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15화 (416/763)

〈 415화 〉 전술핵(1)

* * *

나는 황궁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오래 머물러봤자 마땅히 할 것도 없을 뿐더러 시국이 시국인만큼 내가 있는 것만으로도 방해가 됐으니.

그래서 상견례만 끝나고 사흘 정도 남아있다가 곧바로 기숙사로 복귀했다. 원래라면 완결을 낼 때까지 황궁에 남을 생각이었다만 생각이 바뀌었다.

기숙사에 아리엘을 그대로 남겨두기에도 그렇고, 이렇게 도망만 쳐봤자 슬슬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차라리 방학 직전에 완결을 내버린 후, 이후 다가올 축제에서 그 반응을 지켜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비록 어머니가 조금 무섭긴 하지만······ 매일매일 도망칠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의외로 지난번과 같이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아닐까, 라고 추측하는 중이다.

그동안 뿌렸던 떡밥도 떡밥이고 복선도 거의 다 회수되었으니 슬슬 받아들여야 할 때다.

"아빠아!"

이후로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당연하게도 아리엘이 반겨줬다. 내가 올 거라는 걸 미리 알아차렸는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오도도 달려오는 그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머리 위의 새싹이 위로 바짝 솟아나 있다. 성장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아리엘. 아빠 없는 동안 잘 지냈어?"

나는 달려드는 아리엘을 가볍게 안아들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황궁으로 향한 지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격한 반응이라니.

신문에 실린 소식 때문에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기분이다.

"응! 클라크 할아버지랑 놀았어!"

아리엘은 내 질문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머리 위의 새싹이 고개를 따라 앞뒤로 흔들린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대 쪽을 쳐다봤다.

[왔느냐.]

내가 왔다는 걸 알았는지 클라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전에 봤던 것처럼 침대에 누워 제논 일대기를 읽는 중이었다.

한 쪽 다리를 꼬아 편해보이는 자세도 자세지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그의 입. 입에는 웬 시가 하나가 물려있다.

저 시가는 내가 황궁으로 향하기 전에 사드린 물건이다. 그것도 세계수의 잎을 사용한, 부자 중의 부자만 필 수 있다는 귀중품.

세계수의 잎으로 제작된 시가이기에 다른 담배와 달리 간접 흡연의 위험성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향기로운 맛과 향기를 풍기며 다른 물건이었다면 매캐한 담배향이 나야 정상이지만, 현재 기숙사는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이런 건 아르웬한테 바로 받을 수 있으니 좋네.'

별다른 유통 없이 받을 수 있던 이유는 다름아닌 아르웬 덕분이다. 그녀에게 부탁을 건네니 하나가 아니라 보루째로 주더라.

아르웬이 기거하는 엘로디아와 저택이 서로 연결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녀로부터 공식적인 '선물'까지 받았으니 알븐하임 쪽에서 직접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시리스를 고생시킬 일도 없다.

물론 내가 다른 것도 아닌 시가를 달라고 하자 의아해하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이건 천천히 설명할 생각이다.

"그동안 편히 계셨어요?"

[그럭저럭. 너무 편해서 조금 어색하더구나. 살아있을 때는 매일매일 긴장의 나날이었는데.]

후우­

클라크가 길게 숨을 내뱉자 담배 연기가 실컷 뿜어져 나왔다. 독특하게도 회색 연기가 아닌, 청색에 가까운 연기다.

널리 퍼져나간 연기는 이내 조금씩 흩어지며 완전히 사라졌다. 맡기만 해도 지독한 담배 냄새가 아닌, 박하향을 메인으로 한 싱그러운 향기가 기숙사를 가득 메웠다.

나는 아리엘을 안아든 채 클라크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사이 아델리아는 짐 정리를 하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이윽고 클라크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제논 일대기 28권을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까지 계속 읽은 건가요?"

[가끔 아들놈이랑 대련 하거나 신문을 읽었지.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은 이걸 읽느라 소비했다.]

"꼼꼼히 읽으시나 보네요."

내가 황궁에 머무른 시간은 일주일 가까이 된다. 그리고 클라크는 스켈레톤으로 부활하여 잠이 필요없다.

여태까지 읽은 시간에 비해서 상당히 느린 속도라 할 수 있다.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읽는 타입인 듯싶었다.

[버릇이지. 열쇠가 될 수 있는 단어를 놓쳤다가 몇 달을 고생한 적이 있거든. 원래 기록도 하는 편이지만 이건 그럴 필요가 없고. 게다가 남은 게 시간이니 여러 번 읽어도 괜찮지.]

"아. 혹시 이번이 두 번째 정주행이세요?"

[정주행?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실수로 전생의 은어를 뱉어버렸다. 정주행이라는 단어 자체는 있으나 은어까지는 아니다.

이에 나는 아차하며 서둘러 다른 말로 바꾸었다.

"실수했네요. 두 번째로 읽는 건가요?"

[그렇지. 10권도 아니고 30권 가까이 되다보니 전에 읽었던 걸 간간이 잊어버리더구나. 그래서 다시 읽는 중이지.]

"하긴, 생각보다 엄청 길죠. 그래서 감상은 어때요? 재미있어요?"

[재미라기보다는 볼 때마다 이런 세상이 오지 않아서 안도감이 드는구나.]

누구보다 영웅에 가까운 삶을 사셨던 탓인지 꽤 현실적인 말씀을 하셨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에 가까웠다.

괜히 숙연해지는 기분이라 무어라 말을 못 꺼낼 것 같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 말고 걸리는 건 없죠?"

[딱히 없구나. 아, 그건 그렇고 오늘 신문 보았느냐? 너를 추종하는 자들이 꽤 재미있는 일을 저지르려는 것 같던데.]

보아하니 클라크 할아버지도 신문을 읽은 모양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난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현재 세상은 진의 죽음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황이다. 최종결전지이자 최초로 악마가 소환됐다던 회색 사막에 관한 소식은 거의 묻혔다.

다행히 완전히 묻힌 건 아니고 몇몇 탐사대가 회색 사막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린다.

회색 사막은 무턱대고 간다면 십중팔구 사망하는, 위험천만한 곳이라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오늘에서야 그 기사가 나온 거고.

'예언자라는 건 빼도박도 못 하겠지만······'

그것보다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게 진의 죽음이다. 악마 숭배자?

알아서 해라. 그들은 진이 죽느냐,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 현재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고 있다.

이때문인지 악마 숭배자의 숨통이 약간이나마 트였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예, 뭐······ 어쩌겠어요. 제가 그렇게 정한 건데. 이런 일은 할아버지도 처음이시죠?"

[악마 숭배자에 홀린 광신도는 많이 지켜봤다만. 그래도 이정도는 귀여운 편이지.]

순한 편이긴 하다. 여기서 좀 더 과격했다면 불이라도 지르지 않았을까.

나는 소리없이 웃고는 아리엘을 안아든 채 자리를 옮겼다. 독서를 하는데 말을 거는 것만큼 방해되는 일도 없었으니.

오늘은 아리엘과 신나게 놀아주고, 마무리 작업까지 끝마칠 계획이다.

'슬슬 방학이기도 하고······ 이번 겨울 방학에는 평범하게 흘러가겠지?'

제논 축제는 1년에 한 번, 여름 방학 때 개최된다. 다시 말해 이번 겨울 방학은 다소 널널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

게다가 영지의 발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으니 축제를 열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더군다나 나도 따로 할 일이 있는데다가 여러 약속이 잡혀있는 상황이다.

'레오나는······ 저택에서 살겠네.'

그중 하나가 바로 레오나와의 인연. 우리 가족에게 정식으로 인사해야 될 뿐더러 그녀와 밤일이 예정돼 있다.

전까지만 해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진행된 그녀와의 연이라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도장을 찍을 생각이다.

다만 걸리는 점은 꾸준히 언급했던 발정기. 그 발정기가 과연 어떤 형식으로 찾아올 지 기대와 동시에 우려가 생긴다.

'세실리도 올 테고······ 악주기까지 겹치면 큰일나는데.'

세실리가 이번 겨울 방학에 저택으로 찾아오는 건 반쯤 확정된 상황이다. 숙청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으며 조만간 만나겠다고 편지를 보냈으니.

숙청 작업이라 해서 약간 섬뜩해졌으나 듣자하니 악마 숭배자와 연관이 있는 자들을 색출하는 거란다.

게다가 세실리와 얼굴을 마주한지 벌써 몇 달이 흘러가니 나 또한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

대신 여기에 레오나와의 약속까지 잡혀있어서 문제지. 빠른 시일 내에 신전을 찾아가야 할 듯싶다.

'그나저나 케이트는 언제 돌아오는 걸까?'

며칠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만 정확히 언제 돌아올 지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 저택 바로 앞에 신전이 있으니 상관이야 없다만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다.

나는 생각보다 붐빌 것 같은 겨울 방학에 기대를 하는 것도 잠시, 아리엘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아빠 일 잠깐만 하고 올게. 조금만 기다려. 알겠지?"

"우웅······ 아빠랑 놀고 싶은데······"

오랜만의 만남이라 그런지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투정을 부리는 아리엘. 심장에 무리가 오는 귀여움이다.

"잠깐이면 돼. 저기 방에 가서 아델 엄마랑 놀고 있을래?"

"알았어. 대신 아리엘이랑 꼭 놀아줘야 된다?"

"물론. 30분이면 돼."

"엄마~"

내가 내려놓자마자 아델리아가 있는 방으로 달려가는 아리엘. 등 뒤의 날개가 파닥거린다.

나는 사랑스러운 그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마무리 작업을 위해 자리에 앉았다.

'이제 슬슬······'

전술핵을 준비하도록 하자.

*****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 최종장을 마무리하는 시기.

마이샬 영지로부터 꽤 먼 거리의 도시. 그 도시 한복판에 모험가 한 명이 터덜터덜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듬직한 체형. 미남이라기보다는 시골 청년과 같이 훈훈한 외모.

대신 꽤 험악한 일을 하는지 다소 험상궂은 인상이었으며 수염 또한 관리를 하지 않아 마구잡이로 자라있었다.

"에휴······"

"그정도로 상심할 필요는 있어? 제논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잖아."

모험가, 로이가 한숨을 푹 내쉬자 그의 동료 앤이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악마 숭배자를 때려잡는 이벤트가 발발했을 당시만 해도 의욕이 넘치던 로이였는데, 최근에는 의욕이 팍 떨어져 있다.

악마 숭배자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웬 부랑자 한 명만 떡하니 남아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아쉽잖아. 진이 꼭 죽어야 돼?"

앤의 말에 로이가 항변에 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정말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는 반응에 가깝다.

그렇다. 그는 제논 일대기 1권부터 꾸준히 정독한 독자임과 동시에 열렬한 진·릴리 커플 추종자였다.

제논과 메리 커플도 좋긴 하지만 로이는 진·릴리에 더욱 몰입하고 있는 상황.

헌데 진이 죽는다는 게 거의 확실시되자 모든 일이 귀찮아지고 의욕 또한 떨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잖아. 여태까지 뿌려놓은 걸 회수해야 되고. 작품성도 올라가니 희생은······"

"너는 정말 감정이 메말랐구나."

"네가 이상한 거야. 아니지.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이긴 한데 음······"

앤도 현재 진·릴리 추종자들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비정상적이라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를 나름 평범하게 읽는 그녀였던지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고작 등장인물이 죽는 걸로 슬퍼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물론 슬픈 건 슬픈 거다. 자신도 사크란의 희생을 비롯한 비극적인 스토리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으니.

진의 죽음도 위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으나 격렬하지는 않았다. 그저 납득이 가는 스토리에 감탄과 슬픔이 공존했을 뿐.

"됐고, 오늘 의뢰에나 집중하자고.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네 책임이니까."

"후우······ 알겠어."

앤의 격려에 로이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언제까지 슬픔에 잠길 수는 없는 법.

그렇게 두 사람이 모험가 길드로 향했을 때, 그들은 길드가 어수선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게시판 앞에 우글우글 모인 채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뭐지?"

"글쎄. 공문이라도 내려왔나?"

보통 저런 경우는 영주가 직접 공문을 내리거나, 이와 비견될만한 소식밖에 없다.

이에 로이와 앤은 모험가들의 양보를 받으면서 게시판 바로 앞으로 향했다. 예상했다시피 게시판에는 새로운 공문이 기재돼 있다.

[장례식 및 운구 이송을 호위할 모험가 구함. 인원은 상관없으며 신분증 필참. 위치는······]

[시작 날짜: 제논 일대기 신간이 발매되고 사흘 이후부터.]

[목적지: 미네르바 제국의 마이샬 영지.]

[조건: 진의 죽음이 확실시 되었을 때.]

"······?"

로이와 앤은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밑에 걸린 의뢰금. 단순한 호위임에도 불구하고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라 명예가 높은 사람이 사망했을 시에나 걸릴 법한, 그런 금액이다.

귀족들은 기사들이 호위를 하니 모험가의 도움이 필요없지만, 애당초 이 조건을 내민 사람은 부자로 유명하다.

"아주 그냥 돈지랄을 하는구만. 그런데 나 같아도 이랬을 것 같다."

"지금 모인 사람들이 몇 명이랬지? 꽤 많다고 들었는데."

"일단 지나가는 도시마다 인원을 모집한다고 들었어. 실제 장례식처럼 줄지어 이동하고, 우리가 그 주위를 호위한다더군."

"의뢰금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봐야겠다."

"난 반드시 해야지. 난 호위보다는 참여를 할 것 같아."

몇몇은 지랄을 한다는 반응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일 뿐. 모험가들 중에서 제논 일대기를 안 읽은 사람은 없다.

모험가의 수가 폭증한 이유 중에 제논 일대기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없을 리가.

게다가 자유로운 모험가인 만큼 썩어넘치는 게 시간이며, 그 시간을 해소시킬 문화에 제논 일대기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

"······할 거냐?"

앤은 고개를 스윽­ 돌리며 로이에게 물었다. 로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호위가 아니라 참석을 해야 할 것 같은데······"

"··· ···"

"누군지 몰라도 스케일이 크군. 이정도면 제논도 알아주지 않을까?"

또다른 전술핵이 준비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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