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7화 〉 회색 사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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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사막 원정은 예상했던 대로 험난한 길이 이어졌다.
수백 명이 광활한 사막을 넘는 것마저 힘든데 모래 안에서는 온갖 악랄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틈만 나면 신기루가 튀어나와 원정대의 진을 빠뜨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급선이 제대로 활성화돼 있어서 탈수가 일어나거나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는 것.
게다가 몬스터가 강해도 엘프와 마족의 협공, 여기에 성직자의 보조까지 있으니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리에 성급히 출발한 원정대지만 그럼에도 철저한 준비를 한 터라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심지어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도 텔레포트를 이용해 곧바로 후송 조치를 하면 그만이라 인력이 부족할 일도 없다.
길 찾기가 더럽게 어려웠을 뿐이지. 나침반과 임시로나마 제작된 지도가 없었더라면 원정은 한 달 이상 걸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스켈레톤이다!"
"젠장! 변방에 무슨 스켈레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악마 전쟁 중에 도망치다가 죽은 시민들이겠지!"
하지만 게리오스 왕국에 도착했더라도 마냥 일이 쉬워진 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게리오스 왕국은 최초로 악마가 등장한 왕국.
3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풍화되지 않고 스켈레톤이 된 시체들이 모래 속에 묻혀 있었으며, 그 수는 원정대로 하여금 기가 질릴 정도였다.
심지어 악마들의 시체도 중간 중간 섞여 있는데다가 그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더군다나 스켈레톤은 쓰러뜨려도 신성력으로 퇴치하지 않으면 다시 부활하는 망자들. 신성력이 없다면 불로 태우는 수밖에 없다.
결국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늦추기 위해 천천히 도심부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지? 다른 곳과 상당히 다른데?"
"보아하니 점령지를 관리하는 행정부 같은데······ 아. 여기 기록이 있어!"
"어디? 어디?"
그러거나 말거나 게리오스 왕국은 학자들에게 꿈의 도시나 다름 없는 유적지. 겉으로 보이는 건물 구조부터 시작하여 간단한 문자마저 큰 보물이었다.
비록 악마들이 날뛰는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고,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풍화되었지만 기록만큼은 잔존해 있다.
평민이 쓴 일기마저도 학자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부족했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무엇보다 게리오스 왕국은 악마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만 해도 세계로 뻗어나가던 패권국으로 유명하다.
악마 전쟁 때문에 그들이 어떤 경위로 강대국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여기 기록을 보면 농사를 지었던 모양인데?"
"뭐? 여기는 사막이잖아. 농사를 어떻게 지었던 거지?"
"글쎄. 악마들이 땅의 생명력을 다 먹었던 건가?"
"그럴 가능성도 높겠네."
유적을 탐사하면서 얻게 된 정보는 바로 게리오스 왕국은 원래 사막이 아니라 평범한 땅이었다는 것.
그것도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 매년 풍년이 들 정도로 비옥한 땅이 많았다는 기록이 존재했다.
그러한 산출량을 통해 백성들은 매일 매일 배를 불렸고, 먹고 살기 편해지니 자연스레 삶의 질이 올라갔다고.
군대는 밥을 먹어야 진격을 한다는 누구의 말처럼, 식량이 풍족하니 자연스레 정복 사업도 펼칠 수 있던 것이다.
"이거 보게나. 이거 참······"
"아이를 위하는 마음은 어딜 가나 똑같구만."
가끔 가다 아이를 꽉 껴안고 있는 어른의 유골을 발굴하거나, 갈비뼈가 완전히 파손되었는데도 손에서 검을 놓지 않는 유골 등.
역사 속에서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단번에 보여주는 유적들을 보면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들의 숭고한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 스켈레톤으로도 부활하지 않았다. 성직자를 포함한 학자들은 이런 유골을 잘 기록하면서 장례를 치렀다.
이리하여 하나 둘씩 게리오스 왕국에 대한 유적을 발굴하면서 점차 도심부로 나아가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이거 놔라! 난 그저 연구를 위해······!"
"시끄러! 품 안에 있는 동전을 가로챈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그리고 네 놈은 학자도 아니잖아!"
"이 놈을 결박하고 다른 놈도 수색해라! 도굴꾼들이 중간에 섞여 있다!"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원정대원 중 한 명이 유물을 도굴한 것. 단순히 화폐를 품에 넣은 것밖에 없었으나 딱 걸려버린 것이다.
겨우 화폐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현재 발굴하는 지역은 게리오스 왕국.
제논이 밝힌 진실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려 3000년 이상 묻혀있던 고대의 왕국이라 유물의 가치가 매우 높다.
아닌 말로 화폐 하나만 몰래 챙겨도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다. 그만큼 값어치가 상당하다.
"앞으로 발굴은 세이비어 교국에서 허락한 곳에서만 하시오! 더이상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오!"
결국 또다른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세이비어 교국이 먼저 엄포를 놓았다. 당연히 그 엄포에 반발하는 대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전부 묵살당했다. 도굴 방지라는 명분은 너무나도 강력했으니.
이에 도굴꾼을 향한 시선이 급격히 나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 결국 그 도굴꾼은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곧바로 도심부, 그것도 왕궁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향하겠소! 우리의 진짜 목표는 제논이 밝힌 진실을 찾는 것이니! 진실이 밝혀진 후에는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소!"
"아. 그럼 괜찮지."
"오히려 좋은데?"
조삼모사라고, 학자들은 원정대가 지체하지 않고 도심부로 향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안심했다.
안 그래도 당장 왕궁으로 달려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가려운 부분이 시원하게 긁어준다.
이후로 원정대는 보급소 겸 후방 지원을 남기고 도심부로 나아갔다. 후방은 전부 정리하여 큰 문제가 터질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워낙 넓은 영토를 보유한 게리오스 왕국이었던 탓에 도시로 향하는 길조차 매우 힘들었다.
또한 악마의 영향이 남아있던 건지 서식하는 몬스터도 점점 강해졌으며, 스켈레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때문에 임시 기지를 세우면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마족 및 학자 대부분이 안전 및 발굴을 위해 남게 됐다.
특히 마족이 상당히 뼈아픈 손실이다. 마족 한 명 한 명의 전력은 매우 막강하여 이러다가 위험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콰앙! 콰득! 우드득!
"······저 엘프 뭐야?"
"저기 있는 엘프 학자의 남편이라는데?"
종족전쟁 당시 활약을 펼쳤던 아이케르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 혼자서 원정대를 도맡아도 되는 수준이다.
숫자만 많았던 스켈레톤은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으며, 강한 축에 속하던 몬스터도 얄짤없었다.
알븐하임에게 있어서 회색 사막 원정은 여태까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라고 증명하듯, 시원시원한 돌파를 선보였다.
이에 선발대는 광활한 영토를 지나친 끝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리오스 왕국 수도의 명칭은 웨이스토.
옛 말로 '서쪽 끝'이라 부르는 곳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여기는······"
"거의 남지 않았군요."
원정대 책임자, 데이모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중얼거리자 부관이 이어받았다.
그의 말마따나 악마 전쟁의 최초 발발지여서 그런지, 화려할 것으로 추정되던 수도는 죄다 파괴되어 황량한 황무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게다가 서쪽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듯, 그 뒤로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으며 바람은 짜디 짠 바다 냄새를 풍겼다.
이곳에 과연 남아있는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그들의 눈길을 단번에 끄는 구조물이 하나 있다.
"헌데 희한하게도 왕궁은 멀쩡하군요."
데이모스의 말처럼 주변 건물은 다 파괴돼 있는 반면, 왕궁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중앙에 우뚝 세워져 있다.
3000년 전, 악마 전쟁의 겁화 속에서도 우두커니 살아남은 왕궁.
현대 왕궁들처럼 하늘 높이 우뚝 솟아나지는 않았으며, 신전에 가까운 형태를 띄고 있었다.
게리오스 왕국은 '주술'을 중점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던 나라였으니 왕궁이 신전 형태를 띄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마 저곳이 악마 전쟁의 진정한 시발점이었을 거예요. 저곳에 무슨 일이 진행됐는지 몰라도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을 테니 왕궁만큼은 무너져서 안 됐겠죠. 기록에 따르자면 주술로 강력한 군사력을 키웠던 나라니까요."
엘레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신빙성이 높은 가설을 꺼냈다. 실제로 알븐하임의 정치기관, 엘로디아도 신전과 비슷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 안에서 루미너스와 모라를 모시는 예배당도 존재했으며, 엘로디아 뒷편에는 세계수까지 높게 뻗어있다.
다시 말하지만 왕궁이 신전의 역할을 하는 건 결코 이상하지 않는 일. 특히 주술은 특유의 불확실성 때문에 왕이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많다.
본래라면 왕궁 근처에 커다란 '제사장'이 있어야 하나 악마 전쟁의 여파로 소실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저곳에 진실이 묻혀있겠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죠."
"흐음······"
데이모스는 송충이처럼 두꺼운 눈썹 아래에 묻힌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옆을 힐긋거렸다.
현재 이곳까지 따라 온 학자는 엘레나, 신디를 포함하여 정확히 4명. 나머지는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2명은 세이비어 출신이자 '신탁'을 이행하기 위해 데려온 인물.
다시 말해 엘레나와 신디를 왕궁에서부터 떨어뜨려 놓아야 신탁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루미너스 님은 어째서 그런 신탁을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데이모스는 자그만한 눈을 다시 송충이 눈썹에 숨기며 상념에 잠겼다.
원정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루미너스는 이런 신탁을 내렸다.
[진실을 파헤쳐라. 하지만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곳에 갇힌 진실은 그에 맞는 곳으로 던져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혼란이 닥칠 것이니.]
보통 신탁은 애매모호하게 전달되는 편이나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애매한 수준을 넘어 직설적이다.
그 신탁이 내려지자마자 세이비어 교국은 난리도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교황과 추기경들에 한해서다.
저 신탁은 교황이 예배를 할 때 내려진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떤 신탁이 떨어졌는지 모른다.
예정일보다 더 일찍 원정대를 출발시킴으로써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을 뿐. 신탁의 내용은 지도층만 알고 있다.
'심연처럼 깊고 어두운 곳에 갇힌 기록······'
아이작이 밝혔던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또한 그에 맞는 곳으로 던지라는 건 즉, '바다' 속으로 던지라는 뜻일 터.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 알 수 없으나 저 왕궁 안으로 들어가면 알게 되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엘레나를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아야 된다.
이에 데이모스는 헛기침을 하며 주변의 이목을 이끌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엘레나와 신디도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우선 저와 벤피스, 델핀 씨는 왕궁부터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엘레나와 신디 씨는 주변부터 조사해주실 수 있습니까?"
"누구 마음대로요? 저희도 같이 가야죠."
너무 뻔한 속셈이었던 걸까. 엘레나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받아쳤다.
왕궁 주변의 흔적도 충분히 조사할만한 가치가 있지만 왕궁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게다가 아까 말했듯이 너무 뻔한 수작이다.
안 그래도 예정보다 일찍 출발한 탓에 미심쩍은 부분들이 많은 상황. 여기서 자신과 신디만 따로 떼어놓는다?
이들이 왕궁 안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다. 엘레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신탁과 연결된 일이라 어쩔 수 없군요."
"그놈의 신탁······ 루미너스 님께서 숨기고 싶은 게 있으신가 보죠?"
엘레나는 고운 눈쌀을 찌푸리며 다소 위험한 발언을 꺼냈다. 그것도 추기경 앞에서.
"감히 루미너스 님을 의심하는 게냐!"
"아무리 엘프인 너라도 그 발언은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울컥한 성기사들이 검까지 뽑으며 그녀를 겁박했다. 반면 데이모스는 할 말이 없었는지 평온을 유지했다.
엘레나는 검이 자신에게 겨누어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코웃음쳤다. 저렇게 대해봤자 늘어나는 건 적대감밖에 없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다. 아이케르는 그 상황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성기사들은 여태까지 막강한 무위를 자랑하던 아이케르가 다가오자 바짝 긴장했지만, 의외로 그는 다소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 아내가 여러분 앞에서 말실수를 한 것 같군요. 추기경 님의 제의대로 저희는 따로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보!"
아이케르가 순순히 따라주겠다고 하자 엘레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버럭 소리쳤다. 그에 아이케르는 그저 미묘한 미소만 지어줬다.
그 미소에 무언가 눈치챈 게 있는지 엘레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표정에 깃든 불만은 여전했지만.
데이모스도 꺼림칙할지언정 아이케르가 정중히 물러나자 다행이라 여기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도굴이 목적이 아니라 진실을 알기 위해 왔다는 것.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거면 우리도 같이 가면 되지이······"
뒤에서 신디가 툴툴거렸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그 누구도 듣지 못했다.
그리하여 몇몇 사람이 좌표 설정 및 보급을 위해 임시 기지를 설립하기 시작할 때쯤, 데이모스는 성기사 몇 명과 학자들을 대동한 채 왕궁으로 향했다.
엘레나는 왕궁으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케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데이모스 일행의 뒤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투명화 마법으로 따라가려고? 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비는 해 놓을 걸?"
엘레나의 말마따나 데이모스도 현재 아이케르의 의중을 의심하는 중이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벌어질 상황이었는데 순순히 물러났으니 그럴 수밖에. 더군다나 원정 중 무시무시한 무력까지 선보였던 그다.
최악의 경우, 무력을 사용하면서 충돌을 빚을 수 있었기에 최대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투명화 마법 또한 만능이 아니다. 평범한 성직자면 몰라도 추기경이 사용하는 신성장막 안에서는 바로 들통날 테니까.
몰래 잠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력을 사용하자니 후폭풍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걱정 마시오.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자가 갈 테니."
"다른 자? 누구?"
엘레나의 의문에 아이케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답했다.
"여왕님이 보낸 사람은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오."
"······?"
엘레나는 그 대답을 듣고 더욱 아리송해졌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윽
동시에 그녀 뒤에서 약간이나마 '굴절'돼 있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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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가 게리오스 왕국을 발굴하고 있을 시간.
장례식 아닌 장례식 끝에 아이작이 발매하겠다고 낸 제논 일대기 외전은 또다른 폭풍을 낳았다.
우선 달달하다 못해 이가 썩을 듯한 전개를 보여주어 진·릴리 커플들을 성불시킨 건 물론이고, 중반부와 결말부에 나온 노래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으니.
둘 다 제목은 거의 똑같았지만 가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하나는 진과 릴리가 서로를 위로하는 듯한 가사였으며, 다른 하나는 핍박받던 마족을 위한 헌정곡이나 다름없었다.
추상적이면서도 애절함이 담긴 두 개의 노래. 독자들은 저마다 이 노래를 제대로 부르기 위해 노력했다.
[진과 릴리에게 걸맞는 노래. 그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는 마족에 걸맞는 노래. 이로서 주인공은 제논이 아니라 진임이 밝혀졌다.]
[사랑은 국경은 물론 종족까지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준 외전. 사람들의 마음을 달달하게 녹여내었으며······]
[음유시인들은 각자 이 선율이 맞다면서 언쟁을 벌이는 중이다. 과연 제논은 누구의 편에······]
[또한 음유시인들은 각자 노래를 준비하여 다음 제논 축제 때 보여줄 거라······]
아이작은 가만히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디션을 보게 돼버렸다. 오디션이 아니라 가수들이 한데 모여 열창하는 무대에 가깝다.
덕분에 새로운 문화 거리가 늘어나서 좋긴 좋았지만, 현재 아이작은 그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노래는 분명 핍박받던 민족을 위해 쓴 노래일 거야. 그렇지? 누가 봐도 희망찬 노래잖아."
왜냐하면 세실리가 외전을 보자마자 그에게 달려들어 이것저것 질문했으니까.
바둑까지 내팽겨치고 달려올 정도로 노래가 인상 깊었다나 뭐라나.
"어······"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모두 알다시피 그 노래는 아동용 만화에서 나온 것이다.
어린애들을 위한 노래치고는 다소 추상적이고 훌륭한 명곡이라서 그렇지.
세실리도 아이작의 이상한 반응을 보고 나서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그럼 누구를 위한 노래였어?"
"누구를 위한 노래라기 보다는······ 어린이들이 보는 문화에서 나온 노래였어."
그리 알려주자 세실리는 충격 받은 표정을 짓더니······
"······아이작네 세상은 어린이가 살기 힘든 세상이었어?"
"··· ···"
또다른 오해를 낳아버렸다.
"아니지. 아이작의 나라는······"
"내 나라가 어째서?"
"······아냐. 우리가 잘해줄게."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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