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69화 (470/763)

글만 쓰는 기계가 되겠다고 말은 했지만 나도 휴식이 필요한 사람이다. 매일매일 글만 쓰면서 하루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

피와 강철 3권까지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찰져서 무리를 한 거지만 4권부터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4권은 다른 곳도 아닌, 민주주의의 결정체라 부를 수 있는 미국이 등장하게 되니까.

정확히는 결말부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전까지 히틀러의 눈물 나는 똥꼬쇼를 통해 민주주의가 어떤 건지 대충 알려줄 예정이다.

나치당이 제 2당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는 대공황 때문이었으니 전개상 알맞다. 대공황이 터짐과 동시에 미국 쪽으로 시선을 옮길 것이다.

아, 물론 히틀러의 영원한 라이벌 스탈린을 비추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대공황 이전이라 서기장이 되기 전이나 짤막하게나마 비출 계획이다.

또한 '대숙청'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에 발생하는 거니 당장은 필요없다. 지금 중요한 건 대공황 이전 히틀러의 똥꼬쇼 즉, '선거'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자 가장 핵심적인 것. 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선거'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귀족이 영지의 얼굴을 대표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거는 계급과 신분을 막론하고 오로지 정치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거라 받아들이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선거?"

"응. 내가 지난번에 말했던 민주주의의 핵심이야."

"군주들이 권위가 아닌 권력을 내려놓고, 평민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거?"

그러니 관련자와 상의를 하는 편이 낫겠지. 그리고 그 관련자는 무려 제국의 황녀다.

내 초대에 응한 리나는 내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니 뭔가 색다르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옆을 힐긋거렸다. 곁에는 함께 의견을 묻기 위해 마리가 앉아있다.

주물- 주물-

그런데 리나가 앞에서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장난기가 발동한 걸까. 마리는 내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장난을 치는 중이다.

책상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라 리나는 당연하게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하지 말라고 다그치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럴 수도 없다.

그냥 조용히 손만 잡는 것으로 끝내야지. 그러면 당분간은 잠자코 내 손만 잡는 편이다.

"글쎄······ 난 잘 모르겠네."

마리의 장난을 받아주는 동안 리나가 애매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검지 손가락을 턱에 대며 고민하는 표정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정말로 애매하다는 뜻이다.

지난번에 입헌군주제에 대해 설명했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지금은 긍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겠다고?"

"응. 듣기만 하면 평민들의 활동 범위가 늘어나는 셈이니 나쁘지 않아.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반드시 도입할 필요는 없잖아? 악마 숭배자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하긴 해도 대처를 하는 중이고."

"그래? 그러면 마리 네 생각은 어때?"

"리나 말대로야. 지금으로서는 '굳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리나와 마리 둘 모두 내 설명을 듣고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두 명은 선거 즉, 민주주의를 대입시켜야 될까라는 의견에 굳이? 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은 나도 동감하고 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은 대부분은 군주제를 표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가장 먼저 의원내각제를 도입하여 민주주의를 시작했고,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군주제를 '강제로' 끝내기 위해서는 1차 세계 대전 혹은 프랑스 혁명에 비견되는 일이 터져야 될 것이다.

그전까지는 영국처럼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는 것밖에 없다. 미네르바 제국에는 두 개 다 통용되지 않는 소리다.

나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다. 단지 이들의 의견을 묻고 싶어서 모은 것뿐이다.

"그렇지? 하긴 정세가 평화로우면 변화를 도모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맞아. 그리고 군주가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도 마음대로 내려놓긴 힘들 거야."

"응?"

그냥 쓰면 되겠구나 싶을 때, 리나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군주가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리나는 아델리아가 타준 차를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뒤이어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특유의 어른스러운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한 나라의 군주가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건 맞아. 허나 그렇다 해서 귀족들의 권력이 적은 건 절대 아니지. 다시 말해 군주가 권력을 내려놓더라도 귀족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야. 무려 황제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데 자기들이 내려놓지 않는다면 모양새가 이상하니까."

"흠.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단박에 이해가 가는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러고 보니 1차 세계 대전 프랑스가 비슷한 행보를 거쳤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낭만주의가 도래하던 시대라서 귀족들은 전부 장교로 입대했다.

그리고 참호전이라는 끔찍한 지옥을 맛보고 대다수가 살아돌아오지 못 했다. 설령 돌아오더라도 몸이나 정신이 망가져 있다.

한 마디로 대를 이을 귀족이 거의 없어서 귀족체계가 완벽히 끊겨버린 것이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왕과 귀족에게서 특권만 빼앗았을 뿐, 체제 자체는 그대로 남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탄생하지 못 했겠지.

"지금 내가 귀족들의 권력을 빼앗는 작업을 하고 있다지만 선거까지는 글쎄······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 그래도 아바마마께서 들으신다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네."

"관심을 가지실 거라고? 황제 폐하께서?"

"어째서 그분께서? 적어도 지금은 황권이 막강할 텐데?"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마리도 깜짝 놀라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베리트 황제는 겉으로 인자해 보여도 제국의 황제다.

황궁에 방문했을 당시 그 분위기를 똑똑히 느꼈다. 더군다나 악마 숭배자로 나라가 뒤숭숭한 시점에도 잘 다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권력을 내려놓고 싶어한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리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납득이 가는 이유를 꺼냈다.

"너희들. 권한이 강하다는 뜻이 뭔지 알고 있니?"

"권력이 강하다?"

"그것도 맞지만 해야 할 일이 과하게 많다는 뜻이야. 행정부터 시작해서 건드리기 민감한 군사까지. 귀족들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바마마께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지."

야근과 과로구나. 나는 일리 있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비즈니스 파트너, 레킬리스 공작가가 곁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지만 방대한 영토를 홀로 다스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봉건제처럼 각 지역마다 영주를 파견하자니 왕권이 약화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 지금처럼 악마 숭배자로 인해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자칫하다가 반란까지 발생할 수 있다.

다행히 반란까지는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봉건제가 더 약화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베리트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는 건 덤.

"우리 제국의 영토는 넓어도 너무 넓어. 더군다나 북부 지역의 야만수인을 완전히 몰아낸다면 더 넓어지겠지. 아바마마께서 잘하고 계시다만 테르스 왕국과 같은 '의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계셔."

"그러고 보니 역대 황제들의 사망 원인이 대부분 과로였었나?"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미네르바 제국은 건국된 지 300년이 흘렀으며, 그 사이 바뀐 황제만 하더라도 15명이다.

다시 말해 한 명당 약 20년 정도 통치했다는 뜻. 만약 전생이었다면 무난한 편이겠지.

하지만 이 세상의 인간은 마나의 존재 덕택에 수명이 길다. 어디까지나 시대에 비해서 긴 거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통치 기간이 매우 짧다.

그리고 대부분이 '과로'로 인한 사망이었다. 중간중간 권력에 눈이 먼 자가 나타나긴 했다만 그 황제마저 과로로 쓰러졌다.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폭군일지언정 다들 일만큼은 열심히 하더라. 이건 좀 신기하다.

또한 15년마다 황제가 바뀌는데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은 것도 기적이다. 그때마다 섭정의 역할로 레킬리스 공작가가 나섰던 걸로 안다.

"맞아. 우리 할바마마께서도 과로로 쓰러지고, 황위 계승 다툼이 벌어졌지. 그래서인지 몰라도 처음에는 격무에 별 관심이 없으셨어. 제이로스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일을 안 할 수도 없겠네."

"뭐, 굳이 혁명이 아니더라도 역대 황제들이 격무에 시달려 60을 넘긴 힘들었어.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고. 원래 군주라는 직위가 그런 거잖아?"

하긴 그렇다.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더라도 격무에 시달려 일찍 사망한 군주는 세상에 널려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군주제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한 게 바로 이거다.

민주주의와 선거는 그 군주들로부터 가장 강력한 힘 즉, 권력을 가져왔으나 책임마저 가져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100세 가까이 장수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인가?'

물론 어디까지나 반 장난식으로 말한 거다. 그래도 넓은 땅덩어리만큼 무시무시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권한을 어느 정도 차근차근 덜어낼 생각이야.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바로 그거고."

"전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

"간단해. '법'을 귀족으로부터 떼어내는 거지."

리나의 설명은 이렇다. 평민이 죄를 저질렀을시, 그 재판은 대부분은 지역의 영주가 맡는 편이다.

여기서 증인과 목격자가 있지만 검사를 비롯한 변호사는 없다. 재판을 받는 사람 한 명만이 스스로를 변호해야 된다는 소리다.

이것만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히리야의 뺨을 후려치고 재판에 끌려갔지 않은가.

그때 나를 도와준 사람이 있긴 하다만 큰 효력을 보지 못 했다. 내가 제논이 아니었더라면 사형대로 끌려갔겠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사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꾸릴 생각이야. 물론 이렇게 해도 빠져나갈 사람은 빠져나가겠지. 그래도 귀족의 권력은 크게 줄일 수 있을 거야. 어때? 괜찮지?"

리나가 방긋 웃으며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치 도도한 고양이가 칭찬을 해달라는 듯이 머리를 내미는 모양새 같달까.

그녀는 나를 파란색 고양이 로봇 혹은 꾀주머니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의견을 묻는 것 같다.

"나름 괜찮은 시도네. 우리 세상에도 비슷한 게 있거든."

"그래? 다행이네. 네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살짝 무서웠는데."

"누누이 언급하지만 내가 알던 지식들이 여기서도 통할지는 미지수야."

그래도 리나가 말한 작업은 성공적으로 정착할 확률이 크다. 현재 귀족계층이 흔들리고 있는데다가 황권이 강한 상황이니.

아무튼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한 것도 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체제를 바꿀 필요는 없었으니.

물론 시간이 흘러 미네르바 제국이 크게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의원내각제가 먼저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베리트 황제는 황위에 큰 관심이 없고, 레오르트조차 큰 욕심이 없었으니. 그냥 받을 게 뻔하니까 받는다는 느낌에 가깝다고.

"아참. 아이작. 그거 알아?"

"뭐가?"

"우리 아바마마께서도 히틀러의 수염? 그거 따라한다고 수염을 기르고 계셔. 뭔가 마음에 드셨나 봐."

"··· ···"

좆됐다.

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잠식했으나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포일러만큼은 최대한 참고 싶었으니.

물론 이대로 웃기만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떻게든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 리나? 너도 알다시피 히틀러는 성불구자인데 자칫하다간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을까?"

"그런 것 치고는 지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걸? 그리고······"

리나는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로 가려져 있어도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한다. 이 여자가 또 야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무것도 아냐."

"뭐가 아니라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걸 놓칠 마리가 아니다. 마리는 건수가 잡혔다는 듯이 능글거리는 투로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이에 리나는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마리는······

"궁금하지? 한 번 보여줄 수 있는데 보여줄까?"

섹드립으로 응수하여 리나를 공격했다. 원래라면 이쯤 되서 무너져야 정상이지만······

"아냐. 괜찮아. 안 봐도 되거든."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여유만만하게 대했다. 이제 그런 공격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반응.

마리도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순간 당황하다가 이내 칫, 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그렇다고 완전히 물러난 것도 아니다. 마리는 리나를 한 번 힐긋거리다가 지나가듯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봐도 된다는 거지? 설마 몰래 보기라도 한 건가?"

"푸흡! 쿨럭! 쿨럭!"

흘러가는 말에 큰 반응을 터뜨리는 우리의 황녀님. 차를 마시는 도중에 기침을 한 거라 얼굴에 다 튀었다.

나와 마리는 그런 리나를 조용히 쳐다봤다. 사레라도 들렸는지 계속 기침을 토하고 있다.

"콜록! 콜록······"

"······리나?"

"콜록! 아, 안 봤어! 안 봤다니 콜록! 까!"

그래. 그렇겠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마리를 힐긋거렸다.

그녀는 어련하겠다는 얼굴로 리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네. 옛날부터 지금까지."

"아, 안 봤다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니?"

"네 얼굴을 보고 나서 얘기해. 가면이 와장창 다 깨져버렸네?"

"이익······!"

이게 정말 황녀와 공작가 영애 간의 대화가 맞는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거나 민주주의의 설명이 약간 담겨 있는 피와 강철 4권은 일주일 후에 발매되었고.

[피와 강철 4권의 등장! 선거의 개념이 무엇인가?]

[필요한 체제인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만의 독특한 개념?]

평론가들도 굳이? 라는 의견을 내보이며 무던히 넘어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미네르바 제국도, 테르스 왕국도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선거'가 탄생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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