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강철 3권이 등장함과 동시에 퍼져나간 아이작의 짝부랄 소문.
히틀러가 아이작이라는, 뭔가 애매하게 높은(?) 신빙성으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은 어찌 저찌 잘 마무리되었다.
아이작이 직접 해명하는 게 아니라 약혼녀 즉, 마리가 나서서 밝혔으며 그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겉보기에는 자상해 보이는 제논. 그러나 그 또한 역시 남자였다.]
[얼마나 절륜하면 약혼녀가 직접 정부를 두라고 할 정도인 건가?]
[약혼녀와 정부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의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식이 있어······]
[아카데미 관련자의 말에 따르자면 재학 당시 약혼녀만 아니라 다양한 여자와 밀담을 나눴다는 소문이 있다고······]
신체적 결함이 있다는 소문이 완전히 묻힐 정도로 우후죽순 불어나는 소식들.
자그마치 신문의 한 면을 꽉 채울 정도로 얼마나 큰 관심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아이작은 악마 숭배자의 위협이라는 이유로 특정한 상황이 아닌 이상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신비로운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으며 '성자'라는 이미지 또한 갖고 있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논과 연을 맺고 있는 여자들은 몇 명인 것인가? 헬리움의 공주와 알븐하임의 여왕과도 이어져 있다는 소문이······]
[신비로운 이미지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남자다움. 꽁꽁 숨기는 것보다 속 시원하게 밝히는 게 낫다.]
[부럽다.]
마지막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대부분 너그럽게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 세상은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며 능력만 충분하다면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건 별로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애당초 왕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에게 있어서 자손을 늘리는 건 '의무'였기에 아내가 많은 건 당연한 일.
프리드리히 국서가 한때 순정남이라 칭해지던 이유도 이때문이다. 의무라는 이유로 주위에서 첩을 들이라 해도 완강히 거부했으니.
더군다나 현재 아이작은 많은 사람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여자가 많다는 건 대수롭지 않은 부분이었다.
[혹시 제논에게도 사생아가 있는 건 아닐까?]
가끔 어그로를 끌기 위해 눈치없이 찌라시를 뱉는 사람도 있었지만.
[신에게 맹세하건데, 망나니로 살지언정 쓰레기로 살지 않을 겁니다.]
뒤가 구린 쓰레기로 살 바에야 당당하게 망나니로 살겠다는 아이작의 발언 덕분에 몰매만 얻어맞았다.
물론 본의 아니게 신비주의를 표방한 바람에 온갖 괴소문이 돌아다니긴 했다. 머지 않아 대부분 찌그러졌지만.
어쨌거나 아이작의 여성편력이 훤히 드러났지만 행적이 행적이다 보니 다들 납득했다.
게다가 꿈보다 해몽이라고, 마리가 직접 아이작의 우월한 남성성을 밝히면서 이런 말까지 나왔다.
[제논은 신이 직접 데려온 성자가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축복받은 인생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외모, 재력, 명성, 마지막으로 여러 여인들을 품는 능력까지. 행복한 영웅의 서사시가 이렇지 않을까?]
[소설로 세상을 구했으나 정작 본인이 소설 속 삶을 살고 있었다.]
'억까'가 아니라 '억빠'에 가까운 칭송들. 그러나 하나 하나 따져본다면 죄다 맞는 말이라 아이작조차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성자는 아니지만 신이 데려온 영혼이었으며 그들의 비호 아래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작도 본인도 가끔 가다 이게 꿈은 아니지? 라며 의문을 품고 있을 정도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신들에게 감사를 전달하기 위해 아이작이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 여인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신성력 덕분이다. 성기사들의 체력이 일반 기사보다 강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저 말이 거대한 기폭제가 되어 신도들이 대폭 증가해버렸다. 겸사겸사 성기사들의 인기 또한 상승한 건 덤.
이렇듯 신비로운 분위기에 감싸져 있던 '인간 아이작'이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는 과연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취미와 좋아하는 예술가라도 있을까? 약혼녀 마리의 말대로 밤에는 짐승 같을까?
밝혀진 게 거의 없을 때는 멀리서 지켜보는 식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니 사람들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토커마냥 뒤를 잡을 수는 없는 법. 무엇보다 아이작은 밖에 나갈 일이 잘 없다.
다시 말해 본인이 직접 행동하지 않는 이상 그를 알 길이 거의 없다는 것. 그를 뒤쫒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제논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논 축제뿐이다. 그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없다.]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제논 축제. 이번에는 어떤 예술을 펼칠까?]
[마이샬 영지는 지금도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건물을 늘리고 있으며······]
사실 아이작도 마음 같아서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지.
악마 숭배자만 위협인 게 아니라 악질 스토커도 배제할 수 없다. 내향적인 성격도 한몫하고.
물론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아이작이 밖으로 못 나오는 이유는 악마 숭배자의 존재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악마 숭배자들도 본인들의 장기적인 계획을 망친 아이작을 증오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기습까지 가했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완결되고, 피와 강철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활동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이벤트의 활력도 슬슬 빠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악마 숭배자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
몇몇 사람들은 악마 숭배자가 거의 다 토벌됐다 말하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몸을 숨겨 힘을 기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그 놈을 죽이지 않는 겁니까?"
앞을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어둡고도 비밀스러운 공간. 후드를 눌러 쓴 젊은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의 건너편에 앉아있는 노인은 고개를 들러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남자처럼 후드를 눌러썼기에 외모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밖으로 드러난 손은 주름으로 자글자글했다.
"군주님의 명령이라네."
늙수레하면서도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미묘한 압박이 담겨있었다.
군주님의 명령. 젊은 남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콱 찌푸렸다.
코까지 후드를 눌러썼으나 입 부근이 일그러진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언짢아하는지 알 수 있다.
"군주의 명령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당장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라 욕한 지가 언젠데 갑자기?"
"··· ···"
"저는 당신들이 좀 더 깊은 곳에서 숨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그러니 이유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잖습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호소하는 남자. 이에 노인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남자도 이에 질 수 없다는 것처럼 노인을 가만히 응시했다. 노인의 입은 묵언수행을 하는 사제처럼 꾹 다물어져 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서로 기싸움을 하던 두 남자 중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노인이었다.
"그대는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거짓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대에게는 상관없겠지. 그대가 원하는 건 그를 향한 복수니까 말일세."
"··· ···"
따끔한 지적에 이번에는 젊은 남자의 입이 다물어질 차례였다. 마치 정곡을 찔렸다는 반응이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특유의 쇠 긁는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놈이 낸 책은 안 그래도 거짓으로 뒤덮힌 세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지. 부숴야 할 새장을 도리어 튼튼하게 만들었어.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의 진실을 아무도 몰랐을 거라네."
"··· ···"
"이번에 발매하는 책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지. 때문에 앞으로 올 여름에 그를 처치할 계획이었다네. 원래라면 말이야."
"······무슨 계획이었습니까?"
"군주님이 스스로 희생하여 그를 직접 처단할 예정이었다네. 신들이 보호하는 지역이라지만 군주님의 힘이라면 어느 정도 버티겠지."
정말 단순무식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이다. 남자는 헛웃음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그 군주라는 자가 도대체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저 정도로 신뢰하는 걸 보면 가능한 계획이었을 터.
하지만 현재 악마 숭배자에는 군주가 한 명밖에 없다. 나머지 군주는 아이작의 조부였던 클라크 마이샬에게 죄다 처단당했으니.
이후로 군주의 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했지만 하필이면 제논 일대기가 인기를 끄는 바람에 전부 차단됐다.
"정말 훌륭한 계획이군요. 그래서, 그 훌륭한 계획을 접고 지켜보기 시작한 이유가 대체 뭡니까?"
"너는 이번에 그 놈이 발간한 책을 읽어보았나?"
"피와 강철 말씀이십니까? 역겹지만 읽어봤습니다."
아이작을 정말 싫어하는지 역겹다는 수식어까지 붙이는 남자. 지피지기 백전불패라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읽었던 상황이다.
물론 노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젊은 남자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 놈이 당연하게도 거짓된 세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책을 쓸 거라 예상했다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오히려 새장에 금이 가도록 만드는, 우리가 바라던 이상향을 적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짓된 신이 관리하는 게 아닌, 오직 인류의 손으로만 가꾸는 세상을 말일세."
남자는 노인의 설명에도 이해하기 힘든지 인상을 다시 찌푸렸다. 동시에 그들이 지닌 사상을 떠올렸다.
이 세상은 거짓된 신들이 쳐놓은 새장 안에 갇혀있으며, 자신들은 그 새장을 부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
당연히 미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며 남자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오직 복수를 위해 몸을 담았을 뿐.
헌데 같은 목표를 달리던 집단이 생뚱맞게 저런 소리를 하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피와 강철이 당신들의 이상향이라고요? 그게 무슨 또 개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인간밖에 없다는 점이 의문이지만 이건 우리가 꿈꾸던 세상일세. 완벽한 자유 아래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전부 보여주고 있지. 신들을 믿든 말든 자유이며, 그들을 욕하든 말든 자유. 그리고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것도 자유라네."
"고작 3권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자세한 건 좀 더 나와야 알겠지.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네."
잠시 말을 멈춘 노인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을 바라봤다. 여태까지 발매된 피와 강철 책들.
"어째서 거짓 신들은 이 책이 발매되도록 가만히 둔 것일까?"
"······예?"
"그 놈들은 새장을 유지시키기 위해 온갖 행위를 했던 놈들이라네. 진실을 깨달은 자의 외침에는 천벌이라는 이유를 대며 곧장 처단했지. 그게 아니고서야 우리가 이런 음지에 숨어들 이유가 없다네."
"··· ···"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신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가 천벌을 맞은, 어리석은 자들의 이야기.
그때 당시에는 뭔 저런 병신들이 다 있지? 라며 생각했으나 노인의 말을 들으니 숨겨진 비밀이 있는 듯했다.
"다시 말해 진실은 거짓된 신들이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은 이 책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네. 새장이 존재하지 않고, 인류는 스스로 발전하며, 그 과정 속에 온갖 파멸과 교훈이 담긴 세상."
"··· ···"
"어째서 거짓 신들은 이 책이 나오도록 막지 않은 것인가? 그에 대한 기억을 없애면 될 것을 어째서 방치한 것인가? 미래를 읽고, 더 나아가 조율할 수 있는 자들이 왜? 군주님께서 꺼낸 가설은 이렇다네."
신들이 피와 강철의 발매를 막을 수 없던 이유.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거짓 신들은 제논의 미래를 읽을 수 있어도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어."
"······그건 당연한 거지 않습니까? 신들은 필멸자들을 존중하여······"
"그런 신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천벌을 내리나?"
"··· ···"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어쩌면 그의 행동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전혀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 제논 일대기가 뒤늦게 예언서로 추앙받은 걸 보면 가능성이 높아."
"단순히 제논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거짓 신들이 이 미래를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만약 보았다면 영혼 자체를 없애버렸겠지. 새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낱낱이 살펴 보니 의문이 드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확실히 이런 미래를 예측했다면 미리미리 준비했겠지.
그러나 신들조차 당황스러워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마족의 해방부터 시작해서 악마 숭배자의 존재까지.
무엇보다 제논의 탄생 이전에 세이비어 교국에 내려진 관련 '신탁'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가 하나 둘씩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설명을 마친 노인은 전보다 점잖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당분간 지켜볼 생각이라네. 군주님께서도 호기심을 가졌으니."
"······만약 이 책마저 당신이 말한 새장을 견고하게 만드는 거라면?"
"미리 세웠던 계획을 이행해야겠지. 그래도 이거 하나는 확실해."
악마 숭배자들이 진행했던 소환식.
"제논의 등장으로, 거짓 신들이 매우 당황하고 있다네."
어쩌면 진정한 의미로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노인의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피와 강철이 완결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겁니까?"
"일단 그렇지."
"이 책에도 악마 숭배자를 안 좋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빨리 책 내고 싶다."
"그러면 빨리 집필해."
"조금만 놀다가."
악마보다 더한 새끼가 나올 예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