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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84화 (385/763)

〈 384화 〉 주사위(6)

* * *

장난으로 리나한테 맞을 뻔했지만 간신히 넘어갈 수 있었다. 내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의 반응에 얼마나 웃었는지.

하지만 아주 약간, 정말 약간이지만 관심을 드러냈다. 이 세상은 소설이나 그림만 있을 뿐이지 영상은 없다.

상당히 외설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지구의 포르노도 사실 과학과 문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성욕이 존재하는데다가 그걸 풀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니.

사람마다 차이는 있어도 영상만큼 확실한 전달 매체는 없다. 리나도 포르노가 아닌, 영상 매체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걸 평민들도 쉽게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지."

"귀족조차 접근하기 힘든 문물인데 너희 세상은 아닌 모양이네. 듣기만 해서는 가능한지 의문이 들어."

"과학만 충분히 발달된다면 가능해. 게다가 마법도 있고."

아직 화상 통화 마법이 발명되지 않았으나 조만간 등장할 것이다. 엘프가 그걸 연구하고 있었으니.

엘프는 발전 자체는 느려도 마법에 한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깊이를 가졌다.

문제는 특유의 편협한 시선과 폐쇄성. 이것들만 고친다면 다른 종족보다 훨씬 빠른 발전 속도를 가질 수 있다.

"그것도 그렇고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신기하네. 계급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이 투표를 통해 나라의 왕을 뽑는다니."

"좋은 것 같아?"

"좋고 나쁨을 넘어 우리 세상에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울 것 같아. 공평과 평등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니까."

아주 정확하다. 민주주의는 특정 계층에 권력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투표를 통해 권력을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리나와 같은 고위층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위와 권력을 내려놓아야 되니.

또한 공평과 평등은 다르다는 말처럼, 지금 시점에서는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자리잡은 이유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체주의의 만행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기 때문이다.

"네 말이 맞아. 솔직히 체제 자체는 서두를 필요는 없어. 아까 말했듯이 급진적인 발전은 필연적으로 파란을 몰고 오니까. 이 세상은 개개인의 힘이 강하니 고려해야 할 부분도 많을 거야."

"무턱대고 접목시키기보다는 기본부터 해야겠네. 예를 들자면 황제여도 백성의 자유를 정당한 대가 없이 박탈할 권리가 없다거나."

"그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는 보장해줘야지. 만약 자유가 침범당하면 그걸 해결해 줄 사람도 필요하고."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민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이 본인의 자유와 권리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은 '힘'에 의해 간단히 진압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서도 5.18 민주화 운동이 발발했고, 미얀마에서도 쿠데타가 발발해 민주주의가 개박살났다.

물론 민주주의가 힘을 발하는 사건도 꽤 많지만 그건 전부 시민들 스스로가 행한 일이다.

괜히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말이 왜 있겠나.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멀고도 먼 과정을 거쳐야 된다.

애당초 전체주의조차 등장하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도 충분히 자유와 권리가 보장받고 있으니 현상 유지를 해도 충분하다.

"적어도 네 세대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착될 일이 없을 테니 걱정 마. 테르스 왕국에서 혁명이 발발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면 좀 긴장되겠네. 그걸 보고 우리 백성들이 동요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혁명을 막을 명분도 없잖아? 지켜볼 수밖에 없지. 어디 보자. 그럼 네가 알려준 지식들을 토대로 삼아서······"

리나는 나에게 종이 한 장과 펜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지식을 정리하기 위함인 듯하다.

여태까지 들은 것들을 머릿속으로만 정리하는 건 무리이니 수첩에 적는 편이 훨씬 낫다.

이윽고 페이지를 쓰면 쓸수록 그녀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새겨졌다.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질 정도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지, 아니면 상상만 해도 기쁜 건지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미네르바 제국의 정치 체제에 큰 변화가 발생할 거라는 것을.

"흐히."

얼마나 기쁜 건지 특이한 웃음을 바깥으로 낼 정도다. 어차피 무슨 일이 발생하던 간에 나에게 오는 영향은 거의 없을 터.

그래도 조금 궁금하다.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길래 차마 미소를 감출 수 없는 정도일까.

나는 그녀가 종이에 쓴 내용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쭈욱 내밀었다. 그러나 눈치를 챈 건지 리나가 곧바로 종이를 뒤집었다.

"왜 그래? 나한테도 보여줄 수 없는 거야?"

"부끄럽잖아. 네가 보기에는 황당할 수도 있는 건데."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끄러웠는지 리나의 뺨에 홍조가 희미하게 일어났다.

종이에 적힌 내용이 마치 일기장이라도 되는 건지, 결코 나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의지가 돋보인다.

아까와 다른 의미의 부끄러움이었으나 왠지 모를 귀여움도 묻어나왔다. 그럼에도 황녀로서의 기품과 특유의 우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약간만 말해줄 수도 있잖아. 전부 다 얘기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나한테 의견을 물으러 올 테고."

"역시 눈치가 빠르네. 사실 별 거 아니야. 우리 황실의 권력은 돈독히 유지하면서도 그 밑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방법이 생각났거든."

"그 방법이 뭐야?"

"아직 확실히 정리된 건 아니야. 단지 권력과 부서를 좀 더 세밀하게 나누는 거지. 그곳에 각각 머리를 하나씩 넣은 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조절하는 거야. 하지만 그들이 합심할 수도 있으니 레킬리스 공작가를 넣는 거고."

"대놓고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티가 나는데?"

삼권분립 비슷한 걸 시행하려는 모양이지만 티가 너무 난다. 누가 보아도 귀족들의 권력을 군데군데 흩뿌리게 만들 작정이다.

애당초 제대로 된 삼권분립도 아니다. 최종 결정 권한은 황제가 쭈욱 갖고 있을 테니까.

너무 일차원적 생각이 아닌가 싶었으나 다음에 이어진 리나의 말로 하여금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전에 내가 말했지? 케리손 백작가의 자금이 악마 숭배자에게 줄줄 흐르고 있었다고. 공범이라면 처형하겠지만 몰랐다면 네 말대로 억울하잖아? 그래서 이걸 명분 삼아 권력을 분산시킬 거야. 최근 백작가들의 권력이 강해지고 있던 터라 여러모로 곤란했거든."

"분리가 가능해? 분리하는만큼 인력도 많이 필요할 텐데."

"우리 미네르바 제국은 인재가 많아. 하지만 쓸 곳이 거의 없었지. 이번 기회로 다양한 부서를 신설하면 일자리도 해결될 거야."

그렇단다. 리나의 머릿속에 무슨 미래가 그려져 있는지 모르겠다만 좋으면 좋은 거겠지.

'그런데 내가 알려준 것만으로 저런 생각이 가능한가?'

역시 천재는 천재인 모양이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나지만 저런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으니.

뒤이어 리나는 기대된다는 얼굴로 종이를 빽빽하게 채우고는 고이 접었다.

당장이라도 정책을 적용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나왔다.

"앞으로 자주 찾아와도 될까? 네 이야기가 좀 더 듣고 싶어. 어차피 결혼할 사이잖아."

이제는 아예 대놓고 찾아온단다. 나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리나의 눈을 보면서 떨떠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런 눈빛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본 적이 있다.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눈동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나에게 저런 시선을 받으니 얼떨떨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얼마나 찾아오려고?"

"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당장은 못 찾아올 거야. 하지만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마리가 엄청 귀찮아 할 것 같은데?"

"그럼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하자. 너에게 듣는 이야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제국이 더 크게 발전할 테니까."

어느 만화에 나오는 너구리 로봇으로 취급하는 리나.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다시 말하지만 지구와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지구의 역사를 알려줘도 그걸 적용시키는 건 리나의 몫이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전부 개소리로 취급했을 지식들. 하지만 나는 세간에 예언자로 추앙받고 있는 제논.

하필이면 예언자로 취급받고 있는 터라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아참. 너네 세상은 300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서 급격하게 발전했다고 했지? 그럼 급격하게 발전된 원인이 있지 않아?"

"어······ 있지. 산업 혁명이라고, 쌓이고 쌓은 기술들이 임계점을 넘어선 때가 있었어."

"그때가 오기를 최대한 앞당길 수 있도록 해야겠다. 증기 기관차가 실제로 발명되는 거지?"

"응."

"그럼 마키나와 좀 더 가까워져야겠다. 네 말대로라면 앞으로 드워프의 시대가 올 테니까. 에인스의 영입도 고려하고······"

넘쳐나는 아이디어를 주체할 수 없었는지 리나가 다른 종이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 차분한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저리 열정적으로 대하니 약간 생소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가능성'만 넘쳐나는 것들이지만 그녀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이건 확실하다. 저런 도전 정신이 있는 사람만이 세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또 한 가지. 이 세계의 발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다.

"리나."

"과학이라는 학문을 좀 더······ 응?"

"깜빡하고 말을 안 한 게 있어. 발전도 좋지만 신중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신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신의 분노를 산다. 이 말 하나에 리나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되물었다.

목소리가 은연 중에 떨리는 것이, 내가 한 말이 결코 허투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모양이다.

이에 나는 찻잔에 남아있는 차를 모두 마신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산업 혁명 이후, 인류의 가장 큰 과제로 남아버린 환경 파괴에 대해서.

"우리 세상은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작용이 조금씩 나오고 있어. 이건 과학 혹은 문화를 말하는 게 아니야. 생명 그 자체이자 모든 이의 어머니인 '자연'을 말하는 거지."

"자연? 자연이 왜?"

"인류는 막대한 자원을 소비하면서 자연을 마구잡이로 파괴했거든. 산의 나무는 모두 잘려나가고, 강은 혼탁해지며, 바다는 점점 더 험악해졌지. 하늘에는 구멍이 뚫리면서 온갖 기후 이상이 발생하는 중이고."

"··· ···"

내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평균 기온은 점점 상승하고 있다. 때문에 해가 흐르면 흐를수록 원인조차 찾을 수 없는 자연 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기관이 말하길,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중단해야 지구가 살 거라고.

더 나아가 몇몇 섬은 이미 상승된 해수면으로 인해 지반이 가라앉기 직전이다.

"다행히 내가 살던 곳은 신이 직접적으로 간섭을 하지 않아서 망정이지, 만약 간섭했으면 진작에 천벌을 받고도 남았을 거야. 그래도 이 세상은 히르트 님이나 다른 신들이 직접 경고를 하겠지."

"······방법은 없어?"

"나야 모르지. 여기는 마나가 존재하니 그걸 잘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자연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데 정작 인류가 그 자연을 파괴하다니······ 패륜이 따로 없네."

리나는 내 경고를 듣고 펜을 움직이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깨달은 게 있는 것 같다.

산업 혁명이 발발하면 환경 파괴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이곳은 마나와 마법으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겠지.

히르트를 포함한 다른 신들도 섣불리 개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자식들이 발전하는데 막는다면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나올 테니까.

나는 약간 진지해진 상황 속에서 시계에 눈을 돌렸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한 탓에 시간이 벌써 훌쩍 지나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너도 당장 할 일이 많잖아?"

"알았어. 여러모로 유익한 시간이었네. 나중에 또 알려줄 거지?"

"언제든지. 아, 나중에 침대에서도 알려줄 수 있어. 그때 말고 시간이 거의 없을 것 같아서."

"하긴. 그렇······ 야!! 너 진짜!!"

역시 리나는 놀려야 제맛이다.

*****

그로부터 하루가 흐르고 제논 일대기가 막 발매되었을 쯤.

"아버지. 저택에서 어머니가 뭐라 안 하셨어요?"

"이번에는 참는다고 했다."

잠깐 저택에 갔다 온 아버지께서 좋은 소식을 알려주셨다.

지난번 진의 악마화 사태가 예방 주사가 되었는지 어머니가 찾아오시는 일은 없었다.

"다행이네요."

"대신 진과 릴리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뼈와 살을 분리시킨다고 하더구나."

"··· ···"

그때는 진짜로 도망쳐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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