘을 빌리고 나서 모습을 보였으니까.

히르트에게 끌려갔으니 앞으로 오늘 같은 사건이 발생할 일이 줄어들 거고, 나는 나대로 적당히 책임지며 글을 쓰면 될 것이다.

"내 미래를 볼 수 없다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단순히 기억만 가지고 환생을 한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깊은 사정이 있었다니 생각치도 못했다.

모라 같은 초월자 입장에서 나라는 존재는 무섭겠지. 언제 내 목을 물지도 모르는 사냥개가 떡하니 있는 셈인데.

하지만 나는 절대 모라를 비롯한 신들의 목을 물 생각이 없다. 이번 사건도 모라의 미숙한 판단으로 발생했으니 너그럽게 넘어가줄 수 있다.

다만 한 번 무너진 신용은 처음부터 신용을 쌓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고, 클라크 할아버지 말마따나 그들을 맹신하는 건 피해야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한 번 크게 싸운 친구와 같은 사이. 당분간은 어색해질 예정이나 시간이 흐르면 점차 나아지겠지.

모라도 부디 히르트에게 단단히 혼나면서 잘못을 깨우쳤으면 좋겠다. 아까 주저앉고 우는 걸 보면 본인의 잘못을 깨닫긴 했을 테니 남은 건 성장이다.

'그나저나······'

나는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검은색 구슬을 지그시 쳐다봤다. 모라의 손을 잡았던 손이다.

알약처럼 작고 동그란 검은색 구슬. 이건 대체 어떤 용도에 쓰이는 것일까.

처음에는 영약마냥 먹어야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정했다.

히르트에게 끌려간 모라가 언제 되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조용히 글만 쓰면 되겠지.

'아. 그런데 책상이······'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간 나머지 책상을 두 쪽 냈던 걸로 안다. 나도 나에게 그런 힘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

이에 과연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싶어 책상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게 웬 걸.

반으로 조각나 있던 책상이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다. 사방팔방 휘날려 뒤섞였던 원고들도 마찬가지.

타자기도 가지런히 올려져 있는 걸 보면 수를 쓴 모양이다. 모라가 히르트에게 끌려가기 직전에 복구라도 한 건가.

나에게는 집필을 무난히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거니 아무렴 상관없다. 나는 유유히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많이 썼는데?'

모라가 시켜준 고행은 전보다 훨씬 강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길렀다. 비록 잘못된 고행이지만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다.

시계를 보면 알 수 있다. 고행을 거치면서 2권을 속사로 썼는데 시간상으로는 고작 사흘도 지나지 않았다.

식사도 할 필요가 없고 잠도 잘 필요가 없었으니 하루에 한 권 꼴로 집필한 것이다.

"음······"

혹시 몰라 고행을 겪으면서 작성한 원고를 재차 확인했다. 집중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서 그런지 내가 원하는 스토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걸 보면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문제는 이대로 간다면 폴란드 침공은 물론, 독소전쟁을 넘어 태평양 전쟁까지 쓸 수 있다는 것.

태평양 전쟁은 2차 세계 대전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전쟁이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 이후 본격적으로 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드는 시기니까.

'그냥 비축분 쌓아놓았다고 생각하자. 중간중간 분량 때문에 적지 못했던 것도 다 적고.'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 폴란드 침공까지는 이미 따놓은 당상이고 나머지는 자잘한 상식이나 에피소드를 넣으면 될 듯하다.

다만 지난번처럼 무책임하게 발간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필요가 있다.

신들도 내가 특정 행동을 하는 순간 미래가 뒤죽박죽 얽힌다고 했으니 사실상 나 스스로 임해야 된다.

'민족자결주의를 이용해서 안슐루스, 뮌헨 협정, 폴란드 침공이 이어진다면 스타비르크도 당분간 잠잠해지겠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에 불과하다. 스타비르크에 피어오르는 독립의 불씨는 사그라들겠지만 완전히 전소되지는 않을 터.

그들에게는 아쉽긴 하지만 당장은 참아줬으면 좋겠다. 미네르바 제국뿐만이 아닌 전세계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내가 말을 한다면 스타비르크도 아쉬워할지언정 잠시나마 불씨를 꺼뜨리겠지. 사실 이게 제일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행이 현실로 될 수도 있다.'

그럴 확률은 매우 희박해도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현재 스타비르크는 민족주의가 한창 들끓고 있다.

역사적으로 민족주의는 대부분 국수주의로 발전했으며 그 국수주의는 나치 독일을 탄생시켰다.

따라서 나로서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필요가 있다. 이건 무책임한 게 아니라 아까 내가 모라에게 따졌던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글을 썼을 뿐인데 마음대로 따라한 건 저들이라고. 나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으며 피와 강철 또한 판타지 속 이야기라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담습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물론 가이스트처럼 직접 조언을 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앞으로 루미너스와 모라도 나를 옹호할 예정이니 반응을 살펴보면 끝이다. 단, 대공황에 비견되는 상황이 터진다면 손수 나설 계획이다.

'진짜 일론 머스크마냥 마음대로 떠들 것도 아니니까.'

일론 머스크가 한 마디 했다가 주식 혹은 코인이 왔다 갔다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에도 입으로 똥을 싸는 사람이었고.

이 세상에서 그런 취급을 받는 건 한사코 사양이다. 나는 적어도 확실한 것만 말할 생각이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라던지,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철갑선이라던지 등등. 마법도 없이 순수 '과학'으로만 행한 기적들.

'전혀 예상치 못한 게 튀어나올지도 몰라.'

한참 뒤에 등장할 전차가 바로 그 예시다. 휘발유가 아니라 석탄으로 가동하는 강철 요새.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했냐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다른 기술들은 오죽할까. 늘 말했지만 이 세상에 전생의 상식을 대입시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행기와 철갑선을 보여준다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드워프는 과연 어떤 미친 기계들을 발명해낼까. 듣자하니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를 적절히 섞은 사상을 내세워 기술력을 대폭 증진시킨다는데.

'일단 칼즈에게 줄 그림이나 그리······'

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남아도는 만큼 그림도 많이 그리면 되겠구나.

앞으로 스토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갖가지 신병기들이 나올 테니 삽화는 필수다.

비행기부터 시작해 로망을 담은 전함, 마지막으로 해상전의 꽃인 항공모함까지.

이런 기계들뿐만이 아니라 중간중간 20세기의 상황을 보여줘도 될 것 같다. 예를 들면 의복이 있다.

'칼즈 씨가 고생하겠네.'

나는 여기서 여유롭게 그려도 시간이 남아돌지만 칼즈 입장에서는 마감의 지옥일 터.

그래도 돈으로 때려주면 울면서 좋아할 것이다. 밑그림까지 그려주니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고.

나는 중간중간 삽화가 될 그림을 그리면서 꾸준히 글을 집필했다. 뜬금없는 고행도 없어서 글을 쓰기에 아주 적절했다.

그나마 단점이 있다면 순백의 공간이었다는 점. 사람 한 명을 온통 새하얀 공간에 집어넣으면 미친다는 속설이 있다.

다행히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만 뭐랄까, 약간 따분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까 거리를 보여줬던 것처럼 안 되나? 가능하다면 폭포수가 흐르는 자연 환경을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리 생각한 이후였다.

쏴아아아-

순백의 공간이 신기루처럼 일렁이더니 내가 원하는 풍경으로 변했다. 푸른 녹음이 진 숲 안쪽, 마음을 편히 만들어주는 폭포수.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 폭포수와 주변의 숲을 둘러보다가 이내 피식거렸다. 방금 전 고행을 겪어서 그런지 놀랍지도 않다.

사람을 대하는데 성숙치 못한 초월자라지만 역시 신은 신. 권능을 아무렇지 않게 써버리는 모습은 가끔 무섭다.

'······전 물지 않아요.'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집필을 이어나갔다.

쏴아아아-

기분 좋은 폭포수 소리가 내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

신이 안배해준 공간 속에서, 아이작이 여유롭게 집필을 하고 있을 쯤.

세계는 낮밤이 갑작스레 멈춘 탓에 혼란에 찰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떨어지면 달이 떠오르고, 달이 떨어지면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태양은 루미너스를 상징하고 모라는 달을 상징한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신화를 따졌을 때의 이야기.

이 세상 사람들은 태양을 중점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달이 이 세계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것까지 안다.

먼 과거에는 이 세계를 중심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엘프 학자들이 밝혀낸 과학적 사실 중 하나다.

그래도 '상징'만큼은 변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양을 루미너스로, 달을 모라로 취급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 또한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난 현상은 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웬일로 쌍둥이가 큰 사고를 쳤나 보군.]

멸망한 게리오스 왕국의 마지막 왕, 모건 왕이 하늘을 올려다 보며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미네르바 제국은 이제 막 해가 떨어질 찰나였으나 이곳은 서쪽 끝이라 칭해지는 회색 사막.

뻥 뚫려있는 천장 밖은 해가 여전히 중천에 떠 있다. 덕분에 회색 사막 원정대는 춥디 추운 저녁이 아닌, 살벌한 뜨거움을 하루종일 맛보아야만 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난데없는 기상이변(?)에 당황했던 데이모스가 모건 왕에게 질문했다. 무언가 아는 게 확실한 뉘앙스다.

이에 무료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있던 모건 왕은 별일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말 그대로일세. 세상이 멈췄다는 건 히르트가 모든 일을 멈췄다는 뜻.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현상인데 오늘 다시 보는군.]

"당신은 겪은 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악마 놈들이 쏟아져 나올 때 세상이 멈췄으니까. 이것도 책에 기록돼 있지 않은 건가?]

모건 왕의 의문에 데이모스는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그런 기록이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하지만 악마 전쟁은 거의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라 그때 당시도 신화적인 분야로 생각했었다. 세상이 멈춘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막상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는데 기록은 오죽할까. 데이모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순간 온 몸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악마 전쟁 때 세상이 멈췄는데 오늘도 그 일이 발생했다. 그 말을 즉, 악마 전쟁에 준하는 사건이 터졌다는 것일 터.

"그, 그럼 설마······"

[네 놈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악마 전쟁 때는······ 아, 이것도 말 못하는군. 혼나는 와중에도 이런 짓을 하다니 참.]

눈쌀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하는 모건 왕. 이윽고 그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히르트가 잠시 손을 놓은 것뿐, 누군가 방해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짐의 예상대로라면 아마 지금쯤 루미너스나 모라의 신전에 벼락이 떨어지고 있을 게야.]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데이모스는 혼란스러웠다. 게리오스 왕국을 조사하면서 드러난 수많은 진실들.

그 진실은 루미너스의 신탁에 따라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으나 모건 왕은 그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네 놈도 이제 잘 알 텐데? 지하 무덤에 어떤 진실이 숨어있었는지. 신이 숨기고 싶은 추악한 진실들을 간직하고 있는 몸이라네.]

"··· ···"

[신의 천벌이 무섭다면 입 싹 닫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걸세.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속담도 있지 않는가? 껄껄껄.]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면서 껄껄껄 웃는 모건 왕. 진실을 파헤친다면 신의 천벌을 각오하라는 의미다.

신이 숨겨놓은 진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허나 그 결과가 바로 눈 앞에 있다. 모건 왕의 비참하면서도 웅장한 최후를 직접 목도했기에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일었다.

[그나저나 짐의 후손은 언제 부를 예정인가? 책도 거의 다 읽었는데 말이지.]

"······죄송하지만 아이작 님은 저희조차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무엇보다 현재 시국이 시국인만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대공황인가 뭐시기인가 발생한 거 말이냐?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악마 전쟁보다는 나을 텐데.]

그야 맞는 말이다. 악마 전쟁은 사람들이 다 죽어나갔으니까. 대공황처럼 경제가 박살난 게 아니고 문명 자체가 대부분 무너졌다.

데이모스는 순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오물거리다가 때마침 적절한 게 떠올라 다급히 입을 열었다.

"최, 최근에 아이작 님께서 발행한 신작이 있습니다. 그거라도 읽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신작이 나왔다고? 그게 무엇이냐?]

제논 일대기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모건 왕의 관심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데이모스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와 강철이라고,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마나와 마법이 없으며, 신의 존재마저 불분명한 세상의 이야기죠."

[······저런.]

그런데 반응이 이상하다. 모건 왕은 데이모스의 설명을 듣자마자 난색을 띄웠다.

언제나 위풍당당한 태도만 보여주던 모건 왕이 색다른 반응을 보여주자 데이모스도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모건 왕은 난처하다는 듯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작게 읆조렸다.

[골라도 하필 그런 걸······]

"······?"

도통 알 수 없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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