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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31화 (432/763)

〈 431화 〉 실패(4)

* * *

마리의 40대와 그럼에도 애 같다는 발언에 정신이 잠깐 혼미해졌다. 확실히 전생을 기억해도 다소 애 같은 면모를 보이긴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리의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났는지 어머니가 정말 난감한 질문까지 하셨다.

"그럼 아기였을 때도 기억을 한다는 거니? 엄마가 너에게 젖을 물렸을 때나 아니면 기저귀를 갈았을 때도?"

"······아뇨. 지금은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생각이라는 명확히 인지했을 때는 3살이었어요."

이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다. 똥오줌을 못 가리거나 어머니의 젖을 문 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일이 있었구나~ 라는 식으로 얼핏 기억을 할 뿐이지. 그때는 환생이고 뭐고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여 본능밖에 없었다.

그래도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다. 내 몸이 컨트롤할 수 없는 건 둘째치고 분변을 못 가린 건 정말 최악이었으니.

심지어 분변을 못 가린 건 3살 때도 마찬가지여서 기저귀를 갈 때마다 정말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쩐지. 아이작은 유독 조숙한데다가 미운 3살이라는 말과 한참 동떨어졌지. 애가 얼마나 똑부러지고 말을 잘 듣던지 그것 때문이었구나."

"보통 업둥이로 키운 막내는 막나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것도 없었죠."

"나는 말을 일찍 깨우친 게 신기했어. 언어를 다 깨우치자마자 어려운 책부터 읽고. 이제야 이해가 가네."

각각 어머니, 데이브, 니콜의 말이다. 당시에는 내가 조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지만 진실을 밝히니 하나 둘씩 납득하는 반응이다.

뒤이어 아버지도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아이작. 너는 전에도 작가였느냐?"

"네. 원래 제가 살던 곳에서도 작가로 살았죠."

"음. 그렇구나."

아버지의 반응은 다소 독특했다. 납득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으나 약간 아쉽다는 표정이랄까.

그 표정을 보고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는 머쓱한 듯,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만약 네가 전에도 무예와 가까웠다면 훌륭한 기사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말이다. 몸이 약했을 뿐이지,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는데다가 이해력이 좋아서 말이다."

"이이도 참. 그랬으면 지금의 아이작이 없었겠죠. 우리한테 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을 거고요."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쉽잖아."

보아하니 여전히 나를 기사로 키우고 싶으신 모양이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몸이 안 따라줘서 포기하신 거다.

그때는 내 몸이 지금처럼 튼튼하지 않았을 뿐더러 막내라고 소중히 대해줬으니까. 내 기준으로 힘든 건 매한가지였지만.

덕분에 굴강한 체력 못지 않은 집중력을 터득했으니 소득이 전혀 없던 건 아니다. 특히 '성실함'을 준 게 가장 크다.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 지구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살던 세상은 이곳과 많이 달라요. 맹수는 있어도 몬스터라 할 만 한 건 없고, 종족마저 오직 인간밖에 없었거든요. 게다가 마나와 마법도 없는데다가 과학과 문화가 극도로 발달돼 있는 세상이에요."

"뭐? 몬스터가 없어?"

"인간밖에 없다고? 마나랑 마법도?"

"마나랑 마법이 없는데 과학이랑 문화가 발달될 수가 있나?"

역시 내가 예상했던대로의,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속속 튀어나왔다. 그들에게 마나와 마법, 마지막으로 몬스터는 상식 중의 상식이자 세상을 조율하는 문물이니.

과학과 문화조차 마나와 마법이 있기에 가능한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당장 냉장고마저 마법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했으니.

이렇듯 제각기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 속에서, 오직 마리만이 다른 반응을 드러냈다.

"그거 네가 전에 머스크 씨와 대화했던 거지? 마나와 마법이 없는 세상 말이야."

"기억하고 있네?"

"워낙 생뚱맞은 이야기라 다 기억하고 있지. 그런 곳에서 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던 거구나. 뭔가 퍼즐이 딱딱 맞는 느낌이야."

때아닌 떡밥 회수에 마리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는 번뜩 떠오른 게 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급히 물었다.

"그럼 1년 전에 교수한테 질문했던 거는? 12척의 배로 100척이 넘는 배를 쓰러뜨린 것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야?"

이제는 내가 깜짝 놀랄 차례였다. 무려 1년 전, 아카데미 신입생 당시 교수에게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마나와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도 그런 압도적인 물량 차이를 이길 수 있을지 궁금해져서 그런 질문을 꺼냈다.

세계 대전은 탱크나 전투기와 같은 병기가 존재하여 패스하고, 그나마 비슷한 거라고는 명량 해전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불가능. 이런 저런 설명을 갖다 붙여도 신의 사도 즉, '화신'이 존재해도 승리를 불가능하다고 답변이 돌아왔다.

심지어 교수가 부드럽게 답해서 망정이지, 실상은 '뭐 그런 헛소리를 하냐?' 식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다가 워낙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잖아. 그거 정말로 이긴 거야?"

"응."

"어떻게? 마나와 마법도 없는데? 그것도 저주받은 바다에서?"

"나도 모르고 후손도 몰라.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이겼어."

물론 판옥선과 일본의 배의 스펙 차이가 있긴 했지만, '상식적으로' 압도적인 물량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는 법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이순신이 탄 대장선 홀로 분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길 것 같으니까 1척을 제외한 나머지 배가 출동한 거고.

하지만 조선 수군이 입은 피해는 사실상 전무한 수준이었고, 일본 수군은 아주 개박살이 난 탓에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온갖 연구를 하고 있음에도 도저히 해답을 찾지 못해 이런 저런 가설만 난무하는 실정인데 내가 알 턱 있나.

마리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 독심술을 통해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못 믿지. 그걸로 책을 써도 못 믿겠다. 주인공을 너무 띄워준다고 욕만 주구장창 먹을 거 같은데?"

"어쨌거나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게다가 그 분은 그 전투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뒤집어버렸거든."

"상대했던 적 입장으로서는 무조건 이겨야 할 전투를 패배했으니 당연하겠지. 다만 환경이 열악한 걸 보면 이전에 극심한 피해를 입었을 테고."

군사에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가 내 설명을 보충해주셨다. 단순히 상황 설명만 했는데 전후사정까지 완벽하게 꿰뚫고 계셨다.

그의 말마따나 조선 수군은 원균의 하드 트롤링으로 인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를 당했다. 그 결과로 조선 수군이 뿔뿔이 흩어진 거고.

심지어 이순신 장군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파직까지 당하고 백의종군 상태였다. 그럼에도 수군을 완벽히 통제하고 승리까지 거둔 것이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질 수밖에 없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질 수 없는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라 할 수 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빈말이 아니라 이순신만 아니었더라면 조선 정벌은 진작에 성공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것도 저의 세상 기준으로 약 400년 전의 이야기에요. 아까 말했듯이 과학과 문화가 여기보다 극도로 발달된 세상이라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자면?"

"인간의 손으로 하늘을 나는 피조물을 만든다면 믿으시겠어요? 이뿐만이 아니라 강철로 제작한 배로 바람과 파도도 없이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더 나아가 손바닥만한 물건으로 전세계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전에 리나에게도 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내 질문에 대한 반응도 그녀와 비슷했다.

"못 믿겠는데?"

"마법도 없이 과학으로만? 그게 가능해?"

"말도 안 되지. 냉장고조차 마법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그게 마법이지 아니면 뭐겠어?"

마법도 없이 오직 과학으로만 행한 일이라 하자 다들 못 믿는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겠지.

당장 냉장고가 있어도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건 고위급 마법사만 가능한 일이다.

기계로 하늘을 난다는 건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특히 이런 경향은 바다가 더 심하다.

지난번 바다에 대해서 조사하니 항해술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으니까. 배를 건조하는 능력마저 시대에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바다를 악마의 보금자리이자 해양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탓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엘프마저도.

제아무리 마법이 있다지만 그 작디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어찌하여 대영제국으로 변모했는지 잘 생각해보자.

바다를 점령하는 자가 세계를 점령한다는 말이 있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은 유독 바다를 심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탓에 정체돼 있다.

'기본적인 항해술이 개판이니 증기선을 발명해도 큰 효과는 없을 거야.'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그야말로 미지 그 자체였으니.

당장 과학이 발달된 지구조차 바다는 끝없이 미지라 표현하고 있으니 두려워하는 것 또한 정상이다.

어쨌거나 바다에 관한 건 이정도로만 하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가족들을 보며 설명을 이었다.

"우리 세상은 그게 가능했어요. 제논 일대기에 묘사한 증기 기관차 있죠? 그건 제가 살던 시대 기준으로 유물이나 다름없어요. 그것보다 훨씬 발달된 기차가 존재하거든요."

"으음······ 말로만 들어서는 썩 와닿지 않구나. 그림으로 설명해줄 수 있니?"

"물론이죠."

나는 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각각 비행기, 증기선,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노트에다가 그려줬다.

생전 처음 보는데다가 전혀 다른 세상의 물건. 마리와 내 가족들은 무한한 관심을 퍼부으며 내 그림에 집중했다.

그들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상식과 비교하며 설명하는 건 잊지 않았다.

특히 휴대폰에 관한 설명이 가장 쉬웠다. 이곳에도 통신을 위한 수정 구슬이 존재하니까.

나머지는 조금 힘들었던 것이, 나는 과학과 거리가 먼 문과에다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 있어서 제대로 된 설명은 힘들었다.

"이게 개인마다 보급된다고? 평민들도 쉽게 가질 수 있단 말이냐?"

"휴대폰이라는 물건만 보급되는 거예요. 나머지는 국가나 기업, 그러니까 귀족이나 상단이 목적을 위해 운용하는 거고요."

"허······ 통신마저 이리 쉽게 하는데 군대는 얼마나 괴악할지 상상조차 안 되는구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건과, 바다를 마음대로 항해하는 배와 항해술이라니."

아버지는 상상조차 힘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사람도 영 믿기 힘든 건지 얼떨떨하거나 애매하다는 얼굴이다.

마리는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댄 채 신기해하는 중이고. 내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데다가 사실 물건 자체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녀는 오직 나라는 사람 자체에만 관심을 주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판타지'를 접하는 시선과 비슷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전쟁이 터진 적이 있느냐? 온갖 전략전술이 난무할 것 같은데다 인명 피해도 극심할 것 같구나."

"네. 제가 살던 시대를 기준으로 약 80년 전에 2차 세계 대전이 터졌죠."

현대전이라 할 만 한 건 걸프 전쟁이 있다. 하지만 걸프 전쟁은 치고 박고 싸우는 게 아닌, 미군의 일방적인 승리여서 언급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안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인데 걸프전까지 설명하면 머리가 터질 것이다.

그사이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는지 다소 어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2차라고? 그것도 세계 대전?"

"아."

아버지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를 해버린 셈인가.

따지고 보면 종족 전쟁이 또 한 번 터진 것과 똑같으니 저런 반응을 짓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1차와 2차의 간격이 고작 20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설명해드릴까요? 아까 말했듯이 차기작으로 쓰긴 할 텐데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으면 더 재미있거든요."

"솔직히 궁금하긴 하네. 우리로 치자면 종족 전쟁이 또 한 번 터진 거잖아."

"한 번 설명해줘. 대신 스포일러는 하지 말고."

"무기가 어떤 건지도 궁금하구나. 우리처럼 냉병기를 사용하는 게냐, 아니면 다른 걸 사용하는 게냐?"

기사 가문 아니랄까봐 다른 세계의 전쟁 이야기가 나오자 급격한 관심을 드러냈다.

게다가 마리와 어머니도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면 그냥 다른 세계라는 것 자체에 초점을 둔 모양이다.

전쟁은 끔찍하고 희망이 없긴 해도 판타지라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그게 아니더라도 시대가 시대인만큼 전쟁을 낭만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아버지는 다소 진지하셨다. 현역 시절에 PTSD를 정통으로 맞으신 분이니 전쟁에 한해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겠지.

나는 일단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하자는 선에서 설명하기 위해 지도부터 그렸다. 세계 지도는 모라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일단 이게 제가 살던 세상의 세계 지도에요. 제가 살던 곳은······"

"뭐야? 세계 지도를 바로 그린다고?"

"너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던 거 맞아?"

"······?"

지도를 그리자마자 속속 튀어나오는 반응들에 오히려 내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내 가족들은 그런 내 얼굴을 보고 헛바람을 내뱉더니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가장 먼저 니콜이었다.

"그래. 이러니까 제논 일대기를 적었던 거겠지."

"뭔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야. 대체 뭐 하는 세상일까? 평민이 제논 일대기를 쓰고, 세계 지도까지 바로 그린다고? 아예 세계 하나를 구현하겠네."

데이브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만약 그가 '게임'을 접하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뒤집어지지 않을까. 그나마 영화가 최근에 탄생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마법이 더 사기라고 느껴진다. 비록 과학의 발전을 늦추고 있다지만 언젠가 포텐이 터질 게 분명하다.

뒤이어 나는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 전, 원래 내가 살던 대한민국부터 콕 집었다.

"설명하기 앞서, 이 작은 반도가 제가 살던 나라에요. 다만 분단 국가여서 사실상 섬이라고 봐야하죠. 보통 위쪽은 북한, 밑쪽은 남한이라 칭하죠. 제가 살던 나라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이고요."

"확실히 다른 지역에 비하면 작네. 제국의 스타비르크 지역이랑 흡사하기도 하고."

"그런데 분단 국가라고? 설마 내전이라도 일어났던 거야?"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깨달았는지 니콜이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곧바로 나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내전을 겪은 분단 국가라지만 큰 위협은 없다. 시시때때로 쌀 달라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만 빼면은.

"응. 그거 때문에 현재도 휴전 상태야.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나는 그 분위기에 눈을 깜빡거렸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 같이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마리마저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어머니였다. 그녀는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부모를 잃었다는 그 사고라는 게······ 전쟁 때문이니?"

"원래 전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낳으니······"

"하물며 내전이라면······ 심하면 더 심했겠지."

그런 거 아닌데. 정말 자동차 사고로 돌아가신 건데.

나는 갈수록 깊어지는 오해 속에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질 것 같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애당초 내전은 저희 부모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발발했거든요. 게다가 휴전이 길게 이어져서 전쟁의 여파는 거의 없는 실정이고요."

"그, 그러니? 다행······ 이 아니잖니."

"예?"

어머니는 다행이라고 말하려다가 스스로 부정하셨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데 그녀는 아닌 모양이다.

비단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니콜과 데이브는 아예 언급을 피하는 중이고, 아버지는 뭐부터 설명해야 할 지 착잡해하고 있다.

이에 어리둥절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내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서 선뜻 입을 열기가 애매했다.

"······아이작."

"아, 네. 아버지."

"기나긴 휴전이라고 해도 전쟁 중이라면 그 나라에 심각한 불균형을 낳는단다. 너에게도 분명 피해가 갔을 거야. 잘 생각해보렴."

"어······ 피해라기보다는 징집을 당하긴 했······ 죠······?"

징집이라는 소리에 더 숙연해지는 분위기. 어머니는 아예 울기 직전이다.

아버지도 심란하셨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나지막이 다음 질문을 날렸다.

"징집이라······ 그래. 그럼 어디서 근무했느냐?"

"최전방이요."

춥고, 덥고, 더럽고, 짜증나는 일들을 한꺼번에 겪은 기억이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는데다가 온갖 괴생명체들이 득실거리는 장소.

그러자 가족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어머니는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을 닦는 중이셨고, 니콜과 데이브는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당최 예상이 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마저 이 이야기를 듣고 순간 울컥하셨는지 다소 지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다. 이 이야기는 더이상 안 하는 게 좋겠구나. 세상 자체가 아닌, 그 나라를 포함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가급적 삼가하도록 하마."

아니, 왜요. 전 정말 괜찮은데. 나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렇듯 분위기가 점점 더 밑으로 꺼져가고 있을 때쯤,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마리가 발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다른 건 몰라도 저에게 정말 중요한 거거든요."

"아이작의 트라우마를 건드리지 않는 거면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아이작?"

"응?"

마리는 어느새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은 상태였다. 밝디 밝은 표정을 보아하니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선 걸로 보인다.

이어서 그녀는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를 짓더니 정말 개인적으로 중요할만한 질문을 꺼냈다.

"그럼 그때도 여자친구나 약혼녀가 있었어?"

"어······"

"있어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이 중요하니까. 난 있는 쪽으로 걸게. 안 그러면 첫날밤에 그렇게 잘할 수가 없잖아?"

그건 시청각적 자료가 있어서 있어서 그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나는 이 말을 꾹 삼키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마리에게는 정말 안타깝게도.

"······있긴 있었지."

"역시 그렇구나."

"근데 군대에 있을 때 바람 폈어."

"··· ···"

저 질문만큼은 진정한 의미의 지뢰나 다름없었으니.

마리는 내 대답을 듣자마자 웃는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풀 수 있을까.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 원래 하던 설명 계속 해도 될까요? 제가 살던 나라가 아니라 세계 대전에 관한 이야기요."

"······거기에 또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어? 예를 들어 수백 만명이 죽었다던가······"

"수백이 아니라 수천 만 명이 죽긴 했는데······"

"··· ···"

"······그냥 배경 설명만 할게요."

세계를 멸망시키는 무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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