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머즈에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는 소식이 퍼지고 며칠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함과 동시에 기대했다.
그 누구도 선뜻 시행하지 못한 정치 체제에다가 보기만 하면 공평해 보였으니.
전혀 다른 세계에 등장한 정치 체제가 현실에 잘 적응한다면, 다른 것도 되지 않을까? 라는 심리도 깔려 있다.
애니머즈는 다른 종족과 달리 민족성이 상당히 복잡할 뿐더러 현실의 미국처럼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는 나라.
허나 그 미국조차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독립전쟁을 겪었으며 이후에도 완전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대통령을 제대로 정착시킨 건 다름 아닌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으니.
말만 대통령이었지 워싱턴이 집권할 당시에는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 상황을 본다면 그가 꾸준히 집권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능력도 충분하지, 지지도 충분하지, 민심까지 모두 사로잡았으니.
하지만 워싱턴은 딱 2연임만 하고 스스로 내려왔다. 힘을 포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초인'의 영역에 든 사람이다.
물론 이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연임을 하게 되지만 대공황과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다소 특수한 상황이라 넘어갔다.
이후에 3연임 금지법이 생겼으니 미국인들이 얼마나 워싱턴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다.
'잘 정착되면 좋겠지만······'
예상컨데 민주주의를 도입하더라도 독립전쟁 비슷한 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곳도 아니고 민족마다 개성이 넘치다 못해 범람하는 종족, 수인이었으니까.
더구나 수인은 애니머즈 건국 이전만 하더라도 스스로의 무력을 믿고 생활하는, 무법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미국과 비슷한 역사를 걷고 있으나 갈림길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집중해야 될 것이다.
'미국에 대해 설명할 때 워싱턴을 언급해야겠네.'
나는 애니머즈가 민주주의를 도입하든, 군주제를 도입하든, 공산주의를 도입하든 상관없었다.
각기 명확한 장단점을 안고 있는데다가 꾸준히 언급했듯이 세계관 자체부터 다르다.
특히 잠재력이 뛰어난 마나의 존재로 인해 사람마다 총기 한 자루를 들고 있는 것과 똑같다.
그 안에 총알을 장전할지, 그냥 방치할지는 본인들의 자유. 마나를 깨우친 사람은 총을 들고 다니는 셈이다.
'어차피 조만간 민주주의가 개박살나는 걸 보여줄 테니까.'
대공황 이후의 나치당이 정권을 붙잡는 과정. 그 과정은 정말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대공황으로 인하여 정권을 향한 신의를 잃은 군중들. 그리고 그 군중들을 연설과 선동으로 현혹하는 히틀러와 괴벨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40만 돌격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한 주에 250만 마르크가 요구되었으며 나치당 내부에서도 잡음이 많았으니.
이런 고난에도 히틀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나갔다. 그리고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있듯, 히틀러도 열매를 맺게 된다.
1928년 총선에서는 2.6%라는 저조한 성적을 보였지만 1930년 총선에서는 무려 18.3%의 성적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제 2당으로 도약하고, 이걸 통해 자신감을 얻은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대통령 선거 출마를 권유한다.
물론 아쉽게도(?) 전쟁 영웅 힌덴부르크의 지지율이 압도적이라 낙선했지만 히틀러 또한 어마어마한 투표율을 얻었다.
'수권법까지는 귀찮으니까 빨리 마무리하자.'
나치당이 정권을 완전히 붙잡고, 히틀러가 총리의 자리에 앉아 만든 수권법.
수권법은 간단히 말해 히틀러 본인을 헌법 위의 존재로 올려놓는, 그야말로 '무소불위'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법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도저히 생각치도 못할 법이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걸 통과시켰다.
'파펜이 등신짓만 안 했어도.'
수권법 제정까지 정~말 복잡한 정치 싸움이 이어진다. 정치가 원래 그렇지만 표면상으로 민주주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이걸 하나 하나 설명하자니 머리도 아프고 전개도 복잡하니 히틀러를 중심으로 할 예정이다.
중간에 괴벨스도 거하게 사고를 치지만 이건 그냥 흘러가는 식으로 적을 것이다.
'중간에 만주사변에 대한 것도 설명하고.'
중일전쟁의 전신이었던 만주사변. 이것 또한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제국이 저지른 사건이다.
사건 자체만 본다면 일본 제국의 뇌절이라 평가받을 만 하다. 그 뇌절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중일 전쟁까지 간다는 게 흠이지만.
아무튼 수권법 통과와 만주사변을 끝으로 피와 강철 5권은 끝난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치당의 파티가 이어질 것이다.
'동시에 히틀러의 무능함도 조금씩 드러나겠지.'
히틀러는 정권을 붙잡는 능력은 상당히 좋았으나 그 외의 능력은 죄다 평균 이하다.
심지어 망상증 환자에 필적할 정도로 정신이 다소 불안했으며 몸만 큰 어린 아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파펜을 포함한 다른 정치인이 히틀러를 이용하려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히틀러가 역으로 보내버렸다.
과연 이런 면모를 보여줄 때도 사람들이 찬양을 할지, 아니면 의구심을 품을지 기대되었다.
'수권법 이후에는 루즈벨트의 당선도 비춰야겠지.'
수권법이 통과하여 히틀러가 절대적인 권력을 얻은 반면, FDR은 정당한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심지어 FDR은 모두가 알다시피 하반신 마비인데도 대통령이 된 반면 히틀러는 그 유명한 T4 작전으로 모든 장애인을 죽여버린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지만 어쩜 이리 차이가 날까.
미국이 1차 세계 대전으로 대공황을 겪어서 망정이지, 만약 멀쩡했다면 FDR은 독일부터 조져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칼스 씨에게 받을 초상화가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니까······"
이번 초상화는 매우 뜻깊은 초상화가 될 것이다. 수권법으로 '왕'이 된 히틀러와 투표로 '대통령'이 된 FDR의 그림이 나올 테니까.
서로 마주보는 형식으로 그림으로서 서로 간의 대비를 명확하게 보여줄 생각이다.
히틀러의 라이벌이 스탈린이라면 루즈벨트는 최종 보스 혹은 코즈믹 호러였으니.
어쨌거나 피와 강철 5권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고.
"심심하다."
칼스로부터 삽화를 받기 전까지 발매할 예정이 없었기에 심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6권을 바로 적자니 그건 또 뭔가 귀찮다. 매일매일 같은 일상만 반복되다 보니 기분이 무료해졌다.
"심심해? 뽀뽀해줄까?"
"응."
"앙!"
"악!"
그래도 사랑스러운 약혼녀 덕분에 많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내 볼을 깨무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지.
나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면서 마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시시덕거렸다.
보통 날이 가면 갈수록 애인의 사이는 멀어진다는데 우리는 그런 거 없다. 연애를 시작했을 때와 똑같다.
더구나 현재 상황이 마리에게 매우 유리하다. 각자 사정 때문에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없었으니.
"물어도 살살 좀 물어줄래? 아프잖아."
"그럼 다른 곳 물어도 될까?"
"어디?"
"반대쪽! 앙!"
"아악!"
그때문일까. 마리는 지금까지 참았던 애정을 마음껏 발산했다. 학기가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있다.
동거 아닌 동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모자라 잠자리까지 함께 치렀으니까.
말만 별거지 사실상 동거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하는 중이다.
"아이작 볼은 쫀득쫀득해서 계속 물고 싶어. 다른 사람은 이걸 몰라서 다행이다."
"옆에 아델 누나 있는데?"
나는 얼얼한 양쪽 뺨을 매만지면서 툴툴거렸다. 지금 우리 뒤에는 아델리아가 서서 지켜보고 있다.
그에 마리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델리아를 바라보더니 앙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 언니. 아래는 괜찮아도 뺨은 내거니까 탐내지 마. 알겠지?"
"어······ 응. 알았어."
"됐지?"
"어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교는 좋다만 이러다가 볼이 남아날지 모르겠다.
차라리 밤일을 하고 말지. 낮이든 밤이든 지금처럼 열정적으로 애교를 부리나 이때만큼은 나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
정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린다면 매일매일 이런 행복함을 만끽하겠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을 괜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라 칭하겠나. 당장은 행복해도 사람과의 만남은 필수다.
여태까지 꾸준히 언급했듯이 언제까지고 요람 안에서만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
악마 숭배자를 포함해 다양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지만 사람을 만나야 된다.
'당장 나는 괜찮아도 인맥을 다져야 하는 건 변함이 없지.'
인맥을 다지는 것도 있지만 신비주의를 깨부술 필요도 있다. 자꾸만 나를 성자로 취급하는 탓에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쉽게 말해 거품이다. 여기서 거품이 더 끼기 전에 터뜨려야 된다.
내 미래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들 사이에 낳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내 팔에 안긴 채 분홍빛 기류를 뽐내는 마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은은한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다.
"마리."
"왜?"
"너는 사람들 안 만나고 싶어?"
"이미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거물인데?"
"음······"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지는군.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부터 시작해서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까지.
무슨 만나는 인물이 죄다 국가 지도자급이다. 여러모로 인맥 자체도 탄탄하다 못해 강철 같은 수준.
"뭐, 그래도 네 말마따나 우리도 슬슬 공개 활동을 할 필요가 있을 거야. 신비주의는 좋지만 거품도 같이 끼는 법이니까."
하지만 마리도 현재에 안위하지 않고 공개 활동의 필요성을 느꼈던 모양이다.
나처럼 정치를 싫어하는 그녀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밀어둘 수는 없는 법.
마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까지는 괜찮다지만 과연 미래의 자식들도 괜찮을까?
"차라리 나와 주변인에게도 그랬듯이 조금씩 밑밥을 뿌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래에서 온 성자보다는 차라리 환생자가 낫잖아?"
"대체 뭐가 더 낫다는 거야?"
"미래에서 온 성자는 거품이고 환생자는 진실이지. 물론 대놓고 밝히지는 마. 진실은 가족들에게만 알리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런가······?"
정치를 잘 모르다 보니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나보다 경험이 많은 마리의 조언이니 괜찮겠지.
내가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리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거짓보다는 진실이 더 낫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니까. 어쨌거나 사교계에 데뷔하고 싶은 건 맞지?"
"응. 어차피 미래에 내 자식이랑 함께 가야 할 텐데 내가 경험이 없으면 그것 또 이상하잖아."
"알았어. 그럼 아빠한테 말해놓을게."
"······그게 금방 되는 거야?"
사교라는 건 보통 특별한 날마다 개최되는 게 아닌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쯤, 마리가 명랑하게 말했다.
"응. 곧 있으면 우리 아빠 생신이거든. 아마 제국 내 귀족들 대부분이 참석할 걸?"
"그냥 안 하면 안 될까?"
"쫄려?"
"··· ···"
거 참 남자 자존심 건드리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됐지만 어차피 할 것도 마땅히 없던 상황이다.
무엇보다 나를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얼굴만 비춰도 괜찮다.
"그런데 생신이라 했으니 챙겨드려야 할 게······"
"오늘 피임약 먹지 마. 그럼 될 거야. 최고의 선물이지."
"동시에 최악의 선물일 거 같은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듭이 지어지고.
"혹시 모르니 깜짝 방문식으로 하는 게 좋겠어. 괜히 정보를 흘려봤자 좋을 건 없으니."
"알았어."
무슨 이벤트 몹이 된 듯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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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슷한 시간, 마티우스 후작가.
"칼라스 자작."
"예! 말씀하십시오!"
"부디 레킬리스 공작에게 예산을 달라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해도 상관없어. 대신 그 빌어처먹을 포탄 얘기는 하지 마.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후우······"
마티우스 후작은 칼라스 자작의 힘찬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