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0화 〉 왕과 노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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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는 상황 재현이 끝났음에도 왕좌에 당당히 앉아있는 모건 왕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노예라 칭하며 사라졌는데 어째서 왕좌에 앉아있는 것일까.
노예가 되었을 때의 복장이 아닌 왕으로서 위엄이 돋보이는 복장. 또한 그의 머리 위에는 왕관까지 씌어져 있다.
데이모스는 그가 '원령'이 아닌, 스스로 자아가 존재하는 '혼령'이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침착을 되찾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왕좌에 앉아있는 모건 왕은 자아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대화가 통할 수도 있다는 뜻.
이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다.
"······루미너스의 자식이 정중히 묻겠습니다. 게리오스 국왕, 모건 왕이십니까?"
[그렇다. 짐이 게리오스 왕국 최후의 왕, 모건 유르크 비아 3세이니라. 죽을 때는 노예, 아서 마이샬로 죽었지만 말이다.]
방금 전에 보았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증명하듯, 모건이 특유의 위엄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데 루미너스의 자식이라······]
모건은 데이모스로부터 시선을 떼어 다른 곳을 쳐다봤다. 마치 그곳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뒤이어 그는 한동안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렴 어떻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 짐이 왈가왈부할 상황은 아닌 것 같군. 딱히 관심도 없고.]
"··· ···"
데이모스는 그의 말을 듣고 의문을 품었으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모건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좋을 게 없다.
생전에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모건은 정복 군주로 이름을 날리던 왕.
3000년 전 악마 전쟁으로 인해 기록이 대부분 다 유실되는 상황에서 다양한 기록을 남긴 자다.
정복 군주는 대부분은 폭군에 가까운 성향을 띄고 있는데다가 3000년 전 인물인만큼 괴팍한 사고관을 갖고 있을 터.
따라서 일단 예의를 갖추고, 따박따박 캐묻는 건 한사코 사양해야 된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찌하여 짐의 왕국에 발을 디딘 것인가? 짐의 후손이 이곳에 도달하고 난 후부터 20년 정도가 흐른 것 같다만.]
"······20년? 게리오스 왕국도 해를 따진 건가?"
모건 왕의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의문이 우선이었는지 고고학자, 벤피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도 지구처럼 1년은 12개월이었으며 일로 계산한다면 365일이다. 흔히 태양력이라 부른다.
먼 과거는 천문학이 발달되지 않아 다른 공식을 사용하기 마련인데 게리오스 왕국은 자연스레 수십 년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심지어 구세대 엘프마저 몇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몇 번의 겨울을 지켜봤다는 식으로 답하는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감히 짐의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물론 그 질문 자체만으로도 모건 왕의 심기를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다.
뒤이어 그는 삐딱한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손가락만 까닥거렸다.
"커억?! 컥······! 크윽······"
그러자 방금 전 질문을 걸었던 벤피스에게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느닷없이 자신의 목을 스스로 조르는 것이 아닌가.
데이모스를 비롯한 원정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지만 보아하니 모건 왕이 술수를 부린 것으로 추측된다.
시잉!
그에 성기사 한 명이 다급하게 검을 뽑았다. 여차하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표시.
모건 왕은 그런 행동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앞에서 무기를 꺼내는 것이냐? 다시 넣거라.]
철컥!
그 말을 하자마자 성기사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성기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검집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검을 뽑은 것까지는 자의를 행한 일이지만, 검을 도로 수거한 건 자의가 아니다. 몸이 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모건 왕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킨 뒤, 아래로 까닥이며 지시했다.
[꿇어라.]
쾅!
두터운 백색 갑주를 착용한 성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이것 또한 그의 자의가 아니었으며 모건 왕의 명령에 따라 몸이 자기 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아악!"
문제는 너무 강한 힘으로 바닥을 찍었다는 것. 바닥이 움푹 패였을 뿐더러 쾅!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얼마나 강하게 찍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최소한 무릎에 큰 이상이 발생했을 터. 그러는 와중에도 벤피스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있다.
얼굴색이 붉어지다 못해 푸르죽죽해지는 걸 보면 조만간 목숨까지 위험해질 터.
데이모스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상황을 보다가 서둘러 신성 주문을 외웠다.
"루미너스시여! 이들에게 자유를!"
파앗!
데이모스가 주문을 외우자마자 찬란한 금색 빛무리가 번쩍이더니 벤피스와 성기사에게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던 것인지 벤피스는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걸 간신히 멈추었고, 성기사도 뒤로 벌러덩 누울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목숨에 큰 위기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
'원령이 나타났을 때부터 예측했어야 했는데······'
전에 말했듯이 원령이 등장해 상황을 재현시킨다는 건, 그만큼 강한 원념이 어딘가에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원념이 바로 눈 앞의 혼령, 모건 왕이다. 원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현세에 끼치는 영향력은 커지기 마련.
악령에게 빙의 당해 사람들이 몸의 주도권을 잃는 것처럼, 모건 왕은 단순히 '말'로만 주도권을 빼앗아버린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인물이길래, 또 얼마나 강한 원념을 갖고 있길래 '언령'을 사용하는 것일까.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결국 모건 왕은 서쪽을 전부 지배했던 정복 군주. 악마 전쟁 이전 피와 살이 난무하던 시대에 꿋꿋이 살아남은 괴물이다.
[루미너스의 빛이라······ 오랜만에 느껴보는군. 재미있는 놈이었지.]
모건 왕은 데이모스가 펼친 신성 주문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놀랍게도 그는 만인이 우러러 보는 루미너스를 까내렸다.
원래라면 신성모독이라며 처벌해야 할 수준은 언행. 데이모스도 그 말을 듣고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전 보았던 그의 능력을 상기했다. 말 한 마디로 몸의 주도권을 강탈하는 무시무시한 능력.
지금으로서는 화가 나도 삭힐 수밖에 없다.
"······루미너스 님께서는 만인의 빛이십니다. 서쪽을 지배한 당신이어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인의 빛? 루미너스가 정말로······ 아, 젠장. 이건 못 말하는군.]
어처구니 없다는 목소리로 말하던 모건 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아꼈다. 미소로 일관하던 것과 달리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 반응에 의구심을 가진 데이모스였지만, 모건 왕이 곧바로 말을 열었기에 해소할 시간도 없었다.
[어쨌거나 게리오스 왕국은 일찍부터 태양력을 사용했다. 바다를 탐험하다 보니 자연스레 별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거든. 이거면 충분히 답이 되었나?]
"콜록! 콜록! 크윽······"
답이 되었으나 정신은 못 차리고 있다. 몸의 제어권을 빼앗겼다는 공포심 때문인지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모건 왕은 아무렴 상관없는지 원정대를 다시 둘러봤다. 방금 전과 경계심이 한층 더 강해진 표정들.
[그럼 이제 짐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겠나? 그대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는가?]
"······진실을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진실?]
진실이라는 단어에 흥미가 돋았는지 모건 왕은 삐딱했던 자세를 고쳐잡았다. 누가 보아도 경청하겠다는 자세.
그에 데이모스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게리오스 왕국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가장 먼저 제논 일대기의 등장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예언서가 되는 과정. 더 나아가 결말부에 등장한 악마의 기원까지.
이 모든 것을 설명하면 할수록 모건 왕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변해갔다.
처음에는 흥미였지만 그 다음에는 집중, 놀람, 만족 등등.
길고 긴 설명 끝에, 마지막으로 그가 보여준 반응은 '탄복'이었다.
[하하하하! 내 후손이 악마 숭배자들을 모조리 축출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그것도 책으로? 이거 정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만족스럽군! 하하하하하!]
박장대소를 하는 것도 모자라 박수까지 치면서 정말 기뻐하는 모건. 문제는 그 행동 하나로 인해서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쿠구구구구
지진이 난 것처럼 왕궁 전체가 흔들리는 건 기본이다. 더 심한 건 바로 원정대원들.
"귀, 귀가······!"
"머리가 울리는 것 같아······"
"으윽······"
단순한 폭소만으로도 원정대원들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두통을 겪었다.
흡사 악령이 혼이 실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위력. 소름 끼치는 게 아니라 그냥 아프다.
심지어 악령은 '악의'라도 있어서 이해를 할 수 있는데 모건 왕은 그런 거 없다. 단지 감탄해서 웃을 뿐인데 머리가 울리는 것이다.
데이모스가 서둘러 신성력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기절하는 사람이 나왔을 터. 그러거나 말거나 모건 왕은 진심으로 웃을 뿐이다.
[하하하하. 이거 참 신기하군. 세상을 지배하는 게 무력이 아니라 지력이었다니. 그나저나 그 후손의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아,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입니다."
[아이작이라······ 짐에게 찾아왔던 후손의 이름은 클라크였는데 말이지. 그 놈이 알려준 건가?]
모건 왕이 턱을 쓰다듬으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데이모스가 질문을 날렸다.
"시, 실례지만 왕이시여. 클라크 마이샬이라는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뭐? 못 들어봤다고?]
"예, 예. 애초에 마이샬이라는 가문은 이제 막 등장한 신생 가문. 현재 가주는 호크 듀커르 마이샬이며 미네르바 제국 출신입니다."
[흠······ 그러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데······ 으음······ 설마 알려주기도 전에 어디 가서 죽기라도 한 건가?]
앞뒤가 맞지 않는지 모건 왕은 한참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원정대원들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여기서 딴짓이라도 했다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그의 언령은 영혼을 지배하기에 무력하게 당한다.
차라리 그의 환심을 사서 상황을 천천히 해결하는 게 좋겠지. 긴장과 사막 특유의 더위로 인해 땀이 쏟아졌으나 가벼운 행동조차 하기 힘들었다.
[뭐. 됐다. 결과가 좋으면 상관없는 거겠지. 나중에 만나서 대화하면 될 테고.]
모건 왕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는지 쉬이 넘겨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지력은 자신과 거리가 멀었으니.
[그렇다면 그대들은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진실이라고 말하마. 아까 내 노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마족은 인간과 악마의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지.]
모건 왕은 한치의 고민도 없이 시원하게 진실을 원정대원에게 밝혔다. 제논 일대기에 쓰여진 사실이 진실임을 입증됐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악마의 기원이 정말로 인간이라면, 어떤 경위로 악마가 되었는가?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다. 원정대가 꾸려진 것도 자세한 경위를 알기 위해서다.
데이모스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질문을 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해야 된다. 방금 전 보았던 상황에 대한 의문도 함께 풀 수 있을 테니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우선 마이샬 가문에 대해서다. 이것 하나로 마이샬 가문에 대한 평판이 뒤집어 질 수도 있다.
"허면 아까 보았던 그 노예와의 관계가······ 정확히 어떤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짐이 사랑하는 아들이자 사위. 그리고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 인간이지.]
"그렇다면 마이샬 가문이 세상에 악마를 부른 겁니까?"
원령들이 보여준 상황으로만 보자면 노예, 그러니까 아서 마이샬이 저지른 걸로 보인다.
현재 마이샬 가문은 모건 왕의 후예임과 동시에 아서 마이샬의 후예. 관계가 다소 복잡해도 사상 최악의 죄를 저지른 왕가의 후손이다.
모건 왕이 스스로 모든 오물과 죄악을 뒤집어 썼으나 죄는 사라지지 않는 법.
여기서 가장 큰 피해자는 마족이라 할 수 있는데 마이샬 가의 진실이 밝혀지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측조차 되지 않는다.
[악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원인은 맞지. 이건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의외로 모건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긍정했다. 마이샬 가문의 죄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은 원정대원들로 하여금 의문을 낳았다.
[대신 악마를 등장시켜 세상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악마 그 자체를 만들지는 않았지.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는 수백 명의 영혼을 희생시켜 얻게 된 것뿐.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아.]
"··· ···"
[그러면 짐이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하마.]
모건 왕이 던진 질문은.
[과연 '누가' 인간을 진화시켜 악마를 창조했을까?]
듣는 이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했으며.
[그리고······]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부분들에.
[각 종족은 원래부터 이 '땅'에 존재하던 것일까?]
의문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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