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80화 (381/763)

〈 380화 〉 주사위(2)

* * *

제논 일대기 28권의 원고를 저택에 발송하고 나서 내 마음은 긴장으로 채워졌다.

주사위가 던져진 건 아니다. 제논 일대기 28권은 주사위를 만든 것이다.

그걸 제대로 던지게 되는 건 진이 최종보스로 거듭나는 29권 혹은 30권 막바지다.

29권은 전쟁이 끝난 이후의 전후 처리와 엘븐하임의 수복 과정을 써내릴 계획이다.

제논 일행도 중요하지만 자그마치 세계의 존망을 건 싸움이어서 후일담은 필수다.

더 나아가 릴리가 어떤 상태인지도 자세히 풀어나가야 되니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참을 수 있을까?'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커플은 알다시피 진·릴리 커플이다.

이 커플은 특유의 애달픈 러브 스토리로 인해 팬층이 가장 두텁다.

제논·메리 커플도 그들 못지 않게 튼튼하지만 진과 릴리가 훨씬 강하다. 정확히는 진하다고 봐야겠지.

다른 러브 라인에 비해서 진·릴리 커플은 감정 이입이 쉽게 되도록 만들었기에 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제논 일대기가 파란을 몰고 오기 전부터 진·릴리 커플의 열렬한 팬들 중 한 명이시다.

'지난번처럼 쫒아오시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진이 탐식과의 전투 도중 가슴에 꿰뚫리고, 그걸 통해 각성하는 장면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자마자 곧바로 헬리움으로 도피했던 나에게 찾아오셨다. 그것도 가르츠를 소환하면서까지.

이번에도 그러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이미 예방 주사를 세게 맞으셨으니 어느 정도 참지 않으실까.

물론 진이 최종보스로 등장하고, 제논의 일격에 산화하는 것까지 보신다면······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주사위를 만드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어찌저찌 기다려 달라는 말로 안심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후에는 얄짤없다.

빈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할 지도 모른다. 이미 어디로 도망갈지 구상까지 하는 중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예전부터 결말을 그렇게 정했는데.

외전으로 행복한 미래를 보여준다고 한들, 그것을 정사로 취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그냥 미래 생각?"

"너도 많이 복잡하나 보네."

내 맞은편에 앉은 리나가 찻잔을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 봐도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우아함이 깃들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게 다르긴 하지만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오늘 리나가 내 기숙사로 방문한 이유는 별 거 없다. 원래 그렇게 예정돼 있었으니.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기에 신문이 없는 이상 바깥 정세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무고한 희생자가 나왔을 때도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리나다. 이후로 케이트가 확인차 교단으로 향했고.

현재로서 내 주변에 리나만큼 튼튼한 정보통이 되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실리랑 아르웬도 있지만······ 매번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세실리는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은 귀족들을 숙청하느라 바쁘고, 아르웬은 잠깐 휴일을 가진 거지 원래부터 바빴다.

그렇다 해서 리나가 바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현재 미네르바 제국은 쏟아지는 악재들로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상황이니.

특히 다음 대 황제로 예정된 레오르트는 죽을 맛이라고 한다. 아카데미에 얼굴을 비춘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고.

현재 제국 상층부는 악마 숭배자의 만행이 낱낱이 밝혀질 수록 마비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서 무고한 희생자 건은 어떻게 하려고? 이번에는 악마 숭배자의 자작극이라지만 정말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잖아."

"그건 교단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했어. 대신 세 번 이상 걸리면 이벤트는 곧바로 중단될 거고."

"교단에서 그러면 알아서 하겠지. 마음에 안 들지만."

리나가 다소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벤트는 국가가 아닌, 교단에서 진행한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미네르바 제국이 곤욕을 치르는 거고.

반면 세이비어 교국 입장에서는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다. 안 그래도 위신이 땅에 떨어진 상황인데 이번 일을 통해 다시 회복할 기회를 얻은 것이니.

물론 이벤트를 성황리에 끝마쳐도 세이비어가 예전의 위상을 되찾는 건 매우 힘든 일이다.

"루미너스 교단은 그렇다 쳐도 모라 교단은 어때?"

"모라 교단은 큰 줄기를 추적하는 중이야. 너도 알다시피 마을 전체가 세뇌된 일도 모라 교단이 찾은 거지."

"그건 몰랐네. 그러면 제국의 상황은 어때?"

움찔­

내가 제국의 현황에 대해 묻자 리나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매사에 평온을 유지하는 그녀인데 저리 반응한 걸 보면 생각보다 안 좋은 모양이다.

뒤이어 리나는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특유의 미소 지은 얼굴이 아닌, 쓰라림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이었다.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어. 혹시 들어봤어? 악마 숭배자의 보금자리라고."

"신문에서 본 적이 있어."

"처음에는 단순히 영토가 넓어서 그런 거다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하아······"

리나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얼마나 상황이 좋지 못하면 그 리나가 다른 사람 앞에서 한숨까지 푹 내쉴 정도일까.

예전까지만 해도 나를 압박하는 못된 황녀 정도의 인식이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쏟아지는 일감에 이리저리 치이는 공무원처럼 느껴진다.

언제부터 인식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만 그녀의 은밀한 취향이 들켰을 때부터이지 싶다.

리나는 만인이 우러러 보는 황녀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와 똑같은 사람이다.

'테르스 쪽보다는 훨씬 양반이지.'

진짜로 양반이긴 하다. 테르스 왕국이었다면 내가 명성을 얻기 전에 온갖 방법을 강구했겠지.

나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이렇게 둘이서 얘기할 수 있는 이유도 있다.

아리엘은 침대에서 자고 있거든. 당연하지만 창문을 통해 내려쬐는 햇볕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고 있다.

"후우······ 일단 그나마 작은 것부터 말하자면 스타비르크 지역 문제. 너도 역사를 좋아하는 무슨 문제인지 알겠지?"

"당연하지. 그쪽에서 뭐라고 했어?"

"물론이지. 악마의 보금자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나 뭐라나."

안 그래도 악재가 겹치는데 스타비르크 쪽에서도 건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네르바 제국은 스타비르크를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간의, 특히 독립과 관련된 사항은 상당히 복잡하다. 하물며 스타비르크 지역은 명분마저 충분하다.

종족 전쟁 당시 손재주를 알아본 인간 연합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현재의 스타비르크가 되었다.

당시 스타비르크 지역 주민은 원주민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이득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가 문제여서 그렇지. 다소 복잡한 이유를 통해 지금까지 독립을 외치는 중이다.

"뭐, 너한테는 이건 어디까지나 국가적인 문제니까 넘어가도록 할게. 이다음은 케리손 백작가야."

"케리손 백작? 잭슨의 가문 아니야?"

"맞아. 학기 첫날부터 나랑 세실리한테 되도 않는 제안을 했던 영식."

잭슨을 향한 리나의 인식이 어떤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말이다. 하기야 그때는 꽤나 꼴불견이었다.

그나저나 케리손 백작가에 문제가 생겼다니. 이건 스타비르크와 달리 쉬이 흘려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케리손 백작가는 미네르바 제국의 가장 큰 돈줄이라 해도 무방했으니. 애당초 백작가가 관리하는 지역 자체가 다른 곳에 비해서 훨씬 좋다.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항구 도시로도 이용이 가능하고, 더 나아가 교역로 역할까지 충실히 할 수 있다.

그런 곳에 문제가 발생했다면 경제력으로 모든 걸 받치는 제국에게 치명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케리손 백작가가 왜? 악마 숭배자랑 손을 잡았어?'

"아직은 확인 중이야. 그러나 케리손 백작가는 상권에 있어서 눈이 밝은 사람이지. 너도 악마 숭배자가 어떤 식으로 자금을 벌어들이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 아."

"네 생각대로야."

리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케리손 백작가가 악마 숭배자와 손을 잡았든 말든 상관없다.

문답무용으로 처형해버리면 그만이니까. 황실 입장에서는 눈엣가시를 처리할 수도 있었으니 괜찮은 방법이다.

하지만 미네르바 제국의 자금이 악마 숭배자에게 줄줄 새어나갔다는 게 요점이다.

누누이 언급하지만 미네르바 제국은 경제력이 모든 걸 뒷받침하는 만큼 돈이 미친듯이 많은 나라.

그리고 케리손 백작가는 제국의 커다란 돈줄기다. 구멍만 살짝 내도 어마어마할 텐데 아예 기생한 수준이라 더 심각하다.

"악마 숭배자의 자금 중 대부분이 우리 제국에서 빠져나왔을 확률이 높아.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널려있으니 세를 넓히는 건 어렵지 않았겠지."

"그럼 왜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은 거야? 악마 숭배자는 제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있던 세력인데. 지금쯤이면 나라 하나도 세웠겠다."

"지금 그게 문제야. 놈들이 어디서 돈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 일단 추적은 하고 있지만······ 쉽진 않지."

생각보다 꽤 복잡하고, 또 심각한 사안이다. 머스크의 말마따나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어도, 많은 걸 해결할 수 있다.

빈민가를 주 타겟으로 삼은 것도 이런 일환일 것이다. 돈만 대충 던져주고 포교하면 전부 다 믿을 테니까.

악마 숭배자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속속 드러나는 소식들만 들어도 반드시 해결해야 되는 것들이다.

"그러면 케리손 백작가는 어떻게 되는 거야?"

"결탁한 흔적이 나오면 그 즉시 멸문될 거야.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문제여서 강등으로 그치겠지. 이적 행위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니까."

"케리손 백작가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는데?"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그쪽 잘못이야. 굳이 케리손 백작가가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 우리 황실에서도 악마 숭배자와 결탁한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칼을 제대로 갈았구나. 나는 피곤해 하는 리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미네르바 제국이 이번 사태를 어영부영 넘어가게 된다면 내부에서부터 무너질 것이다.

외부에서 무너진 나라는 다시 재건할 기회가 있으나, 내부부터 무너진다면 답이 없다.

실제로 테르스 왕국이 그럴 뻔했다가 겨우겨우 추스렸으며, 왕족들조차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선 다른 건 몰라도 일반 시민부터 안심시켜. 악마 숭배자가 선동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제국이 무너져서 좋은 건 악마 숭배자일 테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너와 결혼하다는 소식을 뿌리면 금방 잠잠해질 거야. 귀족 관련 문제는 우리 쪽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이다음이 관건이지."

"그것보다 심각한 게 있어?"

"아니었으면 너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이건 네 의견을 반드시 들어봐야 되는 거라서."

도대체 뭐길래.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좀 더 경청했다.

내 의견을 들을 정도의 이야기라니. 제논 일대기 혹은 이벤트와 관련돼 있는 걸까.

뒤이어 리나는 숨을 몰아쉬더니 특유의 우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지? 지난번에 지하 사원을 발견한 거."

"알고 있지."

"그곳은 단순한 사원이 아니었어. 제단이었지."

"제단?"

"응. 제물을 바쳐서 특별한 힘을 얻는 제단. 그곳에 있던 석상 또한 실제로 '그릇'일 가능성이 커."

"··· ···"

음. 빌어먹을 이왜진이 또 터지는군. 이제는 놀랍지도 않아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차피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니······

"그리고 파견된 마법사가 조사한 결과, 의식이 성공했다는 정황까지 발견했어."

"······뭐?"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식이 성공했다. 그 말은 즉슨 제논 일대기의 디아볼스처럼 다른 차원의 악마를 소환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악마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악마화한 마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재앙이라 단언할 수 있다.

그런 악마가 소환됐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없이 심각해지는 것이다.

"주변의 의장품과 더불어 인골들을 파악했을 때 실행된 기간은 약 20년 전. 대신 의식은 완전히 성공한 게 아니야. 도중에 누군가 난입하여 방해한 흔적도 발견됐거든."

"그럼 의식이 반만 성공했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하지만 악마는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 존재. 차원과 차원 사이를 이을 정도이니 분명 다른 차원의 무언가가 넘어왔겠지."

"··· ···"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20년 전에 시행된 의식이나 누군가의 방해로 인해 반만 성공했다.

"아직은 조사 중에 있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까지 파악하는 건 힘들 거야. 오라버니 말로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개구리일 수도 있어서 쉽게 공표하기도 어렵다 했고. 그래서 너한테 묻는 거야. 너라면 뭐일 것 같아?"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너라면 알 것 같아서. 조금만 생각해서 네 의견을 말해줘. 그걸 토대로 한 번 조사해보게."

이 여자도 나를 회귀자로 믿는 거구나. 그러나 나는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정황만 본다면 내가 확실하다.

루미너스도 악마 숭배자가 차원 연결을 실패하여 지구에서 살던 내가 이곳으로 넘어왔다고 알려줬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이 있다니 웃어야 할 지 난감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진짜 나인 것 같은데?'

시기가 절묘하게 겹쳐서 자꾸만 그쪽으로 끌린다. 그래도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을······

"뭐가 나라는 거야?"

"응?"

"어?"

귀엽고 앙큼한 소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생각에 빠진 나는 물론, 한숨 돌리기 위해 차를 마시고 있던 리나 또한 고개를 들었다.

이어서 고개를 돌리니 언제 깬 지도 모를 아리엘이 말똥말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체구가 워낙 작은데다 대화에 집중한 탓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가 나라는 거야, 아빠?"

"··· ···"

곧바로 확인사살까지 시켜주네. 아빠는 우리 딸을 정말 사랑해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도 잠시, 허탈함에 허허 웃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겠네.

나조차도 이런데 과연 리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에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니.

주르륵­

어느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벌어진 입에서차를 줄줄 흘리고 있는 리나를 볼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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