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28화 (429/763)

〈 428화 〉 실패(1)

* * *

"후아······"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모라의 신전 안.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도망치고 도망치다 보니 도착한 곳이 이곳이다.

다른 곳도 아니라 신전이라 양심이 찔리다 못해 모라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저택으로 들어가자니 어머니가 버티는 중이고, 그렇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자니 혼란만 가중될 터.

결국 선택한 곳이 신전이었으며 그나마 가까운 곳이 모라의 신전이었다.

[모라의 신전으로 들어가셨어!]

[어떡하지? 모라 님에게 무례를 저지를 수도 없잖아.]

[어쩔 수 없지.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내가 신전에 숨어든 이유도 저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막나가는 사람이어도 신전에서는 언제나 예의를 지켜야 했으니. 자칫하다간 신에게 호통을 듣거나 천벌을 맞을 수도 있다.

사실 내가 다급히 들어온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무례인 셈이지만, 이정도는 괜찮은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단지 신전에서 활동하는 신자들의 눈치만 보일 뿐이지. 다행히 그들도 빙긋 웃어주는 걸로 관대하게 넘어갔다.

'······나중에 자주 방문할게요.'

나는 속으로 모라에게 사과를 전달했다. 나를 어여삐 여기는 분이지만 한 명의 사람으로서 무례를 저질렀으니 사과는 해야 된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신전을 밝히는 촛불들이 미약하게나마 흔들렸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흔들린 걸 보면 분명 모라가 대답을 한 거겠지. 완전히 꺼지지 않는 걸 보아 너그럽게 용서해주신 모양이고.

[모두 물러서세요! 이러시는 것부터가 제논에게 실례입니다!]

[만약 계속 이러신다면 제논께서도 화를 내실 겁니다!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바깥에서는 아델리아가 버럭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부터 허스키한 목소리라 그런지 상당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장판파마냥 굳건히 버티고 있으나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저 사람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결말이고 뭐고 일단 나를 '실물'로 봤다는 것부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할 테니까.

내가 악마 숭배자의 습격으로 인해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은 널리 퍼진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같이 아, 이건 못 참지 상태가 되어 달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직접적으로 못 건드린다는 걸까.'

아까 전 추격전을 펼칠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내 뒤만 쫒아왔을 뿐, 직접적으로 건드리지는 않았다.

현재 우리 영지로 들어온 조문객(?)들 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인간뿐만 아니라 이종족도 포함돼 있다.

제아무리 아델리아가 또래 중에서는 강하다지만 그만한 인원을 홀로 막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아까 어머니가 엄포했듯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전부 영지 밖으로 추방시킬 거라고 하셨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내 뒤를 바짝 쫒아와도 잡을 수 없었으며, 내가 신전으로 도망치니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저택으로 도망쳤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실리나 리나가 이 사실을 들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돌아간다고 한들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우선 저기 있는 사람들부터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장례식이 아니라 일종의 팬미팅으로 바꾸는 것이다.

악마 숭배자의 위협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 영지는 루미너스와 모라가 직접 지켜보는 중이다.

아마 지금쯤 팝콘을 뜯으며 재밌게 관람하고 있겠지.

훙­

저것 봐. 촛불이 흔들리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튼 우리 영지를 방문했던 순례자의 말에 따르자면 평소보다 몇 배의 신성력이 쌓인다고.

다시 말해 신성력이 가득 채워진 땅이라는 뜻이다. 악마 숭배자는 오기만 해도 기력이 대폭 떨어지겠지.

'그래도······'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소리없이 웃었다. 급박한 상황이라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나 내가 어떤 위치인지 다시금 실감시켜줬다.

이전에 정체를 공개했을 때와 비슷하면서 다른 반응이다. 그때는 작가가 아닌 예언자 혹은 회귀자로 착각받는 상황에서 반응을 얻었는데, 오늘은 색다르다.

작가가 된 입장에서 어떻게든 결말을 바꾸기 위해 항의를 하는 귀여운 독자들. 그 방식이 과격하긴 해도 작가로서 감동스럽다.

내 작품에 진심으로 몰입해주고 더 나아가 저런 이벤트까지 펼쳐주니. 그 주모자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어머니라는 게 흠이지.

'코난 도일이 이랬던가?'

그래서 홈즈는 왜 죽였니? 라는 희대의 명언이 탄생한 그 사건. 그 사건과 비교했을 때 저건 귀여운 수준이다.

사람들이 매일 같이 돌을 던져 집의 창문이 남아나질 않았으며, 바깥의 사람들처럼 진짜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으니.

한 술 더 떠서 길을 가다가 어느 노부부에게 양산으로 얻어맞았다고 한다. 홈즈를 죽인 나쁜 새끼라면서.

이외에 출판사의 구독이 우수수 나가떨어진다거나 다른 책이 상대적으로 묻히는 등등.

온갖 사건사고가 터져나오는 와중에 친모의 결정타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재연재를 하게 된다.

'잠깐. 이대로 가면 앞으로 다른 책들도 묻히는 건가?'

2차 세계 대전? 좆까. 우리는 진을 살리는 게 우선이다. 진짜로 이럴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코난 도일도 비슷한 상황을 맞이했지 않은가. 왜인지 몰라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재연재를 하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다른 책을 발매했는데 다들 홈즈를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외쳤다.

매운 걸 먹으면 물이나 우유를 마셔야 나아지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의 부활밖에 답이 없다.

하물며 앞으로 등장할 2차 세계 대전은 진의 죽음보다 더 매우면 맵지, 결코 달달하지 않다.

"에효······"

나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히도 홈즈라는 선례가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장기전으로 돌입할 뻔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전생과 달리 내 얼굴과 저택의 주소가 익히 알려져 있다. 제논 일대기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후딱 진을 살려주고 매운 맛을 덜어주는 게 나을 듯하다. 외전이 아니라 정사로 편입시킬 정도로 말이다.

'팬들이 저리 원하는데 기꺼이 들어줘야지.'

하지만 단단히 혼쭐을 낼 생각이다. 이 이벤트는 작가인 나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엄격히 다그쳐야 된다.

팬이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벌여 폐를 끼쳤을 때 욕을 먹는 건 그들뿐만이 아니니까. 이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계획이다.

나는 생각을 재빠르게 정리하면서 외전, 진짜 에필로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괜찮은 설정이 하나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사제님. 개인 예배실을 사용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신전 안에서 활동하던 사제에게 허락까지 받은 후 곧장 예배실로 향했다. 따로 물을 게 생겼다.

[그러니까······ 영혼을 일부 떼어내면 수명도 줄어드냐고? 당연하지. 원래 있던 걸 떼어내는 거니까.]

'부작용은 없나요?'

[없지는 않아. 힘이 약해진다거나, 방금 말했듯이 수명이 대폭 줄어들 거나 등등. 영혼의 크기를 제거하는 거니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지.]

'그럼 영혼을 구성하는 것 중에 기억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나요?'

수명이 인간 수준으로 떨어져도 상관없다. 기억을 온전히 유지시킬 수만 있다면.

오히려 진과 릴리가 서로 행복하게 살다가 함께 늙어죽을 수 있으니 제대로 된 해피 엔딩인 셈이다.

[기억은 영혼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 가장 큰 축을 담당해. 어째서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생각해보렴. 기억이야 말로 정체성이자 원동력이거든.]

'저는요? 저는 사고라지만 기억을 유지시켰잖아요.'

[너는 너무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전생의 네 수명은 원래 97세였거든.]

'··· ···'

살아갈 의욕도 없었는데 뭐 그리 장수할 운명이었데.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모라는 약간 고민하는 듯하더니 숨기고 있던 진실들을 하나 둘씩 입 밖으로 꺼냈다.

[이외에도 네가 만날 예정이었던 반려라던지, 그 반려의 가족과 친구라던지 등등.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수명이 뒤죽박죽으로 꼬였거든. 괜히 지구의 신들이 노발대발한 게 아니란다.]

'그······ 네.'

꼬인 거는 이쪽이 제일 심하지 않을까. 사고로 건너오게 된 영혼이 세상을 크게 뒤엎었으니.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 알아봐야 하는 건 진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냐는 것이다.

'어쨌거나 진의 기억만 쏙­ 빼서 유지할 수 있나요?'

[가능해. 체를 이용해 불순물들을 거르는 것처럼, 기억만 통과할만한 길을 만들고 거르면 되거든. 대악마의 영혼과 분리하는 것보다 훨씬 쉽지.]

'그에 따른 부작용은요?'

[대부분의 힘을 잃는 건 기본이고, 수명 또한 줄어들어서 오래 살진 못해. 기껏 해야 200년?]

진작에 물어볼 걸. 괜히 쉬운 길을 돌아간 것 같아 탄식이 나온다.

그렇다고 루미너스나 모라를 책망할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은 오직 내가 물은 질문에만 대답한다.

가끔 가다 조언을 해주지만 극히 예외다. 더군다나 진은 가상 인물이지 않은가.

확실치 않은 미래라서 대답하기도 영 애매할 테니 어쩔 수 없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네요.'

[고맙기는 뭘. 우리도 좋은 구경했으니까 좋지.]

'역시 지켜보고 계셨군요.'

[헷.]

장난꾸러기 소녀처럼 잔망스레 웃는 모라. 이 상황이 어지간히 재미있긴 재미있는 모양이다.

비단 모라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도 비슷하겠지. 나는 빙빙 돌아온 듯한 느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설마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건 아닐 테고······'

[··· ···]

'모라님?'

[무슨 말 했니?]

'음······ 아뇨.'

설마 그러겠어. 나는 속으로 그리 다독이면서 모라와의 접신을 끊었다.

[킥킥.]

끊기 전 모라가 장난스레 웃은 것 같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어차피 해결책은 전부 나왔으니 남은 건 사람들 앞에 서는 것뿐이다.

이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예배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세실리 누나?"

"아. 여기 있었구나."

저택에 있어야 할 세실리가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보아하니 바깥의 소란을 듣고 이곳으로 온 것 같다.

그녀는 신전에 들어와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 원래부터 모라의 신실한 신자이기도 하고 대외적으로도 나와 연관이 있다.

물론 마리나 아르웬과 달리 공표된 건 아니지만 알음알음 그런 소문들이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세실리의 행동은 소문의 신빙성을 더 강하게 만든 거지만 지금 와서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모라님과 이야기하다 나온 거야?"

"응.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지금 바깥 상황은 어때?"

"아직 사람들이 모여있어.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나 봐."

"그럼 나가서 곧 나간다고 얘기해줄래? 난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거든."

세실리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신전 밖으로 나섰다. 나는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을 두드렸다.

정체를 밝혔을 때를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일은 거의 없다.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더욱이. 그래서 조금 긴장되는 기분이다.

'감사하다는 말이랑 따끔하게 혼도 내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촛불로만 빛을 유지하는 신전 내부와 달리 출구는 밝기 그지 없다.

이윽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건 셀 수도 없이 많은 인파들. 계단 밑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신전 계단 밑에는 소식이라도 들었는지 기사단이 계단을 막고 있다. 저 분들도 나 때문에 참 고생이시네.

"저, 저기! 제, 제논이다! 제논이 나왔다!"

"정말로? 어? 정말이네."

내가 등장하자마자 인파들이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가 계단 밑을 바라봤다.

바리게이트가 된 기사단 뒤로 내 지인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아까 만난 세실리부터 시작하여 마리, 리나, 아델리아, 마지막으로 어머니까지.

아주 익숙한 얼굴들이었으나 그중에서도 단연코 눈에 띄는 사람은 레오나라 할 수 있다.

레오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인파들 속에 섞여있었으나 맨 앞에 위치해 있어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논님! 진을 다시 살려줄 생각은 없으신가요?!"

"고증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자기 아이는 만나게 해주세요!"

"영혼으로 교감만 해도 상관없으니 부디 만나는 것까지만······!"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아우성을 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도 소음 때문에 다 묻힐 것 같다.

이러니까 내가 무슨 사이비 교주 같잖아. 심지어 몇몇 사람들은 눈물을 뚝­ 뚝­ 흘리기까지 한다.

나는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거렸다가 진정하라는 의미로 두 손을 위에서 아래로 흔들었다.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할 것 같다.

"··· ···"

"··· ···"

"··· ···"

이게 되네. 내 제스쳐를 알아들었는지 좌중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놀란 마음도 잠시, 헛기침을 통해 목을 풀었다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

잠깐만. 이러면 뒷사람들이 내 말을 못 듣잖아.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계단 아래에 있는 세실리를 힐긋거렸다. 이곳 사람들 중에 마법에 능통한 사람은 세실리밖에 없다.

세실리도 내 시선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간단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내 주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 같더니 이윽고 잠잠해졌다.

"아아. 아."

마이크가 켜진 것처럼 목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세실리에게 감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좌중들을 바라봤다.

정체 공개 당시에는 높으신 분들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남녀노소, 종족 및 계급 가리지 않고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있다.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이벤트 아닌 이벤트로 모인 사람들이라지만 무언가 벅차 오르는 기분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지만······ 아무튼 반갑습니다."

"우아아아!"

"제논이다! 제논!"

내가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하자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격하디 격한 환영.

전생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소시민적인 심성 때문인지 몰라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장례식이라 아니라 팬미팅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예의는 한껏 차려야겠지.

생산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 소설에 몰입하고, 더 나아가 사랑까지 아낌없이 퍼붓는 분들인데 나 또한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해야된다.

"여러분이 모이신 이유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진의 죽음 때문에 그런 거겠죠. 아닌가요?"

"예!"

"살려주실 수 있는 건가요!"

"릴리와 만나게 해주신다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습니다!"

이벤트의 근본적인 원인을 내가 직접 언급하자 흥분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진정하라는 의미로 손을 아래로 흔들었다. 다행히 내 말을 철썩 같이 잘 들어줘서 금세 조용해진다.

"자자. 여러분들이 제논 일대기, 그것도 진·릴리 커플을 사랑하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허구의 인물들인데 이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는지······"

"헛소리 하지 마세요! 당신이 예언자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예언 속의 인물은 곧 현실의 인물이나 다름없어요!"

"··· ···"

이게 이렇게 시너지를 이루는구나. 나는 진이 현실 인물, 정확히는 미래의 인물이라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고 방식을 거치는지 전혀 파악할 수가 없다. 내가 진짜 살인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거야.

'그럴만도 하지만······'

전생으로 따지자면 2차 세계 대전을 예언한 사람이었겠지. 미국의 대공황부터 시작하여 나치 독일의 득세. 마지막으로 독소 전쟁까지.

이 모든 걸 예언한 책이 있다면 그 작가를 예언자라 안 믿고 배기겠는가. 본인은 잡아떼겠지만 다른 사람은 안 믿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비유하니 절로 납득이 간다.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낫겠지.

내가 아무리 예언자 혹은 회귀자가 아니라고 잡아떼도 절대 안 믿을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야말로 진퇴양난.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나는 해탈한 마음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예언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나 내가 참아야지.

대신 할 말은 해야겠다.

"네······ 좋아요. 여러분이 그리 믿으니 저도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와서 호소해봤자 안 믿으실 테고."

"그래서 진은 왜 죽였어요?"

나긋나긋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 헌데 그 목소리가 유독 내 귀를 파고들어 뇌를 강타하는 기분이다.

왜냐하면 저 질문을 한 사람이 내 어머니거든.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저런 질문을 하니 멘탈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나는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유지했다. 하마터면 허탈함이 물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진을 죽인 이유는 평론가들이 그러했듯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진의 슬픔을 추모할지언정 캐릭터가 완성된 건 부정하지 않으셨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그때만큼 평론가들을 진심으로 때리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화가 나지만······ 맞는 말이야."

좋아. 이대로 가면······

"그래도 진을 죽이는 것보다 나쁜 건 없어요."

"어떻게 악마도 아니고 그럴 수가 있죠?"

"심지어 릴리가 자기 아이를 임신한 것도 모르잖아요. 그 사실을 알고 가기만 했어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었을 텐데······"

어림도 없지! 사람 한 명을 쓰레기로 만드는 이야기들이 속속 튀어나온다.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기껏 부여잡았던 희망이 속절없이 와르르 무너진다.

코난 도일은 이 짓거리를 10년 이상 버텼단 말인가. 그의 단단한 멘탈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차라리 전생의 인터넷처럼 악플이라도 달리면 모르는데, 이 사람들은 익명성 따위는 뒤로 던져버리고 진심을 다 하고 있다.

그 진심이 악플들보다 더 아플 줄은 상상도 못 했지. 나는 속에서 무럭무럭 올라오는 빡침 아닌 빡침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여러분들의 성원에 감동했습니다. 현재 제논 일대기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건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직접 이런 이벤트를 벌일 줄은 생각치도 못 했거든요."

그리 말하며 어머니를 살짝 째려본다. 어머니도 본인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잘 알아 내 시선을 회피하셨다.

뒤이어 나는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고는 잠깐동안 침묵을 유지했다가 재차 사람들을 둘러봤다.

묘한 기대감이 섞인 얼굴들도 있고, 혹여 내가 진을 살리지 않겠다고 할까봐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 살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대로, 진을 살리겠습니다. 방금 전 모라님에게 조언까지 받은 참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행복해질 수 있어! 행복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와아아아!!"

내가 진을 부활시킨다는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영지 전체가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다.

몇몇은 환호를, 몇몇은 눈물을, 몇몇은 개운한 미소를.

이렇게까지 반응할만한 일인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전에 그들에게 말할 것이 있다.

이에 진정하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자 언제 환호성을 질렀냐는 듯,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기쁘면 됐지.

"기뻐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만······ 앞으로 이런 일은 가급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의 부활은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서 가능하지만, 천사로 부활시키는 것처럼 안 되는 건 정말 안 되니까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사고는 터지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만큼은 삼가해주세요. 이건 여러분만 비난을 받는 게 아니거든요. 부디 조금만 더 성숙한 문화를 보여줬으면 해요."

지난번에 신문에서 이런 소식을 본 적이 있다. 진이 죽는다는 소문 아닌 소문이 퍼지자 화가 난 나머지 난동을 부린 모험가가 있다고.

물론 그 소문이 진실로 밝혀지자 묻혀버렸으나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만약 이것마저 어기신다면······ 저 또한 생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과 달리 더 최악의 결말을 낼 거예요."

"더 최악의······ 결말······?"

"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게 있다고?"

"대체······"

진의 죽음보다 더 최악의 결말이 있다고 하자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신전 앞.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하나 같이 놀란 얼굴이다.

나는 그런 그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좌중이 고요해지자 나는 숨을 몰아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종의 협박이자, 앞으로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기 위한 부탁에 가깝다.

그들이 나에게 협박을 한다면, 나는 아주 정중하게 '결과물'로 보답해줄 계획이다.

"릴리가 쐐기에 맞는 거?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죠. 릴리의 쐐기가 발화하고 메리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어······"

"세상에······"

벌써부터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거나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한다. 허나 이것만으로 놀라기에는 이르다.

"그리고 제논은 겨우겨우 진을 죽이고 돌아왔는데 메리는 죽어있고, 릴리는 여전히 폭주한 상황입니다. 결국 무너지기 직전인 정신으로 릴리를 죽이지만······ 릴리는 유언으로 진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죠. 결국 둘은 끝까지 못 만나는 엔딩이고, 제논은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제논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 ···"

"··· ···"

"어때요? 이런 결말을 원하시는 건 아니죠? 그러니 다음부터 이런 건 삼가해주세요."

나락에도 나락이 있다고. 진의 죽음보다 훨씬 끔찍한 배드 엔딩에 대해서 알려주자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물론 나도 저런 엔딩은 안 쓸 것이고, 무엇보다 못 쓴다. 내가 못 버티거든.

특히 히로인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는 엔딩은 내 손목을 잘라서라도 피할 것이다.

옛날에 한 번 경험했다가 내상을 심하게 입어 한동안 정신이 나간 채로 생활했으니.

'자.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라고 생각하려던 찰나였다.

"여, 역시······ 제논 님은 미래에서 온 게 확실해······"

"응?"

저게 무슨 소리야.

"그,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최악을 상상할 리가 없어! 도대체 어떤 삶을 살다 오신 겁니까!"

"저런 비극적인 인생을 사셨으니 진의 죽음마저 좋은 엔딩이라 착각하신 거야······"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이런 씨발.

"아이작······"

"우리가 더 행복하게 해줘야겠네."

"어쩐지 여자들을 알게 모르게 꼬시더라니······ 이때문이었구나."

"저런 상처가 있어서 상처를 치유해줄 사람이 많이 필요했던 거야."

이래서 영국 같은 개새끼가 있어야 하는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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