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85화 (386/763)

〈 385화 〉 소 뒷걸음(1)

* * *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것도 리나에게 전생을 들켰으나 별 문제 없이 무던하게 넘어갔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발설할 만큼 리나의 입이 가볍지도 않고, 어차피 비슷한 의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저 사실 하나로 모든 정황이 단번에 이해가 됐다고 했으니 나름 괜찮은 결과이지 않을까.

더 나아가 내가 알려준 이야기를 통해 몇몇 정책을 추가시킨다고 했으니 리나로서는 큰 이득을 본 셈이다.

어쨌거나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이벤트는 절찬리에 진행 중이고, 제논 일대기 28권도 아무런 차질없이 발간됐다.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한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는 잔인한 결말.]

[최후의 관문이라 예상했으나 그보다 더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들이 원하는 진과 릴리의 결말.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카이르와 엘리샤처럼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기적이 펼쳐질 것인가?]

그리고 발간되자마자 내가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칠죄종에 비해서 다소 평면적인 대악마, 디아볼스는 제논 일행에게 처단당한다. 이 플롯 자체만 본다면 무난한 스토리라 할 수 있지.

하지만 디아볼스는 그릇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최후의 발악을 터뜨렸다. 가장 추악한 어둠이 담긴 쐐기를 발사한 것이다.

모든 독자들이 제논을 노릴 거라 예측했으나 그 화살은 제논 바로 앞에서 방향이 꺾였다.

꺾인 방향이 향한 곳은 바로 릴리. 반전 식으로 한 번 꺾은 탓에 진조차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추악한 어둠을 담은 쐐기. 과연 릴리는 그 쐐기를 정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세계수조차 악마의 오염에 버티지 못했다. 릴리라 해서 정화는 거의 불가능할 것.]

[신이 그들을 돕는다면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진도 탐식에게 당했다가 각성을 했지 않은가?]

진·릴리 커플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또 몰입하는 커플. 당연히 28권의 결말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몇몇은 설마 이어지지 않는 거냐고 걱정하는 반면, 몇몇은 진도 죽음에서 돌아왔으니 릴리도 그렇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이 결말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냐면 이벤트의 진행 상황이 살짝 묻힐 정도였다.

이벤트에 참가한 사람들 대부분이 제논 일대기의 열렬한 팬이니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진이 최종보스로 등장할 때는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하네.'

29권의 내용은 전쟁 직후 전후 처리 과정과 릴리의 심각한 현황이 주를 이룬다.

위의 한 평론가의 이야기처럼, 제논 일대기 속 악마는 세계수마저 오염시킬 정도로 추악한 어둠을 갖고 있다.

제아무리 성녀라 칭해지는 릴리라 해도 자력으로 정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말로 디아볼스는 완전히 소멸한 것인가?]

[그릇이 깨졌을 뿐, 영혼은 어디론가 떠돌거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전쟁은 이겼으나 상처밖에 남지 않은 전쟁. 게다가 악마들의 세계에서는 디아볼스보다 훨씬 강한 악마들이 도사릴 터.]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디아볼스의 영혼도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다. 그릇이 깨지기 직전에 자기는 죽지 않는다며, 다시 돌아올 거라고 떡밥까지 던졌다.

그 떡밥 하나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도 허탈해했다. 그정도의 희생을 치렀는데 결국 또다시 악마들에게 농락을 당했다고.

물론 그 떡밥을 진이 아주 맛있게 먹는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끝은 행복인가, 아니면 불행인가?]

[영웅의 끝은 언제나 비극적. 여태까지 모든 이들이 그랬다.]

[어째서 그들은 행복해질 수 없는 건가.]

28권은 독자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는 파트. 그들은 진과 릴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노심초사하며 다음 권을 기다렸다.

그런 초조한 마음을 나도 알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29권은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제논 일대기 집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지금부터 남아있었으니.

"그러니까 아리엘. 사람 마음을 읽어도 그걸 말하지 마. 알겠지?"

"왜?"

"사람들이 마음 속의 이야기가 들통나면 부끄러워하거나 화를 내거든.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

"대신 아빠 앞에서 불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몰래 알려줘. 알겠지?"

다름아닌 아리엘의 교육. 현재 나와 마리는 아리엘을 침대 위에 앉힌 채 열심히 교육시키고 있다.

속마음을 읽는 것 자체는 상관없으나, 그걸 알더라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큼은 하지 마라.

단, 낯선 사람이 나에 대해 안 좋은 마음을 품거나 험담을 한다면 몰래 알려달라.

아리엘은 똑똑한 아이이니 아무런 의심 없이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왜?"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가는 거니?"

"바로 앞에서 말하면 되지 않아? 아빠랑 엄마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인데."

하지만 그녀가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라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교육을 통해 다양한 상식에 대해 알려줬지만 인간 관계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 지, 아니면 볼 필요가 없다는 판단하는 건지 몰라도 속마음을 읽으면 곧이곧대로 말해버린다.

"아리엘. 네 말도 맞지만 그걸 바로 말했다간 아빠나 엄마들이 곤란해질지도 몰라. 아리엘은 아빠나 엄마들한테 피해를 주는 걸 좋아해?"

"아니. 그건 싫어."

"그럼······"

"엄마랑 아빠를 욕하는 사람은 더 싫어. 바로 말할 거야."

또한 은근히 고집이 강했다. 마리는 아리엘의 고집에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아리엘의 생각은 이렇다. 친한 사람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발설하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친한 사람들의 흉을 보는 건 참을 수 없다. 흉을 본다면 바로 말해버릴 거다.

지극히 아이답다면 아이다운 사고 방식이었으나, 그녀에게 독심술이 있다는 점이 크나큰 고민이었다.

'이런 걸 불속성 효녀라고 해야 되나?'

분명 도움은 되는데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독심술을 금지하자니 그건 싫단다.

독심술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사람의 눈을 바라보면 그대로 읽힌다고. 다시 말해 얼굴만 마주치지 않는다면 속마음을 읽힐 염려가 없다.

"후우······ 아리엘."

"응. 엄마."

"이건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지금은 괜찮아도 네 능력은 훗날 너에게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 엄마랑 아빠는 대처할 능력이 있지만 아리엘은 아직 미숙하잖니?"

마리가 다소 갑갑하다는 목소리로 아리엘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아리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누가 봐도 불만이 가득해보이는 반응.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뺨을 누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나 마리도 아무런 생각없이 저런 일침을 가한 게 아니다. 모두 알다시피 그녀도 아리엘처럼 독심술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

마리는 삐진 아리엘을 달래주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아리엘도 살짝 누그러지며 빵빵하던 뺨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엄마도 아리엘이랑 비슷한 능력이 있어서 그래.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때가 있거든. 만약 아리엘이랑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흉을 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할 거니?"

"······그런 사람은 나빠."

본인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보이는 아리엘. 마리도 이 부분은 예상했는지 부드러이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마리의 품에 아리엘도 조용히 몸을 맡겼다. 머리 위의 새싹도 본인의 누그러진 마음처럼 약간이나마 기울어진다.

"그래. 나쁘지.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면? 만에 하나 아리엘이 실수를 해서 그 사람이 너를 싫어할 수도 있잖니."

"··· ···"

"그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게 될 거야. 분명 주변에 사람은 있는데 기댈 사람이 없는 거지. 엄마도 아빠를 만나기 전까지 그랬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저 말 모두 마리의 경험담이다.

그녀도 아리엘과 비슷하게 태생적으로 사람의 진의를 깨닫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덕분에 치열한 정치판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치판이 워낙 더럽고 치졸하다보니 자연스레 멀리했다.

대신 본인은 특유의 활발한 언행을 유지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랑 똑같아지기 싫다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와 만남을 가지고, 언제나 허물없이 본모습을 드러내는 나에게 호감을 느껴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도와줄게. 네 능력이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야. 단지 조금 특별한 능력일 뿐이지."

"······어떻게 하면 돼?"

마리의 다정한 설득이 통했던 걸까. 황소처럼 질긴 아리엘의 고집이 꺾였다.

나는 실시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감탄했다. 비슷한 능력을 가졌기에 마리의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

"우선 천천히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자. 속마음을 그대로 꺼내기보다는 조금만 생각을 하는 거야."

"생각을?"

"응. 아, 물론 아빠랑 엄마들한테는 하고픈 말을 그대로 하렴. 어디까지나 낯선 사람에 한해서니까. 알겠지?"

"어려웡······"

생각만 해도 어질어질한지 아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마리는 그런 그녀가 귀여웠는지 꽉 끌어안았다.

이에 아리엘의 얼굴이 마리의 풍만한 가슴에 파묻히게 됐지만, 광합성을 하는터라 숨이 막힌다는 표현은 없었다.

"정말이지······ 어쩜 이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다 있을까? 아리엘을 보니까 아이를 빨리 갖고 싶어지네."

"2년만 참아주면 안 될까?"

"과연 2년 동안 사고가 안 날까? 난 아니라고 보는데."

애 앞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물론 아리엘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마리가 혀로 입술을 요염하게 핥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에게 교육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욕망이 서서히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웅. 파아! 엄마. 이건 말해도 돼?"

"뭐를 말이니? 아! 혹시 엄마가 생각한 동생 이름들?"

"응."

"글쎄. 아리엘은 말하고 싶어?"

"아니. 안 말할래."

"어이구. 그래. 그래. 엄마랑 뽀뽀하자."

쪽쪽쪽쪽!

참을 수 없는 아리엘의 사랑스러움. 마리는 아리엘의 얼굴에 뽀뽀를 열심히 해대며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 부담스러운 사랑에 아리엘은 눈을 찡그리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강력한 근력 덕분에 어찌저찌 벗어났다. 뒤이어 나에게 엉금엉금 기어오는 아리엘.

나는 그녀를 자연스레 감싸안으면서 사랑을 담아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아리엘. 아리엘은 혹시 밖으로 나가고 싶니?"

"밖으로?"

"응."

엄밀히 말하자면 밖이 아니라 저택으로 가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리엘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한 번쯤은 보여드리는 게 낫다.

도중에 아리엘의 존재를 들켜도 상관없다. 어차피 언젠가 알려질 존재인데 더 빨리 밝혀져도 큰 의미는 없다.

물론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면 전세계가 다시 한 번 뒤집히겠지만.

나는 아리엘의 뺨에 얼굴을 비비면서 말랑말랑한 찹쌀의 느낌을 만끽했다.

"아이작. 나는?"

"마리 너도 해줄까?"

"응!"

"이리 와."

아리엘이 부러웠던 건지 마리도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이어서 얼굴을 맞대며 살살 비비거나 깨무는 등. 다양한 애정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얼굴만 비비고 있다는 게 아니라는 점. 그녀의 손이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살살 쓰다듬고 있었으니까.

이 행동이 의미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바빠서 거의 하지를 않았다.

마리가 머무는 방은 바로 옆방이니 아델리아와 아버지에게 아리엘을 맡기면 될 것이다.

'미리 사인을 만들어서 다행이다.'

행동이라면 아리엘이 뜻을 눈치챌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단란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때.

[제논은 진을 죽일 것이다! 카이르와 엘리샤의 비극처럼, 진과 릴리는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거대한불똥 하나가 떨어졌다.

이 새끼 뭐지. 진짜 예언자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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