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53화 (454/763)

〈 453화 〉 게리오스 왕국(3)

* * *

엘레나가 사막의 땡볕 아래에서 항구를 조사하는 동안, 원정대원은 모건 왕의 말에 따라 왕궁 내부를 조사했다.

원령들이 보여줬던 상황 재현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나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기록을······ 보관해야······]

"으악!"

상황 재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원령들이 튀어나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니까.

노예, 아서 마이샬이 모건 왕을 만나러 갈 때처럼 긴박한 상황은 보여주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이처럼 가끔 가다가 원령이 튀어나와 말을 중얼거리거나 정처 없이 배회하는 등.

실시간으로 원정대원들을 놀라게 만들었으며 너무 놀란 나머지 고고학자, 벤피스는 기절까지 했다.

"데, 데이모스 추기경님. 이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벤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데이모스에게 부탁했다.

여태까지 수많은 유적지를 탐방하고, 혼령을 만난 적이 있는 그였으나 이건 너무 심해도 너무 심하다.

게다가 혼령은 대화라도 할 수 있지 무슨 정신병자마냥 중얼거리거나 같은 행동만 반복하니 미칠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원령은 주체가 되는 자가 승천하지 않는 이상 계속 등장할 겁니다."

"설마 그 주체라는 게······"

"······아마 모건 왕도 제어하지 못할 겁니다."

모건 왕이 승천하지 않는 이상 원령의 등장은 불가피하다. 벤피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었으나 결국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었다.

모건 왕에게 부탁은커녕 가서 죽기밖에 더 하겠나. 차라리 조사를 하면서 담력을 꾸준히 키우는 편이 낫다.

그리하여 원정대원들은 무려 3000년 전부터 존재했던 '도서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은 수많은 책들이 한 곳에 모여있는 지식의 집합소. 책 하나만 해도 막대한 가치를 자랑하는데 도서관은 오죽하랴.

"맙소사. 이건 책이잖아? 그것도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 있어."

"3000년 전의 책이라······ 하나만 해도 엄청난 건데 이렇게나 많이······"

물론 도서관의 책장 안에 빼곡히 채워진 책들을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혼란으로 파손된 책장과 책들이 많았으나 도서관의 규모가 규모다 보니 멀쩡한 유품이 상당히 많았다.

학자들이 어떻게든 기록을 보관하기 위해 애를 쓰던데 그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특히 두루마리뿐만 아니라 '책'이 많다는 게 그들에게 신성한 충격을 선사했다. 아무리 왕궁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고서(古書)는 처음 본다.

현재는 제지술의 발달로 책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먼 과거에는 말 그대로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다.

당장 양피지만 하더라도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그걸 한데 모은 '책'이 책장을 가득 메울 정도다.

게다가 멸망 직전 학자들의 필사적인 노력 덕택에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양호했으며 그 안의 기록도 멀쩡했다.

"델핀. 이거 한 번 해독해줄 수 있겠나?"

"어디 보자······ 653년 5월 13일. 응? 653년? 알븐하임이 건국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일 텐데?"

"그럼 게리오스 왕국이 알븐하임보다 더 앞선 시기에 건국되었다는 건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하지만 그 기대는 머지 않아 커다란 충격으로 바뀌었다. 대충 아무렇게나 집어든 책은 게리오스 왕국의 건국 날짜를 추론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최초의 문명이자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건국된 알븐하임보다 더 앞선 시기에 세워진 문명. 학자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악마 전쟁이 발발된 시기가 3000년 전이라지만 그것도 대략적으로 잡은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가히 신화나 다름없는 시기.

그러나 최대 수명이 1000년으로 알려진 엘프가 있으며 알븐하임은 종족 전쟁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침략받지 않은 나라다.

당연히 다른 문명보다 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악마 전쟁의 발발 연도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성지의 기록에 따르자면 악마 전쟁, 정확히는 악마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가 2940년 전이야. 그래도 건국 시기가 얼추 비슷한데······"

"그럼 다른 문명이 원래부터 존재했고, 알븐하임이 뒤늦게 건국되었다는 거예요?"

"아직 모르지. 기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이건 우리만 판단해서는 안 돼. 세계 모든 학자들이 모여서 판단해야 할 것 같아."

최초의 문명이라고 널리 알려진 알븐하임보다 더 일찍 건국된 문명이 있었다. 그것도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세운 국가다.

이 하나만으로 전세계가 발칵 뒤집어 질 거대한 진실이나 다름없다. 아마 알븐하임에서 가장 불신하겠지.

벤피스와 델핀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다른 기록을 하나 둘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건 좀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니 다른 것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152년 1월 13일······ 이때 당시에도 문자가 있었다고? 대체······"

"이건 천문학과 관련된 기록인 것 같네요. 여기 별자리를 상세히 구분한 걸 보면 확실해요."

바닷물에 잠겼을 텐데도 책을 비롯한 기록물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보존돼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바다와 가깝다는 지리적 특징을 고려하여 특수 처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기에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3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유적이니 연구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리라.

이에 고고학자들은 꾸준히 기록물을 살펴보면서 게리오스 왕국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으음······"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데이모스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서둘러 벤피스와 델핀이 다른 곳에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알븐하임보다 더 앞선 시기에 건국된 문명마저 충격적인데 이것보다 큰 게 남아있다. 어디까지나 신탁에 따르자면 말이다.

루미너스는 이런 진실은 마음껏 파헤쳐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단,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곳에 잠긴 진실은 무조건 그에 맞는 곳으로 던지라고 명했다.

도대체 그 진실이라는 게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올 게 분명하다.

어쩌면 신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된다.

"흠. 흠. 벤피스 씨. 그리고 델핀 씨."

"네?"

"무슨 일이죠?"

데이모스의 부름에 신나서 연구하고 있던 두 고고학자가 의문을 표했다. 그들의 손에는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이에 데이모스는 특유의 인자한 말투로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구미가 당길 제안을 건넸다.

"도서관에 보관된 기록이 아니라 좀 더 심도 깊은 기록물을 찾는 게 어떨까 싶어서 제안을 드립니다. 아까 모건 왕이 허락했으니 괜찮겠죠."

"심도 깊은 기록물이라 하면······"

"왕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만이 열람할 수 있는 기록을 말하는 겁니다."

"오오······!"

그 말을 듣자마자 벤피스와 델핀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채워졌다. 마치 며칠 간 굶은 거지가 진수성찬을 앞에 둔 것 같은 표정.

데이모스는 그 표정을 보자마자 허락한 걸로 알며 성기사들에게 호위를 지시했다.

왕과 그에 준하는 신분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면 필히 함정을 비롯한 몬스터들이 존재할 터.

우선 그곳부터 찾는 게 관건이다. 왕궁 자체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리라.

"······여긴가?"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활짝 열려 있지 않습니까?"

찾는 건 정말 어렵지 않았다. 도서관 안쪽에 아주 시원하게 개방돼 있는 대문이 존재했으니.

처음에는 대놓고 열려 있어서 모두의 의심을 샀지만, 문에 각인된 문양을 본 후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알현실로 향하는 대문에도 똑같은 문양이 각인돼 있었다. 분명 왕을 상징하는 문양일 터.

어째서 침실도, 알현실도 아닌 도서관 안쪽에 배치돼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지하로 향하네요?"

"중요한 기록만 남겨둔 게 확실합니다."

"어서 가시죠. 혹시 모르니 성기사들은 축복과 무장을 갖추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치 던전을 탐험하는 듯한 느낌에 원정대원들은 바짝 긴장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신성력으로 주위를 밝히는 건 잊지 않았다.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왕들의 무덤이 안치된 곳 같은데요?"

"흠······ 그건 아닐 겁니다. 보통 왕의 무덤은 아예 건물을 따로 세우는 편이니까요. 바깥이 모조리 쓸려나가서 문제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깊었다. 오죽하면 공기가 희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기록을 남겨두었길래 고대의 기술력으로 이런 지하실까지 만든 것일까.

원정대는 지하실의 존재에 신기해 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괴상한 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이윽고 그들은 계단이 아니라 평평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여기는······"

"방이······ 많군요."

길게 이어진 복도와 그 양 옆에 배치돼 있는 문들. 원정대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눈빛으로 복도를 둘러봤다.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무언가 불안감을 자극시키는 복도다.

게다가 방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저 안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이에 벤피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려는 순간, 옆에서 한 성기사가 다급히 팔을 세워 제지했다.

"무엇이 있을지 모릅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네. 알겠습니다."

"우선 가장 앞에 있는 방부터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데이모스는 말을 하다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성력으로 앞으로 밝히자마자 눈에 들어온 장면 때문이었으니.

함정이 있는 건 맞다. 정확히는 함정이 존재하던 '흔적'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웬 거대한 철퇴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으며 복도 중간에는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떨어져 있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화살 또한 무수히 바닥에 놓여있다. 분명 누군가 함정을 작동시킨 흔적이다.

"······그러고 보니 후손이 먼저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모건 왕이 자신의 입으로 말했다. 전에 자신의 후손이 이곳에 당도했다고.

아마 이 함정들은 그 후손이 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혹시 몰라 학자들에게 함정이 대략 언제 발동되었는지 부탁했다.

"길게 잡아도 30년은 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덕분에 아주 손쉽게 복도를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만일에 대비하여 신성 보호막을 켜는 건 잊지 않았다.

이에 원정대원들은 아까 말했던 대로 가장 앞에 있는 문부터 열기 위해 도달했지만······

"······안 열리는데요?"

"손잡이도 없고. 대체 어떻게 여는 거지?"

특수한 열쇠가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 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그대로 두기로 정했다.

그대신 이 문과 복도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어떤 목적으로 안치된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역대 왕들의 무덤과, 그에 관한 기록이 담긴 곳인 것 같군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까 전 도서관의 두루마리에서 보았던 이름과 똑같은 문자가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왕의 이름이겠죠."

실제로 문 위에는 고대어로 작성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원정대원들은 델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모건 왕의 기록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죠. 문이 열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개방돼 있는 문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없다. 진짜로 하나도 없었다.

문들은 죄다 꽉 막혀있었으며 철저하게 박살난 함정들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도대체 이곳을 통과한 자가 누구이길래 죄다 부서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복도를 지나가는 원정대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한 곳도 다치지 않고 앞으로 쭉 걸어갈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알게 된 사실이었으나 복도는 생각보다 길었다.

이런데도 공기가 희박하지 않다니 고대의 기술력에 한 번 더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어? 저기 문이 열려 있는데요?"

그때 성기사 중 한 명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이에 원정대원들이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기사의 말마따나 다른 곳과 다르게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 딱 한 군데 존재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활짝 열려 있는 문 맞은편에는 문이 없다는 것. 또한 그 뒤의 복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보았던 무수한 문들이 역대 왕들의 무덤 겸 기록 보관소라면, 저건 필시 모건 왕의 무덤일 터.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원정대원들은 그리 믿고 있었다.

이윽고 모건 왕의 무덤으로 예상되는 방 안으로 진입했을 때······

"······유골이로군요."

"골격을 보아하니 모건 왕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유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리오스 왕국의 마지막을 기록하기 위해 책상에 앉아있는 유골을.

그 책상 뒤에는 네모난 돌무덤이 배치돼 있었다. 이를 통해 지하실은 역대 왕들의 무덤임이 확실해졌다.

다른 나라의 왕들과 달리 무덤을 만들지 않고 지하에 안치한다. 여러모로 검소하면서도 소박한 전통이라 볼 수 있다.

"시신이 없네."

"왕국이 멸망했으니 당연한 거겠지."

당연하겠지만 무덤 안에 모건 왕의 시신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었다.

모건 왕은 최후의 최후까지 악마들에게 맞서 싸웠을 테니 시신이 온전할 일은 0에 수렴한다. 이건 고고학자들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이 제일 관심을 갖는 건 바로 책상에 앉아 죽어있는 유골 뿐. 벤피스는 조심스레 유골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들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양피지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지······

"흠? 뭐야? 누가 불로 태우다가 만 흔적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것 봐. 이 끝에 그을음이 있잖아."

누군가 양피지를 불로 태우다가 만 흔적이 있었을 뿐. 다행히 비교적 끝부분이라 기록을 읽는데 무리는 없었다.

허나 손상이 가해졌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기록 하나 하나가 보물이나 다름없는 그들로서는 용서치 못할 행동.

이에 델핀은 혀를 끌끌 차며 심히 안타까워했다.

"모건 왕이 말했던 그 후손이 저지른 걸까요?"

"글쎄······ 일단 한 번 읽어보자고. 왕국이 멸망하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쓴 기록이니까 말이야."

"혹시 소리를 내어 읽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고학자들이 해독을 하려던 찰나에 데이모스가 끼어들어 부탁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신탁에서 언급한 '진실'이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 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대들은 잠시 밖으로 나가주게나."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기사들까지 무덤 밖으로 내보낸 데이모스는 고고학자들에게 눈짓했다.

고고학자들은 그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것도 잠시, 천천히 해독하며 읽기 시작했다.

"942년 12월 25일. 게리오스 왕국 최후의 서기, 밀레크 말토가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이곳에 담은 내용은 전부 진실임을 밝히며, 우리 게리오스 왕국이 세상을 누비면서 남기는 마지막 유산이 될 것이리라. 이걸 읽는 후손들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밝힌 진실이 사라지지 않도록."

"게리오스 왕국은 서쪽 끝에 자리를 잡아 대륙과 바다를 누비면서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으나 꿋꿋이 버티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문이었을까? 아무리 강한 필멸자여도 신의 분노 앞에서는 그저 나약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신을 향한 두려움과 위엄을 동시에 보여주는 글귀. 멸망 직전인 왕국의 서기가 작성한 것 치고는 다소 담담한 내용이었다.

물론 글로 썼기에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필체를 보면 얼마나 급했는지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휘갈긴 것까지는 아니어도 중간중간 그런 흔적이 다분하게 묻어있었으니.

벤피스와 델핀은 살짝 말려있던 양피지를 조심히 펼치며 다음 장을 읽었다.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줄 알았던 우리는 바다를 통해 온 세상을 탐험했다. 육로가 봉쇄되어도 강력한 해군을 통해 해상 무역을 실시했고, 도리어 육로를 봉쇄한 도시를 집어삼켜 게리오스 왕국으로 편입시켰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 힘을 주었으나 동시에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실까지 전달했다."

"그 진실은······"

고고학자들은 말을 하다가 말고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다가 뒤의 데이모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학자들의 표정에는 짙은 당혹감이 새겨져 있었으며, 혼란스러운지 눈동자 또한 떨리고 있다.

그 반응에 데이모스는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글이 작성돼 있길래 저리 경악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어째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일까. 그는 두툼한 눈썹 속에 가려진 눈으로 학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서 읽으시죠."

"··· ···"

"··· ···"

데이모스의 말에 다시 한 번 서로를 쳐다보는 학자들. 짙은 고민의 흔적이 얼굴에 새겨져 있다.

그에 데이모스가 답답함에 소리치려는 찰나, 델핀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진실은······ 이 세상은 이미 신들의 전쟁으로 한 번 멸망했다는 것."

"······뭐?"

"그리고······"

데이모스가 놀라던 말던, 델핀은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멸망 속에서 살아남은 필멸자들이, 이 땅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

"아이작."

"응?"

"만약 네 세상에 대한 책까지 완결을 낸다면 다음에는 어떤 책을 쓸 거야?"

아이작은 마리의 질문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현재 그들은 침실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단 둘이 있는 거라 온갖 이야기가 나오던 중에 저 말을 꺼낸 것이다.

이에 아이작은 시선을 위로 두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각한 건 하나 있어. 예를 들어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의 이야기? 아마 그걸 쓰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 걸 쓴다고? 그게 가능해?"

"불가능한 건 아니지. 우리 세상에는 그런 유형의 작품이 많았는 걸?"

특히 게임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게임이 하나 있다.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 속에서 던져진 인간의 발버둥.

불친절한 스토리하며 합리적으로 어려운 난이도 덕분에 두터운 매니아층을 보유한 게임이다.

특유의 스토리에 감화된 적이 있어 한 번 집필할 수 있으면 집필할 예정이다. 물론 2차 세계 대전 소설이 끝난 후에.

전에 말했듯이, 일종의 제논 일대기 if물에 가까워서 집필 자체는 어렵지 않다. 설정을 조금 추가해야겠지만.

"신기하네. 그런데 그건 신들이 뭐라하지 않을까?"

마리가 살짝 불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상이 멸망한다는 건 곧 신에게 위해가 가해졌다는 뜻일 터.

아이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신성모독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작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에이. 괜찮아. 세상이 진짜로 멸망할 것도 아닌데 뭐."

이미 한 번 멸망했다는 것을 과연 그는 알고 있을까?

절대 모를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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