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 아르웬 너는 너만의 스타일을 찾는 게 좋을 거야. 히틀러의 연설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파도라면, 너는 잔잔하지만 모든 걸 덮는 밀물이니까. 알겠지."
[음······ 알겠다. 아쉽긴 하지만 그대의 조언이니 유념하도록 하마.]
테이블 위 통신 구슬 너머로 아르웬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런지 약간 잡음이 끼었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는 그대로다.
거리가 멀어도 특정 마법을 부여한다면 쌍방통신이 가능한 통신 구슬. 거리가 멀어도 특수 처리만 한다면 대화가 가능하다.
파앗-
이윽고 구슬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면서 통신이 종료됐다. 통신이 종료되자 세실리가 손가락을 튕기면서 구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전자기학이 발명된 것도 아니면서 통신이 가능한 이유를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른다.
단지 엘프가 최초로 발명했다는 것과 '텔레파시'의 원리를 이용했다는 것만 알 뿐이지.
엘프는 머나먼 고대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기초 학문을 마련했으며 물리와 수학에 한해서는 넘보지 못할 영역을 갖고 있다.
애당초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마저 수학적으로 표현할 정도이니. 학문 자체만 따지자면 지구보다 고도로 발달돼 있다.
"누나. 그 통신 구슬은 국가지도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거지?"
"응. 게다가 구슬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해. 나와 아르웬 여왕은 본래부터 뛰어난 마법사이니 괜찮지만."
"대중에게 보급은 안 되는 거지?"
내 질문에 세실리가 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기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얘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네가 살던 세계랑 이 세상이랑 은근히 비교하려고."
"아냐.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
"이게 보급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마법사여야만 가능해. 그것도 엘프나 마족 기준으로 '마법사'라 칭해질 정도로 전문적으로 교육받아야 하지. 일반인에게도 보급하는 건 꿈에도 못 꿔."
세실리의 말처럼 지구의 과학자들이 바보라는 건 절대 아니다. 그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 눈에는 지구의 과학자들이 괴물로 보일 것이다.
당장 아르웬과 연결시켜준 통신 구슬마저 텔레파시의 원리를 이용한데다가 마법사의 도움마저 필요하다.
반면 마법은커녕 마나조차 없는 지구에서 발명된 물건이 라디오, 무전기, 텔레비전, 컴퓨터,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이다.
기초 학문이 탄탄하다지만 감조차 못 잡는 경우가 부지기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각할 때마다 신기해. 도대체 너희 세상은 어떤 천재들이 등장했길래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을 발명한 거니? 그러면서 정작 텔레포트는 하지 못하고."
"그 소리를 과학자들이 들었다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걸?"
"신기한 건 신기한 거야. 마법도, 마나도 없는 세상이잖아. 그런 곳에서 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
"생소하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다. 인류는 사회와 적응의 동물이라고, 불편함도 잠시 난 이곳에 완벽히 적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는데, 어디에 태어나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 관계라는 것이다.
생활의 불편함? 그정도는 5년만 지나면 금방 적응된다.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으나 이것도 금방 적응했다.
하지만 인간 관계는 아니다. 다행히 화목한 가정에서 환생한 덕분에 곤란한 점은 없었지만 그 외가 문제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다른 점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 최소한의 인간 관계만 유지했다.
최근에서야 완전히 감화되어 정체도 밝히고 사교회도 나갔으나 그전까지 방구석에 숨어 글만 썼다.
"아까 전에 공개처형 부분도 그렇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많이 딱딱해. 어쩌면 여기보다 답답할 수도 있지."
"흠······ 그럴 수도 있겠다. 거긴 마법도 없으니 불편한 점이 더 많겠네. 그냥 이대로 아이작이랑 사는 게 훨씬 좋겠다."
세실리는 그리 말하면서 은근슬쩍 내 팔을 붙잡았다. 말랑말랑한 흉부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는 그녀의 애교에 피식 웃으면서 말없이 뿔을 만져줬다. 악주기가 지나서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한 뿔.
"흐응."
마족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 표시를 해주자 세실리가 야릇한 비음을 흘린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얹는 것이 아닌가.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오니 몸이 달뜨는 모양이다.
이에 나는 허벅지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았다. 지금 당장 침대로 직행하는 건 아니어도 조금씩 분위기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마리도 딱히 제지할 생각이 없었는지 흥, 하며 투정을 부리면서도 떼어내지 않았다. 어차피 곧 있으면 본인도 똑같은 일을 할 테니까.
"아이작."
"응."
"우리가 행복하게 해줄게. 전생의 일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
순간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을 끔뻑였다. 슬쩍 세실리를 쳐다 보니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손만 잡고 있다.
혹시 중간에 오해가 갈만한 이야기가 나왔는지 골똘히 생각했으나 그런 적은 없다.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에 나와 이어진 여자들밖에 없어서 그런 건지 도통 모르겠다.
'대체 또 무슨 착각을······ 에휴. 됐다.'
이제는 해명하기도 지친다. 굳이 분위기를 깨뜨릴 필요도 없고.
대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반응하는 게 좋겠지. 나는 세실리와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어이쿠. 너무 낮은 톤으로 말했나.
세실리는 내가 그리 답하자마자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러면서 내 붙잡은 손에 힘을 더 강하게 주기까지.
무어라 해명하고는 싶은데 여기서 입을 열었다간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 꾹 다물었다.
"······행복하지?"
길고 긴 침묵 속에서 나온 질문.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전생에 비해 너무 행복한 나머지 꿈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그래서 가끔씩 두렵기도 하다.
자고 일어나면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있을까봐. 주변과 완전히 단절된 채 고립됐을까봐.
'잘 때 껴안는 버릇이 있다고 했었나?'
나와 잠자리를 가진 여인들의 말로는 그랬다. 깊은 잠에 빠진다면 항상 팔과 다리로 껴안는다고.
조심스레 떼어내도 어떻게든 달라붙는다. 아마 이것 때문에 오해가 더 깊어졌을 수도 있다.
'근데 이건 진짜 외로워서 그런 거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홀로 살면서 생긴 잠버릇이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겠는데 외로움은 버티기 어렵더라.
그렇다 해서 친구와 선뜻 만나기도 힘들었다. 만나려면 만날 수 있었지만 그냥 내가 포기했다.
여자친구는 뭐······ 알다시피 군대에 있을 때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고. 객관적으로 보면 외롭디 외로운 인생이긴 하다.
소설을 꾸역꾸역 쓴 게 기적일 정도였지. 그것마저 완결내지 못 하고 여기로 넘어왔지만.
아마 '20대 청년의 고독사. 갈수록 증가하는 청년들의······'라는 타이틀로 뉴스거리가 됐을 거라 본다.
"행복하지.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내 솔직담백한 대답에 세실리는 물론, 마리와 아델리아도 안심이 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반응들에 피식거렸다.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사람을 보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건지.
그만큼 그녀들이 나를 아껴준다는 의미이니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행이다. 만약 불편한 게 있다면 바로바로 얘기해줘. 우리가 다 할 테니까. 알겠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내가 애도 아니고."
"우리 아이작 몇 살?"
와. 이럴 때 나이를 들먹이네. 나는 익살스레 묻는 세실리에 어이가 없어져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띨 뿐이다. 반으로 접힌 붉은 눈동자에는 애교가 가득했다.
결국 포기하는 건 내 쪽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았어. 그래도 불편한 건 없을 거야. 지금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걸?"
"정말로?"
"응."
"그러면······"
말 끝을 흐리며 나에게 천천히 밀착하는 세실리. 우아하게 접힌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레 빛난다.
이윽고 그녀의 가슴 사이에 내 팔이 끼어들어 갔을 때쯤, 그녀가 색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가 좀 더 만족시켜줄게."
몸이 절로 뜨거워지는 그녀의 속삭임도 잠시, 마리와 아델리아가 서서히 나에게 다가왔다.
먼저 마리가 두 손으로 내 몸 구석구석 훑기 시작하고, 아델리아는 뒤에서 나를 껴안는다. 그녀도 손으로 내 몸 곳곳을 훑었다.
중간에 화장실을 간 적도 없는데 세실리가 신호하자마자 다가오는 그들. 나는 당황도 잠시 곳곳에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에 눈을 감았다.
'······이제는 경이로운 수준이네.'
축구 명감독조차 감탄할 빌드업이다.
*****
피와 강철 7권과 8권은 유대인을 탄압한다는 논란이 있을지언정 히틀러를 향한 지지를 잃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사유 조약으로 금지되었던 라인란트 재무장이 실시되면서 열광하기 바빴지.
게다가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하여금 베르사유 조약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는 게 가장 컸다.
이대로 간다면 독일이 군사력을 키워 힘을 키우는 건 일도 아닌 수준.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느꼈을 때, 또다른 의문이 하나 튀어나왔다.
[히틀러가 정복 전쟁을 한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다시 말해 군대의 민낯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
[제논의 친부는 과거, 붉은 사자로 유명했던 마이샬 남작이다. 그에게서 조언을 듣는다면 괜찮을 것.]
[하지만 과학과 문화가 다르지 않은가? 사회조차 다른데 군대가 똑같을 리는 없다.]
'군대'를 어떻게 묘사하냐는 것. 단지 '어디 어디를 정복했다' 수준으로 끝나지 않고 치열한 전투 현장을 묘사할 거라는 추측이다.
무엇보다 히틀러 본인부터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은, 보헤미안 상병이었다. 군생활 묘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지극히 동감하는 부분이다. 세상이 완전히 다른데 군생활도 똑같을 수가 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활은 달라도 근본은 똑같다. 군대는 똑똑한 사람마저 등신으로 만드는 기적의 집단.
갈구는 선임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부조리가 곳곳에 널려있으며, 그것이 대물림되어 또다른 부조리를 낳는 곳.
"현역 시절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예. 대신 전투가 아니라 생활에 대해서요. 군대는 별의별 부조리가 있지 않나요?"
"흠······"
그래서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정했다. 남는 건 시간이요, 널널한 건 공간이라 아버지를 기숙사로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중간에 멈췄던 아델리아의 훈련도 필요하다. 명분 자체는 충분하다.
마음 같아서는 클라크와 아리엘도 부르고 싶었으나 그러면 공간이 너무 비좁아진다. 듣자하니 둘이 잘 노는 중이라 부르기에도 미안하고.
어쨌거나 아버지는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내 얼굴을 보며 의문을 품었다.
"혹시 전에 물었던 그거 때문이냐? 똥 싸러 간 병사를 실종 신고해서 전쟁이 터졌다는 거?"
"그것도 있지만 워낙 괴악한 사건 사고가 터져서요. 아버지마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처음에는 그랬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명분이 필요했다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물론 지휘관이 머저리겠지만."
"··· ···"
그 머저리가 훗날 임팔 작전의 사령관이 됩니다. 확실히 그 분은 중일전쟁 때도 싹수가 보이긴 했다.
"아무튼 부조리도 부조리지만 별의별 또라이가 많긴 했단다. 나도 그때는 왜 그랬지? 싶은 것도 있고."
"알려줄 수 있나요?"
"말해주기 좀 부끄러우니 너부터 말하거라. 너도 군대를 갔다 왔잖느냐."
앗. 치사하게. 나는 아버지의 제시를 듣고 과거를 상기했다.
다시는 가기도 싫은 군대. 오줌조차 그 방향으로 누지 않다는 명언으로 유명한 집단.
이제는 20년도 더 된 기억이라 흐릿하나 아이러니하게도 강렬했던 기억은 죄다 군대에 남아있다.
예를 들자면······
"순찰을 돌 때 선임이 새를 사냥하겠다고 대검을 날려먹은 적이 있습니다."
"잡았냐?"
잡았기는 무슨.
"아뇨. 새가 대검에 박힌 채로 도망가서 영창만 갔어요."
"허허허."
만창 갔다. 내 대답에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흘린다.
평소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어서 몰랐는데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으셨다.
뒤이어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본인의 '썰'에 대해 풀었다.
"그런 놈들이 많긴 했지. 전에 말했던가? 북부 지역은 땅굴을 조금만 파면 검은 물이 나온다고."
"아. 네. 야만수인이 그걸로 화공을 한다는 것도 들었어요."
"그래. 화공에 이용될 정도로 불에 잘 탄다는 특징이 있지. 그걸 이용해 장작을 피우려 시도했단다. 그때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겨울에 버티기 어려웠거든."
뒤이어 나온 이야기는.
"근데 검은 물을 너무 많이 부은 나머지 폭발해버렸지. 기지 전체가 불에 타고 장난이 아니었단다. 다행히 야만수인이 습격하지 않아 큰 피해는 없었지만."
"누가 그랬어요?"
"내가."
"··· ···"
정말 군대스럽다는 말밖에 못 하겠더라.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요. 그것 말고 더 없어요?"
"심심풀이로 누가 더 멀리 돌을 던지나 시합했는데 적 족장이 맞아서 죽은 것 정도?"
"··· ···"
적어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