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504화 (505/763)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루미너스와 모라 중에 어느 한 쪽을 편애하지 않는다. 두 분 모두 좋으신 분들인데 편애할 이유가 없다.

루미너스를 자주 찾아가는 이유는 정말로 단순한 것이 그냥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바로 코앞에 신전이 있었으니.

반면 모라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세실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영지로 가던, 헬리움으로 가던 간에 텔레포트는 필수였으니.

게다가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라 내 기도가 끝날 때까지 밖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다.

루미너스의 신전은 걸어서도 시간이 충분히 남기에 많이 여유롭지만 모라는 그렇지 않아 여러모로 수고가 많다.

물론 이것도 옛날 일이지,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진 지금은 두 분 모두 공평하게 방문하는 중이다. 단지 최근에 루미너스를 방문했을 뿐이다.

헌데 갑자기 모라에게 실례를 끼친 일이 있다니.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걸 넘어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피와 강철의 영향이 모라에게도 향했는지 싶어서.

사실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죽음과 안식의 여신인 그녀에게는 가장 바쁜 상황이겠지.

그래서 잔뜩 긴장하며 모라의 신전 안으로 입성했다. 세실리의 말을 듣자마자 뒤로 미룬다면 무슨 일이 날 거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얘. 하나만 물어볼게.]

'······말씀하세요.'

[너 너무 루미너스 오빠만 편애하는 거 아니니?]

'··· ···'

그리고 모라와 대화를 나누자마자 예상했던 타박이 돌아왔다. 나는 그 타박을 듣고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평소 장난기가 많던 그녀라지만 지금은 뭔가 다른 분위기다. 다른 건 몰라도 실망했다는 어조가 강하게 느껴졌으니.

정말로 루미너스만 찾아가서 모라가 실망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걸까.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나로서는 당장 알기 어렵다. 모라와 천천히 대화를 나누면서 이유를 찾는 게 답이다.

'······그럴 리가요. 두 분 다 좋은 분들인데 어째서 제가 편애를 하겠어요?'

[그럼 그런 중대한 사항을 루미너스 오빠에게만 물어보려고 했어?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어······'

할 말이 없네. 모라의 핀잔을 듣고 속으로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민족자결주의 파동을 억누를 수 있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루미너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루미너스 신전과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빠른 시일 내에 조언을 구할 수 있었을 테니까. 모라를 찬밥 취급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모라는 그게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본인의 전령이나 다름없는 세실리에게 부탁까지 한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일 터.

[그 얼빵한 구석이 네 매력이긴 하지. 가끔 우리조차 당황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긴 하지만.]

'··· ···'

[그러나 얘야. 나와 루미너스 오빠는 특정 권능을 관장하는 신 즉, 초월자야. 세상의 흐름에 따라 영향력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지. 여태까지 악마 숭배자라는 공통된 적이 있었기에 우리 둘 모두 큰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이제는 달라. 너도 알잖아? 세상이 흉흉할수록 별의별 일이 터진다는 거.]

모라의 말에 그 어떤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죄다 맞는 말이니까.

대공황에 버금가는 세계 경제 침체로 미네르바 제국은 바람 빠진 호랑이가 되었고, 마키나에서는 혁명이 터졌으며, 스타비르크는 독립을 외치는 중이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벨루아 공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투자자의 시체를 치웠으며 알븐하임도 구멍을 열심히 막고 있다.

내가 쓴 글로 인해 전세계에 파도 수준이 아닌 해일이 몰아친 격. 필멸자의 신앙을 먹고 사는 신들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루미너스 님은 괜찮다고, 원래 발생할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것도 맞는 말이야.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공황이 터질 뻔한 걸 방지했으니까. 거품이 더 커지기 전에 터진 거라 부작용도 미미한 수준이고.]

지금도 끔찍한 수준인데 미미하다니. 원래 역사대로였다면 얼마나 심했던 걸까.

[그렇지만 이대로 방치해서도 안 되는 노릇이야. 필멸자인 너에게 이런 말은 듣기 가혹하겠지만 우리는 필멸자를 통해 양분을 얻는 존재. 언급만으로도 힘을 키울 수 있지. 다시 말해 영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힘 또한 강해진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힘은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가고. 이런 식으로 순환되는 구조지.]

히르트, 루미너스, 모라 이 셋은 초월자다. 필멸자는 '따위'로 취급할 정도로 막강한 권능과 힘을 가진 존재들.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여러 제약이 따르나 개입만 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다소 무섭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친절하신 분들이다. 비록 사고라지만 나에게 수많은 편의를 봐주신 분들이니까.

'그 말씀은 이대로 간다면 루미너스 님의 영향력이 강해진다는 건가요?'

[역시 얼빵한 것과 별개로 똑똑하네. 맞아. 이대로 간다면 오빠의 영향력이 강해지겠지. 만약 네가 스스로 선택했다면 모를까, 오빠에게만 조언을 구하고 결정하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잖니?]

'아.'

정말로 안 찾아와서 화가 나신 거구나. 공적인 부분도 있었으나 개인적인 감정도 함께 포함돼 있었다.

모라의 말대로 아무에게도 찾아가지 않고 나 스스로 선택했다면 두 분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

그러나 루미너스만 찾아가고 끝냈으니 모라 입장에서는 울컥하다 못해 속상한 수준일 것이다.

편애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다. 내 생각이 짧았다고 해야 할지, 스케일이 커졌다고 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죄송해요. 제논 일대기 때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아까 말했지만 그때는 악마 숭배자라는, 공통된 적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나 지금은 세상 그 전체를 바꾸고 있잖아? 그러니 앞으로 오빠만 찾아가지 말고 나에게도 찾아와. 나도 조언은 해줄 수 있으니까.]

'그 말은 두 분의 의견이 다르다는 건가요?'

의문을 하나 해결하니 또다른 의문이 나왔다.

두 분의 의견이 같았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완전히 상반되기에 세실리를 보냈을 터.

루미너스는 빛의 신이고, 모라는 어둠의 여신이다. 빛과 어둠은 뗄래야 뗄 수 없지만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

실제로 두 남매는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여러 방면에서 차이가 난다. 이번 사태도 그 이유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나를 부를 이유가 없다.

[······다를 수밖에 없지.]

모라가 힘겹게 대답을 꺼냈다. 대답하기 망설였다는 티가 역력했다.

망설일 필요가 있는 대답인지 싶어 잠시 의아했지만 상황이 그만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항상 말했듯이 선택권은 오로지 너에게 달려있어. 우리는 말 그대로 조언만 할 뿐이지, 어떤 방법을 택할지는 네 마음이야.]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우리가 더 고마운 걸. 엄마가 앞으로 좀 많이 아프시겠지만······]

'··· ···'

저거는 진짜 찔리는데. 마력 기관 도입 이후 산업 혁명이 터진다면 자연을 해치는 일이 상대적으로 빈번해질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시험'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작정 자연을 해친다면 초대형 몬스터에게 호되게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보다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해야 된다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내가 너에게 부탁할 건 한 가지야.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일주일 안에 막대한 분량을 쌓는 것. 그리고 그걸 통해 스타비르크의 불씨를 일시적으로 꺼트리는 것.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반대로 루미너스 님은 사태를 지켜보자는 쪽이겠네요?'

[그렇지.]

'음······'

어째서 루미너스는 사태를 지켜보자는 쪽을, 모라는 불씨를 꺼트리자는 쪽을 권유하는 걸까. 조금 궁금해진다.

루미너스는 빛과 희망의 신, 모라는 어둠과 안식의 여신이다. 태생부터 서로 반대되는 분들이니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가만 보면 루미너스 님은 굵직한 전쟁에 많이 참여하긴 하셨지?'

[헙······]

응? 내가 잘못 들었나?

'무슨 말 하셨나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럼 잘못 들었나 보네. 나는 모라의 답을 듣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아까 말했던 거에 이어서 루미너스는 역사적으로 굵직한 전쟁에 다수 참여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와 가까운 사람들이 대개 루미너스를 신봉한 것이다.

루미너스의 신성력은 다양한 효과를 보여주지만 그중 대표적인 건 '신체'와 관련된 분야다.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게임의 버프마냥 특수 능력을 부여한다거나, 아니면 외상을 말끔히 치료하는 등.

신체가 재산 그 자체인 전사들이 신봉할 수밖에 없는 효과로 넘쳐난다. 당연히 이 전사들은 수많은 전투 혹은 전쟁에 참여했을 테고.

'반면 모라 님께서는······'

'안식'이라는 수식어처럼 평화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정신적인 분야는 물론, 평화와 매우 가깝다.

광기에 찬 세이비어가 전역을 휩쓸었을 당시, 무력하게 학살당하던 마족을 보호해줬으며 그 이전에는 다크 엘프를 보듬어주셨다.

무엇보다 어둠 밑에서 활약할지언정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끽 해봐야 모라를 신봉하는 자가 암살을 주도했다는 것 정도. 어쨌거나 전쟁과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건 변함이 없다.

'전쟁과 평화도 서로 반대되는 상황이니까. 이런 면모에서도 차이가 나긴 하겠네. 그러면 모라 님께서는 피와 강철을 싫어하시는 건가?'

[아, 아니! 그럴 리가! 오히려 오빠가 더 싫어할 걸?]

지금까지 내 속마음을 읽던 모라가 심히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는 외침이라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깜짝 놀라는 건 덤이고.

'그, 그런가요? 의외네요. 그런데 루미너스 님이 싫어한다는 건······'

[오빠는 신경 쓰지 마! 넌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쭈욱~ 집필하면 되거든. 아! 겸사겸사 나치 독일의 만행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만행도 밝히는 게 어떠니? 개개인은 정의를 위해 전쟁을 한다지만 국가적으로는 말이 많았잖아?]

말을 돌리려는 게 티가 났지만 그녀의 의견도 일리가 있다. 홀로코스트가 워낙 큰 파장을 낳았을 뿐이지, 소련이 행한 전쟁범죄도 만만치 않았으니.

여기에 일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인륜을 저버리는 짓을 펼쳤고, 그 미국조차 전쟁범죄는 아니더라도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이 있다.

무엇보다 '전쟁'은 사람을 피폐하다 못해 완전히 망가뜨린다. 미군조차 PTSD로 망가져서 본인도 모르는 범죄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

전에 강조했듯이 나는 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피와 강철을 집필하는 게 아닌,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집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주인공처럼 보이게 만든 것도 그 일환이다. 내가 이런 악마를 지지했다는 충격을 주려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전쟁을 미화하려는 생각은 없으니까요.'

[정말 고마워. 그럼 조용히 지나가기를 원하는 거지?]

'제가 저지른 것도 있으니 이제는 책임을 져야죠.'

원래부터 책임을 질 방향으로 노선을 잡았다. 이대로 방치했다가 독립전쟁이라도 터진다면 리나가 쓰러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대공황이 약간 억까이긴 하지만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마력 기관을 당장 도입하라는, 산업 혁명을 좀 더 앞당길 필요가 있다.

'이 정도는 괜찮겠죠?'

[마력 기관 공급에 차질이 생길 걸? 직접 만드는 건 힘드니 마키나로부터 공수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광부를 포함한 원자재 관련 직종은 취업난이 아니라 구인난이 생길 거고.]

'이런 씹. 아, 죄송합니다.'

뭐 하나 되는 게 없네. 내가 다급히 사과하자 모라는 웃으며 괜찮다고 달래줬다.

'어쨌거나 일주일 내에 제가 원하는 분량까지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죠? 회귀까지 가능하다고 했으니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거 아니에요.'

[음······ 그렇긴 한데······ 네가 조금 아니, 많이 힘들 거야.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을 따로 설정하고 그 안에만 박혀있어야 되거든. 게다가 우리가 아닌 네 신성력을 소모하는 형식이라 출입은 너만 가능해.]

정신과 시간의 방인가. 내 신성력을 소모한다는 것만 빼면 듣기만 하면 딱 그것과 비슷하다.

'신성력 소모가 많이 심한가요?]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드는 거니 심하긴 하지. 물론 회귀를 하는 게 아니니 네 신성력이 차는 게 더 빠를 거야. 식사도 따로 할 필요가 없고, 잠도 잘 필요가 없지. 말 그대로 정신 수양을 위한 곳이긴 한데······]

'괜찮겠네요.'

지금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거다. 그런 거라면 일주일 내에 폴란드 침공까지 집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라는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약간 애매하다는 투로 나에게 넌지시 의견을 물었다.

[괜찮겠니? 미리 말하지만 시간은 우리조차 건드리기 난해한 분야야.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어.]

'나올 수는 있는 거죠?'

[네가 지정한 시간이 전부 끝나면 밖으로 나올 수 있어. 바깥의 시간과 안의 시간을 따로 설정할 수도 있고.]

모라의 설명은 연이어 이어졌다. 바깥의 시간이 하루가 흘렀을 때 안쪽의 시간은 일주일이 흐를 수도 있고, 보름이 흐를수도 있다. 이건 내가 원하는 대로 설정하면 된단다.

다만 여기서도 차이가 난다. 안쪽에서 일주일이 흐른다고 가정했을 때, 바깥에서 하루가 흐르는 것과 이틀이 흐르는 것 또한 정할 수 있다고.

이건 두 공간끼리의 시간 차이에 따라 신성력 소모가 극과 극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럼 바깥의 시간 기준으로 하루 동안 제가 정할 수 있는 시간의 폭은 얼마나 되나요?'

[길게 잡아봐야 3년?]

예상보다 훨씬 긴데. 나는 순간 떨떠름해졌다가 혹시 몰라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회귀는 얼마 전으로 할 수 있죠?'

[지금 기준으로 한 달이야. 시간역행을 쉽게 보면 안 돼. 흐르는 물줄기를 느리게 만들 수 있어도 거꾸로 흐르는 것도 힘들잖아?]

명쾌한 비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무튼 모라의 도움도 받을 수 있겠다, 남은 건 준비밖에 없다.

[이 기회에 저 얼빵한 구석도 좀 고칠 수 있겠지.]

'저요?'

[그래. 너요.]

'······?'

그냥 방치하는 걸로 정할까. 벌써부터 불안해진다.

'아, 맞다. 모라님. 혹시 몰라서 세 번째 선택지가 있어요. 연재 완전 중단이라고, 이것도 나름······'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 당하기 싫으면 그냥 써.]

'네.'

이제 저런 농담은 못하겠네. 나는 한껏 찌그러지며 예배실 밖으로 나섰다.

'편집자가 두 명이나 생긴 기분이야.'

그 편집자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신들이라는 게 흠이지만.

*****

[과연 이게 맞는 일일까?]

한 여인이 자책하듯이 말한다. 그녀는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가는 아이작을 말없이 지켜봤다.

정말로 이게 맞는 일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그를 위한 거라지만 본질적으로는 신 즉, 자신을 위한 계획이었으니까.

조금이라도 언질을 했다면 모를까, 충격 요법을 위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상황.

이러다가 아이작이 자신을 원망하고, 더 나아가 실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그냥 두지 그랬니? 주변이 힘들긴 하겠지만, 그 아이가 뒤늦게라도 책임을 깨달으면 괜찮잖아. 우리는 늘 그렇듯이 조언과 충고를 하면 그만일 거고.]

모라의 곁에서 어느 한 남자가 무덤덤하게 얘기한다. 이에 그녀가 눈을 꿈틀거렸다가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라의 쌍둥이 남매이자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 그는 모라와 달리 아이작을 이대로 두자는 의견이었다.

[······나도 알아.]

어둠과 안식의 여신이 작게 대답한다. 아까의 중얼거림을 봤던 것처럼 그녀도 내심 이게 맞는 건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평화'의 여신으로서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마키나 혁명과 대공황을 보았듯이 이미 전세계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 흔들림이 점차 불안해지면 균열이 발생하고, 그 균열은 곳곳에 남아 거대한 화마가 되어 세계를 집어삼키겠지.

'평화'를 관장하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눈 감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모라. 전쟁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법이야. 그리고 인류는 그 과정을 통해 한층 더 성숙해지겠지. 그 아이도 그걸 보며 뒤늦게나마 경각심을 가질 거야. 굳이 고행을 줄 필요까지는 없어.]

[그러면 이대로 넘어가자? 누구 좋으라고? 근 100년 동안 전쟁이 거의 없어서 아주 심심했다 이거지?]

루미너스의 말에 모라가 은은한 분노를 담으며 그를 쏘아붙였다. 평소 장난기가 많은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반응.

루미너스는 그녀의 분노에 침묵을 고수했다. 전쟁과 평화. 너무나도 상반된 상황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둘 중 하나라도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들.

이대로 방치하면 루미너스에게, 반대라면 모라의 영향력이 커질 터. 그리고 아이작은 모라의 손을 들어줬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오빠는 좋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에게는 의무가 있어. 세계를 평온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의무가.]

[이 일로 그 아이가 원망해도? 너도 알다시피······]

[알아.]

루미너스의 말을 신경질적으로 끊어버리는 모라. 뒤이어 그녀는 기숙사로 복귀한 아이작을 쳐다봤다.

[지금으로서는······]

잠깐 말을 흐렸던 모라는, 자신감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잘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미래를 보는 신이 할만한 말은 아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