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07화 (408/763)

〈 407화 〉 충격과 공포(2)

* * *

제논 일대기 29권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27권의 결말이 이제야 보기 시작한 희망에 대못을 꽂았다면, 29권은 아예 망치로 내려찍은 수준이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의 선동으로 인해 불안감이 조성된 상황인데 확인 도장까지 선명히 찍어버렸다.

당연하게도 진·릴리 커플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격렬한 반응을 토해냈다. 거의 피를 토하는 심정에 가깝다.

[결말을 읽은 어느 한 독자는 책을 갈갈이 찢으며 울부짖었다. 이런 결말은 용서치 못한다며······]

누군가는 분노를.

[악마 숭배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전개를 펼칠 리가 없다. 제논과 출판사는 필히 재검수를 바라며······]

누군가는 현실 부정을.

[여태까지 진이 걸어온 행보를 보면 납득이 가는 일이지만 부족하다. 좀 더 확실한 묘사가 필요해······]

누군가는 침착하게 평가를.

[기껏해야 진이 악마 숭배자에게 크게 다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결말일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악마보다 더한 전개이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비난을.

[다음 권에 제논이나 진 둘 중 한 명이 죽는다면 여태까지 모은 제논 일대기를 전부 태워버리겠다.]

누군가는 가당치도 않을 협박을 해댔다.

각자 다양각색의 반응들이 줄지어 나왔으나 대부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제논 일대 속에 등장한 비극들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가장 먼저 마족을 위해 평생동안 헌신한 사크란. 그의 희생을 통해 마족의 숭고함을 널리 알리게 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두 번째로 수명의 한계로 이어지기 힘들었던 사랑, 카이르와 엘리샤.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부여했다.

세 번째로 탐식에게 당한 진. 이건 전에 진과 릴리의 애틋한 과거를 보여주는 외전이 나왔기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외에 분노, 색욕, 질투의 비극적인 과거사를 보여주면서 그들의 행적을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시켰다.

이렇듯 비극은 온갖 복합적인 감정의 파도를 불러일으켜서 기억에 남는다. 흔히 후유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절망적인 전개임에도, 여기서 독자들을 더 괴롭히는 부분이 있다.

[전에 탐식에게 당했을 때도 각성했는데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전혀 아니다. 그때는 멀쩡했던 반면, 이번에는 디아볼스의 영혼을 흡수한 상황이다. 릴리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희생될 것.]

[디아볼스의 영혼이 담긴 육신을 직접 먹으면서까지 영혼을 흡수할 필요가 있었나?]

[그 이야기는 다음 권에 나올 게 분명하다. 그러나 진의 생사는······]

일말의 희망이 아주 약간이나마 남아있다는 것. 진은 탐식에게 가슴이 꿰뚫렸던 전적이 있었으며 각성을 통해 겨우겨우 부활했다.

때문에 독자들은 이번 전개도 비슷해지지 않을까, 라는 미약하디 미약한 희망을 붙잡고 있는 상황이다.

그토록 애틋한 스토리를 보여줬으면서 갈라놓는 건 악마나 할 짓이라며, 반드시 맺어질 거라고 희망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그런 희망과 별개로 그동안 뿌려놓은 복선들이 하나 둘씩 회수되기 시작했다.

[진은 언제나 릴리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가장 추악한 어둠이 되더라도 가장 밝은 빛을 지키겠다는 그의 사랑과 충절.]

[릴리의 심장에 쐐기가 박히면서 이런 결말은 예정된 것.]

[작품의 완성도를 극한까지 올리기 위해서는 진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제논 일대기의 인기와 별개로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던 평론가들. 그들은 작품을 위해서라면 진이 죽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론가들은 평소 독자들에게 좋은 말을 듣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 이유도 단순한 것이, 평론가는 맨 처음 제논 일대기가 포텐을 터뜨렸을 당시에도 비판만 늘어놓았으니까.

평론가들이 대부분 기성작가들 혹은 철학자인 걸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이왜진이 연달아 터지면서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예언자 혹은 미래인이니까 이런 글을 쓰는구나~ 라면서 다들 알아서 납득해 버렸으니. 덕분에 색안경을 모조리 벗어던질 수 있었다.

[29권의 결말로 인해 제논이 직접 진행한 이벤트마저 지지부진해질 것으로 우려돼······]

[마이샬 저택과 출판사 앞은 절망한 독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제논은 현재 아카데미에서 쉬는 중이며······]

[제논은 현재까지 아무런 입장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현재 제논 일대기를 읽은 사람들은 혼란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전례가 없는 현상까지 발생할 정도.

[한 줄기조차 안 되는 희망을 부여잡고 애원하는 독자들. 학자들은 이 현상을 '희망고문'이라는 새로운 현상이라 칭해······]

이뿐만이 아니라 학자들은 이 현상을 보면서 새로운 용어까지 창조했다.

재미있는 건 아이작은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용어라는 것. 만약 신문을 보았다면 낄낄거렸지 않았을까.

아무튼 29권의 결말로 대부분의 사람이 충격과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 아이작의 지인 중 한 명이자······

"정말로 미래에서 온 게 확실하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절망적인 전개를 펼칠 리가 없지."

연인인 세실리는 오히려 이런 전개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그녀는 특유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책을 조용히 덮었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천천히 감아 결말부를 상상했다.

회색빛 사막 위에 짐승에게 뜯어먹힌 듯한 시체가 즐비해 있고, 그걸 보며 경악하는 제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핏자국을 따라 걸어가니 눈에 보이는 건 전과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진의 모습.

덩치는 디아볼스의 영혼으로 인해 비대해졌으며, 입에는 미처 다 먹지 못한 악마 숭배자의 살점과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이 모든 것이 릴리의 완치를 위한 행동이라니, 이 얼마나 헌신적인 기사란 말인가.

'여태까지 수많은 비극들을 접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야.'

세실리는 제논 일대기에 포함된 비극만 말한 게 아니다. 그녀의 정확한 나이는 106살.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족이 겪을 수 있는 비극이란 비극은 전부 접했다.

물론 그녀가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 왕족이다 보니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들이 무성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행을 떠났던 마족이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악마가 되어 토벌당했다던지, 믿었던 사람에게 마족이라는 이유로 배신을 당했다던지.

더 나아가 마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 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었다던지 등등.

많고 많은 비극들을 점했으나 29권의 결말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였다. 더 악랄한 건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것.

만약 진이 탐식에게 당해 부활했다는 전개만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진이 무조건 죽었을 거라 강하게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사전에 남겨놓았기에 독자들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고 있다.

'이런데도 미래인이 아니라고? 말이 안 돼. 응. 안 되고 말고.'

직접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서야 이런 절망적인 전개를 펼칠 수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원래도 아이작이 다른 세계, 즉 평행 세계 비슷한 곳에서 넘어왔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도장을 찍게 됐다.

과연 이다음은 어떤 전개를 보여줄까. 세실리는 상상만 해도 두근거리는 느낌에 책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너무 강하게 껴안았던 탓인지 커다란 흉부가 보기 좋게 눌렸다. 단순히 행동만으로도 고혹적인 색기가 주변에 흩날렸다.

악마 숭배자와 연결고리를 맺은 귀족을 하나 하나 숙청하느라 스트레스도 쌓이고, 아이작과도 만나지 못하니 성욕이 알아서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오랜만에 찾아갈까? 아니지. 방학 때까지만 기다리자. 어차피 황궁에 갔으니 만나기도 힘들 테고.'

이미 가르츠의 보고를 통해 아이작이 황궁으로 도망쳤다는 건 진작에 파악하고 있다.

그도 이런 일에 대비하여 황궁으로 도망친 거겠지. 지난번에는 헬리움으로 도피했으니 이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이작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시어머니, 안나도 황궁으로 향하는 건 조금 꺼림칙하겠지.

헬리움의 경우는 가르츠의 도움이 있었을 뿐더러 반쯤 장난에 가까웠으니까. 황궁은 절차만 해도 오래 걸릴 것이다.

'만나면 한 번 진득하게 얘기해야겠다. 겸사겸사 어떤 세계에서 왔는지 물어보고.'

한 번 그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진지하게 듣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세계이길래 이런 비극적인 서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동시에 조심스러웠다. 정말로 이 모든 비극을 겪었다면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오만가지 흉터가 새겨져 있을 테니.

'혹시 알게 모르게 여자를 들이는 것도 이런 이유인가?'

이성과의 교류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니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본인의 능력과 힘이 충분하기에 수많은 여자들을 들일 수 있는 거겠지만, 사실상 그가 직접 선택한 셈이니.

"하아······"

세실리는 머릿속으로 아이작에 대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달뜬 숨소리를 내뱉었다.

악주기가 슬슬 다가와서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쌓인 게 많아서 그런지 상상만 해도 아래가 흥건해졌다.

서큐버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신이지만 실은 아이작이야말로 인큐버스이지 않을까.

그래야만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더 나아가 여자들까지 홀리는 거겠지.

'어디까지나 장난이지만.'

진짜 악마였다면 신성력을 받는 것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비유에 불과하다.

세실리는 서둘러 머릿속을 점령할 뻔한 성욕을 재빨리 물리쳤다. 여기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할 수 없으니 평정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마족은 어지간하면 욕망에 휘둘릴 일은 없으니 이정도는 가뿐하다. 만약 아이작이 앞에 있었다면 욕망에 잡아먹혔겠지만 다행히 지금 없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제논 일대기 29권을 책상 위에 조심히 얹었다.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을 뿐, 아직 남은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빨리 방학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못 풀었던 걸 다 풀어버려야지.'

이렇듯 세실리처럼 29권의 결말로 인해 착각 아닌 착각을 낳아버린 경우도 있었으며.

"······정말 비극적이로구나. 그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이냐."

비슷한 착각을 한 나머지 진심으로 아이작을 딱하게 여기게 된 아르웬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녀도 아이작을 미래인이라 철썩 같이 믿는 사람인 만큼, 이런 결말을 직접 경험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아파왔다.

그것과 별개로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싶은 건 세실리와 다를 게 없었지만.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책을 조용히 덮었다.

뒤이어 창문 밖으로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떤 세상이길래······ 이런 비극들로 채워진 게냐. 이런 세상이 오지 않아 정말 다행이로구나."

안심함과 동시에 안타까워하는 아르웬. 마지막으로······

"어떻게 생각하시죠? 선동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 슬슬 진짜가 되려는 중인데?"

"······나도 이건 예상하지 못 했군. 뭐 이런 악랄한 놈을 보았나. 한 수 배워야겠어."

"악마 숭배자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겁니까? 악랄한 건 당신들이잖아요."

"우린 그저 양이 많을 뿐, 농도로는 이 결말에 비해서 한참 부족하다네."

누군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 *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