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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82화 (383/763)

〈 382화 〉 주사위(4)

* * *

다소 추상적인 말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듣고도 못 믿더운 이야기였던 걸까.

리나는 내가 알려준 말을 듣자마자 웃기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걸 보고 살짝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믿지 않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달달달­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이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아닌 척하고 있을 뿐, 내 이야기를 믿고 있다.

리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책에서나 나올법한 지구의 이야기.

마나와 마법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다른 종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있을 뿐.

이 세상 사람들은 엘프로부터 문명을 전수받았고, 드워프로부터 야금술을 전달받았다.

이게 이 세상 사람들, 정확히는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상식'이다. 자신들은 다른 종족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라고.

물론 이곳에 '몬스터'가 존재하니 그럴 수도 있다. 현재도 몬스터는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는 존재다.

달그락­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에 리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떨리는 손은 그대로였다.

뒤이어 그녀는 숨을 몰아쉬더니 미소 지은 얼굴을 유지하며 나를 쳐다봤다.

얼굴은 분명 웃고 있지만, 달달거리는 손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피, 피조물이라 했지? 다른 종족도 아니고 인간이 그런 걸 창조했다고? 그쪽 인간은 우리랑 다른거야?"

"완전 똑같아. 그쪽 세상 사람을 이쪽에 데려놓아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다거나 아니면 머리가 좋다거나?"

"내가 손재주가 좋았으면 뭘 만들고도 남았겠지."

흔히 말하는 '천재'가 세상을 발전시킨 것도 크나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다.

본래 기술이라는 건 어디선가 갑자기 뿅! 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쌓이고 쌓인 것이 결과물이 되어 매듭을 짓는 것이다.

세상을 뒤바꾼 산업 혁명조차 그런 형태로 탄생했다. 증기 기관과 비슷한 마력 기관도 결국 기술력이 쌓였기에 발명할 수 있던 거고.

"머리, 그러니까 지능도 비슷해. 단지 세월이 부족했을 뿐이지."

"세월?"

"응. 우리 세상은 인간이 문명을 세웠던 게 대략 6000년 전 쯤이었거든. 어디까지나 검증된 바로는."

그 대답에 리나가 어처구니 없어하며 반박했다.

"엘프는 만년 전에 문명을 세웠잖아. 인간은 기록상 5000년 전에 세웠지. 그런데도 스스로의 창조물로 하늘을 부유하거나 바람도 없이 항해를 할 기술은 없어. 심지어 드워프조차도 못 만들고 있지."

"대신 마법이 있잖아. 우리 세상은 과학이 마법을 대신한다고 보면 돼."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분간할 수 없다.

그 반대도 통용될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비행기나 거대한 화물선을 본다면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냐고 했겠지.

마법이 과학을 대체하고 있기에 과학의 발전도가 느린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그 마법이 고도로 발달된 덕택에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기물이 있으며, 심지어 아이스크림도 시중에 팔고 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러면 피조물로 전세계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건? 그건 공간의 개념을 무시하는 거야."

"여기도 비슷한 게 있지 않아? 지난번에는 통신 구슬로 세실리랑 이야기했었는데."

"그럼 질문을 바꿀게. 너희 세상의 평민들도 사용할 수 있어?"

"응. 당장 나도 사용했어."

쓸 일은 거의 없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성이 없으니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리나는 내 대답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 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이어서 복잡해진 머릿속을 다시 한 번 정리했다.

나는 그때동안 차를 한 모금 마셨다가 수첩을 꺼내들었다. 보다 더 쉬운 설명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게 나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방금 전 언급했던 비행기와 선박. 인터넷과 핵폭탄은 그림으로 설명하기 힘드니 이 둘만 하는 게 낫다.

"이거 한 번 볼래?"

"응? 이건······"

"아까 내가 말했던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과, 바람 없이 항해할 수 있는 피조물들."

"··· ···"

리나는 내가 그려준 그림을 빤히 바라봤다. 아이가 그린 듯한 그림이지만 특징 자체는 잘 살려놓았으니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거다.

이윽고 한참을 쳐다보던 그녀는 나를 힐끔거리더니 비행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하늘을 난다고?"

"응."

"크기는 어느 정도야? 마차보다 커?"

"그냥 하늘을 날아다니는 배라고 생각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지."

"··· ···"

내 비유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는 리나. 다음에는 선박이다.

"바람이 필요 없다더니······ 돛대도 없이 항해를 하는 거야?"

"그렇지. 물론 필요에 따라 돛대를 설치하는 배도 있어."

"이게 정말 가능한 거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길래······"

"과학이지.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가 필요하지? 이것들을 움직일 때도 마나와 비슷한 에너지가 필요해."

그 설명을 들은 리나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푸른색 눈동자에는 의문이 한가득 담겨있다.

"이쪽 세상은 마나랑 마법이 없다며?"

"대신 마나를 대체할 자원과, 그 자원을 에너지로 치환할 마법 같은 과학이 있지. 에인스가 발명한 마력 기관이 바로 그런 거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어."

머리를 너무 써서 그럴까. 어지러웠던 건지 리나는 수첩에서 눈을 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혹시 몰라 뒤를 바라보니 아리엘이 쿨쿨 자고 있다.

아델리아의 특훈도 종료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어차피 중간에 대화가 끊겨도 상관없는 것이, 리나가 원할 때마다 얘기해줄 생각이다.

이미 들킨 마당에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낭패를 보면 괜히 내가 미안해졌으니.

"후우······ 대체 어떻게 돼 먹은 세상인지······ 정말로 이 모든 걸 인간이 창조한 게 맞아? 그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이?"

"맞아."

"그럼 우리는 왜 이러는 거야? 우리는 마나와 마법도 있고, 더 나아가 신들마저 힘을 빌려주고 있어. 네 말이 맞다면 여기보다 문명이 뒤떨어져야 하는데 전혀 아니잖아."

"흠······"

들어보면 충분히 일리있는 의문이다. 엘프는 이미 만년 전에 문명을 세울 정도로 태생이 압도적이고, 드워프는 손재주가 극히 뛰어난 종족이다.

비행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부유하는 성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잠재력이 뛰어난 세상. 그러나 실상은 비행기조차 못 만들고 있다.

게다가 과학도 깊게 파고드면 여러모로 언밸런스한 부분이 많다. 아까 말했듯이 냉장고와 에어컨 같은 기물들.

만들 수 있으면 마법을 이용해 손쉽게 창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막는 것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신들이 너무 싸고 도는 경향이 있지.'

우선적으로 신들. 신들은 지상의 모든 종족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힘을 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발전 또한 막고 있다.

해결하기 힘든 일이 발생하면 신에게 다가가 기도하면 땡이니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의술이 있다.

본래 과학이 발전할수록 의술도 진화하는 법이지만, 그 모든 걸 성직자가 대체해버리는 상황이다.

역병, 그러니까 세균과 바이러스마저도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신권이 매우 막강한 세상이다.

'지구에도 신이 있다고 했었지? 그런데 왜 그쪽 신들은 간섭을 하지 않는 걸까?'

전에 루미너스가 설명한 적이 있다. 간섭을 하는 순간 다른 신들도 간섭을 시작할 거라고.

하지만 신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경우는 역사를 뒤져봐도 없다. 신화 또한 역사로 취급되는 이곳과 달리 말 그대로 신화다.

실제로 과거, 세이비어의 폭주를 제지한 것도 루미너스이지 않은가. 그가 막지 않았더라면 불씨가 전세계로 번져 큰 전쟁으로 발전되었을 터.

그 전쟁을 밑거름 삼는다면 큰 발전을 이룩했을 텐데 단지 싸우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막아버렸다.

여러모로 의문이 드는 순간이나 세계마다 차이점이 있으니 그러려니 넘어가도록 하자. 이건 다소 복잡한 문제라 내가 개입할 수 없다.

'두 번째로는······'

신도 신이지만, 결정적으로 '문화'의 차이가 가장 크다. 과학과 문화는 서로 어우러지면서 발전하는 것.

솔직히 말해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우선적으로 지구와 달리 '종족'이 명확히 분간돼 있다.

종족마다 문화가 다른 건 물론이고 더 나아가 각 종족끼리 뭉치는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인간은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 여러 나라가 존재하나, 각 종족마다 나라가 하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전쟁'을 잘 하지 않는다. 지구는 틈만 나면 전쟁을 했는데 이곳은 종족 전쟁을 제외하고 거의 없는 수준이다.

'혁명이 성공했다면 모를까.'

이 세계판 프랑스 혁명이라 칭하는 제이로스 혁명. 실패로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왕족과 귀족이 시민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건 실패로 끝나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니었으면 수많은 왕족과 귀족이 단두대에 목이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아무튼 이 세계의 발전이 유독 느린 이유가 너무 다양해서 하나를 꼽을 수 없다.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네. 내가 살던 세상의 인간은 여기보다 더 약해서 뛰어난 도구가 반드시 필요했거든.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기 위해, 조금이라도 상대를 쉽게 상대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 닥치는 대로 제작했지.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런 문명을 이룬 거고."

"굉장하네······ 정말로. 우리도 가능할까?"

"시간만 충분히 흐른다면. 기술이라는 게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서."

발전이 느릴 뿐이지 그렇다고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당장 에인스가 마력 기관을 발명하지 않았나.

대신 산업 혁명이 터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산업 혁명의 진정한 진가는 바로 공장이었으니.

공장이 생기면서 노동자가 투입되고, 그 노동자가 박해를 받아 투쟁을 벌이고, 그 투쟁의 결과가······

'······공산주의네.'

이건 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조만간 책에 적어야지.

내가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리나는 수첩에 그려진 그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그럼 그쪽 세상도 종족 전쟁 같은 전쟁이 있었어?"

"2번이나 터졌어. 그것도 30년도 안 된 사이에."

"2번이나?"

"응. 그리고 그때 최초로 대량살상무기, 아까 내가 말했던 세계를 멸망시킬 무기가 사용됐지."

"와아······"

다른 세상 이야기라서 그럴까. 리나의 눈이 점점 반짝반짝해졌다.

방금 전까지는 혼란으로 인해 생각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내가 하는 이야기 모두가 판타지적인 내용으로 들리겠지.

이어서 그녀는 대량살상무기, 그러니까 핵무기가 사용됐다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찻잔을 들었다.

언제 채웠는지 몰라도 찻잔에는 차가 가득 담겨있었다.

"정말로 그 무기가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어?"

"응. 정확히는 인류의 문명을 싸그리 리셋시키는 거야. 위력도 위력이지만 땅을 못 쓰게 되거든."

"그렇구나. 그럼 봉인됐겠네?"

"응? 전혀?"

나는 전혀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거 지금 수천 개 넘게 있는데?"

"푸우!!"

그리고 내 얼굴에 달콤한 차가 분사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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