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9화 〉 이야기(1)
* * *
"노예요?"
나는 클라크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도 약간 당황한 눈초리셨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다. 내 선조가 사실 자유를 갈망하던 노예였다니.
노예가 어떤 존재인가. 바닥 중의 바닥이자 인권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계급이다.
현재로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악마 숭배자의 주도 하에 불법 노예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노예들 중 남자는 대부분 농사와 같이 노동력이 쓰이고, 여자는 외모에 따라 각자 다르게 사용된다.
이렇듯 노예는 살아있되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 존재가 내 선조라니,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노예가 맞다.]
클라크의 확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잠시, 곧바로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한 나라의 장군이나 영웅이면 모를까, 노예와는 백만 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대대로 물려받는 장대한 기골 하며, 니콜과 같이 여성임에도 막강한 근력을 타고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 다른 기사 가문에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는 마나 연공법과 무술까지. 무엇 하나 꿇리는 게 없다.
심지어 먼 과거에 인간은 마나조차 사용하지 못했으니 오직 피지컬만이 승부를 좌우했다. 그런데도 노예였다니, 필시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을 것이리라.
"...우리가 노예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데. 먼 과거에 죄를 저지르기라도 했소?"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셨다.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
마이샬 가문의 선조도 지금과 같은 무력을 갖고 있다는 가정 하에, 그를 노예로 부릴만한 세력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클라크도 그 심정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우리를 둘러보더니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이요?"
[담배 하나만...]
"애가 앞에 있는데 담배는 무슨 담배. 그냥 말하기나 하쇼."
애연가답게 담배를 요구했으나 아버지의 타박으로 묵살당했다. 아리엘이 앞에 있는데 담배는 약간 선을 넘었다.
클라크는 아쉬움에 혀를 찬 것도 잠시, 곧이어 생각을 정리하더니 특유의 걸걸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느긋하게 옛 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면서 다른, 오묘한 느낌이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될까... 그래. 사람이 강해지는 법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느냐?]
"무력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전부 포함해서인가요?"
[우리 같은 경우는 무력이라 봐야겠구나.]
"그거라면 한정돼 있죠. 마나를 연공한다거나, 근육을 키운다거나, 아니면 기술을 연마한다던가 등등. 무력에만 국한되면 그거밖에 없지 않을까요?]
내 대답에 클라크는 눈을 감으며 맞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눈구멍 안의 빛은 실제 눈처럼 움직이고 있다.
[네 말이 맞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의 도리에 벗어나지 않는 방법이지. 하지만 도리에서 벗어난 방법이라면?]
"인신공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악마 숭배자들이 단기간 내에 힘을 가지는 방법 중 하나 인신공양이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양심과 도리를 버리고 힘을 취하는 방법.
설마하니 우리 가문이 인신공양을 하다가 노예가 된 건 싶었다. 그러면 노예가 되도 싸다 못해 인간 실격이었으니.
하지만 클라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었다.
[맞다. 인신공양이지. 그러나 우리가 직접 인신공양을 한 게 아니란다.]
"그러면..."
[인신공양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투견. 수천 명의 피가 머리카락에 물들어 붉어지고, 그 과정 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를 얻었단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말이다. 나는 등 뒤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으며 바라봤다.
이게 수천 명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된 색깔이라니. 책에서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아서 쉬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클라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마이샬 가문의 역사를 알려줬다.
[시대가 흐를수록 그나마 옅어지고, 신성력을 받아 색채가 밝아지긴 했지. 하지만 우리 가문의 피를 이은 사람의 머리카락은 대부분 빨간색을 띈단다.]
"니콜 누나가 특이한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그 애도 은은하게나마 붉은색을 띄고 있잖니?]
클라크의 말대로다. 니콜의 머리카락은 남색이나 군데군데 붉은 기운을 띄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가문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에 붉은색이 들어가는 건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심지어 이것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그나마 옅어진 거다. 옛날에는 무조건 빨간색이었겠지.
어쨌거나 마이샬 가문의 상징인 빨간머리에 대한 의구심이 어느 정도 풀렸겠다, 남은 건 노예에 관해서다.
어떤 미친 사람이 선조를 노예로 잡아다가 인신공양의 실험체로 사용하고, 또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타난 건지.
때마침 클라크도 그것과 관련된 얘기를 할 생각이었는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담배 한 대만 주면 안 되겠니?]
"안 돼요. 그 모습으로 필 수 있기나 하세요?"
[되더구나. 나도 이게 참 신기했지. 한 번 보여줄 수 있는데 될까?]
"지금 말고 나중에요."
[쳇.]
남자는 커도 애라고, 클라크도 자기가 사랑해 마지 않는 담배 앞에서는 철이 없어지는 것 같다.
이어서 그는 머리, 아니 맨들맨들한 두개골을 손으로 긁적이더니 자동으로 집중될만한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책에는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역사를 좋아하는 나로서 눈을 빛낼만한 것들이었다.
[너희들 혹시 게로시아 왕국이라고 알고 있느냐?]
"저 알고 있어요. 한때 강대국이었지만 악마 전쟁 당시 가장 먼저 멸망한 왕국이잖아요."
악마 전쟁 당시 알븐하임을 제외하고 기록물이란 기록물은 대거 소실됐다. 하지만 어떤 왕국이 존재했다는 건 약간이나마 남은 상황이다.
또한 나는 알븐하임의 성지에 남은 기록을 통해 게로시아 왕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도 대충 알고 있다.
한때 테르스 왕국을 뛰어넘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했지만, 애석하게도 악마 전쟁으로 멸망한 왕국.
심지어 악마가 가장 먼저 차원을 찢고 나타난 곳이 게로시아 왕국이다. 그들로서는 뭘 하지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겠지.
[잘 아는구나. 우리 선조는 게로시아의 검투사였단다. 그것도 왕이 직접 호명할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지. 그것 때문에 인신공양의 실험체가 되었지만 말이다.]
"게로시아의 마지막 왕은 정복 군주라고 하던데 인신공양과 관련이 있나요?"
[있다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강자의 유무에 따라 군사력이 좌우되었거든. 게로시아 왕은 평소 눈여겨본 실력자를 데려와 인신공양으로 강화시키고, 영토를 서서히 넓혔단다.]
쉽게 말해 국가 단위로 진행되는 슈퍼 솔저 프로젝트. 나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했다.
게로시아 왕의 주도 하에, 평소 눈여겨보던 검투사를 데려와 인신공양의 실험체로 배정. 그 결과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됐다.
여기서 신이 간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은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개입하지 않으니.
"그 프로젝... 아니,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 우리 선조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지. 수천 명의 영혼을 한 몸에다가 집어넣는 일이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용한 거야. 그래서 게로시아 왕이 직접 곁에 뒀지.]
"노예랑 거리가 상당히 멀지 않아요?"
[예끼. 뭐 그리 급해? 좀 천천히 들으렴.]
클라크의 타박에 약간 무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라 흥분한 것 같다.
클라크도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아니면 그저 손자가 귀여웠던 건지 몰라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영광도 거기까지였어. 악마 전쟁이 발발하고, 게로시아 왕국이 가장 먼저 멸망하면서 다시 실험체로 추락했지. 악마 놈들도 인신공양으로 강해진 우리 선조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야.]
"마족은 안 됐나 보네요."
마족의 기원이 악마라는 건 상식 중의 상식. 그리고 악마의 실험체였다는 것도 상식이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 선조도 마족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 점이 조금 의아해. 수천 명의 영혼이 담긴 몸이 버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지. 아무튼 악마 전쟁이 끝나고도 우리 조상은 악마 숭배자의 충실한 투견으로 살았단다.]
"반항은 하지 않았소? 우리 집안 성질머리를 보면 반항하고도 남았을 텐데."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질문하셨다. 확실히 우리 가문은 평소에 온화하지만 특정 부분에서는 과격해지는 면모가 있다.
전투에서는 물론이고, 누군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제대로 욱하는 성질이 있다. 이건 나도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데이브와 니콜이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친 적도 몇 번 있다. 그래도 피해는 심각하지 않았다.
[반항이라... 과연 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오?"
[너희들에게 하나 질문하마. 악마 전쟁이 어떤 경위로 통해 발발했는지 아느냐?]
"경위라면..."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클라크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악마 전쟁은 지금으로서는 거의 신화에 가까운 역사다.
그 전쟁 하나로 그 전의 기록들이 거의 다 소실되었고, 알븐하임의 성지에 조금 있다지만 명확하지 않다.
애당초 역사라는 것이 객관적인데도 불구하고 주관적으로 기록되는 것. 기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객관적인데 성지는 너무 적다.
내가 게로시아 왕국에 관한 기록을 찾은 것도 우연에 가깝다. 게다가 아르웬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처럼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데다 그런 나라가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라고.
실제로 고대의 유럽인들은 세상의 끝이 인도라 생각했으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악마들은 다른 차원에서 건너와 침범한 존재들이지 않나요? 제가 알기로는 이런데."
"저도요. 신들이 현세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기도 했고."
"마족의 조상이기도 하죠."
저마다 악마 전쟁에 대한 사실들을 늘어놓았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전부 맞는 말이다.
악마 전쟁과 관련된 기록 혹은 문헌은 어딜 가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도 배우기도 하고.
전종족이 힘을 합쳐 대항한 유례없는 역사이자, 이후로 신이 직접 인류를 보살피게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엘프만 소통하던 신들이다. 그러나 악마 전쟁을 겪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다른 종족과도 소통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가장 큰 수혜를 본 건 단연코 인간이다. 주술에만 매달리던 인간이 신성력을 얻으면서 세력이 강해졌으니.
비록 마법은 여전히 선택받은 자만 가능했으나 신성력만 해도 인간이 큰 발전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아니. 나는 악마들이 어떤 길을 통해 이 세상을 침범했는지 물었다. 그 전쟁이 끼친 영향이 아니라.]
하지만 클라크에게 마음에 든 답이 없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박하자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나만 쳐다봤다. 여기서 역사에 빠삭한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나 또한 악마가 어떤 길로 이 세상에 들어왔는지 잘 모른다. 차원을 찢었다는 말만 있을 뿐이지.
"어... 차원을 찢어서 침략한 거 아니에요? 전 그렇게 알고 있어요."
[차원이라...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그럼 그 일을 누가 행했을까?]
"악마 숭배자 아니에요?"
[아니.]
클라크는 단호하게 답하더니,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줬다.
[게로시아의 마지막 왕, 모건 유르크 비아 3세가 직접 행했다. 왕이 직접 주도한 의식인만큼 국가 단위로 진행됐지.]
"...예?"
이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데, 다음에 이어진 말은 더 심했다.
[무엇보다 악마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아니란다.]
왜냐하면.
[게로시아 왕국민들이지.]
마족의 존재 이유를 단칼에 설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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