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44화 (445/763)

〈 444화 〉 회색 사막(1)

* * *

레오나와의 첫날밤은 다른 여인들과 달리 다음 날 오후까지 이어졌다. 안 그래도 체력이 강한데 발정기까지 합치니 기력까지 소모해서 더 오래 걸렸다.

다행히 머스크가 선물한 약이 꽤 훌륭한 효과를 드러낸 덕분에 내가 먼저 지쳐 떨어지진 않았다. 대신 사소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거사가 전부 끝나고 정리하려던 찰나, 마리가 내 침실로 찾아왔다는 것.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나오지 않길래 걱정되서 찾아왔다고.

하지만 상황이 마리의 질투심을 자극시키기에 딱 좋았던 상황이어서 그녀에게도 한 번 기가 빨릴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레오나와 물고 빨고 해도 상관없지만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쥐어짤 거라는 협박은 덤.

어쨌거나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정사를 나눈 탓에 그 날 하루는 뜬 눈으로 지냈다. 수면 패턴을 위해서라도 이게 낫다.

레오나도 한 번 푹 자고 나서 저녁을 먹자마자 다시 잤다. 기력까지 소모한 탓에 숙면을 통해 체력 회복은 필수다.

그리하여 제일 힘들었던 첫날밤이 흘러가고, 하루를 잠만 자고 나서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타다닥­ 타닥­

일상으로 돌아오자마자 집필을 마무리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참고로 레오나는 아직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다.

듣자하니 수인은 발정기 때 모든 체력과 기력을 끌어올리지만, 그걸 전부 소진한다면 당분간 잠만 잔다고.

하지만 그것도 수인 특유의 강한 재생력이 있을 때나 국한된 거지, 레오나는 혼혈이다.

당연히 재생력도 상대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으며 듣자하니 지금은 밥만 먹고 꾸준히 잔다고.

게다가 세계수잎 시가향으로 이성까지 잃어버려 한계까지 몰아붙였으니 회복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실리처럼 한 번에 쾅! 하고 터뜨리는 타입이라 봐야겠지.'

다만 시가향으로 이성을 끊어버리는 바람에 조절은 실패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잠만 자는 중이고.

덕분에 저녁에는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게다가 레오나가 자기 전에 나한테 이리 말했다.

만약 성욕을 꾸준히 해소했다면 지금처럼 기력까지 쥐어짜면서 들이박지는 않았을 거라고.

다시 말해서 또다시 이런 힘든 일을 겪기 싫다면 꾸준히 성욕을 해소해달라 간접적으로 부탁한 셈이다.

물론 여태까지 다른 여인들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당분간은 레오나와 몸을 섞을 예정이다. 그녀도 내심 바라는 것 같았고.

이렇듯 한바탕 폭풍이 스쳐지나간 첫날밤이 끝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대다수다.

예를 들자면 지금 영지에서 신나게 웃고 떠들고 있는 관광객들. 진의 장례식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잘 놀고 있겠지?'

내가 진을 살려주겠다고 하자마자 곧바로 축제로 바뀐 게 어이없긴 해도 독자들이 좋아하니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외전까지 딱 발매를 한다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그 모습을 한 번 보고 싶다.

실제로 세계수잎 시가의 효과가 남아있는지 몰라도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이 멈추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 더 피우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중독될 것 같아 최대한 참았다.

아무리 이로운 효과를 준다고 해도 거기에 의존한다면 역효과를 내기 마련이니.

'그래도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건 나쁘지 않겠네.'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사고라도 나서 정신없을 때 피우면 될 것 같거든.

'이제 다 적긴 했는데······'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외전 원고를 쳐다봤다. 이제 한 페이지만 적는다면 끝이다.

하지만 여기서 살짝 걸리는 점이 있다. 이대로 발매해도 괜찮은 것인가.

또다른 외전인 '스쳐간 영웅'은 일종의 프리퀄에 가깝지만, 이번에 낼 건 진정한 의미의 결말이다.

제논 일대기 결말에 어울리는 말을 쓰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다.

'일단 진이 진주인공이니까 진과 관련된 문장을 넣으면 되겠다만.'

여기서 가장 좋은 전생에 유명했던 노래를 넣는 것. 사실 제논 일대기의 스토리에 딱 맞는 노래는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던 명곡, '걱정말아요 그대'.

떠나간 사람 혹은 추억을 위해 부르는 추모곡에 가까웠으며 비극적인 죽음이 많은 제논 일대기에 딱 어울리는 노래다.

원래라면 제논의 스승, 카이르가 사망하고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제논이 부르기로 정했지만······

'하필 그때 까맣게 잊고 있어서······'

당시 다사다난한 일들이 터지는 바람에 깜빡하고 넣지 않았다. 만약 넣었다면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선사했겠지.

심지어 모라마저 지구의 노래를 간접적으로나마 듣고 싶다며, 나에게 꼭 넣어달라고 이전에 부탁했다.

다행히 내가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지만 미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넣을까?'

솔직히 넣어도 큰 상관은 없다. 제논 일대기의 밝은 것 같으면서도 우울한 분위기에 딱 어울렸으니.

다만 문제는 외전의 특징이다.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등장한다면 모를까, 외전은 진과 릴리가 중심이다.

게다가 이 외전을 읽을 때 사람들은 진을 주인공이라 생각하겠지, 제논은 뒷전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진에게 딱 어울리는 노래를 넣어야 한다는 건데······

'하나 있긴 있는데······'

가사만 듣는다면 진이 아니라 마족 그 전체를 위한 헌정곡이라 칭할만한 노래가 하나 있다.

전생의 내가 초등학생 시절이었을 때 들은 명곡 중의 명곡, 전영호의 'Butter­Fly'.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노래일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추상적인 가사여서 단순히 듣기 좋은 노래로 기억되지만,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니 명곡임을 깨닫는 노래 중 하나다.

특히 가사가 정말 인상 깊다. 다소 시궁창적인 세계 속에서도 힘차게 날개짓을 한다는, 꿋꿋하면서 희망이 가득한 내용이다.

'가만 보면 옛날 노래에 추상적인 가사가 많았지.'

추억 보정이 어느 정도 있겠지만 정말 좋은 노래가 수두룩하다. 나는 그 노래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전생의 나는 문화적으로 축복받은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최악의 금융 위기였던 IMF에서부터 탈출하고, 각 가정마다 간신히 여유를 얻었으니.

게다가 반일 감정도 꽤 낮아져 여러 만화를 수입하고, 더빙까지 하면서 텔레비전에 송출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어서 만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 극도로 한정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생전 처음 보는 만화를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니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눈 나빠진다고 멀리서 보라고 했는데.'

이제는 먼 과거가 생각나서 그럴까. 괜스레 울컥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서둘러 상념으로부터 빠져나와 다시 작업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아프긴 해도 전생 즉,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다.

하지만 과거의 잔재를 이곳에다가 끌어올 수는 있겠지. 덕분에 마음을 굳혔다.

'조만간 모라님의 신전을 방문해야겠네.'

물론 가사가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닌지라 모라의 도움은 필수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출력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전은 노래 가사만 넣는다면 끝이다. 이 소식은 모라의 신전에 방문하고 머스크에게 알리면 될 것 같다.

지금 바깥에서 한창 축제를 벌이고 있는 독자들과 영지민들에게 정말 좋은 선물로 남게 되겠지.

이가 썩을 정도로 달달한 순애를 보여준다고 선포까지 했으니 승천하고도 남을 것이다.

'근데 가사를 적으면 음유시인이 부르려나?'

이 세상에도 음유시인은 존재하고 있다. 음유시인이라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에 가깝지만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음유시인으로 칭하겠다.

아무튼 음유시인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신화나 영웅들과 관련된 노래를 하거나 시를 짓는 등. 떠돌이 가수와 비슷하다.

당연하게도 문화의 나라, 테르스 왕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지금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듣자하니 제논 일대기와 관련된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이건 넘어가자. 내가 신경 쓰는 건 외전에 쓸 가사를 그들이 어떻게 부르냐다.

'종족마다 차이점은 있어도 공용어를 쓰니 잘 번역해야겠지.'

원곡에 몇몇 부분에는 영어가 있으니 이 세상은 '외국어'가 없다. 그냥 다 같은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다 똑같은 건 아니고 지역마다, 그리고 종족마다 억양이나 몇몇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어가 같으니 가사를 쓸 때 고심해서 번역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확실히 언어가 다 같은 것도 뭔가 이상하네.'

전생의 지구, 넓게 보지 않고 유럽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좁은 땅에 수많은 언어와 문자가 도사리고 있다.

영어부터 시작해서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어 등등. 문자 자체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기원이지만 언어는 제각각 다르다.

바로 옆나라가 쓰는 언어마저 다른데 이 세상은 다소 특이하다. 전부 다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니.

물론 과거에는 다른 문자를 사용했으나 이건 언어가 차츰 발달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한글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지 않은가. 이곳도 다를 바가 없다.

'역사에는 신들이 쓰는 언어를 갖고 왔다 했으니 이상한 건 없지만······'

물론 신들이 '언어'를 내려줬다고 하니 의구심 자체는 옅어진 편이다. 실제로 나만 하더라도 신들과 멀쩡히 대화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당장 생각해야 될 건 '번역'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 감성 그대로 옮기기에는 여러모로 힘든 작업이다.

실제로 바둑에서나 쓰던 '사활', '초읽기', '자충수' 같은 건 아예 없어서 내가 직접 단어를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세상의 문맥이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걸까. 제논 일대기를 수월하게 집필할 수 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만약 문맥이 영어권에 가까웠으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을 작성했겠지. 불행 중 다행이라 할만했다.

'선율 자체도 발라드 버전이 있으니 뭐······'

알아서 잘 하겠지. 하지만 워낙 명곡 중의 명곡이라 과연 이걸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음유시인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더군다나 발라드처럼 잔잔하게 부를 수는 있어도 원곡 특유의 폭발적인 감성을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힘들 것이리라.

음유시인은 있어도 '가수'라 칭할만한 사람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전생의 노래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한다.

'이제 남은 건······'

나는 오랜 집필로 굳어진 몸을 풀면서 생각했다. 남은 건 프리퀄 외전, '스쳐간 영웅'의 집필과 대망의 세계 2차 대전.

세계 2차 대전은 기억도 되살릴 겸 정리도 해야 되서 시간이 걸리긴 하겠다만 스쳐간 영웅은 곧바로 집필을 할 예정이다.

결말까지 스토리를 전부 구상해 놓은 데다가 협찬 문제도 없다. 세계수잎 시가를 피는 것으로 결론지었으니.

똑똑똑­

[아이작. 나야. 잠깐 들어가도 될까?]

내가 몸을 풀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하며 허락을 구했다. 목소리를 보아하니 리나인 모양이다.

마리나 아델리아면 몰라도 리나가 찾아오는 직접 일은 극히 드물었다. 세실리와 아르웬은······ 바둑을 두고 있을 테고.

이에 나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쉽게 허락을 내렸다.

"들어와."

[그럼 실례할게.]

끼익­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리나가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금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섞여 우아함을 풍기는 드레스 차림.

날카로운 눈매로 하여금 고양이 같은 인상을 지닌 그녀가 내게 꾸벅 인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돌돌 말려있는 종이 뭉치를 한 손에 들고서. 보아하니 신문인 것 같다.

"거기 앉아. 그래서 무슨 일이야?"

"네가 한 번 봤으면 하는 소식이 있어서."

테이블 의자에 앉은 리나가 나에게 종이, 정확히는 신문을 전달했다.

나는 리나의 건너편에 앉으면서 신문을 펼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신문을 깜빡하고 읽지 않았다.

[회색 사막 원정대, 진실을 찾으러 출발. 지도자는 세이비어 교국의 추기경, 데이모스로······]

[테르스 왕국, 미네르바 제국, 알븐하임, 헬리움 등. 수많은 나라에서 지원을 보낸 회색 사막 원정대가 오늘 공략에 나섰다. 전세계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합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원정대의 목적은 제논 일대기에 보여준 진실을······]

[원정대에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등. 수많은 학자들이 포함돼 있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대자보에 기재된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바로 회색 사막 원정대가 출발했다는 것.

나는 이 신문을 보고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정대가 꾸려진다는 소식은 듣긴 했다만 너무 급작스럽다.

최소한 일주일은 소요될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것일까. 나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리나를 쳐다봤다.

리나도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소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색 사막 원정대가 출발했다는데? 너는 알고 있었어?"

"어제 알았어. 문제는 너무 갑작스러웠다는 거지."

"너무 성급한 거 아냐? 각 국에서 보낸 지원 병력은?"

"다행히 잘 도착했어. 하지만 지도자가 데이모스 추기경 즉, 세이비어 교국이지. 뭔가 이상해서 아바마마에게 여쭈어 보니······"

그녀는 잠시 말을 흐렸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좁혀진 미간을 보아 상당히 찜찜한 모양이다.

나는 리나의 말이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나에게 직접 온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진 것일 터.

"······신탁이 내려왔대."

"신탁?"

"응."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최대한 빨리 출발하라는 신탁. 다른 곳도 아닌 세이비어 측에서 밝힌 거야."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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