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404화 (405/763)

〈 404화 〉 주사위는 던져졌다(2)

* * *

"좋아. 결정했어."

"뭐가?"

"이제 네가 뭘 하던 간에 놀라지 않기로."

잠깐 도망칠 구석을 만들기 위해 초대한 리나가 나에게 한 말이다. 현재 그녀는 반쯤 해탈한 건지 몰라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 침대에서 클라크가 제논 일대기를 정독 중이니.

원래 리나는 지하 사원에서 부활한 클라크 때문에 황궁으로 돌아갔지만, 정작 그 장본인이 내 기숙사에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내 할아버지이자 소환 의식을 막은 사람이라면? 현실판 칠죄종을 혼자서 박살낸 실력자라면?

안 그래도 이벤트로 인해 머리가 아픈 상황인데 리나로서는 다 집어던지다 못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지. 내가 쓰게 웃는 동안 리나는 미소를 유지하며 우아하게 차를 마셨다.

달달달달달­

딴에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은 것 같다만 손이 떨리는 건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느 드라마처럼 차를 주르륵­ 흘리거나 얼굴에 분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후우······"

"이제 좀 진정이 돼?"

나는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리나에게 물었다. 클라크의 소개는 진작에 끝난지 오래다.

하지만 끝난 것과 별개로 충격은 영 가시지 않아 좀처럼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근들어 연달아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다보니 스트레스란 스트레스는 다 받고 있을 터.

리나는 황녀라서 그나마 덜 바쁘지, 레오르트는 매일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어서 얼굴조차 비추기 어렵다.

"진정이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너 같으면 진정이 되겠니?"

"음······"

나는 어딘가 억울한 것 같은 리나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클라크를 쳐다봤다.

어제부터 꾸준히 정독하기 시작한 제논 일대기인데 벌써 12권을 읽고 있다.

듣자하니 스켈레톤으로 부활하여 잠이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거실에 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혼자 등불을 켜고 봤다고 말했다.

팔락­

집중하고 계시는지 클라크는 내가 빤히 쳐다봐도 페이지를 넘길 뿐이었다. 게다가 나와 리나가 말까지 나누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다.

사실 밤까지 샜는데도 12권이면 속도가 꽤 느린 축에 속한다. 그만큼 꼼꼼히 읽고 계시다는 뜻이겠지.

나는 클라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도 잠시, 곧바로 리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힘들겠지. 안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을 테니까."

"하아······ 이걸 또 어떻게 해결해야 되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네."

리나는 고운 미간을 꾹­ 꾹­ 누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클라크는 머지않아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으나 그의 업적이 문제다.

그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2차 악마 전쟁이 발발했을 테니까. 더군다나 내 영혼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가 됐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리나밖에 없다. 그녀는 소환 의식으로 인해 내가 넘어왔다는 것도 알고, 그 소환 의식을 방해한 사람이 클라크라는 것도 알게 됐으니.

지금쯤이면 다 포기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심정이지 않을까. 일단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냥 다 때려치고 싶다······ 황녀고 뭐고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다······"

"··· ···"

"아니지. 아니야. 제국이 위기인데 이런 생각을 가지면······ 하지만 진짜 하기 싫은데······"

평소 황녀로서의 기품과 위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책임자 한 명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럴 때일수록 유능한 사람이 곁에서 보필해야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 같이 믿을 게 못된다. 악마 숭배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감언이설만 내뱉는 간신을 곁에 둘 수도 없는 법. 다시 말해 그녀 혼자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해야 된다는 뜻이다.

"후우······ 아이작."

"응."

"황궁으로 오고 싶다고?"

결국 뒤로 미루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나는 그 짧은 사이에 피로해진 리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29권의 원고는 발송하지 않았다. 여기서 발송했다간 어머니가 바로 읽을 테니 출판사로 곧장 보낼 방법을 찾을 생각이다.

아니면 아버지에게 부탁해도 된다. 아버지는 가끔 가다가 저택으로 복귀하시니까.

때마침 적절한 명분도 있다. 알다시피 내가 원고를 보낼 때마다 어머니가 몰래 보시는데, 이건 다른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물론 어머니께서 섭섭하시겠지. 그러나 원고를 건드리는 건 안 된다고 못 박으면 어느 정도 납득하실 것이다.

그리고 냅다 황궁으로 도망치는 것이다. 헬리움은 가르츠라는 변수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완전히 차단시킬 예정이다.

'30권의 분량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어.'

29권의 결말은 최종보스로 변모한 진과 제논이 서로 맞닥뜨리고, 진이 먼저 공격하면서 끝난다.

30권은 진이 걸어온 여정과 그에 따라 변화하는 심리, 두 주인공의 전투가 이어질 것이다. 마지막은 당연하게도 진의 죽음이고.

29권의 결말도 충격적이지만 30권보다는 덜하겠지. 그래서 29권을 작성하는 동안 30권도 함께 집필했다.

다시 말해 29권이 나오고 최소한 일주일 안에 30권이 발매될 예정이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대로 된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가 음모 아닌 음모를 꾸미는 동안, 내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리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궁으로 오는 건 상관없어. 바쁘긴 해도 너니까 환대는 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딱히 있는 건 아니야. 궁금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일도 있어서. 황제 폐하와의 면담도 할 수 있지?"

"네가 원한다면. 혹시 몰라서 말하지만 너는 철저하게 갑의 위치에 있어. 이건 명심해줘."

"예의를 차려서 안 좋을 건 없잖아?"

갑의 위치에 있어도 미쳤다고 황제에게 개기겠나. 하물며 장인어른이 될 분에게 무례를 끼칠 수 없는 법이다.

리나는 내 말에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도중에 뒤에 있는 클라크 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클라크의 존재는 리나에게는 여러모로 신기하겠지. 여느 스켈레톤과 달리 신성력이 전혀 통하지 않고, 생전의 이성을 멀쩡히 유지하고 있는 망자.

"그럼 네가 황궁에 있는 동안 저 분은 여기 계속 남으셔?"

"응. 방학이 오면 함께 돌아가기로 했어."

"그렇구나. 황궁에는 마리도 올 예정이지? 케이트 추기경도."

"응."

"알았어. 그럼 빠른 시일 내에 소식을 들고 올게. 하루면 될 거야."

"고마워. 아참, 리나."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볼 게 있다. 리나는 내가 부르자 한 쪽 눈을 치켜뜨는 걸로 화답했다.

나는 대답을 하기 전,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봤다. 현재 아델리아는 아버지로부터 특훈을 받고 있고, 클라크는 독서에 집중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리엘은······

"할아버지. 할아버지."

[왜 부르는 게냐, 손녀야.]

"나랑 노라줘. 심심해."

클라크에게 놀아달라고 보채고 있다. 내가 바쁘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클라크도 사랑스러운 증손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제논 일대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비행기를 태워주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로는 매우 엄격한 성격이라고 하셨는데 전혀 아니다. 그냥 전형적인 손녀 바보다.

그때 당시는 상황이 너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엄격해진 게 아닐까. 나는 뼈밖에 없는 몸으로도 잘 노는 두 사람에 피식 웃었다가 리나에게 답했다.

혹시 몰라서 조용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건 잊지 않았다.

"너도 혹시 진·릴리 파야?"

"진·릴리?"

"응. 너도 그 커플을 응원하냐고."

만약 그런 거라면 황궁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다. 헬리움은 가르츠가 있으니 힘들고 그나마 남은 곳은 단 하나, 알븐하임이다.

아르웬은 언제든지 찾아와도 상관없다며, 오히려 자주 얼굴을 비춰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리나는 내 질문에 눈을 깜빡거리더니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니. 난 제논이랑 메리가 더 좋은데?"

"그럼 다행이네."

내 질문이 썩 수상쩍었던 걸까. 리나는 설마하는 기색으로 조용히 물었다.

워낙 눈치가 빠른 여자다보니 내가 어째서 저런 질문을 했는지 금방 깨달은 모양이다.

"너 설마······ 아니지?"

"뭐가?"

"진짜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내가 제논·메리 커플을 응원한다지만 그거는 좀······"

리나는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을 떨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불쌍하지도 않니?"

"대신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가잖아."

"그건 그렇지만······ 난 모르겠다. 알아서 해."

주사위는 던져졌다.

******

아이작이 황궁으로 가는 시기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쯤, 그가 원하는 대로 29권의 원고가 출판사에 도착했다.

본래라면 중간에 안나가 원고를 가로챘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작이 당부했던지라 그녀도 별수 없이 출판사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출판사에 도착한 29권의 원고. 인쇄를 하기 전, 오탈자 검수는 필수이며 보통 같으면 편집자가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제논 일대기이다 보니 오탈자를 검수하는 사람마저 여러 명이다.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함이며 작품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그리고 출판사 사장, 머스크는 오탈자 검수를 맡은 직원들이 찾아오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29권의 원고는 책상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었으며, 오탈자 검수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다.

이대로 인쇄소로 보내면 그만이지만 왠지 몰라도 직원들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내용 때문에 그렇습니다."

"줄거리?"

"네. 저희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못 되지만······"

직원들 중 대표 겸 총대를 맨 직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에 머스크는 짜증보다는 의문에 찬 표정으로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직원이 사장인 자신에게 찾아온 걸까. 제논 일대기 출간 이후, 비서가 된 매튜를 제외하고 직원이 찾아온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것도 휴가 혹은 퇴직 때문이며 그 퇴직도 개인적인 사정이 대부분이다.

머스크의 인성도 나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월급이 압도적이어서 일개 직원들이 찾아오는 경우는 전무하다.

"제논에게 스토리를 재고해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까?"

"뭐?"

머스크는 직원의 건의에 인상을 와락 구겼다.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스토리 재고를 부탁한다니.

제논의 편집자가 사실상 머스크이긴 해도 스토리만큼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알아서 잘 하니까.

헌데 직원이 찾아와 저런 말을 하니 황당하다 못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머스크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나?"

"예, 예.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한 번만 읽으시면 저희의 심정을 알게 될 겁니다."

"······쯧. 그래. 한 번 읽어보도록 하지. 대신 다 읽을 때까지 가만히 있게나."

마음 같아서는 내쫒아버리고 싶다만 그럴 수는 없다. 그 용기가 가상한데다가 필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에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머스크는 책상 위에 올려진 원고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논이 진의 뒤를 따라가는 것부터다. 일행이 방문했던 나라를 하나 하나 찾아가면서 진의 뒤를 추적하는 제논.

이윽고 1차 악마 전쟁이 발발했던 사막 지대에 도착하고, 그곳에 숨겨진 진실들이 속속히 드러나게 된다.

이것만 해도 전세계를 들썩거리기에 충분했지만······

"······어?'

머지않아 결말을 읽은 머스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보 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얼마나 믿기지 않는지 페이지를 넘겼다가 다시 되돌렸다가 반복하고 있다. 정말로 자신이 읽은 게 맞나 싶어서.

뒤이어 그는 원고를 덮고는 다급히 옆에 서 있는 비서, 매튜에게 질문했다.

"이보게, 매튜. 이 원고 누가 들고 왔지?"

"늘 그렇듯이 저택에서 온 원고입니다."

"확실해?"

"네."

결말이 도저히 믿기 어려웠던 건지.

"도중에 악마 숭배자가 수를 쓴 건 아니고?"

머스크가 당황한 목소리로 연이어 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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