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화 〉 소 뒷걸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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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 일대기는 현재 나온 권수만 해도 30권이 다 되어가는 장편 소설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만큼 당연히 그 속에 담겨있는 떡밥과 복선이 다양하며 28권에 이르러서는 거의 다 해소된 상황이다.
그전까지는 평론가를 포함한 독자들이 서로 의견을 나눴다. 이 떡밥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등.
이것들을 전부 종합하여 신문사에 제출하거나 의견을 전달하는 식으로 본인들의 추리력을 마음껏 뽐냈다.
흔히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딱히 스포일러도 아닌 것이, 여태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통해 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그렇게 추리해도 빗나간 것들도 상당히 많다. 멀리 가지 않아도 잭슨이 그딴 추리를 한 적이 있으며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물론 케이트가 타락한 추기경을 직접 찾아 천벌을 내리는, 현실 스포일러가 있긴 했으나 그건 내가 힌트를 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터진 스포일러도 깜짝 놀랄지언정 큰 반응을 하지 않을 예정이다.
반응을 한다면 저 의견에 동의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안 그래도 너무 큰 스포일러라 지금으로서는 침묵이 답이다.
'근데 누가 이런 말을 한 거지?'
나는 신문에 실린 소식들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갑자기 터져버린 스포일러로 인해 독자들, 특히 진 릴리 커플은 가히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게 28권의 결말도 그렇고, 세계수조차 악마들의 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게 드러난 상황이다.
그 상황 속에서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않고, 심지어 제논이 진을 죽일 거라는 말까지 했다.
여기서 문제는 사람이다. 누가 이딴 말을 했는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28권이 발매되고 난 지 며칠이 흐른 상황에서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라고.
원래라면 평론가 혹은 독자들이 추리한 것들을 신문에 내놓을 텐데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제논이 진을 죽일 거라는 건 어떻게 안 거야? 무슨 근거로? 미리 깔아놓은 복선으로는 부족할 텐데.'
워낙 충격적인 의견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 믿고 있다. 대부분 개소리로 취급하는 중이다.
현재까지는 제논이 진을 죽일만한 명분이나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둘은 서로를 신뢰하고, 종족을 초월한 친구다.
그러니 저런 의견이 묵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이 디아볼스의 영혼을 찾아 떠나면서 숨겨진 복선들이 차츰 등장하게 된다.
진이 '탐식'의 친자라는 점과, 릴리를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어둠이 될 수도 있다는 희생 정신.
이것들을 하나 하나 다 고려한 건지 모르겠다만 만약 정말이라면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싶다.
'아니면 단순한 어그로인가?'
의외로 가능성이 높은 가설이다. 세상 어디를 가던 간에 관심을 먹고 싶은 사람들이 널려있으니.
하지만 이것조차 애매하다. 이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소문이 퍼지게 된 경위도 음유시인과 매담자가 말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한 명 한 명 붙잡아서 어디서 들었는지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
대부분의 독자들도 개소리라며 몰매를 때리고 있어서 당장은 대처를 하지 않을 예정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네.'
솔직히 말해 내 입장에서는 외통수를 맞은 셈이다. 조금만 더 논리적이었다면 팬덤이 반으로 분열됐겠지.
빠가 까를 만든다고, 제논 일대기라 해서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다행히 빠의 숫자가 압도적이지만 그 안에서 갈라진다면?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심한 사태가 발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은 소설로 보라는 사람들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
당장 어머니조차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뼈와 살을 분리시킬 거라고 압박하고 계신다.
'이벤트 진행도가 늦어질 수도 있겠어.'
진·릴리 커플에 몰입하고 있는 독자들의 숫자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다. 워낙 애절하고 서글픈 스토리여서 팬층도 상당히 두텁다.
겉으로는 개소리라 치부하고 있어도 도저히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제논이 진을 죽이는 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이니.
불안은 불길함으로 바뀌고 그 불길함이 하나 둘씩 쌓이고 쌓이다보면 어느새 의심으로 변모한다.
그 의심이 향하는 대상은 당연히 나일 테고. 최악의 경우 팬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에게 항의를 할 수도 있다.
'진짜여서 더 골치 아프네.'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가장 공들여 만든 반전인지라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돌을 던지는 건 상관없다만 그것보다 죄책감이 심할 것 같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라는 스포일러를 듣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진짜로 개소리였다면 신입생 환영회 당시 잭슨한테 그랬던 것처럼 팩트를 꽂아버렸겠지.
나는 생각보다 복잡해진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좋게 흘러갔으면 좋겠는데 세상 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저······ 선배님? 어디 불편하신 게 있나요?"
그때 음울하면서도 깨끗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이 동태처럼 죽은 눈을 하고 있는 체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위기 자체는 괜찮다만 저 죽은 눈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냐. 괜찮아.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설마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냐. 아냐. 아냐. 그런 거 절대 아냐."
물론 바닥을 치는 자존감 때문에 가끔 이런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이런 거겠지.
그나마 족쇄로부터 풀려났다지만 체리는 수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
애가 얼마나 우울하면 주변에 같이 다니는 친구조차 없다. 심지어 외모와 몸매에 혹해 음흉한 손길을 뻗는 남자조차도 없다.
'진짜 왜 없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네.'
어쩌면 그 정도는 파악할 눈치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체리는 수업이 다 끝나면 곧바로 기숙사로 복귀한다.
신입생 환영회도 마찬가지로 불참. 백작가의 영애인데 자존감이 바닥을 쳐서 그런지 누군가와 교류를 맺는 걸 본 적이 없다.
딱 한 명, 케이트를 제외하고. 거의 핵융합에 맞먹는 조합을 지닌 두 명.
체리가 기숙사에 당당히 방문할 수 있는 이유도 내가 아니라 케이트 덕분이다.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아서 얼굴을 자주 비춘다고.
"흠. 흠. 그래서 요즘은 어때? 케이트랑은 잘 지내고 있어?"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아까도 얘기하다 왔고······"
"무슨 이야기 했어?"
"어떻게 해야 아이작 선배님을 좀 더 편하게 보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들?"
"··· ···"
그건 좀 소름 돋는데. 합법 스토킹을 허락한 체리라지만 그건 바깥에 나갈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기숙사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스토킹을 할 건덕지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냥 당당히 찾아올 수밖에.
"푹신푹신하당."
정신이 약간 혼미해졌을 때 체리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아리엘이 맑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체리의 커다란 가슴을 쿠션 삼아 뒤통수를 기대고 있다.
참고로 체리에게 아리엘의 존재를 알려준 건 오늘이다. 그런데 벌써 저렇게 가까워졌다.
그 과정 속에서 진귀한 걸 볼 수 있었는데, 음울하기 짝이 없던 체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는 것.
천사의 존재는 그 체리조차 경악하게 만들 정도라는 뜻이다.
"편해?"
"응! 편해!"
"헤헤."
물론 아리엘의 사랑스러움에 금방 함락되었지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체리조차 아리엘과 만나니 눈에 띄게 밝아진 모습이다.
아리엘이 서슴없이 무릎 위에 앉아도, 더 나아가 가슴을 쿠션으로 삼아도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마치 텅 비어있던 마음을 아리엘이 가득 채워주는 느낌이 든달까. 체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 가만히 놔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가 찻잔을 들었다. 우선 체리가 방문한 목적은 다른 게 아니라 일과 관련돼 있다.
"전개를 어떻게 써야 할 지 감을 못 잡겠다고?"
"네······ 지난번에 선배님께서 말씀해주셨잖아요. 작은 사건이 큰 미래를 바꾼다고. 하지만 그 미래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체리가 쓰고 있는 장르는 로맨스 판타지, 그리고 회귀물이다.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클리셰를 전부 갖다 박았다고 보면 된다.
어디까지나 지구의 기준으로는 말이지. 현재 로판물은 체리가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선구자인 탓에 감을 잡기가 매우 어렵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쉬운 문제인 것 같아도 그녀 입장에서는 머리가 터질 것이리라.
지금도 마찬가지. 회귀물 특정상 알고 있던 미래가 완전히 뒤바뀌는 전개가 반드시 등장한다.
체리는 그걸 어떻게 바꿔야 할 지 감을 못 잡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가 많이 중요한 거야?"
"미래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앞으로 다가올 큰 미래에 단초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흠······"
나는 그 내용을 듣고 잠깐 고민했다. 로맨스 판타지, 그러니까 로맨스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흘러간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이다. 아니면 정말 예측하지 못하는 전개로 나아가던가.
인기 있는 막장 드라마조차 적어도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주인공은 전쟁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였지? 그거 때문에 과거의 자기가 죽었으니까."
"네. 맞아요."
"그럼 그 미래가 전쟁이야?"
"아뇨. 전쟁을 막을 방법은 있어요. 다만 그걸 막는 과정을 어떻게 써야 할 지 고민이 돼요."
체리의 소설,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은 나도 꾸준히 구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내 취향에 딱 맞는 소설이니.
또한 어느 로판에서 자주 보이는 여주인공의 약점이 나온다. 그건 바로 자기 혼자 다 짊어지려는 것.
그걸 해소시키는 것이 남주인공의 역할이자 로판만의 매력이다.
단, 그전에 체리가 먼저 깔아야 할 밑밥이 있다.
"음······ 일단 전개는 잠깐 중단하는 게 어때?"
"중단······ 하라고요?"
전개를 잠깐 중단하라는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체리. 나는 멈추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가 쓰고 있는 건 로맨스잖아. 전개는 천천히 나아가도 돼. 가장 중요한 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이자 감정이니까. 나무를 하나 하나 그리다보면 어느새 숲이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적으면 될 거야. 결국 사건을 저지르는 건 같은 사람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그렇군요. 바로 이해가 가요."
"너무 성급해질 필요는 없어. 가슴 속에 천천히 스며들 것처럼 나아가. 대신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맞게 대화를 진행하고. 알겠지?"
"감사합니다······"
도움이 됐는지 체리가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면서 아리엘을 조심히 끌어안는다.
뒤이어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아리엘을 껴안은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작 선배님.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
"얘랑 같이 낮잠 자고 싶은데······"
"나?"
본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리엘이 고개를 들며 체리와 얼굴을 마주쳤다. 체리는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면서 나를 바라봤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애원이 담겨있었다. 설마 체리를 홀린 건가 싶었지만······
"얘랑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서······"
"··· ···"
"아이작 선배님이 물을 채워준다면, 얘는 그 물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아요······"
"채워줘? 따뜻해?"
자폐증 환자에게 귀여운 고양이를 안겨주는 것과 비슷한 건가. 효과 자체는 그보다 더 강하겠지만.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피식 웃었다. 기숙사 안에서 벗어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다.
"알았어. 대신 밖으로 데리고 가면 안 돼. 오직 여기서만. 알겠지?"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저기서 자."
나는 거실에 배치된 침대를 가리켰다. 저긴 원래 내가 낮잠을 잘 때나 사용하지만, 손님용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이에 체리는 곧바로 아리엘을 안아든 채 침대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따스함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은 모양이다.
아리엘도 군말없이 안긴 걸 보면 그녀의 품이 편한 듯했다.
"말랑말랑."
"아, 안 돼. 마, 만지지 마아······"
"왜? 아빠한테만 허락한 거라서?"
"어,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방법이 있어!"
음. 나중에 따끔하게 혼내야겠구만. 나는 뒤에 들리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으며 애써 무시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금방 잠에 든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누가 그딴 소리를 한 거지?'
그 의문을 가진 채 며칠이 흘렀을 때쯤.
[미네르바 제국의 유명 모험가. 진과 릴리는 반드시 이어질 거라고 난동을 부려······]
[점차 독자들 사이에서 커져가기 시작한 불안함.]
[제논은 침묵하고 있어······ 침묵은 긍정의 신호?]
부디 아니길 바랐던 상황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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