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48화 (449/763)

〈 448화 〉 왕과 노예(1)

* * *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군요."

세이비어 출신의 학자, 벤피스는 왕궁 내부를 둘러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학자답게 독특한 콧수염과 반짝이는 눈동자를 지닌 남자.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내부를 둘러봤다.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고고하게 견딘 건물도 대단한데, 그 내부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단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와 모래가 쌓여있을 뿐, 악마가 활개친 것 치고 손상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분명 3000년이 넘는 시간 전에 세워졌을 터인데 건축 기술은 현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군요."

"마나와 마법은 물론 기술마저 없던 시대에 이런 건축물이라... 보존이 매우 우수하여 연구도 편하겠어요."

벤피스의 말을 이어받던 고고학자 여성, 델핀이 말을 이어받았다.

주름 진 얼굴로 하여금 그녀의 나이를 유추시켰으나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젊은이 못지 않게 강렬했다.

이 둘은 세이비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날리는 고고학자들. 이번 원정을 위해, 그리고 신탁을 위해 세이비어에서 고른 자들이다.

"악마들이 이곳을 기지로 이용한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죠. 차원과 차원을 잇는 통로로 사용했을 수도 있고, 제논의 말대로라면 의식소로 사용됐을······"

벤피스는 델핀의 말을 이어받다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눈 앞의 참상, 아니 흔적으로 하여금 무슨 상황이 발생했는지 절로 상상하게 만들었으니.

새하얀 대리석 복도 끝에는 배치된 대문. 시원하게 개방된 그 문 앞에는 핏자국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비단 문 앞만 그런 게 아니라 옆부분도 핏자국을 포함한 무수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다.

또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지만 질질 끌려 안으로 들어간 자국까지.

오랜 시간이 흘러서 얼룩 형식으로밖에 남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정황이 역력하다.

"······그 누구도. 그 누구도 밖으로 도망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데이모스의 말마따나 복도의 반도 못 간 채 비참하게 끌려간 흔적이 군데군데 존재했다.

바깥은 초토화되어 흔적조차 없었지만, 설령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해도 끌려갔을 터.

그렇다면 저 안에는 무엇이 있길래 이런 흔적들을 남겨놓은 것일까. 3000년이 흘러도 상상이 갈 정도로 짙은 흔적을.

유골조차 없는 걸 본다면 죄다 끌려간 게 확실하다.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선은..."

만일에 대비하여 데이모스가 신성력을 펼치려던 찰나였다.

뚜벅­ 뚜벅­ 뚜벅­

을씨년스러운 복도 안에서 느닷없이 울려퍼지는 발걸음 소리. 그 소리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아이케르가 무단으로 침입한 줄 알았지만, 복도를 거닐고 있는 '인영'을 보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건..."

"... ..."

복도 입구에서 누군가 일행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하지만 그 모양새가 심히 독특했다.

완전히 투명하지는 않으나 빛이 통과하여 뒤편이 알음알음 보이고 있다. 마치 반투명한 거울 같은 느낌.

뚜벅­ 뚜벅­ 뚜벅­

신원을 알 수 없는 인영이 서서히 다가오자 성기사들은 저마다 하나 둘씩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모스는 그런 그들에게 손을 뻗음으로써 제지시켰다. 아무런 해가 없다는 표시.

당연히 그 표시에 의문을 가진 성기사들이었지만, 데이모스는 인영의 정체에 대해 알려줬다.

"원령입니다."

"원령이요?"

"예. 지박령과 비슷하나 단지 그때의 상황을 보여줄 뿐. 실질적인 해는 없습니다. 영혼이 가진 원념이 너무 강하여 성불을 해도 흔적이 남는 것이죠."

악령이 원한이 너무 강하여 무차별적으로 피해를 끼친다면, 원령은 그보다 상위 차원의 존재라 보면 된다.

원한이 너무 강하여 원념이 생기고, 그 원념이 뭉치고 뭉쳐 당시 상황을 되풀이한다.

설령 영혼이 성불하여도 흔적으로 남게 돼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뚜벅­ 뚜벅­ 뚜벅­

그사이 데이모스가 원령이라 설명한 인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데이모스를 비롯한 대원들은 그 인영을 자세히 살펴봤다.

산전수전 거친 듯한 얼굴과 강직해 보이는 외모. 사자 갈기처럼 길게 뻗쳐있는 머리카락.

집채만한 덩치부터 시작해서 근육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신체까지. 누가 보아도 '전사'에 가까운 자.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뿔? 설마 마족?"

"악마로 보이진 않습니다만..."

"1세대 마족은 악마의 끔찍한 실험으로 태어났다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머리 위에 솟아난 뿔. 현세대 마족과 달리 뿔의 크기가 몇 배는 컸다.

다만 날개가 없는 걸 보아하니 완전히 악마가 된 건 아닌 듯했다.

어쨌거나 마족이 왕궁 복도를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모습은 원령이라 할지어도 궁금증을 낳기에 충분했다.

"...일단 따라가도록 합시다. 혹시 모르니 보호막을 펼치겠습니다."

데이모스의 지시에 따라 원정대는 원령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무언가도 함께 따라갔다.

이윽고 원령은 끔찍한 참상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 문으로 다다르고...

[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문에서부터 터져나왔다.

"뭐, 뭐야?!"

"무슨 소리지?"

귀를 찢는 듯한, 매우 소름 끼치는 비명에 원정대원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비명이 아니라 악령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뇌가 진동하여 극히 혼란스러웠다.

허나 비명은 하나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 아아악!]

[밖으로...! 밖으로 가야 해...]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흐어어엉!]

원령이 문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듯이 들리는 비명 소리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공포에 질린 비명들이 귀를 파고들었다.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이 뇌를 헤집는 소리들. 만약 보호막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소름 끼치는 현상이었으나, 더 큰 문제는 '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저기...!"

귀를 막고 있던 고고학자, 벤피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에 원정대원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고, 동시에 사색이 되었다.

복도를 걸어다니던 남자처럼 원령이, 아니 원령들이 바닥을 아득바득 기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원령은 약과다.

하체가 완전히 잘리고, 한 쪽 팔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비척비척 기어가는 원령도 있었다.

[안 돼...! 안 돼...! 으아아아아!!]

하지만 그 원령도 얼마 가지 않아 문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지만 소용없었다.

피 묻은 손톱 자국이 길게 이어진 자국만 남았을 뿐.

그 원령을 끝으로 상황 재현은 모두 종료됐다. 거구의 마족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지 오래.

그러나 그 누구도 섣불리 안으로 진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원령들이 보여줬던 그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자신들도 원령과 같은 꼴이 되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원정대를 덮쳤다.

"... ..."

"... ..."

"... ..."

원정대원들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활짝 개방되어 안쪽을 훤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차마 들어가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는 문.

그럼에도 방금 전 그 거구의 원령은 말없이 안쪽을 향해 진입하고 있었다.

"...들어갑시다. 루미너스께서 우리를 보호해줄 테니."

"괘, 괜찮은 건가요?"

"루미너스 님이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런 분이 저희를 사지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데이모스의 말에도 설득되었는지 대원들도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아까 전 상황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뒤이어 그들은 재차 마음을 다스린 후, 원령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나칠 곳은 활짝 개방된 대문. 데이모스는 바짝 긴장된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레, 렉스. 나야! 나라고! 네...! 커억!]

[왜, 왜 이렇게 된 거야? 주술이 잘못된...]

[히히히히.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왕께서 이런 일을...]

안은 바깥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방금 전의 상황에는 공포만 가득 했다면, 지금은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공포, 절망, 고통, 부정, 비통 등등.

원령들은 제각기 본인들의 죽음을 재현했으며, 그들의 비명과 외침은 대원들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데이모스 추기경의 신성 보호막이 없었더라면,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리라.

지금도 평범한 학자에 불과한 벤피스와 델핀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발굴은 뒤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저 원령을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예, 예!"

이 상태에서 발굴해봤자 제대로 나오는 건 없을 것이다. 원정대원들은 마족 원령의 뒤를 계속 밟았다.

[어서 책을 지하로 옮겨라! 우리의 마지막 유산이다!]

[기록을! 기록을 남겨야 한다! 어서 빨리...!]

[이 끔찍한 주술은 반드시...! 세상에...!]

도서관으로 추정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는 학자들의 절규가.

[우리는 여기서 죽는다! 일어나라, 게리오스의 전사들이여!]

[끝까지 맞서 싸워라!]

[아아... 나는... 간다... 발할라로...]

훈련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는 용맹한 군인들의 포효가.

[바다의 주인이시여... 저희는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소서...]

[게리오스 왕국에 축복을... 게리오스 왕국에 축복을...]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예배실로 추정되는 곳에는 성직자 혹은 주술사들의 절망이.

[응애! 응애! 응애!]

[차, 착하지. 딸아.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엄마는 괴물로 안 변해... 안... 변할... 거...]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여인까지.

세기말의 종말을 목도한다면 이런 상황이 펼쳐질까. 고요하기 짝이 없는 왕궁 안과 달리, 눈 앞에 펼쳐지는 상황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오히려 고요하디 고요한 왕궁에 대비되어 기괴함까지 느껴질 정도. 이 원령들의 원한이 얼마나 강한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족 원령은 묵묵히 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주변이 절망과 비극으로 점칠된 순간에도, 그는 오직 한 방향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우뚝­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거대한 문 앞에서 마족 원령이 걸음을 멈추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뒷편까지 훤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뒷편은...

"...알현실인 모양이군요."

알현실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단상 위에 우뚝 솟아난 왕좌를 본다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악마 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천장이 박살 나버려 사막 특유의 따가운 햇살이 비추어지는 알현실.

마족 원령은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내 두 팔을 내밀었다.

끼기기긱­

이미 문이 개방돼 있음에도 원령이 미는 시늉을 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뒷편에서 들리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전부 끊겼다. 원정대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문을 완전히 개방한 마족 원령은 이내 드넓은 알현실에 들어섰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늘한 바람, 아니 기운이 원정대를 덮쳤다.

마치 고대 유적에 잠들어 있던 주인의 방에 진입한 듯한 느낌. 데이모스는 신성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기운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아까 상술했듯이 상황을 재현하는 '원령'들이 나타난다는 건, 그만큼 강한 원념이 남아있다는 것.

상황을 보여주는 원령들에게 영혼은 없으나, 이런 현상을 만드는 '주체'는 반드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지켜본 원령들은, 특정 영혼이 강한 원념을 지닌 채 박혀있을 가능성이 크다.

승천조차 못한 채 영원히 되풀이 되는 과거.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얽매는 사슬.

[왔느냐.]

그리고 그 주체가, 우뚝 솟은 왕좌에 앉아 마족 원령을 맞이했다.

분명 마족 원령에게 하는 말인 게 확실하나 왜인지 몰라도 원정대에게 말하는 것 같은 착각.

원정대는 알현실 전체가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홀린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군요. 폐하.]

그동안 마족 원령이 예의를 담아 입을 열었다. 그러자 왕좌에 앉아있는 원령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코웃음친다.

마족 원령처럼 집채만한 덩치. 과거의 복식에 따라 바지가 아니라 기다란 치마 같은 하의.

험상궂은 외모,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카락과 수염. 겉으로 드러난 팔은 바위처럼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왕좌 옆에 당당히 세워진 '양날 도끼'까지.

왕으로서의 위엄을 풍기면서 온갖 고초를 겪은 것 같은 장군의 이미지.

데이모스를 비롯한 원정대는 왕좌에 앉은 원령이 누구인지 바로 깨달았다.

기록상으로 남았던 게리오스의 마지막 왕, 모건 유르크 비아 3세.

아이작이 밝혔던 진실에 따르자면, 그가 악마 전쟁의 근원이자 주모자다.

'헌데 주모자라기에는 아직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데...'

제논 일대기에는 왕이 가장 먼저 악마가 되었다고 서술돼 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광경은 무언가 달랐다.

왕 앞까지 도달한 마족은 서서히 악마로 변하는 반면, 왕은 체격만 클 뿐 평범한 인간이지 않은가.

[어떻습니까? 제 모습이.]

생각이 점차 복잡해질 때 마족 원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신을 보라는 것처럼 두 팔을 양 옆으로 펼친다.

하지만 3000년 전 인간이 보기에는 악마나 다름없을 터. 게리오스 최후의 왕, 모건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흉측한 모습이로구나. 왕가의 상징인 그 붉은 머리가 아까워.]

[폐하께서 하사하신 이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 그리고 제가 이곳까지 올라오게 해준 힘. 당연히 황송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미천한 노예가 폐하께 은원을 돌려주려고 합니다.]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 그 단어를 듣자마자 원정대원들은 한 사람, 아니 가문을 떠올렸다.

미네르바 제국을 위기에서 여러번 구해준 기사, 호크 듀커르 마이샬.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세상을 구한 성자라 칭송받는 작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이 가문의 특징이 바로 방금 언급된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다. 이 특징을 전부 갖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뒤져봐도 전무한 수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 원정대는 입을 꾹 다문 채 상황을 지켜봤다.

[짐은 이 자랑스러운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이면 충분하다. 그딴 흉측한 뿔은 필요없어.]

[하. 수백 명의 영혼을 먹어치운 분께서 그런 말을 하니 무언가 이상하군요. 조금만 더 욕심을 내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까지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의는 있느냐? 나라는 자아가 있고, 또 우리라는 개념이 있느냐? 내가 원하는 지배는 또렷한 이성 아래에 다스리는 것. 그곳에 내가 원하는 게 있는 것이냐?]

[그러면 저 콧대 높은 귀쟁이를 힘으로 압도할 수 있는 겁니까?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영혼을 갈아마셔도 우리 인간은 저 귀쟁이들을 이기지 못할 겁니다.]

모건 왕과 마족 원령은 끝없이 논쟁을 이어나갔다.

모건 왕은 괴물이 되어서까지 세상을 지배해봤자 부질없다는 말을, 마족 원령은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다는 입장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하디 흔한 논쟁이었지만 그 '괴물'이라는 게 악마라는 것이 요점이다.

[시간이 흐르면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넘어올 것이다. 엘프 그 놈들은 모든 게 완벽하지만 오만하고, 무엇보다 도전 정신이 없지. 하지만 우리 게리오스 왕국을 보아라. 동쪽 끝에 있는 알븐하임처럼 서쪽 끝에 자리잡았지만, 우리는 드넓은 '바다'를 지배하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야 말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법. 우리는 엘프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세계의 진실들도 알았지 않느냐?]

[그 진실이 당장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다의 지배가 아니라 바다의 힘입니다. 자연의 어머니에게 축복을 받은 엘프처럼, 우리도 바다의 주인에게 힘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바다의 분노는 우리 필멸자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중간에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 원정대원들의 의문을 이끌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바다와 관련된 무슨 짓을 저지르다가 이 사단이 난 걸로 보인다.

하지만...

"바다는... 3000년 전 악마들이 만든 곳 아닙니까?"

"어째서 저들이 바다의 존재를 아는 거죠?"

"설마 3000년 전에도 바다가 존재하던 건..."

그렇다. 이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3000년 전, 악마 전쟁 이후부터 존재하던 환경.

악마들이 하늘에 비를 뿌려 바다가 생겼다는 게 정설이자 모두가 믿고 있는 '신화'에 가까웠다.

세계수가 바닷물을 빨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전세계는 바다에 잠겼을 터.

그런데 모건 왕과 마족 원령은 태초부터 바다가 존재했다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데이모스도 혼란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으나,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럴 듯한 가설을 꺼냈다.

"...아무래도 3000년 전의 신화다 보니 과장이 섞여있을 수도 있죠. 허나 온 세상이 바다에 잠길 뻔한 건 사실입니다. 벤피스 씨와 델핀 씨는 잘 알고 있겠죠

"예, 예. 물론입니다. 실제로 해수면이 상승했다가 낮아진 정황이 세계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죠."

"그때문에 수많은 문명이 멸망했습니다. 대부분의 유적들에 소금기가 들어있죠. 이를 보면 악마들이 세계를 바다 속에 가라앉히려 시도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3000년 전에도 바다가 존재했다는 건 전세계가 발칵 뒤집어질 진실이다.

물론 조사를 더 해야 자세한 정황을 알겠지만 충격적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신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기록만큼은 필멸자들의 주관적인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대체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 타락시켰단 말이냐? 대체 무엇이 부족했느냐? 힘? 지위? 명성? 부? 너는 짐의 노예로 성장했으나 의형제와도 같다. 그대에게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를 준 것도 이 이유 때문이지. 헌데 무엇이 부족했던 것이냐?]

결국 답답했는지 모건 왕이 호소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바깥 상황은 세기말이나 다름없는데 알현실은 평온하다.

달리 말하자면 모건 왕이 그만큼 마족 원령, 아니 노예를 신뢰했다는 뜻이다.

도저히 믿기 싫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모습. 그에 노예가 입을 열었다.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 ...]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저를 거두어 노예로 길렀으며, 전사의 상징인 붉은 머리와 황금의 눈동자를 하사하셨지요. 제 뼈가 부서지도록 훈련시킨 스승이자, 목표를 갖게 해준 은인.]

말을 잠시 멈춘 노예는, 이내 모건 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제 아버지 같은 분이자, 저에게 진짜 '가족'을 선물한 분.]

[... ...]

[저는 단지 당신에게 걸맞는 세상을 선물하고 싶을 뿐입니다. 폐하.]

단순히 왕과 노예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에 가까운 관계. 한 평생을 전선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

지위를 초월한 우정.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 간의 은애.

허나 그 보답의 방식이 과격하고, 비틀렸다는 게 문제다. 게리오스 왕국은 정복 사업으로 악명이 높았던 나라.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전쟁이 발발하고, 게리오스 왕국은 인륜을 저버린 주술까지 사용하며 영향력을 뻗쳐나갔다.

일말의 인간성이 남았더라도, 이미 깎여나간 정신은 어둠으로 채워질 터.

지금은 그 인간성마저 완전히 소실되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저지른 상황이다.

[...그렇군.]

모건은 노예의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천천히 되새기는 얼굴.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왕은 감았던 눈을 뜨며 노예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느덧 등 뒤에 점점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 노예. 마족이 아니라 진정한 '악마'로 변하는 중이다.

차마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는 외양에, 모건 왕은 그에게 '명령'했다.

[그렇다면 무릎을 꿇어라.]

[... ...]

[무릎을 꿇고 짐의 말에 복종하라. 이 모든 혼란을 수습하고, 모든 일에 책임을 지거라. 짐의 충실한 노예여.]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다시 노예로 취급하겠다는 발언.

[거절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예는 명료히 받아쳤다. 더이상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정면으로, 그것도 왕이자 주인에게 선언한 것이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된다. 노예제도가 존재할 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노예가 명령에 불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거부한다면 둘 중 하나다.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현재는 노예제도가 엄격히 금지돼 있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사업이다.

3000년 전은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는 않을 터.

[...알겠다.]

모건 왕은 노예가 단호하게 답하자 삐딱했던 자세를 풀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일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치 거대한 태산이 기상하는 것 같은 위압감을 풍겼다.

원령이 이정도 기운을 풍기는데 살아있을 때는 얼마나 강했을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일을 하는 것도, 그대의 주인이자 짐의 역할이겠지.]

왕좌에서 일어난 왕은 애병으로 추측되는 양날 도끼를 쥐며 아래로 내려갔다.

노예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팔을 하늘로 서서히 들어올렸다.

꽉!

그러자 그의 손에 모건 왕과 똑같은 무구, 양날 도끼가 등장했다. 공간 마법을 사용하여 무기를 쥔 것이다.

왕과 노예였으나, 동시에 스승과 제자이기도 한 두 사람. 똑같은 무기를 쓰는 건 결코 이상하지 않은 일.

쿠웅!

마침내 왕좌에서 내려온 모건 왕이 발을 크게 구르며 전조를 알렸다.

이에 치마 같은 하의가 나풀거리며 아래에 감추어졌던 다리가 드러났다.

바위 같이 울퉁불퉁하면서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들.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체.

왕이었지만 한 명의 전사였던 게리오스 왕국의 정복 군주.

[짐의 이름은 모건 유르크 비아 3세.]

모건 왕은 흩날리는 먼지 바람 속에서 고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다의 패왕, 게리오스 왕국의 군주이니라.]

최후가 다가왔어도, 그의 목소리는 한치의 떨림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대의 주인, 모건 알챠드 마이샬이 고한다.]

이윽고 모건은 거대한 도끼를 위로 번쩍 들어올리며.

[죽어라.]

짧고 간결하게 명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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