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앙!
"이 하이에나 자식 어디에 있어!!"
대족장실 문이 부서져 멀리 날아가고, 우렁찬 포효가 안을 가득 메웠다.
단순한 외침 정도가 아니라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
지나이와 발칸은 그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둘 다 깜짝 놀란 표정이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크르릉······!"
호랑이가 매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거친 숨소리를 내뱉는다. 지나이와 발칸은 문을 박차고 난입한 수인을 바라봤다.
매서운 호랑이를 갖다 박은 듯한 얼굴과 2m에 달하는 거구.
그나마 옷을 입어 문명인이라는 구색을 갖춘 지나이와 발칸과 달리, 그의 옷차림은 야만인에 가까웠다.
뼈가 장식된 목걸이와 급소만 간신히 가린 갑옷. 마지막으로 짧은 반바지까지.
누가 봐도 야만인에 가까운 행색이었으며 거친 전사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고 있다.
"역시 가장 빨리 찾아왔네. 하긴 이런 일에 순순히 넘어가지는 않겠지. 일단 저기 앉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난입에도 지나이는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 반대로 미리 준비한 좌석을 가리키며 권유했다.
하지만 호랑이 수인은 그 낯짝 두꺼운 행동에 더욱 화가 났는지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흉악하게 생긴 호랑이 얼굴이라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는데 더 험악해졌다.
"앉아라. 대족장의 명령이다."
호랑이 수인이 지나이의 명령에도 착석하지 않자 발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에 호랑이 수인은 험악해질대로 험악해진 표정으로 시선을 발칸에게 옮겼다.
발칸은 팔짱을 낀 채 무뚝뚝한 얼굴 그대로 호랑이 수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하여 시작된 사자와 호랑이의 기싸움.
약 30초 동안 시작된 대치 상황 속에서, 먼저 꼬리를 내린 건 호랑이 수인 쪽이었다.
"······네놈은 대체 언제까지 저 놈의 종으로 살 생각이냐?"
그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발칸에게 물었다. 이에 발칸이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난 선조가 세운 나라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흥. 애국자 납셨군."
신랄하게 비꼰 호랑이 수인은 지나이가 권유했던 자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자리에 착석한 그는 지나이를 한 번 노려보았다가 시선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나이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깐족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너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조금만 참아줘. 알겠지?"
"당장이라도 네 놈의 모가지를 따버리고 싶다만? 그래도 되나?"
"그러고 싶으면 미네르바 제국 위에 있는 북부 지역으로 가던가."
미네르바 제국의 북부 지역은 모두 알다시피 야만수인이 살고 있는 곳이다.
건국왕 히크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지에 흩어진 수인을 한데 모았을 당시에도 끝까지 규합을 거절했던 민족.
그 민족은 전통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끝까지 남게 되었으나 지금은 그저 야만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야만인인만큼 호랑이 수인이 선호하는 '전통'에 충실하다. 그래서 지나이가 저런 말을 한 거고.
"······그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을지 두고 보겠다."
그에 호랑이 수인, 아누만 타이그리는 살벌한 목소리로 지나이를 위협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눈치가 없는 사람이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뭐야? 입구가 왜 이 모양이야? 원래 개방형이었나?"
"보나마나 아누만 그 자가 저지른 짓이겠지."
"허허허허. 혈기왕성한 타이그리 일족답구만."
이후로 지나이가 미리 초청했던 인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사자 수인과 호랑이 수인에 비견되는 신체 스펙을 지닌 곰 수인부터 시작해서 개, 고양이, 토끼, 늑대, 여우, 소, 원숭이 등등.
각 일족을 대표하는 '족장'들은 지나이의 지시에 따라 대족장실에 모여들었다.
"뭐야? 저 냄새나는 놈도 왔어?"
"입만 산 버러지가 꼴에 족장이라고 찾아왔군."
"뭐? 너 말 다했냐?"
물론 서로 하하호호하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는 건 기본이고 위협까지 해댄다.
지나이를 혐오하는 수준으로 싫어하는 아누만처럼 서로 원한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이건 예로부터 이어져 온 원한 관계여서 지나이조차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전통이라면 전통이라 할 수 있겠지.
어쨌거나 지나이가 초청했던 족장들이 대족장실에 모이고, 지나이는 그들을 한 명 한 명 살펴봤다.
대족장과 더불어 실질적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발칸까지 있어서 그런지 대놓고 싸우진 않았으나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아는 얼굴들은 모인 것 같네. 내가 당신들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알고 있지?"
"그 말도 안 되는 정책을 도입시킬 생각이라면 난 무조건 반대할 거다."
지나이가 입을 엶과 동시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누만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평범한 수인도 아니고 예로부터 사자, 곰과 함께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호랑이 수인이 말하니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누가 보아도 지나이를 향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모습. 단순히 마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듯한 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허나 지나이는 전혀 개의치 않은지 특유의 능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무작정 반대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하나? 모두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건국 이념에 어긋나는 거니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래? 태생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게 왜 건국 이념에 어긋난다는 거야?"
능청스러운 말투가 짜증났던 것인지 아누만의 미간이 콱- 좁혀졌다. 동시에 살벌한 기세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하지만 대놓고 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누만의 맞은편에는 발칸이 떡하니 지키고 있었으니.
게다가 아까 전과 달리 족장들이 모여있었으니 함부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힘들다. 아누만은 최대한 화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건국왕께서 애니머즈를 어떻게 건국했는지 네 년도 알고 있을 텐데? 건국왕 히크께서는 각지에 흩어진 동포들을 모아 나라를 건국했지. 하지만 그 분께서 힘이 없으셨다면 애니머즈는 탄생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힘이야말로 애니머즈가 건국할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지. 히크가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국가를 세웠던 것처럼, 우리 또한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필요하겠지."
"그러면 국가가 발전되기 힘들 텐데?"
"하지만 개인 즉, 수인이라는 종족은 발전할 수 있다. 국가가 우리를 감싸고 있지만 우리의 본질은 결코 숨길 수 없다.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는가? 우리 수인 개개인의 힘이야 말로 국력이라는 것을!"
만약 아이작이 들었다면 이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거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딱 맞는 사상 아니냐고.
실제로 애니머즈의 건국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지구의 '미국'과 정말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을 비롯해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이민자들이 모이고 모여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했던 것처럼, 애니머즈 또한 비슷한 과정을 따랐으니.
단지 미국은 본래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게 차이점이다. 또한 애니머즈는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아닌 '왕'이 등장한 나라다.
"투쟁! 우리 수인에게 있어서 투쟁은 불가피한 일이다. 히크는 투쟁으로 수많은 강자들을 꺾고 나라를 건국했지. 심지어 애니머즈가 건국된 이후에도 우리 수인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가 전대 대족장의 홀름강 사태지. 나라가 사분오열 쪼개지기 직전까지 간데다가 미네르바 제국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벼르는 중이었고 말이야."
지나이는 수인의 전통과 문화에 충실하다 못해 열광하는 아누만의 논리를 간단하게 파훼했다.
전대 대족장 홀름강 사건은 애니머즈 전체가 마비될 정도로 충격적인 대사건.
절대 꺾이지 말아야 기둥이 뿌리채 뽑혀나갔으며 누구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 '무력'이었다는 것이다. 힘만 있다면 누구든지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다?
지나이가 간신히 진정시켜서 망정이지 이세계판 삼국지가 등장할 뻔한, 사상 초유의 대사태다.
"오히려 좋지 않은가? 전쟁은 그야말로 투쟁을 위한 곳. 히크가 그랬듯이 나라가 다시 한 번 건국된다면, 우리 수인은 옛날보다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종족 전쟁 당시 인간들에게 속절없이 학살당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알기 쉽겠지."
"··· ···"
기가 차서 할 말이 없어졌는지 지나이는 피식거렸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아누만의 말을 경청하는 수인들이 많았다는 것.
실제로 그의 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수인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의 말마따나 수인의 인생에서 투쟁은 불가피하니까.
문명이라는 거대란 우리에 가둬놓았을 뿐, 지금까지도 곳곳에 투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투표권을 준다면 투쟁을 하지 않겠지. 왜? 가만히 있어도 주니까. 그러면 우리들은 자연스레 약해질 것이고 예로부터 이어져 온 이념 또한 잃어버리겠지. 그런 것도 포기하면서까지 민주주의가 가치 있는 제도인가?"
"꼭 싸워야 성이 풀리냐?"
"난 그저 수인이라는 종족에 충실할 뿐이다. 투쟁이 모든 걸 해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서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지."
아누만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유는 몹시 간단하다. '투쟁'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해도 투표권을 주니까.
민주주의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꾸준히 언급했던 일종의 차별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와 일반인에게 같은 투표권을 주는 게 과연 공정한가?
특히 수인은 다른 종족보다 태생적인 무력이 강한 존재. 약육강식이 뿌리 깊게 내려앉았으며 문화와 전통이라는 이유로 숭상받고 있다.
"아누만 족장 말이 맞아. 가만히 있는 놈들에게 투표권을 왜 줘야 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놈들에게 줄 건 없지."
"하다못해 제논 일대기에 등장하던 카인드는 머리라도 잘 굴렸어."
때문에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족장들이 조금씩 입을 열었다. 지나이는 그들이 말을 전부 나눌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수인은 이게 문제다. 다른 종족이 본다면 야만적이라 할 법한 사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었으니.
히크가 아니었더라면 수인은 종족 전쟁 당시 씨가 말랐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에 스며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끝까지 미네르바 제국 북부 지역처럼 끝까지 야만인으로 생활했겠지.
'머리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안 쓰니까 답답해 죽겠네.'
몸이 너무 좋은 나머지 머리를 안 써도 너무 안 쓴다. 조금만 생각하면 될 것을 귀찮다고 쓰지 않는다.
이에 지나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입을 열려던 찰나,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족장 중 한 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대족장의 제도에 찬성하오."
발칸처럼 묵직하지도 않고, 아누만처럼 발성 자체가 큰 것도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울리는 듯한 목소리.
동굴 같은 저음의 목소리가 대족장실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수근거리던 족장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다.
동굴 목소리로 입을 연 수인의 정체는 다름아닌 웅족. 즉, 곰 수인이었다.
둥글둥글한 곰의 얼굴로 하여금 순한 인상을 풍겼지만, 다른 수인보다 압도적인 풍채를 갖고 있어 위압감이 사뭇 남달랐다.
"민주주의에 찬성한다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른 민족도 아니고 웅족인 네가 그리 말하니 더 이해가 안 가는데?"
아누만도 썩 당황스러웠던 건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을 보아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다.
이에 웅족, 카누 베어그릴스는 동굴과 같은 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누만 족장의 의견처럼 우리 수인에게 있어서 투쟁은 뗄래야 뗄 수 없소. 히크도 투쟁으로 각지에 흩어진 수인을 규합하여 애니머즈를 건국했지."
"··· ···"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상식이오. 히크는 분명 홀름강으로 부족을 들였으나 극히 소수요. 그리고 다른 문명이 절대 수인을 탄압하거나 학살하지 못하도록, '국가'라는 거대한 보호막을 만들었지. 히크조차 투쟁을 수단으로 사용한 마당에 필수는 아니라는 소리오. 우리가 언제까지 야만인으로 살아야 하오? 그곳에 우리 아이들의 안전한 미래는 있는 거요?"
문화와 전통을 고집하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곳에 안전한 미래는 있는 것이냐.
수인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 종족 전쟁 당시 인간들이 자행한 학살극.
인간들도 연합 이전 수인에게 약탈을 비롯한 온갖 악행을 받았기에 정당성마저 부여된 학살극이었다.
야만이 문명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보여준 명확한 선례였으며 히크가 애니머즈를 건국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저 또한 카누 족장의 말에 동의합니다.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건 좋지만, 야만과는 거리를 두어야 돼요."
"지나이 대족장님이 수습해서 망정이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전쟁에 휘말릴 뻔했죠."
"투쟁은 필수가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언제까지 힘으로만 우열을 가릴 수는 없어요."
"선거 제도는 공정하지 않아도 모두에게 공평해요. 반면 아누만 족장께서 말씀하신 투쟁은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죠."
카누의 의견에 동조하는 족장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아누만의 말에 따르는 자들 대부분이 부화뇌동이었다면, 카누는 논리정연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누만이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는 문화와 전통이라는 이름 하에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는 이 힘으로 많은 것들을 얻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대신 힘으로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겠죠. 당장 대족장을 보시오. 그녀는 힘 대신 비열한 머리를 갖고 있었으며, 그걸 나라를 위해 쓰니 어떻게 됐소?"
"아니. 굳이 비열한 머리라 해야겠어?"
중간에 칭찬 아닌 칭찬이 날아오자 지나이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아무튼 이후로도 꾸준히 갑론을박이 오고 갔다.
그러나 아누만이 아니라 카누에 동조하는 의견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나이가 말했듯이 머리를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이들이 많았을 뿐. 더군다나 여기 모여있는 자들은 족장들이다.
최소한 생각이 깨어있는 자들이 있다는 뜻. 덕분에 민주주의 자체를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좋아. 그 빌어처먹을 민주주의.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뭐든지 물어보시오."
"네가 싫어하는 놈이 대족장으로 당선되어도 입을 꾹 다물 수 있나?"
"··· ···"
"그리고 다른 족장들에게도 묻겠다."
아누만은 다른 족장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에 제각기 다른 외모를 지닌 족장들이 그를 쳐다봤다.
"우리 수인은 다른 종족에 비해 너무 많은 민족을 갖고 있지. 그리고 문화와 전통, 심지어 습성마저 달라."
미국과 공통된 장점이자 단점.
"이렇게 많은 민족이 모여있는데 과연 투표로 해결될 것 같나?"
인종의 용광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