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54화 (455/763)

〈 454화 〉 게리오스 왕국(4)

* * *

게리오스 왕국 최후의 서기, 밀레크 말토가 필사적으로 남긴 기록은 모든 이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세상이 한 번 멸망했다. 그것도 신들의 전쟁으로 인해서.

마지막으로 멸망 속에서 살아남은 필멸자들이 이 땅에 스며들었다는 것까지.

무엇 하나 쉬이 믿을 수 없는 진실들의 향연. 과연 이것들이 정말로 진실인 것일까, 아니면 혼란을 유발하기 위한 거짓인 걸까.

하지만 죽을 때까지 펜을 놓지 않고 기록을 남긴 걸 보면 진실일 확률이 높다. 굳이 죽어서까지 거짓을 남길 이유는 없다.

너무 허무맹랑하다 못해 신성모독 수준이라서 그렇지.

"··· ···"

뇌정지가 오는 바람에 고고학자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데이모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생각에 빠졌다.

신들의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필멸자들이 이 땅에 스며들었다.

신실한 루미너스의 신자로서 도무지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기록이다. 저 말은 즉, 히르트와 루미너스, 모라가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 되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다. 히르트는 쌍둥이 남매의 어머니고, 루미너스와 모라는 서로 미워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두터운 우애를 자랑하고 있다.

까마득히 먼 과거에는 사이가 나빴을 수도 있겠지만 기록에 쓰인 건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다.

전쟁이란 무엇인가. 저마다의 이유로 집단과 집단끼리 맞붙는 격렬한 전투이지 않은가.

루미너스와 모라가 서로 죽일듯이 싸웠더라도 그건 전쟁이 아니라 전투에 불과하다. 전쟁으로 지정되기 위한 숫자가 매우 부족하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건 루미너스의 신자와 모라의 신자가 서로 맞붙는, 이른 바 종교 전쟁이겠지.

허나 루미너스와 달리 모라는 가급적 싸움을 최대한 피하는 성격이다. 마족과 다크 엘프가 핍박받는 와중에도 위협으로부터 숨겨줄 뿐, 결코 싸우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데이모스는 두터운 눈썹 속에 숨겨져 있던 눈을 조심히 뜨면서 앞을 쳐다봤다. 벤피스와 델핀도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

"······더 읽으시죠."

"그, 그래도 됩니까?"

"허무맹랑 개소리로 들리지만 그 글을 쓴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 당장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더 읽을 필요가 있다.

데이모스의 사근사근한 부탁에 벤피스와 델핀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두루마리에 시선을 옮겼다.

사실 그들도 더 읽고 싶었다. 단지 뒤에 데이모스가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그렇지.

"게리오스 왕국은 하늘과 별을 읽는 능력으로 세계를 탐험했다. 그 중에서 서쪽 끝으로 향한다면 엘프가 세운 나라, 알븐하임과 맞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디딘 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그곳은 옛 수인들의 땅이자 진정한 고향이었으니."

"우리는 그곳을 탐험하면서 다양한 그림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의 그림들. 그 그림들은 우리가 전혀 알 수 없었던 '창조'에 대한 신화였다. 그 신화가 알려준 건 단 하나, 이 세상을 창조한 건 '자연'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

여태까지 굳게 믿고 있던 신화와 신앙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건 자연의 여신, 히르트라는 건 어린 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자연이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바다'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건 절대 믿을 수 없었다.

바다는 여태까지 악마들이 만든 마의 지대이자 가까이 가서는 안 될 환경으로 여겨졌으니.

데이모스는 밀려오는 부정들 속에서 불길함이 무럭무럭 차오르는 걸 느꼈다. 당장이라도 저 두루마리를 빼앗아 바다로 던져야 하지만······

궁금하다. 도대체 신들이 어찌하여 이 진실들을 묻어버리려고 한 것일까. 도대체 어떤 기록이 남아있길래 이런 일까지 벌인 것일까.

데이모스가 심란에 빠져있는 동안 고고학자들은 흥분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이 섞인 표정으로 기록을 읽어나갔다.

"바다는 자연을 창조했고, 그 자연 속에서 빛과 어둠이 탄생했다. 빛과 어둠 아래에 낮과 밤이 생겼으며, 그 아래에 무수한 생명들이 꽃피었으니. 각각 권능을 지닌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저마다 갖게 된 권능을 통해 이제 막 창조된 세상을 다스렸다. 인간, 수인, 드워프 이 최초의 인류들은 저마다 문명을 이룩하며 신들의 비호 아래에 발전해나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바깥 신'들이 새로 탄생한 이 세상에 호기심을 느껴 방문한 것이다. 다행히 직접적으로 침략하지는 않았으나 그보다 더 심각한 걸 퍼뜨렸으니, 바로 그들의 '문화'를 퍼뜨린 것이다."

"······바깥 신들?"

난데없이 '바깥 신'들이 언급되자 데이모스가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여기서 더 큰 혼란만 가중시키는 느낌이다.

고고학자들도 의문스럽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일단 기록을 다 정독하기로 결정했다. 연구는 천천히 해도 괜찮았으니.

"그 문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창조신이자 아버지, 그리고 바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바깥 신들이 다스리는 세상처럼, 신이 통치하지 않는 세상을 원한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새장을 부숴야 된다는 생각 하에 모든 신들에게 명령했다. 더이상 세상을 다스리지 말거라."

"당연히 많은 신들이 반발했다. 이중에서는 빛과 전쟁의 신, 그리고 어둠과 평화의 여신이 거세게 반발했다. 바다와 자연의 쌍둥이 남매이자 가장 큰 권위를 지닌 신들이 전면으로 나선 것이다."

"빛과 전쟁의 신은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며 의견을 피력했으며, 어둠과 평화의 여신은 이에 동조했다. 인류를 새장 속에 가두지 않고 방치한다면, 결국 그 피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연'과 '바다'가 입게 될 것이라면서."

신들이 이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세상. 적어도 데이모스에게는 결코 있어서 안 되고, 존재하지도 않을 세상이다.

신이 있기에 세상이 이정도로 발전한 것인데 그들이 없다면? 인류는 원숭이 수준으로밖에 발전하지 못했겠지.

신이 있어서 인류가 하나로 뭉칠 수 있었으며 문명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저건 잘못된 문화라 단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바다의 아버지는 완고했다. 신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인류의 방해물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사라져야 인류가 진정한 의미의 발전을 이룰 수 있으며, 그것이 신들의 역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자기 몸까지 희생하는 것. 과연 이것이 그릇된 일일까?"

"이에 빛의 신과 어둠의 여신이 반발했다. 그건 우리가 조절하면 되는 일이다. 바깥 신들의 세상에서 인류는 끔찍한 죄를 저질러도 결국 제자리만 돌고 있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경고하는 것. 과연 이것이 그릇된 일일까?"

서로 상충되는 입장과 태도. 바깥 신들이 보여준 문화는 커다란 균열을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균열의 끝은······ 단 하나.

"바다의 아버지는 분노했다. 부모라면 응당 자식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적어도 그의 눈에 빛의 신과 어둠의 여신이 그저 자기 안위를 지키기 위한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서서 권위를 누리려는 폭군. 그것이 아버지가 내린 결론이었다. 정작 자신이 그런 폭군이 된 것을 전혀 모른 채로."

"아버지에게 반발한 신들이 많은만큼, 아버지의 편에 든 신들도 많았다. 서로 반대되는 '사상' 속에서 승리를 점한 건······ 빛의 신과 어둠의 여신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의 승리라고도 할 수 없었으며, 자연의 어머니는 극심한 슬픔에 빠져버렸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와 비슷한 전쟁 양상을 띄게 된 신들의 전쟁.

지나가듯이 뿌려진 문화가 또다른 사상을 낳았으며, 그 사상은 과격해져 결국 서로의 눈을 가려버렸다.

"인류는 그들의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바다의 해수면은 상승하여 온 세상을 뒤덮었고, 낮과 밤이 사라졌으며, 자연은 슬픔에 빠져 이들을 품어주지 않았다."

"동시에 끈질겼다. 어머니는 아이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바닷속에서도 팔을 높게 뻗었으며,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맨몸으로 배를 움직였다. 그렇게 길고 긴 멸망 속에서 간신히 닿은 곳이 바로 이 땅이다."

"바다는 그 분노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바다의 분노는 전세계를 덮치기 위해 태동했다. 경배하고, 또 경외하라. 바다의 분노를 사지 말 것이며 더이상 바다를 외면하지 말 것이리라. 바다의 진정한 이름은······"

긴장된 마음으로 글을 읽던 델핀을 말을 하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를 보아 '이름'이 나올 것 같았는데 중간에 멈춘 것이다.

당연히 잠자코 경청하던 데이모스가 의문을 표했다. 그는 긴장이 탁­ 하고 풀리는 느낌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더이상 읽지 않는 것이죠?"

"그게······ 끊겼습니다."

"네?"

"하필이면 불에 그을려진 부분이······"

그렇다. 하필이면 불로 태우다가 만 부분이 공교롭게도 이름을 지워버린 것이다.

데이모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 어지러워졌으나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이상 이런 진실들이 밝혀져서는 안 됐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튼 그게 끝입니까?"

"예, 예.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그럼 어서 저에게 주십시오."

신탁에 따라 이 진실을 그에 걸맞는 곳, 바다에 던지는 일밖에 없다. 데이모스는 그리 말하면서 손을 조용히 내밀었다.

그 행동에 벤피스와 델핀은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서로를 쳐다봤다. 그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들이 오고 갔다.

학자로서의 마음은 이걸 건네주면 안 된다고 소리치고 있다. 이 진실을 데이모스에게 준다면 영영 사라질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세이비어가 두려운 게 아니라 '신의 분노'가 가장 두렵다.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을 알아버린 자들은 그 최후가 좋지 않다. 이건 암암리에 퍼지는 일종의 진리와도 같은 것.

"······저희는 괜찮은 겁니까?"

이에 벤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데이모스에게 물었다. 신의 어두운 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심판감이다.

당장 머리 위에 천벌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 목숨이 아까운 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신전으로 가서 입을 열지 않겠다는 맹약을 하면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데이모스는 세이비어 내에서도 온화한 성정으로 유명하다.

만약 과격했다면 바깥에 경계하고 있는 성기사를 불러다가 다짜고짜 죽였겠지. 살인멸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고고학자들도 그 부분을 알고 있는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전달했다. 데이모스는 두루마리를 받자마자 글부터 확인했다.

고대어로 작성돼 있었기에 해독은 불가능했으나, 이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거리다.

만약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거짓말을 못하는 루미너스 님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신성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전대미문의 사건들이 연이어 터질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된다.

신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들,인류에게 큰 도움이 된 것 또한 변하지 않은 진실이었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훨씬 낫다. 데이모스는 두루마리를 가지런히 접은 채 성호를 그렸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제 남은 건 이 두루마리를 바다로 던져버리는 것. 그러면 신탁은 마무리된다.

데이모스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등을 돌린 후, 기나긴 복도를 지나 지상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경계하느라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성기사들도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여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 고고학자들까지.

마지막으로······

"··· ···"

그 모든 진실을 함께 들은 다크 엘프, 시리스도 기척조차 내지 않고 조심스레 따라갔다.

*****

엘레나는 책 한 권을 찾은 이후에도 열심히 주변을 조사하고 다녔다. 알븐하임보다 앞선 시기에 건국된 문명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물론 게리오스 왕국이 날짜를ㄴ 세는 것과 지금을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는 있을 터. 하지만 의문이 하나 튀어나왔으니 그걸 입증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증거 하나를 찾는 것조차 고된 작업이었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대부분의 유적을 싹 쓸어간데다가 왕궁은 데이모스 일행이 조사하고 있었으니.

결국 처음에 찾은 책 한 권을 제외하고 마땅히 나오는 게 없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뒤에 남는 건데."

"그래도 그거 하나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하잖아요······? 게다가 게리오스 왕국이 조선공을 우대했다는 정보도 알 수 있었고."

휴식을 위해서 그늘에 앉은 엘레나와 신디가 서로 잡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현재 마법으로 차갑게 유지되고 있는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엘레나는 갈증을 축이기 위해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더 짜증나. 조선공을 우대했다는 걸 보면 분명 조선 능력도 뛰어났다는 건데 그 증거가 하나도 없어. 최소한 설계도 한 장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왕궁에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군함과 관련된 설계도는 있을 텐데······"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니? 그리고 그 시대에 해군이 있었을 것 같아?"

"글쎄요······"

"거 봐.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나는 당장 알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고고학과 역사학의 오묘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온갖 의문들만 튀어나온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그리고 그 유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마지막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등등.

연구할 거리가 산더미 같은데 관련 유적이 희박하다 보니 제아무리 엘레나여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아이작을 데려올 걸 그랬나?'

신디가 무능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아이작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생각이 들 뿐이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서 방대한 지식들을 알고 있다.

하물며 범인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생각까지. 가끔 보면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기묘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가 이곳에 왔다면 이런 저런 의견을 꺼내지 않았을까라는 엘레나의 생각이다.

스윽­

"응? 여보?"

"잠깐 할 말이 있어서 왔소."

그때 주변을 둘러본다며 잠깐 떨어졌던 아이케르가 다가왔다. 엘레나는 의문 어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대체 무엇은 본 건지 몰라도 얼굴이 딱딱하고 굳어있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

이에 엘레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와 마주했다. 다만 더위를 먹은 탓에 멍해져 있던 신디는 그대로 놔두었다.

"무슨 일이라도 났어요?"

"다른 게 아니라 한 번 봤으면 하는 게 있어서······"

아이케르는 말을 흐리더니 옆을 힐긋거렸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처럼.

엘레나는 그가 향하는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무더위 때문인지 아지랑이마냥 공간이 일그러진 느낌만 들 뿐. 틈만 나면 신기루가 등장하는 회색 사막이라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대체 뭘 보라는······"

스으윽­

엘레나가 말을 열러던 찰나, 일그러진 공간으로부터 구릿빛 피부의 여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예상했다시피 데이모스 일행의 뒤를 쫒고 있던 다크 엘프, 시리스.

엘레나는 예상치 못한 시리스의 등장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친 것도 잠시,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아이케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이 다크 엘프는 누구예요? 설마 아까 여왕님이 불렀다는 사람?"

"그렇소. 세이비어가 워낙 구린 짓을 많이 해야지."

"허······"

다크 엘프에 대한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막상 이렇게 만나니 뭐랄까······ 쉬이 와닿지 않았다.

가끔 아르웬 여왕이 다크 엘프측과 대화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던데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잠입에 있어서 다크 엘프만한 인력이 없을 테니 아르웬의 선택은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엘레나도 이를 인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여왕님이 선택하셨으니 따라야죠, 뭐."

"··· ···"

"그래서, 저한테 줄 게 있다고요?"

"여기."

무뚝뚝한 말투로 웬 두루마리 하나를 전달하는 시리스. 엘레나는 두루마리를 건네받으면서도 시리스를 쳐다봤다.

어디 바닷가에 몸을 담구기라도 한 것인지 마법으로 몸 곳곳에 소금기가 남아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게다가 두루마리도 마찬가지. 마르긴 했지만 군데군데 소금기가 묻어있다.

그래도 보존 상태는 양호해서 읽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엘레나는 두루마리를 펼치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몰래 잠입까지 하면서 갖고 온 기록물이니 분명 중요하겠지.

"······이게 정말 사실인가요?"

"저는 갖고 온 것밖에 없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리고 방금 전 고고학자들처럼 극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말로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헷갈린다.

이에 시리스는 떨리는 눈으로 두루마리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던 두루마리입니다. 마지막 서기가 죽기 직전까지 쓴 기록이니 진실일 확률이 높겠죠."

"··· ···"

"데이모스 추기경은 이걸 바닷속으로 던져버려 영영 찾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걸 갖고 온 거고요."

"그런 거면 불로 태우면 되지. 왜 굳이 바다에······"

엘레나는 그 말을 하다가 말고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글이 진실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사람들은 믿지 않을 터.

이에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돌 말았다. 뒤이어 가방에 넣은 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이건 당분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 밝혀봤자 그 누구도 믿지 않을 테니."

"그러면 언제······?"

시리스의 질문에 엘레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친 후, 진지한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딱 한 명. 딱 한 명 있긴 있어요."

******

"덩케르크 철수가······ 언제였더라?"

그리고 엘레나가 언급한 사람은 현재 2차 세계 대전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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