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88화 (389/763)

〈 388화 〉 주술(1)

* * *

인터넷의 발명은 '지구촌'이라는 단어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세계 어디에 있던 간에 인터넷만 있다면 대화를 할 수 있으며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했는데 바로 익명성. 익명성은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이며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잘 드러난다.

악플로 인해 연예인이 사망한다던지, 불법 토토와 같은 범죄 사이트가 늘어난다던지 등등.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인터넷이 없어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만약 있었다면 지금 나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었을 테니까.

사실 인터넷이 등장할 정도면 문화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뜻이니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팬들이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건 결코 보고 싶지 않다. 팬끼리 싸우는거면 몰라도 괜히 멀쩡한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전개를 바꾸는 게 어떠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만 금방 접었다. 바꾸면 바꾸는대로 뭐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으로서는 조용히 있는 게 가장 최선이나 나에게 가장 큰 무기가 하나 남아있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도 유용하게 썼던 휴재 협박. 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하면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책임을 지겠다 말하면 다른 의미의 난리가 날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는 걸까. 모험가가 난동을 피웠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금방 무마되었다.

이후에 자기들도 좀 아니다 싶었는지 조금씩 자중하기 시작했으며 악마 숭배자 토벌도 지체되었을지언정 중단되지는 않았다.

"아이고······"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도 아버지로부터 특훈을 받고 나서 녹초가 되어버렸다.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어 하는 내가 곤죽이 될 정도면 얼마나 힘든 훈련인지 대강 감을 잡을 것이다.

원래는 내 몸 하나 스스로 간수할 수 있을 정도면 끝인데,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욕심이 점점 더 강해지셨다.

데이브와 니콜처럼 타고난 재능은 없지만, 집중력과 체력이 그걸 모두 커버하고 남는다고.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체력을 사용해야 된다는 의미다.

스윽­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내 얼굴을 살살 간지럽혔다.

마치 커다란 붓 하나가 내 얼굴 위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나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니 웬 꼬리 하나가 내 머리 위에서 살랑살랑거리고 있다. 나는 이 꼬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레오나?"

"히히."

고개를 돌려 이름을 부르자 레오나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장난스레 웃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 꼬리만 살랑살랑거리는 그녀. 나는 복슬복슬한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을 헤집어줬다.

그러자 레오나도 특유의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본인의 기쁨을 표현했다.

"기다리느라 지루하지는 않았어?"

레오나가 여기에 온 이유는 그녀와 상의할 게 있어서다. 하지만 예상 외로 훈련이 길어져서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미안함이 담긴 내 질문에 레오나는 씨익 웃어줬다. 황금의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는 것이 참 매력적이다.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어. 저 꼬마 덕분에."

레오나가 말한 꼬마가 누구인지 모두 알 것이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간신히 들어올려 한 곳을 쳐다봤다.

아리엘이 푹신한 소파에 앉아 정자세로 독서를 하는 중이었으며, 맞은편에는 마리가 의자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다.

아리엘에게 모르는 질문이 있다면 마리에게 질문하는 식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엄마. 엄마."

"응? 궁금한 거라도 있니?"

"응. 여기 목도하다가 무슨 뜻이야?"

"쳐다보다와 같은 뜻이야. 비슷한 단어로 직시하다, 응시하다, 노려보다, 지켜보다 등이 있지."

"그렇구나. 그런데 왜 비슷한 단어가 이렇게 많은 거야? 그냥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각각 사용할 곳이 있어서 그렇단다."

저런 식으로. 나는 얌전하게 교육을 받는 아리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레오나의 말마따나 태생이 태생이라 아리엘의 재능은 평범과 거리가 멀다.

한 번 보고 들은 건 전부 다 기억하는 수준이었으며 기본적인 신체 능력조차 범상치 않다.

어쩌면 조만간 마법까지 사용하지 않을까. 아버지도 아리엘의 재능을 눈 여겨 보고 계시는데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예상이 간다.

'엇나가지만 않도록 해야지.'

이미 재능은 차고 넘치겠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그녀가 탈선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책만 읽는 아리엘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레오나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곁을 지키는 느낌이다.

슥­ 슥­

"그릉. 그릉."

실제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특유의 그릉거리는 소리를 낸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최근들어 레오나의 애교가 더 늘어난 듯했다.

듣자하니 나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나 뭐라나. 라일락이나 복숭아 향도 아닌 그냥 좋은 냄새라고.

아마 히르트로부터 받았던 '순수한 축복'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수인은 동물의 감각과 본능을 타고났으니 가능성이 높다.

나는 레오나의 머리를 한동안 쓰다듬어주다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대로 누워있다간 잠에 빠져들 것 같다.

"좀 더 쉬지 그래?"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레오나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권유했다. 좀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꼬리를 살랑거리는 건 덤.

나는 그 표현에 피식 웃으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기다리게 만드느라 미안했는데 여기서 더 기다리게 할 수 없다.

게다가 힘들다고 해도 골아떨어질 정도는 아니다. 이때 만큼은 튼튼한 내 체력이 자랑스러웠다.

"아니. 괜찮아. 할 일은 해야지. 나중에 좀 더 쓰다듬어줄게."

"머리도 빗어줄거지?"

"물론."

"알았어. 읏차."

팔을 사용하지도 않고 오직 코어힘으로만 상체를 벌떡 일으킨 레오나. 역시 수인답게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월등하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와 밤일은 어떻게 진행될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그녀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참고로 2주일이 지나면 발정기가 찾아와 이런 생각이 드는 것 뿐이지, 내가 색마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아델리아의 체력과 세실리의 악주기를 겹친 셈이니 여러모로 힘든 밤이 될 것으로 추측됐다.

"우리 아리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었니?"

"응? 앗! 아빠!"

이윽고 미리 마련된 자리로 향한 후에 아리엘을 불렀다. 아리엘은 내 부름에 화사한 미소를 띠더니 책을 내팽겨치고 나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폭 안기는 그녀. 저번처럼 힘조절에 실패하여 고간에 머리를 들이박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는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못말린다는 표정으로 아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보면 며칠동안 떨어져 있다가 온 것처럼 보일 테니까. 참고로 훈련은 3시간 정도 진행됐다.

"우리 아리엘은 어리광쟁이네.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니?"

"응! 아빠 보고 싶었어."

"그래. 그래. 일단 저기 앉자."

아리엘도 아리엘이지만 레오나를 부른 이유가 따로 있다. 나는 아리엘을 안은 채 마리의 옆으로 향했다.

뒤이어 레오나도 맞은편에 앉아 대화를 할 준비를 끝마쳤다. 당연하게도 아리엘은 내 무릎 위에········

"아야야. 내 귀 잡아당기지 말아줄래?"

"그럼 먹어도 돼?"

"안 돼! 네가 물면 아프단 말이야!"

········가 아니라 놀랍게도 레오나에게 안겼다. 안기는 게 아니라 매달렸다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수인에게만 있는 동물귀와 꼬리에 관심이 간 모양이다. 지금도 귀와 살랑거리는 꼬리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니.

이에 마리가 곧바로 아리엘을 불렀지만 레오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아리엘에게 자연의 기운이 충만해서 그런지 지금이 훨씬 편하다고.

"어쨌거나 주술에 대해 알려달라고?"

이후로 레오나가 아리엘을 무릎 위에 앉힌 채 주제를 거론했다. 아리엘도 얌전히 안긴 채 그녀의 꼬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그 물음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오나와 마리를 부른 이유는 다름아닌 주술 때문이다.

현재 악마 숭배자가 사용하는 능력은 마법도, 신성력도 아닌 주술이다. 그리고 수인은 마법이 아닌 주술을 주로 사용한다.

레오나는 순혈이 아니라 혼혈이나 대족장의 자식인만큼 주술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마리는 공식적으로 내 약혼녀라 발표된 이상 악마 숭배자의 먹잇감이다. 대응을 위해서라도 들을 필요가 있다.

"응. 악마 숭배자가 사용한 주술 때문에 위험할 뻔했거든. 다행히 아리엘이 있어서 잘 해결됐지만 혹시 모르잖아. 아리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또다른 주술로 나를 위협할지."

"얘가 해결했다고? 대체 무슨 주술이었길래?"

그 질문에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설명했다. 다만 확실한 건 아니라며, 어디까지나 추측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이후로 주술과 관련된 서적을 읽었으나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건 거의 없었다.

이상하게도 대부분 유실되었으니까. 심지어 아르웬에게 부탁했는데도 찾은 건 거의 없었다.

무슨 이유로 소실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현재로서 믿을 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이야기, 즉 구전밖에 없다.

"그렇구나. 빙의라········ 원래 빙의는 한을 풀지 못한 영혼이나 악령이 주로 하는 건데 이상한 일이네."

"너도 모르는 거야?"

"모른다기보다는 신기한 거지. 시전자가 아니라 주술의 대상이 자기자신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게다가 그 사람은 아마 주술 쪽에 재능이 뛰어났을 걸? 것보다········"

레오나는 말을 흐리며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아리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리엘은 여전히 레오나의 꼬리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가 그 영혼을 먹고는 정화를 했다라········ 따지고 보면 히르트 님의 자식이기도 하니 불가능하지는 않겠네. 자연은 더러워져도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아리엘한테 해가 가는 건 없지?"

"있었으면 진작에 증상이 나타났겠지."

다행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여 아리엘에게 문제가 생겼을까봐 걱정됐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대응책 뿐. 마법은 주변에 훌륭한 마법사들이 있어서 문제 없지만 주술은 논외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않은가. 아카데미의 보안 마법을 뚫고 내 뒤를 급습하려던 암살자.

그 암살자가 보안 마법에 적발되지 않은 것도 일종의 주술로 추측하는 중이다.

"일단 주술이 어떤 건지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럼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힘이 뭔지 알아?"

"마나 아니야?"

마나는 이 세상의 근원이자 에너지 그 자체. 신성력은 신이 전해주는 힘이니 별개로 쳐야된다.

마나가 있어야 신체를 좀 더 굴강하게 만들 수 있고, 마나가 있어야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전생으로 치자면 전기와 비슷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주술도 마나가 필요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제사를 지낼 때 바치는 공물에는 대부분 짙은 농도의 마나가 담겨있으니까. 악마 숭배자가 저지르는 인신공양도 따지고 보면 마나를 바치는 거랑 똑같고. 하지만 공물이 주체가 되지는 못해."

"그럼 뭐야? 신앙?"

"신앙과 비슷하지만 달라. 믿음 그 자체라고 봐야겠지."

뭔가 지극히 사이비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신앙도 신을 향한 믿음이지만 레오나가 말한 건 너무 추상적이다.

믿음. 이 단어를 설명하는 건 정말 간단했으니까.

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다 이해한다는 듯, 레오나가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주술이라는 것이 꽤 복잡한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네.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그래서 주술이 도박과 비슷하다는 인식이 있는거고."

"너무 추상적이라 와닿지가 않네. 그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주술에도 재능이 있다는 거야?"

"아니. 주술에서 말하는 믿음은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행위 자체를 말하는 거야. 반면 신앙은 믿는 신이 존재하니 가질 수 있는 거고."

플라시보 효과, 또는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들어줍니다. 이런 건가.

나는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마리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깜빡였다.

레오나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자 뺨을 긁적거리더니 한 가지 예시를 들어줬다.

"하나 예를 들어줄게. 자, 여기 귀여운 애 머리 위에 난 새싹이 있어. 보이지?"

"응."

"이거 뽑을 수 있는 거야?"

"아니."

아리엘 머리 위에 난 새싹은 뽑히지 않는다. 이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여러번 시도했기에 알고 있다.

힘을 강하게 줄 때는 아리엘이 아프다고 해서 그만 뒀고, 자르려고 하자니 무서워서 안 했다.

그래서 지금은 머리카락, 그것도 아주 깊숙하게 박힌 머리카락으로 취급하는 중이다.

저 새싹이 언제 성장할지는 모르겠다만 시간이 흐르면 자라지 않을까 싶다.

"알았어. 자, 한 번 봐봐. 여기에 뽑을 수 없는 새싹이 있어. 그러나 주술에서의 개념은 내가 이 새싹을 뽑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제사를 통해 공물을 바치면서?"

"그렇지. 그러면 평소대로 힘을 줘서 뽑았을 뿐인데········"

레오나는 장난식으로 아리엘의 새싹을 붙잡아 위로 잡아당겼다. 원래라면 우리에게 예시를 들어주기 위함이겠지만.

뽁!

아주 귀여운 소리와 함께 새싹이 뽑혀버렸다. 뿌리까지 뽑힌 건 아니고 중간에 줄기가 깔끔하게 끊어졌다.

나와 마리, 그리고 레오나는 새싹이 가볍게 뽑히자마자 모든 행동을 멈추고 멀거니 쳐다봤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적으로 채워졌으며 그 누구라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아리엘은 새싹이 뽑혀도 아무렇지 않은지 멀뚱멀뚱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쑤우욱!

침묵으로 가득 채워진 분위기 속에서, 아리엘의 머리 위에 또다른 새싹이 돋아났다.

언제 뽑혔냐는 듯, 아주 새초롬하고 싱싱한 새싹이다.

레오나는 그걸 보더니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말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걸 보면 그녀도 어지간히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짠! 어때? 깔끔하게 잘 뽑혔지?"

어케 했노.

* *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