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에게 한 소리 듣고나서는 지체없이 준비에 나섰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폴란드 침공까지 연참을 하는 것.
여태까지 일주일마다 한 권씩이라는, 무시무시한 집필 속도를 보여줬으니 한 달에 거기까지 적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세계 대전에 진입하게 된다면 연재 속도가 상당히 느려지겠지. 전쟁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여러 면을 묘사해야 되니까.
지금은 폴란드 침공으로 민족자결주의의 단점을 명확히 보여준 후, 스타비르크에서 퍼지는 불씨를 일시적으로나마 꺼트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만 기다리면 되는 거지?"
"응. 내 기준으로는 한 달이지만 바깥은 하루만 흘러간대."
"신기하다. 신성력으로 이런 것도 되는구나."
기숙사로 다시 복귀하고 지인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서 마리는 내 설명을 듣고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나를 모라에게 데려다주었던 세실리도 비슷한 표정이다. 다만 장난기가 돌았는지 능글거리는 투로 나에게 말했다.
"이 정도는 안 신기한데? 환생까지 한 사람인데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정도야."
"그것도 그러네.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체감이 된다. 신들에게는 오히려 이게 더 쉬운 거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나를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기상천외한 일들을 자주 접하다보니 무덤덤해진 건가.
나는 둘의 대화를 듣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가 침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모라와 대화를 나눴던 시간도 꽤 오래 걸린 것으로 아는데, 리나는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며 꿀잠을 청하는 중이다.
겹겹이 쌓였던 피로를 한꺼번에 푸는 듯한 모습이라 더 미안해진다. 사실상 내가 저렇게 만든 거겠지.
'빨리 써야겠다.'
스타비르크에게는 미안하지만 독립은 나중으로 미루었으면 좋겠다. 지금으로서는 국제 사회만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
"그럼 준비물 같은 건? 필요한 건 없어? 식량이나 침대 같은 거."
내가 리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동안 마리가 질문을 꺼냈다. 그 질문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준비물은 따로 필요없어. 거기는 식량도 필요 없고 잠도 잘 필요가 없대. 모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옛날 영웅들이 정신 수양 혹은 단기간에 강해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공간이라고 하셨어. 나는 단지 시간을 이용하는 것뿐이고."
"아. 들어본 적이 있어. 옛날 신의 화신들이 자주 썼던 방법이라고. 종족전쟁에서 인간 영웅들이 자주 사용했다고 들었어."
기사인 아델리아가 추가로 설명해줬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도 엘프 전사를 넘어 기사단에 맞먹는 인간 영웅이 '전쟁'에서 자주 등장했다.
본디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이상 인간의 짧은 수명으로는 엘프를 따라가기 어렵다.
따라서 저 방법을 사용하여 단기간에 강해질 수 있었지만, 영웅이 어째서 영웅이라 불리는지 생각해보자.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소모해야 된다는 모라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무수한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여태까지 모았던 신성력을 신체 및 재생에만 이용했기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남아돌고 있다.
'그냥 쉽게 말해 천연 슈퍼 솔져인 건가?'
캡틴 아메리카마냥 약물로 강해지는 게 아닌 신성력으로 강해지는 슈퍼 솔져.
클라크 할아버지가 알려준 것처럼 주술로 강해질 수도 있지만 그건 여러모로 반인륜적이다.
어쨌거나 나는 영웅들이 시도할 법한 방법을, 오직 집필만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필요한 건 막대한 종이와 타자기, 책상, 그리고 의자뿐이야. 타자기는 고장날 수도 있으니 여분을 챙겨야 할 거고."
"여분의 타자기는 준비해뒀어. 수리를 한다 해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럼 언제 출발할 거야?"
"굳이 지체할 필요는 없으니 준비하자마자 가야겠지. 급한 불은 하루빨리 꺼트려야 되니까."
나는 혹시 몰라 잊어버린 게 있나 싶어 노트에다가 준비물을 적기 시작했다. 식량은 따로 필요없어도 간단한 주전부리 정도는 들고 갈 예정이다.
이외에 무료함을 풀 수 있는 책이나 그림을 그릴 종이 등등. 생각보다 다양한 물품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어차피 글만 쓰고 나올 건데 많이 필요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겠지.
"거기는 혼자밖에 못 들어가는 거야?"
내가 노트에 준비물을 하나하나 적는 동안 마리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푸른색 눈동자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다.
"응. 신성력을 미리 투입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의 신성력을 소모하는 방식이라서 그래. 내가 너한테 신성력을 줘야 된다는 건데 알다시피 난 사제가 아니라서."
"흠. 신성력은 이때까지 아이작한테서 많이 받았는데? 그걸로는 안 되나?"
"··· ···"
신성력 비슷한 것. 그리고 나에게서 많이 받았다. 저게 무슨 뜻인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보통 사람 같으면 이해하는 즉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을 것이다. 이건 나도 다를 바가 없었고.
장난기의 대가인 세실리도 감탄했다는 표정을, 아델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워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리는 한없이 진지했다. 본인이 섹드립을 날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는지 고민에 빠진 얼굴이다.
"······마리?"
"응? 왜?"
"한 수 배웠어."
"?"
마리는 세실리의 알쏭알쏭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 딴에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 저런 말을 꺼낸 거겠지.
순수한 의미로 나를 사랑했기에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세실리는 그런 마리가 귀여웠는지 약하게 웃으며 친절히 설명해줬다.
"네가 생각하는 건 힘들 거야. 우리가 아이작으로부터 신성력을 비롯한 기운을 많이 받긴 했지만 말 그대로 기운이지 충전되는 게 아니거든."
"아이작을 쥐어짜면 다음 날 상쾌해지잖아. 신성력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마리 특유의 뒤가 없는 화법이 연이어 이어진다. 듣는 나로서는 귀가 붉어지는 이야기다.
"그건 마나랑 정기를 쪽쪽 빤 거지 신성력은 아냐. 너는 신을 모시는 사제가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신성력은 그런 걸로 모으기 힘들어. 마나와 달리 그릇에 한계가 없어도 반대로 말하자면 그릇을 키우기 어렵다는 뜻이지."
"아하.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어. 그럼 아이작이랑 같이 못 들어간다는 거네."
일타강사 세실리의 짧은 강의에 마리가 고개를 명쾌히 끄덕인 것도 잠시, 곧바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껌딱지처럼 언제, 어디서든 나와 붙어있고 싶은 그녀. 교제를 시작한 지 어언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애정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 또한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그녀와 하루라도 떨어지기 싫다. 그래도 할 건 해야 된다.
"딱 하루. 딱 하루만 참으면 돼. 누가 보면 한 달 이상 헤어지는 걸로 알겠네."
"난 하루라도 아이작의 볼을 깨물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아."
"너도? 난 뺨은 아니지만 다른 걸······"
"그만."
세실리는 섹드립을 날리다가 내가 제지하자 뾰루퉁해졌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대로 노가리만 까다가 시간이 다 갈 것 같았다.
"일단 준비하는 대로 출발할게. 혹시 집에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까 데리러 올 때까지는 여기서 기다려줘. 알겠지?"
"알겠어. 정확히 하루 뒤에 같이 데리러 갈게. 우리는 하루여도 너는 한 달이니까."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나는 따뜻한 마리의 말에 뭉클해짐을 느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런 감동에 젖어있을 시간도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까운 상황이었으니.
이에 곧바로 필요한 준비물을 챙긴 후,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모라의 신전으로 향했다.
책상이나 의자 같은 물건은 헬리움 쪽에서 준비하면 된다. 공간 마법을 이용해 뚝딱뚝딱 놓는 모습이 꽤 신기하더라.
다만······
'이거 전부 예배실에 둬도 되는 거예요?'
공간이 살짝 넓은, 개인 예배실에 전부 비치했다는 것. 편의상 일반 예배실보다 2배가량 넓었지만 여전히 협소하다.
과연 이곳에서 정말로 정신 수양 및 무력 단련이 되는 것일까. 정신과 시간의 방처럼 문을 통과하면 드넓은 공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다.
[걱정 마.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면 지금보다 더 넓어질 거거든. 현재 너에게 알맞는 세상이 보이겠지.]
'가상 현실처럼 말인가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거랑 비슷할 거야. 시간은 신들조차 건드리기 어렵지만 공간은 어려운 분야가 아니거든.]
하기야 마법 중에도 공간 마법은 있어도 시간 관련 마법은 거의 없다. 그나마 일시적으로 시간을 감속시키는 스테이시스 정도.
엘프와 마족조차 난해하다고 평가하는 마법인데 텔레포트는 밥 먹듯이 쓰는 걸 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지구는 텔레포트조차 못 쓰는데 여기는 그 어려운 걸 해낸다. 언제 봐도 이상한 밸런스다.
'언제 시작하면 되나요?'
[방금 전부터 시작했는데?]
'네?'
[눈을 떠보렴.]
나는 모라의 말을 듣고 눈을 천천히 뜨기 시작했다. 뒤이어 기도를 위해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어······"
새하얗다. 이 말 말고 표현할 단어가 없다.
세실리의 도움으로 가져왔던 가구들을 제외하면 온통 새하얀 공간이다. 가늠할 수 없을만큼 넓은 공간.
나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저벅- 저벅- 저벅-
아까 봤던 예배실보다 훨씬 긴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아직 남아있다. 모라가 말했던대로 공간의 제약을 완벽히 무시한 것이다.
실로 판타지답다면 판타지다운 공간. 나는 한동안 주위를 둘러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윽고 공손히 무릎을 굽힌 후, 눈을 감고 고개를 내렸다.
'모라님?'
[어때. 대단하지? 빨리 찬양해.]
'··· ···'
실제로 찬양하고 싶었는데 저 말을 듣자마자 그 마음이 쏙 들어갔다. 모라도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머쓱하다는 투로 말했다.
[흠. 흠. 앞으로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면 돼. 그럼 힘내렴.]
'모라 님이랑 같이 있는 게 아니었어요?'
[여기는 본래의 세상과 완전히 별개의 공간이라 내가 간섭하는 순간 신성력 소모가 급격히 커지거든. 특정 상황을 제외하면.]
'그 특정 상황이라는 게 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천천히 알게 될 거야.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나 또한 떠나가는 모라에게 인사하려던 찰나였다.
[부디 이번 수행을 통해 경솔함과 책임을 깨우치길.]
'······수행이요?'
내 질문에 모라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바깥으로 떠나간 모양이다.
이에 나는 눈을 뜨며 앞을 쳐다봤다. 여전히 새하얀 공간투성이다.
연참으로 사죄하는 것도 수행이라면 수행인 건가. 하지만 한 달 동안 폴란드 침공까지 쓰는 건 어렵지 않은데.
만약 내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꾸준히 집필한다면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독소전쟁 발발까지 쓸 수 있다.
"······일단 쓰자."
나는 의자에 앉아 집필 준비에 나섰다. 모라가 떠나가면서 남겼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11권은 피파 월드컵이랑 뮌헨 협정. 그리고 홀로코스트의 시작인 수정의 밤. 이 세 가지로 하면 되니······'
저벅- 저벅- 저벅-
이제 막 타이핑을 하려던 순간, 내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어왔다. 혹시 몰라 말하지만 이 공간에는 나밖에 없다.
이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저벅- 저벅- 저벅-
누군가 앞에서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사람을 쳐다봤다.
'뭐지? 누가 들어올 리는 없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 정확히는 새하얀 공간처럼 온 몸이 새하얀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 의자를 뒤로 끌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존재가 무슨 목적을 갖고 이곳을 걸어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루미너스나 모라가 나를 해칠 리는 없을 테니 가까이 가도 괜찮을 터. 나는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 쪽으로 마주 걸어갔다.
이윽고 내가 그 사람 앞에 막 도착했을 때쯤.
저벅- 저벅- 저벅-
하얀 사람은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그대로 앞으로 쭈욱 걸어갈 뿐이었다.
그걸 보며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을 때, 나는 하얀 사람의 등에 무언가 걸려있다는 걸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는 3가지 일을 할 줄 알고.]
[3개의 나라와 계약을 맺었으며.]
[공국을 위해 3년 동안 병사로 근무했습니다.]
[저에게는 3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3달 동안 일을 하지 못 했지만]
[전 그저 하나의 일자리만 있으면 됩니다.]
미국에서 발발한 '대공황'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저 글귀 하나만으로 대공황이 얼마나 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비슷하긴 해도 군데군데 다른 점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마치······
화악!
생각에 빠지려던 순간 새하얗던 공간이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잉크를 똑- 똑- 떨어뜨리는 것처럼 세계가 다양한 색상으로 번진다.
어느새 하나의 '거리'로 변해버린 공간. 미네르바 제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를 오갔으나 이곳은 처음 본다.
건물 양식을 보아하건데 중세에 가까운 외양을 띠고 있다. 나는 황망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그 사람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사람은 미국의 양복이 아닌, 중세에서나 볼 법한 양복을 착용하고 있다.
아니지.
저 사람은 '지금'의 복장을 입고 있다. 이곳 기준으로는 미국의 양복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 건.
다름아닌 나다.
"자, 잠시만······"
나는 다급히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과 어떻게든 다가가야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쨍그랑!
그때 내 귀로 파고드는 소음.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다.
나는 물론, 앞서 나가던 실업자가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퍼억!
사람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