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5화 〉 회색 사막(2)
* * *
세이비어 교국의 최고 지도자는 교황이지만, 아무리 교황이어도 신탁 앞에서는 평범한 성직자와 똑같다.
다만 신탁은 그 특징상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경우가 많으며, 교황은 그 갈래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막강하다.
다른 성직자가 이 신탁의 뜻은 이거다! 라고 할 때 교황이 반대하면 얄짤없다는 뜻. 물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신들이 이걸 예측하지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 내려온 신탁 또한 회색 사막 원정을 앞당기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리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하지만 문제는 세이비어측에서 신탁에 대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거야."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거짓말은 아닐 거야. 옛날에 그랬다가 천벌을 맞은 적이 있거든. 감히 신의 위신에 먹칠을 하는 거냐면서."
루미너스를 포함한 신들은 평소에는 한없이 따뜻한 분들이지만 몇몇 부분은 엄격하다.
일단 거짓말을 절대 못한다. 약간 말하기 곤란한 정보여도 진실만을 알려준다. 그 이유 때문인지 돌려서 말할지언정 거짓말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방금 리나가 말했던 것처럼 신탁이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하자 천벌이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그 광신도들마저 신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굳게 믿을 뿐이지, 결코 거짓말만큼은 하지 않는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문제지만. 신들이 광신도들을 자제하지 않는 이유도 거짓을 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세이비어 쪽에서 수상한 짓거리를 꾸밀 수도 있다는 거야?"
"당장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어쩌면 제논 일대기에서 밝힌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네 입장이 상당히 난처해지겠지."
"흐음······"
나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나가 꺼낸 가정이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우선 클라크가 그 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나는 제논 일대기에 넣었을 뿐이니까.
만약 거짓말이었다면 신들이 나에게 언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갔다.
다시 말해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것 자체는 진실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나를 숙청하려는 것도 아닐 테고.'
더군다나 신들은 나를 어여삐 여기고 있다. 최고신이자 주신인 히르트마저 나에게 순수한 자연의 축복 즉, '권능'까지 하사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을 차근차근 좀먹고 있던 악마 숭배자를 밝혀내고 더 나아가 악마 전쟁까지 수천 년 뒤로 미루었다.
다시 말해 신들이 나를 버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다간 현실적으로도 본인들이 큰 해를 입을 수도 있다.
내가 그리 만드려는 게 아니라 신자들이 의심을 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아무래도 내 명성이 신 바로 아랫단계에 다다를 만큼 커져버렸으니.
'세이비어가 신탁을 이상하게 해석했을 가능성도 염두해야지.'
현재로서는 경우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다. 가장 최악의 경우가 내가 밝힌 진실이 거짓이라는 거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세이비어가 너무 빨리 원정대를 출발시킨 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리나에게 물었다.
"원정대 책임국가는 세이비어 교국이지?"
"응."
"다른 국가들은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하는 거야?"
"기본적인 물품 지원부터 시작해서 기사단을 파견했어. 헬리움과 알븐하임도 비슷한 상황이고. 하지만 원정대의 특징상 교국의 세가 강할 수밖에 없어. 사막을 횡단해야 될 뿐더러 원정대에는 비전투직도 있으니 성직자의 역할이 막중하지."
아까 신문에서도 본 적이 있다. 게리오스 왕국은 여태까지 복합적인 사정으로 인해 3000년 이상 동안 묻혀있던 고대 유적.
학자들 입장에서는 악마 전쟁의 시발점을 확인할 수 있는 걸 넘어 3000년 전의 패권국을 발굴하는 것이다.
당연히 학자라면 가슴이 뛰다 못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겠지. 실제로 원정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이 나오자마자 세계 각지의 학자들이 저마다 달려왔다.
이로 인해 고고학자를 비롯한 학자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가끔 신문에서 거론되던 학자들도 대거 포함돼 있다.
'그 수가 얼마 안 되긴 하겠지만.'
물론 그 수가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회색 사막은 그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한 마의 지대.
비전투직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원정대가 갖는 부담감이 커질 테니 인원을 최소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10명이 저마다 권위 높은 학자들이니 유적을 발굴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시간을 앞당겼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드네. 대체 어떤 신탁이 내려졌길래."
"굳이 신탁이 아니더라도 미심쩍은 부분은 많아. 지금으로서는 원정이 정상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원정만 성공한다면 헬리움이나 알븐하임 둘 중 하나가 텔레포트를 설치하면 되니까."
가끔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회색 사막을 두 발로 건너기 어렵다면 마법으로 하늘을 날거나 텔레포트를 쓰면 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텔레포트는 일단 그곳으로 가고, 좌표부터 알아야만 사용이 가능한 마법이다.
텔레포트를 통해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으로 향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다가 미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하늘을 나는 건? 시야는 넓어져도 길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특히 사막 같은 곳은 길을 잃기 딱 좋다.
게다가 마족은 그전까지 고립되어 시도 자체를 하지 못 했고, 알븐하임은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왜 그딴 더러운 곳에 가야 하냐는, 엘프 특유의 사고방식이 작용한 게 크다. 그래도 엘프 학자가 포함돼 있다는 소식은 있다.
"그나저나 왜 이런 사실을 나에게 알려준 거야? 신들께 한 번 말씀드려 달라고? 무슨 신탁을 내렸는지?"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하고는 리나의 의중에 대해 물었다. 사실 회색 사막 원정 자체는 나와 큰 연관이 없다.
악마의 기원은 신들마저 암묵적으로 진실이라 인정한 상황이었으니. 그곳에서 어떤 진실이 나오던 간에 나에게는 소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리나가 이 사실들을 알려준 이유가 있을 터.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나는 한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안했는지 피식 웃었다.
"······아냐. 그냥 네 생각이 어떤지 물어본 거야. 너무 답답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거든. 세이비어가 독단적으로 저질렀다면 모르겠는데 신탁까지 내려와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라서."
신권이 강한 세상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세이비어 교국에서 온갖 괴악한 사건이 터져도 강력한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신의 존재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가 온갖 항의를 덧붙여도 '신의 뜻' 한 마디면 전부 묵살되니까. 필멸자는 불만을 가질지언정 뜻을 따라야 된다.
만약 과거에 세이비어가 광신에 휘말려 미친 짓거리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더 심했을 것이다.
루미너스가 이 상황을 원하는 건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세이비어의 강력한 뒷배인 셈이다.
루미너스가 세이비어를 버릴지언정 세이비어는 루미너스를 버리지 못할 테고.
헬리움도 국교를 모라로 삼기에 교국이라 부를 수 있지만, 신자가 루미너스보다 훨씬 적어 권세를 부리지 못 하는 중이다.
"음······ 한 번 여쭈어 보기는 할게. 때마침 조금 있다가 신전을 갈 계획이었거든."
나는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두드리다가 리나를 힐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나의 부탁을 들어줄 겸 개인적인 궁금증도 해소하기 위해서다.
"저, 정말로? 정말로 여쭐 생각인 거야?"
그러자 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다급히 물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부릅 떠지니 깜짝 놀란 고양이 같다.
진짜 고양이(레오나)는 따로 있었지만 인상이 비슷하니 됐지. 나는 그녀의 질문에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신 기대는 하지 마. 루미너스 님도 알려주기 힘들다고 답하실 수도 있거든. 게다가 신탁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 루미너스 님이 아니라 세이비어에 치중했으면 좋겠어."
"그, 그거야 물론이지. 우리 같은 필멸자가 어찌 신의 뜻을 알겠어? 난 그저 신탁의 내용이 궁금했을 뿐이야."
"알겠어. 다른 거는?"
"하나 있긴 있는데······"
역시나. 나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거렸다.
리나도 영 부끄러웠는지 주먹을 입에 갖다 대며 헛기침을 했다. 뺨이 미미하게 붉어진 걸 보아 부끄럽긴 부끄러운 모양이다.
뒤이어 그녀는 여전히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와 관련된 거야. 너도 악마 숭배자가 음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지."
"그리고 그 자금이 우리 미네르바 제국에서 줄줄 새어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고?"
"케리손 백작가가 제일 큰 피해를 봤다며?"
들리는 소식에 따르자면 케리손 백작의 가주는 현재 심문을 받는 중이라고 들었다.
아무래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의 자금이 악마 숭배자에게 줄줄 새어나갔으니 어쩔 수 없는 조치다.
백작 본인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나 알다시피 이런 경우에 딱 알맞는 말이 있다.
알았으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이라고. 어찌 됐던 간에 황실 입장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다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맞아.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문제를 하나 발견했어."
"그게 뭐야? 백작이 정말로 공범이었다는 거?"
"그것보다 더 심할 수도 있어."
대체 뭐길래 그것보다 더 심하다는 걸까. 약간 호기심이 생겨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리나는 혹여 누군가 들을까봐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악마 숭배자는 자금을 대부분 우리 제국으로부터 충당했어. 그 충당한 자금으로 전세계 음지에 영향력을 뻗쳤지."
"음······"
"그런데 그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위조화폐야."
"······위조화폐?"
나는 위조화폐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조화폐는 지구에서도 유서 깊은(?) 범죄 중 하나다.
그 위력은 나라의 경제를 깡그리 무너뜨릴 정도로 위험하다. 화폐에 대한 신뢰도를 박살 내는 데다가 통화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되어 인플레이션까지 초래하니.
먼 과거에는 위조화폐를 발행할시 대부분 사형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일관했다. 전쟁을 할 때마저 위조화폐 발행은 기본적인 전술일 정도.
보아하니 악마 숭배자도 위조화폐로 자금을 충당한 것 같은데, 문제는 그 대상이 막강한 경제력으로 드높았던 미네르바 제국이라는 것.
악마 숭배자가 활동한 지 오래되었으니 지금쯤이면 미네르바 제국의 위조화폐가 전세계에 퍼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미네르바 제국의 화폐는 기축통화 역할도 하고 있으니······'
골드, 실버, 쿠퍼 등등. 미네르바 제국의 화폐는 저런 식으로 세고 있으며 강력한 경제력을 토대로 기축통화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비록 화폐개혁이 터지지 않아 '지폐'는 등장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기축통화 취급 받고 있다.
대신 '달러'처럼 완벽에 가까운 기축 통화가 아니라 유로화, 엔화, 파운드에 가깝다.
세계 경제는 물론 아직까지 금융업이 발달되지 않아 첨단 금융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계에 미네르바 제국의 위조화폐가 퍼졌다는 건······
"좆됐네."
"······직설적으로 말하면 더 우울해져."
"직설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지."
아직 중앙은행이 발명되기 전인데 특정 나라의 위조화폐가 전세계에 퍼졌다? 그것도 준기축통화 역할을 하는 화폐가?
수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된다. 진짜 화폐와 위조화폐가 이리 저리 뒤섞여 분리가 힘들었을 테니까.
하물며 이제서야 위조화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건, 그만큼 악마 숭배자의 위조화폐가 정교하다는 의미다.
덕분에 미네르바 제국은 악마 숭배자의 요람이라는 오명을 또다시 뒤집어 쓸 것 같다. 아주 그냥 동네북이다.
'그래도 제국은 이런 면에 민감해서 다행이지.'
제국도 바보가 아닌지라 경제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위조화폐에 대해 철저히 대비했다.
만약 그것조차 하지 않았더라면 미네르바 제국은 빈민가가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며 경제가 폭싹 주저앉았겠지.
중간중간 화폐개혁을 감행하여 피를 보기는 했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피해를 감수할 수 있었다.
"피해 규모는 어때?"
"우리 제국보다는 바깥이 문제야. 악마 숭배자 놈들이 영리하게도 제국 내에 위조화폐를 뿌리지 않고 바깥에서만 사용했거든. 아무래도 우리 제국은 이런 부분에 민감하다 보니 위험을 감수하기 싫었나 봐."
"생각보다 영리하네."
"교활한 거지. 아무튼 이건 외교적으로 욕을 좀 먹고 끝낼 수는 있는데······"
그러면서 말똥말똥하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기대를 한껏 담은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한다.
아무래도 위조화폐를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넌지시 묻는 것 같다. 나는 그 의중이 담긴 표정을 보고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가 나를 무슨 파란 너구리 로봇으로 알고 있는 건가.'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조화폐만큼은 대비할 방법이 없다.
중앙은행의 등장과 금융업이 발달에도 위조화폐가 전세계에 돌아다니는 지구인데 뭘 바라나.
심지어 미국 달러는 아예 분간이 불가능한 위조화폐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실정이다.
"미안하지만 내가 살던 세상도 위조화폐는 꾸준히 돌아다니고 있어. 이건 대비하는 게 아니라 잡아야 하는 거야."
"정말로 안 돼?"
"그것보다 경제를 따로 관리하는 기관부터 만들어. 지금처럼 돈이 줄줄 새고 있는데도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현재 미네르바 제국에게 가장 필요한 건 중앙은행이 아니라 제대로 된 컨트롤 타워 즉, 중앙집권 체제다.
전세계에 본인들의 위조화폐가 대놓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전혀 몰랐다는 건 엄청난 문제다.
현 황제인 베리트가 무능한 건 절대 아니다. 악마 숭배자가 교활한 것도 있고 귀족들이 협력을 잘 하지 않는다.
봉건제의 최대 단점이라 할 수 있고,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터지기 전에 이랬다.
'악마 숭배자가 흑사병 역할을 하다니 조금 웃기긴 하지만.'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테르스 왕국은 다른 형식으로 정치 체제를 발전시켰다. 질병보다 무서운 게 혁명이긴 하지.
아무튼 위조화폐는 경제와 금융업이 발달되어도 '화폐'가 존재하는 이상 뗄래야 뗄 수 없는 범죄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돈이라는 말이 왜 있겠나. 결국 이건 잡는 것밖에 답이 없다.
"······알겠어. 일단 이번 일을 계기로 황권을 좀 더 강화해야겠네."
리나도 결국 포기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착잡하게 말했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진짜 방법이 없어서 못 알려준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있어?"
"아니. 없어."
"그럼 루미너스 님을 뵈러 갔다 올게. 다른 일도 해야 되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 후로 루미너스 신전으로 향하고, 개인 예배실에서 직접 물어봤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그건 알려줄 수 없단다.]
내 이럴 줄 알았어.
*****
회색 사막 원정대는 수많은 나라가 지원을 보냈지만, 사실상 세이비어 교국 홀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국가가 전부 지원을 보내기도 전에 신탁이 내려왔다며 갑작스레 출발했으니.
본래라면 약 1000명에 달하는 정예 병력이 모일 예정이었으나, 지금은 대략 700명 정도가 모여있다.
예상보다 부족한 숫자이나 한 명 한 명이 정예 병력이었으며, 비전투직은 이중에서 약 5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보급' 문제도 헬리움, 알븐하임에서 파견을 온 마법사들 덕분에 무리없이 가능했다.
이에 겉보기에는 숫자만 부족하지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이들이 향할 곳은 악랄하기로 유명한 '마의 지대'.
그 어떤 원정대도 통과한 적이 없는데다가 광활한 사막만이 펼쳐져 있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은 지역이다.
하지만 '진실' 하나만을 찾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정예병들이 한 곳에 모였다. 인간, 마족, 수인, 드워프, 마지막으로 엘프까지.
각각 장점들을 살려 원정대에서 활약할 예정이었으며, 3000년 이상 묻혀있던 유적을 발굴하러 가기 위해 나아갈 것이다.
"정말로 아이작의 말이 사실일까요오······?"
진하게 내려온 다크 서클과 흐물거리는 말투. 그러나 엘프답게 외모가 받쳐주어 묘한 퇴폐미를 발산하는 신디가 넌지시 물었다.
그 질문에 풀잎을 연상시키는 머리카락과 녹안을 지닌 엘프, 엘레나가 지도를 보다가 말고 그녀를 쳐다봤다.
오랜만의 모험길이라 그런지 신디는 다소 긴장된 모습이다. 하기야 1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아카데미에서 연구만 했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원정이 아니라 그곳에 묻혀있는 '진실'이 더 긴장되는 모양이다.
"글쎄. 검증되지 않은 진실이라 나도 잘 모르겠네. 가서 확인해야겠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오······?"
"나도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이렇게 가슴이 뛰던 적은 오랜만이거든."
전에 몇 번 설명했다만 엘레나와 신디는 본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유적을 파헤치던 모험가다.
모험을 하면서 얻은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지,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다.
물론 귀차니즘에 쩔어있던 신디는 가기 싫었으나 엘레나가 친히 끌고 왔다.
"3000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유적이라니. 기대되지 않아? 게다가 혼자라면 모를까, 아예 국가 차원에서 원정대를 꾸렸잖아. 결코 포기할 수 없지."
"네에······ 네에······ 아카데미에 말을 했고요?"
"아니? 겨울 방학 전에 돌아오면 되잖아."
"··· ···"
신디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실제로 가능할 것 같아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
평소에는 이지적인 면모를 풍기는 엘레나지만, 이처럼 가끔 가다 모험가 기질이 발동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말려도 소용이 없다. 아카데미에서 100년 동안 조용히 지냈으니 그럴만도 하지.
결국 신디는 한숨을 푹 내쉬며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조수로 들어간 게 천추의 한이다.
"······마음대로 하세요오······ 그래도 전 죽기 싫은데에······"
"그럴 줄 알고 내가 이 사람까지 데려왔잖아?"
신디의 말에 엘레나는 바로 옆의 남자와 팔짱을 꼈다.
두터운 남자의 팔을 풍만한 가슴에 바짝 붙이는 걸 보아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신디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얼굴 자체는 미형이었으나 수염을 풍성하게 길러 다소 마초적인 인상을 풍기는 남자.
또한 떡대가 어마어마한데다가 팔만 봐도 근육질이라는 걸 단번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이리라.
"여왕님이 부탁하셨다지만 오랜만에 바깥 구경하니까 좋지?"
"하하하······"
엘레나의 말에 남자, 아이케르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놀랍게도 현재 그는 원정대에 참여한 상황이다.
대신 참석할 때 가명을 사용했을 뿐더러 직접적인 무력 표출보다는 호위에 가까웠다.
당연히 그 호위 대상은 자신의 아내이자 학자인 엘레나, 그리고 그녀의 조수인 신디.
이외에 알븐하임에서 파견을 나온 엘프들은 있지만, 학자는 엘레나와 신디밖에 없었다.
본래라면 다른 엘프 학자들도 포함돼 있어야 정상이나 세이비어 교국이 예상보다 빨리 출발하는 바람에 끼지 못한 것이다.
"사막의 날씨는 엄청 덥다던데 괜찮소?"
"나야 괜찮지. 그나저나 당신 피부 좀 봐. 밖에 얼마나 안 나갔으면 나보다 하얀 거야?"
"가끔 성지에 들리긴 했다만······"
"변명은 됐어. 아무튼 이번에 믿고 있을게."
엘레나는 본인의 애정을 더 표현하고 싶은지 아예 앵기는 수준으로 달라붙었다.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그들의 금슬은 여전히 돈독했다.
그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신디로서는 옆구리가 시릴만한 상황이었지만.
아이케르는 사랑하는 부인의 애교에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렸다가 원정대를 둘러봤다.
확실히 세이비어 쪽에서 작정하고 꾸린 원정대인만큼 한 명 한 명의 기백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여기는 추기경까지 포함돼 있지 않은가.
'당초보다 일찍 출발하는 게 썩 의심스럽지만······'
알븐하임은 애초부터 세이비어 교국을 믿지 않아 아이케르를 지원 병력으로 차출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르웬이 직접 찾아와서 설득에 설득을 한 건 당연한 수순.
처음에는 아이케르도 썩 달가워하진 않았지만, 엘레나가 원정대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엘레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얻을 테니.
'뭔가 있어. 아마 유적 내부에 들어가는 순간 본색을 드러낼 터.'
아이케르는 종족전쟁 당시 인간의 비상함과 교활함을 직접 체험했다. 그렇기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면 항상 경계했다.
사막을 건널 때는 평범한 원정대처럼 행동하겠지만, 그 안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진짜라 할 수 있다.
과연 그 진실이 무엇이길래 모두가 의심할만한, 이런 성급한 결정을 내렸던 걸까.
아이케르는 한창 준비 중인 원정대를 재차 둘러봤다가 엘레나에게 물었다.
"엘레나. 우리가 갈 곳을 지도로 보여줄 수 있겠소?"
"여기."
우선 위치부터 확인하는 게 좋겠다. 최악의 경우, 두 발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으니.
물론 그의 생각을 모르는 엘레나는 아이케르가 원하는 대로 지도를 펼쳐 보여줬다.
"여기 이 부분 전체가 게리오스 왕국의 영토였어. 서쪽의 끝을 전부 지배했다고 해도 무방했지."
"흠. 이런 왕국도 악마에게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라······"
"그렇지. 게다가······"
엘레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게리오스 왕국의 영토는.
"서쪽은 '바다'로 에워싸여있어서 도망칠 곳도 없었을 거야. 악마는 그냥 동쪽으로만 뻗어가면 그만이었고."
지구의 유럽과 매우 유사한 지형을 띄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