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화 〉 전술핵(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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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대부분이 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이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짚고 가야 한다.
디아볼스의 재림을 노리기 위해 악마 숭배자가 숨어들었지만, 진의 집요한 추적 끝에 결국 몰살당한 지역.
제논 일대기는 가상의 이야기였으나 몇몇 부분은 제대로 된 모티브가 있으며, 회색 사막도 이와 비슷하다.
현실에서도, 제논 일대기에서도 회색 사막이라 부르는 곳. 그야말로 생명이 싹 트기는커녕 죽음만 존재하는 마의 지대다.
보통 사막이라 하면 뜨거운 햇볕과 사방이 모래 투성이인 지역을 생각할 것이다. 회색 사막도 이런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한다.
다른 점이라면 모래가 특이하게도 회색빛을 띠며, 구름이 자주 끼는 곳이라 기온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는 것.
그러나 구름이 너무 자주 끼는 것과 별개로 어두침침한 밝기로 인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이것만 있다면 단지 특이하다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만약 회색 사막이 안전했다면 훌륭한 무역로로 발달되었을 테니.
회색 사막은 바쁜 사람들에게 지름길로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그 아래에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잠들어 있다.
대표적으로 스켈레톤. 본래 회색 사막은 게리오스 왕국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며, 악마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당연히 모래 아래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시체가 묻혔을 터. 스켈레톤이 말도 안 되게 많은 이유를 이것으로 꼽고 있다.
굳이 스켈레톤이 아니더라도 악마 전쟁의 발발지인 탓에 온갖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우선 집채만한 사막 전갈부터 시작해서 사막 상어, 더 나아가 자이언트 샌드웜 등등. 그야말로 인외마경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보통 사막이라 해도 히르트의 관리를 받은 곳은 오아시스라던지, 아니면 거대한 강이라도 존재하는데 회색 사막은 그런 것도 없다.
허나 이런 지역이라 해도 수많은 학자들은 관심을 두고 있다. 다름 아닌 그곳에 존재했던 고대의 왕국, 게리오스 때문에.
게리오스 왕국은 본래 뛰어난 정복군주 아래에 차근차근 영토를 넓혔으며, 자연히 부강한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부강하다는 뜻은, 나라에 재물이 많다는 것. 악마 전쟁 당시는 악마들의 기지로 사용되고, 현재는 인외마경으로 바뀐 탓에 그 누구도 탐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가끔 가다 몇몇 열정 넘치는 모험가가 패기 있게 발을 들여도 돌아오지 않거나 폐인이 되기 일쑤다.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사막. 얼마나 위험한지 전혀 몰라서 나라조차 건드리지 않는 곳.
원래라면 손조차 대지 않는 지역이었으나, 제논 일대기 29권의 발매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악마의 정체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닌, 바로 인간이다.]
[마족의 기원은 악마와 인간. 그러나 그들은 평상시에는 인간처럼 지내고, 분노나 절망을 겪으면 악마가 된다.]
[정말로 제논 일대기에 나온 사실처럼 악마의 기원은 인간인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의 결말로 인해 잠깐 잊고 있던 내용이 있다.
진의 뒤를 추적한 제논이 회색 사막에서 찾은 진실들. 악마의 기원은 인간이었으며, 어떤 존재가 그들을 변질시켰다는 것.
만약 그 결말만 아니었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에 집중했을 것이다.
물론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 해도 그들이 세상을 유린하고, 더 나아가 수많은 문명을 파괴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악마를 향한 인식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것보다 악마 전쟁이 어떤 형식으로 발발했는지가 더 문제였다.
[악마 전쟁은 정말로 '인재(人災)'인 것인가? 게리오스의 마지막 왕의 그릇된 탐욕.]
[단순히 사고만으로 그 많은 인간이 전부 악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 무언가의 개입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 또한 악마 숭배자가 저지른 일? 아니면 게리오스 왕국민이 악마 숭배자의 조상인 것인가? 무엇 하나 확실치 않아······]
한낱 인간이 저지른 사고라 치부하기에는 걸리는 점들이 너무 많다.
악마의 막강한 힘도 힘이나, 무엇보다 악마 전쟁은 '신'들이 직접 개입한 전대미문의 전쟁이다.
이 세상의 신들은 필멸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아끼는 존재. 여러모로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가끔 신다운 면모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족 전쟁 당시 인간이 저지른 수인 학살 사건.
악마 전쟁이 끝난 직후, 세이비어는 새로이 등장한 마족을 향해 악마라 단정지으며 무차별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신들이 직접 그 존재를 드러냈던 탓에 광신에 휘말린 것도 컸다. 결국 루미너스가 직접 중재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수인 학살은 달랐다. 당시 인간은 세이비어처럼 광신이 아니라 전쟁의 광기에 빠져들어 대학살을 저질렀으니.
이런 경우에 신들은 방관했다. 자신 때문에 다른 종족이 피해를 입는 건 싫어해도, 그들이 직접 택한 길은 가만히 방치하는 편이다.
[신들이 개입했다는 건, 악마들에게도 그만한 존재가 있었다는 뜻.]
[설마 그 존재가 인간을 악마로 만들었다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이로 인해 학자들은 극도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위의 설명처럼 신이 개입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 명분은 즉,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적대적으로 나서야 된다는 것. 학자들은 그 존재가 다른 차원의 악신이라 단정짓고 있었다.
왜냐하면 악마는 그 기원조차 불분명한, 다른 차원의 침략자이니까. 신들은 필멸자를 지키기 위해 무리를 하면서 현세에 개입한 거고.
딱딱 맞아떨어지는 신화인지라 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다.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는, 초대형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
"말도 안 됩니다! 악마의 기원이 인간? 제아무리 제논이라 해도 이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이 일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세이비어 교국.
추기경, 헤라는 책상에 주먹을 쾅! 하고 내려치며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전에 바크 추기경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으나 현재는 다시 회복된 상황. 오히려 바크를 반면교사 삼아 더욱 신실한 신자로 거듭났다.
"헤라 추기경. 정숙하시지요. 교황 님의 앞이지 않습니까."
덥수룩한 수염과 더불어 눈마저 가리는 송충이 눈썹. 다소 독특한 외모가 인상적인 데이모스 추기경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그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이곳에는 둘만 있는 게 아니다.
이에 씩씩거리던 헤라는 데이모스의 충고에 숨을 길게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 죄송합니다. 하지만 교황님도 제 마음을 이해하실 거라 믿습니다."
"물론이다."
회의장 전체에 엄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울림통이 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목소리를 키운 건지 몰라도 강한 목소리다.
헤라의 의견에 동조한 남자는 세이비어의 최고 지도자이자, 루미너스가 가장 아끼는 빛이라 할 수 있는 인물.
브리크 루렌스.
루렌스라는 성은 교황의 직위를 갖고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으며, 즉위하면 본래의 성을 버린다. 오직 루미너스의 충실한 빛으로 남을 수 있도록.
또한 교황이라 함은 인자하고 단아한 이미지의 노년으로 생각할 법하지만, 브리크는 다소 상반된 모습이었다.
흰색과 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성직자 옷. 몸의 대부분의 가리는 옷에도 불구하고 브리크의 체격은 감추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더해 눈에 들어오는 건 승모근. 승모근 하나만으로도 그 아래의 몸을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었다.
얼굴은 또 어떠한가. 온화한 이미지는 온데간데도 없었으며 뺨에 길게 새겨진 자상이 그의 험난한 인생을 표현하고 있다.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 그의 직책은 대심문관. 케이트 이전의 대심문관이 바로 브리크다.
"헤라 추기경의 말대로 이번 일은 넘어갈 수 없다. 무리를 해서라도 회색 사막에 그 진실이 있는지 파악해야지."
브리크는 두 손을 맞잡은 채 사뭇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부리부리한 갈색 눈동자가 타오르듯이 빛나고 있다.
헤라를 비롯한 데이모스는 그 눈빛 하나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케이트와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
케이트가 특유의 광신으로 세이비어를 이끈다면, 브리크는 광신이 아닌 강력한 카리스마로 세이비어를 휘어잡는 중이다.
"현재 탐험대의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
브리크가 시선을 데이모스에게 두면서 넌지시 물었다. 이에 데이모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간단히 푼 이후,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모험가도 속속 모집되는 중이며, 성기사들도 본격적인 훈련에 나서고 있습니다."
"케이트 추기경은?"
"아쉽게도 케이트 추기경은 제외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악마 숭배자에게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 집중한다고 하더군요."
"흠······"
브리크는 데이모스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케이트의 불참은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웠다.
케이트의 무력은 두말 할 것 없이 강력하다. 브리크가 보았을 때 모자란 부분은 차고 넘쳤으나 그걸 커버할 수 있는 신성력이 있다.
게다가 이번 탐험도 무력보다는 보조가 더 우선시된다. 이미 정찰대가 적절한 루트까지 정했으니 따라가기만 하면 됐으니.
"그건 어쩔 수 없군. 케이트 추기경에 관한 건 넘기도록 합세. 대신 데이모스 추기경. 자네가 책임자로 갔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고맙네. 그러면······"
브리크는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다른 추기경들도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현재 브리크에게 가장 고민이 되는 건 바로 시기다. 지금 탐험대를 출발시킬지, 아니면 후에 출발시킬지.
세상은 제논 일대기 속 진이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워낙 큰 파급력을 낳은 결말이라 악마의 진실에 대한 기사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정확히는 안 다루고 있다. 세이비어 쪽에서 압력을 넣어 그 기사는 쓰지 말도록 지정했으니.
가끔 가다 나오는 소식조차 모두 사라지고 있으며, 각 국의 심층부를 제외하면 다소 조용한 편이다.
'거짓이라면 제논만 홀로 피해를 입어. 그것마저 미미하겠지. 하지만 진실이라면······'
제논 일대기에 등장한 악마의 인간 기원설. 그것이 진실임이 드러나는 순간 그 영향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진의 죽음이 그것을 교묘히 가려줄 테지만, 브리크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준비되는대로 탐험대를 출발시킬지, 아니면 조용해지고 나서 출발시킬지.
전자라면 여론의 힘을 입을 수 없기에 공략 자체가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고, 후자는 각 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후폭풍이 심해진다.
'제논은 분명 그곳에 뭐가 있다는 걸 알기에 적었을 터. 그게 아니고서야 이딴 이단적인 기원설을 적을 리가 없다.'
브리크 또한 제논 일대기를 예언서로 믿고 있는 상황이다. 그가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 대심문관으로 활동했다는 걸 상기하자.
그 누구보다 신을 믿고 이단을 토벌하는 직책인데 루미너스는 제논을 대놓고 비호하는 중이다.
과연 안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은 클라크로부터 말을 들었기에 진실인 건 맞다.
제논 일대기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만약 평범한 학자가 밝혔더라면 당장 이단으로 취급되어 처형당했을 것이다.
'어째서? 루미너스 님은 어떤 이유로 이 사실을 숨기신 거지? 우리가 묻지 않아서? 아니면······'
의심은 의심을 부르고, 그 의심은 불안을 일으키는 법. 브리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심에 미간을 좁혔다.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면, 그 인간을 변화시킨 존재는 대체 누구인가.
신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를 막기 위해서 현세에 개입했던 것인가.
그 존재가 대체 무엇이길래 아무런 '흔적'과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 건가.
신들은 도대체 왜······
'······의심하지 말지어다.'
브리크는 의심이 결국 루미너스를 향하자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신을 향한 의심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루미너스를 비롯한 신들은 그 무엇보다 필멸자를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분들.
악마의 기원이 인간이라고 해도, 그들이 침략자이며 잔혹한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세상을 물로 가득 채우려 했지 않은가. 세계수가 없었다라면 이 세상은 온통 바다로 뒤덮혔을 것이리라.
상념에서 빠져나온 브리크는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추기경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공략은 상황이 조용해졌을 때 진행하도록 하겠다. 가장 중요한 건 유물이나 보물이 아닌, 진실이니까. 성공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결정을 내린 브리크는 숨을 길게 내쉰 후, 눈을 감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또다른 전술핵이 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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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간. 마이샬 저택.
"할무니!"
"아유. 그래. 그래. 할머니 맞아."
"할무니! 할무니!"
"아~ 어떡해. 어쩜 이렇게 귀여운 거람?"
안나가 아리엘의 귀여움으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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