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92화 (393/763)

〈 392화 〉 주술(5)

* * *

자각몽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꿈을 꾸는 것.

다시 말해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전부 꿈이며,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지금 내가 자각몽을 꾸고 있었으니까.

환생하고 나서 자각몽은커녕 꿈조차 꾸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숙면을 취하는 나인데, 왜인지 몰라도 현재 내 눈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져 있다.

배경은 우선 전반적으로 어두운데다가 사원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중앙을 지키는 것 같은 석상 5개가 세워져 있었으며 독특하게도 날개와 뿔을 갖고 있었다.

악마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날개와 뿔. 또한 악마 석상들은 제각기 외모가 판이하게 달랐다.

뿔만 하더라도 세실리처럼 위로 곧게 뻗어있는 게 있는가 하면, 가르츠처럼 양처럼 돌돌 말려있는 뿔을 가진 악마도 있다.

성별도 두루두루 분포돼 있었으며 실물을 보고 제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 있는 중앙은 그보다 훨씬 거대한 석상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크툴루를 연상시키듯이, 입에는 촉수가 달려있었으며 그 크기 또한 다른 석상들보다 훨씬 거대했다.

다른 석상들 못지 않게 당장이라도 살아움직일 것만 같은 생동감. 악마는 그렇다 치고 과연 이것은 누구를 표현한 것인가.

"콜록! 콜록! 커윽······"

생동감 넘치는 석상들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때, 내 귀로 누군가의 거친 기침 소리가 들어왔다.

그 기침 소리는 정확히 내 아래쪽에서 났다. 이에 석상을 둘러보는 걸 멈추고 아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그리고 눈에 들어온 참상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혈투의 현장. 이 말을 제외하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단으로 추측되는 돌침대 밑에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피가 묻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랬던 건지 몰라도 타오를 듯한 붉은 머리를 기르고 있는 남자.

사자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과 거대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의 체격.

다 꺼져가는 생명이지만 피로 인해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동자는 꿋꿋이 빛을 내고 있다.

푸악!

한 번 기침을 하니 피를 한 사발 뿜어내는 적발의 남자. 각혈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몸 군데군데 검을 비롯한 온갖 무기들이 꼬챙이처럼 꽂혀있을 뿐더러 오른팔은 아예 사라져 있다.

심지어 깔끔하게 절단된 것도 아니고 누군가 억지로 뜯어버린 것 같다. 종이를 찢은 것 같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며 뼈마저 선명했으니까.

그럼에도 왼손으로 쥔 거대한 양날도끼는 끝까지 쥐고 있었다. 다만 그의 도끼조차 멀쩡하지는 않았으며 한 쪽 날이 부러져 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만큼의 부상.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취하지 못했다. 남자도 남자지만 그의 주변에 펼쳐진 참상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세상에······'

입이 절로 벌어지는 현장이다. 눈으로 확인되는 시체의 수는 석상의 숫자와 동일한 5구.

일단 악마화를 시전한 건지 평범한 마족보다 훨씬 큰 뿔과 악마 날개까지 펼친 마족 두 명.

한 명은 머리가 도끼에 찍힌 탓에 뇌수가 줄줄 흐르고, 다른 한 명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내장 파티를 벌이고 있다.

그나마 이들은 양반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세 명은 그야말로 끔찍하다는 말조차 부족했으니까.

사지가 전부 뜯겨져 있는 시체 한 구. 장작마냥 위에 아래로 쪼개진 시체 한 구.

마지막으로는······ 그냥 맨손으로 때려죽였는지 얼굴이 함몰되다 못해 싱크홀처럼 움푹 파여있는 시체 한 구.

특히 얼굴이 뚫려있는 시체는 놀랍게도 엘프였다. 귀가 다 잘려나가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만 엘프는 확실하다.

아무튼 하나 같이 멀쩡히 죽은 시체가 없다. 오죽하면 다 죽어가는 남자가 가장 양호할 정도.

달리 말하자면, 남자가 저들을 모두 처치했다는 뜻이다.

"으······"

"으힉?!"

죽은 거 아니었나? 나는 얼굴이 움푹 파여있는 엘프가 신음을 흘리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입 위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한데 의식을 가지고 있다. 저 정도면 뇌까지 곤죽이 됐을 텐데 어떻게 의식을 유지하는 거지.

꿈이라서 망정이지, 실제로 이 모습을 보았다면 당장 속에 있던 내용물들을 모두 게워냈을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군······"

게다가 말까지 한다. 호러도 이런 호러가 없을 것이다.

나는 반시체나 다름없는 엘프가 말을 하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대체 어떻게 돼 먹은 생명력인지 알 수가 없다.

그사이 엘프는 힘을 최대한 짜내는 건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엘프와 적발의 남자를 제외하면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해 저 질문은 적발의 남자에게 한 것이다.

"······안 죽고 뭐하냐?"

이에 적발의 남자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본인도 죽음을 직감한 듯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음성.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속 시원하다는, 서로 대립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런다고······ 널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 ···"

"잠깐······ 늦어졌을 뿐······ 너마저 없으니······ 우리의······ 승리다······ 흐흐흐······"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지는 사람은 실제로 처음 본다. 그 상태로 기괴한 웃음까지 흘리니 꿈인데도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적발의 남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제단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에게 보이는 건 천장에 배치돼 있는 등불 하나.

저 등불 또한 마법으로 유지하고 있으니 언젠가 꺼질 운명이다.

"안다."

엘프의 질문에 담담히 대답한 남자. 뒤이어 그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처럼 아련하게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쿨럭!"

또다시 피를 한움큼 토해해는 남자. 눈빛도 서서히 흐려지는 걸 보아 그에게 남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졌다. 아마 너희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 설령 안다고 해도 알리지 않겠지. 우리가 패배한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그런데 왜······ 설마 너의 후손을······"

"아니. 그 애는 아무것도 몰라. 내가 안 알려줬으니까. 그 애부터 시작하여 양지로 올라오겠지."

적발의 남자가 언급한 그 애. 왠지 몰라도 우리 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 와서 잘 들여다보니 남자는 아버지와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다.

두터운 체격하며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마지막으로 황금의 눈동자까지.

누구인지 알 듯 말 듯한 외모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 남자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일에 종지부를 맺은 것처럼, 후련하디 후련한 호흡. 그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의 '의무'도 여기서 끝이군."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는······ 아주 비참한······ 말로의 영웅이여······"

이제 거의 다 숨이 넘어가는지 목소리가 점점 줄어드는 엘프. 그 엘프는 있는 힘껏 짜내며 겨우겨우 질문을 끝마쳤다.

"그대마저······ 진실을 모른 채······ 사그라든다니······ 통탄할 일이로다······"

"··· ···"

"만물의 아버지여······ 저도 곧 그곳으로······ 끄윽."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그대로 숨을 거둔 엘프. 남자는 엘프가 죽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잔인한 참상과 대비되는 고요한 침묵. 강인한 체격에 대비되는 처연한 눈동자.

남자는 한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이제 잠에 빠져드는 아이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이곳으로 오게 된 이름 모를 영혼아······"

"··· ···"

"막지 못해 미안하구나."

끝까지 남을 위해 희생하고, 또 희생 당한 이들을 기리는 영웅적인 정신.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바람에 휘날려 사라질 것이리라.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을 테니.

"신이시여. 부디 그 영혼을······"

"··· ···"

"어여삐 보살펴주소서······"

그 말과 함께.

번쩍!

강렬한 빛이 일면서 사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

"··· ···"

잠에서 깬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봤다. 분명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는데 몽롱한 기운도 없이 정신이 맑다.

게다가 방금 전 꿨던 그 꿈. 그 꿈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보통 잠에서 깨어나면 꿈의 내용은 대부분 잊기 마련인데 전혀 아니다. 오히려 머릿속에 선명히 박혀있었다.

스윽­

나는 어안이 벙벙한 나머지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니 문득 옆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이에 옆을 바라보니 아리엘이 내 팔을 꽉 붙잡은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여인들과 밤일을 치르지 않는 이상 그녀는 항상 내 침대에서 자는 편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고.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자각몽을 꿨다. 그것도 내 할아버지, 클라크의 최후와 관련돼 있는 듯한 꿈을.

시기를 보자면 내 영혼이 이곳으로 이제 막 건너왔을 시점이지 않을까. 최대한 머리를 굴리니 그쯤이지 싶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이라······'

정말로 잘 어울리는 수식어이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붉은 머리의 영웅이 등장하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클라크가 스스로 영웅임을 포기하면서 마이샬 가문의 영광이 시작됐다.

또한 클라크는 만일에 대비하여 소환 의식까지 망친데다가 최고 간부까지 모조리 도륙냈다.

워낙 인상적인 꿈이어서 그럴까. 나는 침대의 서랍에 손을 뻗었다. 서랍에는 언제나 수첩을 비롯한 마법필을 보관한다.

사각­ 사각­

나는 수첩에 간단하게 메모했다. 그 메모의 내용은 솔직히 별 거 없다. 외전에 관한 이야기다.

전생으로 치자면 흔하디 흔한 클리셰 중 하나지만 아까 꿈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제목은······ 스쳐간 영웅. 이걸로 하자.'

이걸로 되겠지. 나는 메모장을 덮으며 창문을 바라봤다.

별들이 수놓아진 하늘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외전 주인공의 후손을 제논으로 할까?'

괜찮겠네.

그 후로 아침이 찾아오고······

"어디로 간다고요?"

"사원으로 갑니다. 루미너스 님이 그곳으로 가라고 하셔서..."

케이트가 사원으로 간다며 나를 찾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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