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이 세상의 차이점을 하나 하나 꼽자면 너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몬스터'다.
사나운 짐승도 몬스터에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자연의 여신, '히르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누가 창조했는지 모르지만 히르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몇몇 학자는 3000년 전 마족이 탄생했던 것처럼 몬스터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등장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히르트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빙성을 올려주는 가설이다.
[좋은 몬스터는 죽은 몬스터다.]
몬스터의 행패는 인류,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사상 최악의 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은 저마다 특출난 장점이 있었기에 드래곤, 크라켄, 베히모스 등과 같은 거대 몬스터가 아닌 이상 무난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고블린조차 일상에 큰 위협이 될 정도로 나약하다. 지금도 사람의 왕래가 옅은 마을은 몬스터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게다가 짐승은 검과 창을 이용하여 힘겹게 격퇴할 수 있는 반면, 몬스터는 두 발로 걸어다니고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벌어야 하며, 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순간 그 마을은 궤멸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들은 끈질긴 근성과 단결력으로 문명을 세웠다. 문명을 세우고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도록 마나를 비롯한 다양한 전법을 터득했다.
또한 몬스터로부터 다양한 부산물을 얻을 수 있었기에 모험가 같은 직종이 등장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몬스터의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평범한 사람이 몬스터를 좀 더 쉽게 잡기 위해서는 고품질의 '무기'가 필요한 법. 마나를 사용하지 못해도 좋은 무기만 있다면 오우거의 가죽도 뚫을 수 있다.
그리고 고품질의 무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종족은 단 하나, 드워프밖에 없다.
"우리가 무기 생산을 멈춘다면 당장 미네르바 제국에서 왜 무기를 조달하지 않냐고 압박할걸세. 그럼 우리 입장은 뭐가 되겠나? 비단 제국뿐만이 아니야. 우리가 만드는 물건들은 알븐하임에서도 사고 있어. 어쩌면 헬리움도 우리의 좋은 고객이 될 수 있겠지."
"그럼 그걸 만드느라 고생하는 우리 동족은? 동족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건가?"
"돈을 주잖나. 돈.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돈."
부르주 5세는 탐욕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을 비볐다. 저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가 알 것이다.
에인스는 그의 뻔뻔한 언행에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위대한 발명품이 더 거대한 '공장'을 만드는데 이용된다니.
더 큰 문제는 부르주 5세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제국이 사용하는 무기의 양은 다른 나라에 비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당장 앞에 쌓이고 쌓인 발주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 더구나 북부의 야만수인과 동부의 스타비르크의 동태도 심상치 않다.
결정적으로 미네르바 제국의 영토는 미친듯이 넓다. 그 넓은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의 양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만약 마키나 쪽에서 생산을 멈춘다면 미네르바 제국은 노발대발할 터. 그 명분 앞에 '공장'들은 눈물을 흘리며 일을 하겠지.
무엇보다 제일 화가 나는 점은 부르주 5세가 언급했던 임금. 에인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느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돈이라고? 방금 돈이라고 했나?"
"그래. 돈. 그 돈으로 시원한 맥주도 먹고 편히 쉬면 되잖나?"
"··· ···"
다시 한 번 눈을 감는 에인스. 당장이라도 저 짜증나는 면상에 주먹을 후려치고 싶다.
방금 부르주 5세가 언급한 임금은 드워프들이 일하는 것에 비해 현저히 적은 수준이다.
1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망치질과 풀무질을 하는데 휴식을 취할 수가 있나?
그 뜨거운 용광로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데 시원한 맥주를 마실 시간이 있나?
망치질을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는데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는 있나?
무엇보다 더 좆 같은 점은 안 그래도 적은 양의 임금을 말도 안 되는 구실로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각을 한다던가 중간에 존다면 임금의 10%를 줄인다. 이외에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임금을 줄여 '공장(公匠)'들을 압박한다.
여자와 어린아이라도 공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드워프는 선천적으로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종족.
훗날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한다는 꿈을 품으며 공장(公匠)이 되기를 자처하지만, 그 후에 기다리는 건 끔찍한 연옥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타락한 거지?'
에인스는 감았던 눈을 뜨며 앞의 왕을 바라봤다. 온갖 휘황찬란한 장신구로 장신한 부르주 5세.
드워프의 수명은 인간보다 살짝 긴 300년 정도. 부르주 5세는 종족 전쟁을 겪은 부르주 4세의 아들이다.
하지만 부르주 4세는 각 드워프들에게 본인만의 '창작'을 허락한 반면, 부르주 5세는 창작을 억제하고 '노동'만 강요하는 중이다.
소수의 공장주들만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으며 공장들이 겪는 고난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만약 내 발명품이 공장주들의 손에서 탄생됐다면······'
자신이 마력 기관에 몰두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공장이 아닌 대장장이 즉,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물품이 수작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안에 기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용광로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을지, 불의 온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지 등등. 에인스는 그런 기계를 발명하는 기술자다.
그렇다고 기술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광부도 겸하는 중이다. 하지만 곰곰이 되새겨 보니 광부도 만만치 않았다.
갱도가 무너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혀만 쯧쯧 찰 뿐 제대로 된 보상도 하지 않는 건 기본이다.
임금마저도 시원치 않았다. 단지 오랜 기간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서 전혀 인지하지 못 했을 뿐.
'공장들의 삶을 전혀 몰라.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순간 제논 일대기에 묘사된 드워프 왕, 탐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최고의 창작품을 만들겠다는 욕망을 위해 악마 쪽으로 넘어간 케이스다. 그런 탐욕이 스스로를 잡아먹었고.
하지만 그 왕은 적어도 순수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창작품'을 제작하고 만족스레 떠났지 않았는가.
반면 앞의 왕을 보아라. 드워프의 창작 욕구는 온데간데도 없이 돈만 바라보는 돼지에 불과하다.
드워프가 아니라 드워프의 탈을 쓴 탐욕의 악마. 과연 그를 드워프라 부를 수 있을까.
'이건 아니야.'
안 그래도 노약자와 어린애까지 공장으로 활용되는 마당에 증기 기관이 이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지금보다 더 끔찍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면 드워프로 태어난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증기 기관이 그 끔찍한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다면, 공장의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왕이시여."
이에 에인스는 드물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열자 부르주 5세의 탐욕스러웠던 표정이 약간이나마 바뀌었다.
이윽고 에인스는 눈을 천천히 뜨며 앞의 왕을 쳐다봤다. 열정에 활활 불타는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다소 괴짜 같은 면모를 지닌 '기술자'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사람'의 눈빛.
"저의 마력 기관이 공장들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어떤 혜택을 주실 수 있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군. 다시 말해보게."
"제 발명품을 부디 공장들을 위해 사용할 의향이 없으신지 여쭈어봤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침착해진 에인스에 한 쪽 눈을 치켜뜨는 부르주 5세. 그 옆의 신하도 무슨 생각을 하냐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의중이고 나발이고 가장 중요한 건 에인스의 마력 기관이다. 부르주 5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그는 두 손을 맞잡으며 손가락마다 끼어져 있는 반지를 강조했다. 반면 에인스의 손은 고된 노동으로 쭈글쭈글하고 두꺼워져 있다.
"물론이라네. 자네의 마력 기관만 있다면 공장들도 좀 더 편히 일을 할 수 있겠지. 대신 효율이 늘어난만큼 시간도 늘릴 거라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시간을 늘리는 겁니까? 효율이 늘어난다면 발주 시간도 좀 더 일찍 맞출 수 있지 않습니까?"
"제국이 원하는 물품의 양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네."
"······그렇군요."
스윽-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에인스는 부르주 5세가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의 무례함에 신하가 서둘러 다그치려 했으나, 에인스가 먼저 입을 엶으로서 제지되었다.
"전 이만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력 기관은 마음대로 하십쇼."
"고맙네. 자네의 헌신은 잊지 않도록 하지."
"그럼 그동안 강녕하시길."
에인스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방에서 떠나갔다. 뒤에서 부르주 5세가 킥킥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짧은 다리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인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에인스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왕이 기거하는 왕궁은 산 중턱에 건설돼 있다. 잘못하면 무너지기 쉬운 지형이나 드워프의 초월적인 건설 능력은 가능케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켜져 있는 '대장간'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키나는 야경이 예쁜 곳으로 유명하지.'
하지만 그 야경 속에는 수많은 공장들이 망치질을 하고 있다. 지금도 땅! 땅! 거리는 망치질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가.
반면 왕궁은? 에인스는 아름다움 빛 속에 묻혀있는 비명들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봤다.
왕궁의 불은 대부분 꺼져있다. 중간중간 경계를 위해 램프를 들고 다니는 경비병을 제외하면 왕궁은 잠에 빠져들 시간.
누구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망치질을 하는데, 누구는 편안하게 잠자고 있다.
밤까지 새며 일하는 건 공장들인데 정작 그 돈을 받는 건 공장주들이다.
언제부터 드워프는 장인으로 칭송받기보다 돈에 미친 종족으로 멸시받기 시작했다.
공장을 포함한 다른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못해 화병이 날 법한 편견. 저 편견은 전부 공장주들이 만들었다.
'그깟 돈이 뭐라고. 나는 아니, 우리는 그저······'
마력 기관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괴상하긴 해도 재밌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을 전부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공장들을 전보다 더 괴롭게 만든다니. 마음 같아서는 이 두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
에인스는 가슴 속에서 분노와 냉정이 서로 싸우는 걸 느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이 싱숭생숭한 기분을 시원한 맥주로 풀어버리고 싶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것 같다.
"어이! 에인스!"
"응?"
그때 에인스의 귀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걷던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드니 자신과 마력 기관을 발명했던 친구이자 동료, 한다이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등장에 기뻐하려던 찰나, 에인스는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반갑게 흔들고 있는 손이 뭔가 이상하다. 이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다이의 손을 살펴봤다.
"야. 너 손이······"
"응? 아. 이거? 망치질 잘못해서 뼈가 전부 박살났다. 그래서 잘라버렸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보여주는 한다이. 약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잘려나간 상태다.
정작 본인은 껄껄 웃으며 유쾌하게 반응했다. 드워프 특유의 유쾌함이 돋보이지만 에인스에게는 아니다.
"돈은? 돈은 어떻게 받았어?"
"손가락 잘린 걸로 돈을 어떻게 받냐? 그냥 대충 치료하고 망치질 하러 갔지."
"··· ···"
"그나저나 어디 갔다 왔냐? 얼굴이 왜 이리 죽상이야?"
저게 당연한 거라고? 아니, 보나마나 돈으로 압박해서 출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겠지.
에인스는 꺼져가는 열정이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창작을 향한 열정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보다 더, 그보다 더 상위적인 개념의 열정이 솟구친다.
나라 전체를 뜯어고칠 거라는, 다른 의미의 '창작'이.
"왜 말이 없어?"
"······한다이."
"응?"
"혹시 내가 이상한 걸 만들어도 따라올 자신이 있냐?"
한다이는 에인스의 생뚱맞은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에인스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 표정 속에서 뭔가를 느끼기라도 한 걸까. 한다이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뭘 만들 건데?"
"별거 없어. 기아스는 어디 있는지 알아?"
"기아스는 지금 망치질하고 있을 걸?"
"당장 불러."
원래 아주 작은 불씨를 방치하면.
"아주 크고 아름다운 걸 창작할 거니까."
거대한 화재로 변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