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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30화 (431/763)

〈 430화 〉 실패(3)

* * *

사람마다 각자 '비밀'이 있는 법이다. 남들에게 결코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

때로는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살아생전 비밀을 밝히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남들이 듣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밀이라고 해도. 하지만 그 비밀에 대한 증거가 속속 나온다면 믿게 될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오늘,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비밀을 밝힐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묻어갈 비밀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결코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만약 내가 예언자 혹은 회귀자라는 말도 안 되는 명성을 얻지 않았더라면, 결코 믿지 않을 진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릴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내 맞은편에서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아버지가 의문이 찬 얼굴로 내게 물었다. 어머니는 미리 짐작하고 계시는지 다소곳한 태도셨다.

나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다가 옆을 바라봤다. 옆자리에는 데이브와 니콜이 아버지와 비슷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뒤이어 그들의 맞은편. 맞은편에는 클라크가 여전히 육중한 갑옷을 착용한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무도 들지 말라고 했기에 답답했던 투구는 완전히 벗은 상태.

"흠냐······"

그리고 그 머리 위에는 아리엘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단잠에 빠져든 상태다.

증조할아버지에게 저지르는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지만, 클라크는 오히려 괜찮다면서 너그럽게 용서했다.

게다가 귀엽기도 하니 가족들 모두가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중이고. 나도 이 부분은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나까지 부른 걸 보면 뭔가 있지?"

사랑스러운 나의 약혼녀, 마리가 내 바로 옆에 나란히 착석해 있다.

부모님이 앞에 계신 탓에 대놓고 애정 행각을 펼치진 않았으나 바짝 붙어있다. 몸을 살짝 기울이기만 해도 밀착이 될 수준이다.

나는 언제 봐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마리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가 테이블 밑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그녀도 내가 손을 잡자 깍지를 끼면서 내 애정 표현에 응해줬다. 손만 잡았을 뿐인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일단 앞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 중에 단 한치의 거짓이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내가 무겁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가족들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미리 언질을 받은 어머니는 침착한 표정을, 아버지는 한 쪽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데이브와 니콜은 남매 아니랄까봐 눈을 깜빡거리는 것으로.

클라크는 아무래도 스켈레톤이다보니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마찬가지로 의문이 찬 표정이다.

마지막으로 마리. 마리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왜인지 몰라도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챈 것처럼. 그럴 일은 없겠지만 대충 예상 정도는 하고 있는 걸까.

맞잡은 손에 힘이 더 강해지며 자신감 또한 차오른다. 나는 사뭇 심각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빙긋 미소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전 마이샬 가문의 일원이자 삼남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이고, 형과 누나의 사랑스러운 남동생, 막내 릴리의 오빠. 마지막으로 마리의 약혼자라는 것까지."

"······이제 진실을 밝힐 셈이냐?"

내 말에 아버지가 나지막이 말을 여셨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잠잠해지는 모습.

하기야 전에 어머니가 말했듯이,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한 분이시다. 그것도 2남 2녀를 지니신 남자.

나는 그중에 셋째이며 데이브와 니콜을 기른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할 일은 없다. 그동안 말을 안 하셨을 뿐이지.

더군다나 여태까지 성장하면서 이 세상 상식에 맞지 않는 질문들을 여러 번 한 전적이 있던 터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제논 일대기까지 등장하고 예언서로 추앙받으니 의심을 품었겠지. 그러나 나를 위해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신 거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꾸준히 생각하고 있던 거지만, 나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계급과 명성에 집착하지 않고, 자식들을 존중해주며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어주는 가정.

허나 이런 가정인만큼 내가 정체를 밝힘으로써 멀어진다면 큰 상처로 남았겠지. 나는 이런 게 싫어서 지금까지 입을 꾹 닫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제논 일대기가 완결되고 착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당분간은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지만, 나는 이들을 믿는다.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이자, 약혼녀라는 것을.

"네. 제논 일대기도 완결된데다가, 앞으로 쓸 책이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거라서요."

"음······ 알겠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옆을 힐긋거렸다. 데이브와 니콜이 있는 쪽이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는 그의 눈초리에 내 형과 누나는 각각 개성에 맞게 답했다.

"뭐. 우리 막내······ 가, 아니지 아이작이 독특하다는 건 원래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옛날부터 바뀐 건 하나도 없으니 제 동생이 맞죠."

"오빠 말이 맞아요. 이제 와서 가족이라 인정하지 않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잖아요? 아이작은 옛날부터 똑똑하고 이지적이었고, 동시에 어딘가 허당스럽고 맹한 부분이 있었으니까요."

데이브는 특유의 시원시원스러운 성격으로 무던히 넘어갔고, 니콜은 어머니를 닮은 다정함으로 대해줬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빙그레 웃다가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싱그러운 미소를 짓더니 발랄하게 답했다.

"난 이제 너 없으면 못 사는데? 너한테 딱 맞는 몸이 되었는데 너랑 멀어지면 어떻게 살라고?"

"하하······"

다소 중의적인 표현에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마리는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궁합이 너무나도 잘 맞았다.

그래도 저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걸 보면 역시 마리는 마리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아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앞으로 내가 밝힐 진실은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미래를 엿본 것도 아니고,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온 것도 아닌 아예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으니.

무엇보다 단연코 제일 큰 충격을 받을 사람이 있다. 나는 그 생각이 듬과 동시에 클라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클라크 할아버지."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게냐?]

"클라크 할아버지가 악마 숭배자의 군주들과 싸웠을 때, 그 군주들이 소환 의식을 시전했었죠? 이건 리나에게도 들었어요."

클라크는 내 질문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했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막 도착했을 쯤에 이미 의식이 시작됐었지. 다행히 어찌 어찌 막긴 했다만······]

"완전히 성공한 건 아니죠?"

[······그렇다고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지.]

연이은 질문에 클라크가 뜸을 들였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자각몽에서 보았듯이, 클라크는 소환 의식의 불완전한 성공으로 애꿎은 영혼이 이곳으로 넘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단지 그 얘기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 본인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니 이 사실을 꺼낸다면 클라크는 놀라운 걸 넘어 뒤집어지지 않을까. 동시에 안심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기 직전, 신들이 자신의 유언에 따라 이곳으로 넘어온 영혼을 잘 보살펴줬으니까. 내가 바로 그 증거다.

"사실 주술을 시행하고나서 꿈을 꾸었어요. 클라크 할아버지가 거대한 석상에 기대어 있고, 얼굴 중앙이 푹 패여있는 엘프와 대화하는 것까지."

[······뭐?]

"마지막으로 그 영혼을 어여삐 보살펴달라는 할아버지의 유언까지 들었어요."

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클라크의 턱이 서서히 벌어진다. 스켈레톤이라 그런지 뭔가 웃긴 얼굴이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 클라크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설마하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거렸다.

[서, 설마. 얘야, 너 정말로······]

"네. 할아버지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요."

클라크와 반대로 다른 가족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클라크는 당사자이기에 상세한 상황을 알고 있는 반면, 가족들은 아니니까.

이에 충격에 빠진 클라크를 놔두고 가족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뒤이어 가슴 중앙에 손을 조심히 올리고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저는 예언자도 아니고, 미래에서 돌아온 미래인도 아니에요. 이건 신 앞에서도 맹세할 수 있어요."

"··· ···"

"단지······ 악마 숭배자의 소환 의식에 불려온, 이곳과 전혀 다른 차원의 인간이죠."

주사위는 던져졌다. 다만 그 주사위에 박혀있는 눈은 똑같다.

여태까지 의심이 갈만한 행적들을 뿌린데다가 제논 일대기가 그 정점을 찍었으니.

충격을 받는 건 똑같겠지만, 그렇다 해서 지난번 리나와 같이 격한 반응은 터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입에서 차를 쏟는 건 진짜······'

그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리나의 흑역사 리스트에 당당히 차지하지 않을까.

긴장감을 억누르기 위해서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고요한 분위기는 꾸준히 이어졌다.

나는 여기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서 귀족이나 왕족은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평범한 생활을 하던 평민이었어요. 제가 살던 나라는 왕과 귀족이 존재하지 않는, 군주제와는 거리가 먼 나라였고요."

"음······"

"어쩐지 얘가 소탈하다 싶더라."

"우리 가문도 따지고 보면 귀족이 된 지 얼마 안 되서 평민에 가깝기도 하고······"

가족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유지했고, 데이브와 니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속으로는 꽤 혼란스러울 것이다. 예언자나 회귀자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

귀여운 동생에 불과했던 내가 그런 존재였다니. 우애 깊은 형제와 남매로 살아온 그들로서는 심정이 다소 복잡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신들과 나누었던 몇 가지 이야기들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신들은 클라크 할아버지의 유언을 들어주셔서 저를 마이샬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해주셨어요. 이것만 해도 저는 충분히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부모님들이 사고로 돌아가셔서 혼자였거든요."

"아······"

"어······ 음······"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탄식들.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얘기한 건데 어찌 된 건지 더 깊은 걱정을 낳은 것 같다.

설마하며 마리를 쳐다보니 그녀가 다소 슬퍼보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뭐랄까. 당장이라도 손으로 만지면 흩어질 것 같은 공예품을 보는 느낌?

이것만 해도 내가 실수했다는 걸 직감했는데 아버지가 한 술 더 뜨는 질문을 날리셨다.

"그럼 아이작. 이 아비가 하나만 물어보마."

"네? 아, 네."

"네 영혼이 이곳으로 넘어왔다면, 원래의 네 몸은 어떻게 됐느냐?"

"어······ 루미너스 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차원과 차원을 넘는 일은 신들조차 힘든 일이에요. 그러니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심장 마비가 와서······ 네. 영혼만 넘어왔죠."

턱­

한치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는 내 질문에 클라크가 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실시간으로 죄책감이 채워지는 모양이다.

나는 어떻게든 클라크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싶었으나 다급히 입을 열었다.

"하, 할아버지.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당시 저는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삶에 의욕도 없었고, 오히려 마이샬 가문에 태어난 것에 대해 진심으로 행복하니까요."

[······언제······ 넘어왔느냐.]

"네?"

[나이가 몇 일때······ 이 세상으로 넘어왔는지 물었단다.]

착잡함과 죄책감이 가득 실린 목소리. 나는 그 질문을 듣고 떨떠름해진 것도 잠시, 전생의 내 나이를 상기했다.

군대를 갔다 오자마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으니까······

"아마······ 23살이었을 거에요."

[··· ···]

내 대답에 클라크는 아예 오열하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가족들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하나 같이 안타깝다는 표정이다.

가족 사랑이 워낙 넘치는 사람들이라 이런 반응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만약 여기서 내 원래 수명이 90살을 넘긴다는 것까지 알린다면, 클라크는 당장이라도 자결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나이가 40살이 넘는다는 건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마리는 다른 부분에 집중한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애 같지······?"

"··· ···"

내가 원하는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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