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9화 〉 이벤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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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숭배자의 만행이 전부 드러나기 전, 그들은 음지에 꽁꽁 숨어 본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숨겼다.
그들의 존재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한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악마 전쟁 이전에도 활동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악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만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집단이다.
또한 30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악마에 대한 관심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악마 숭배자가 날뛸 여지가 늘어나면서 세력이 증가했다.
특히 4대 암시장 품목이라 불리는 마약, 인신매매, 무기, 몬스터 부산물 등.
음지 전체에 손길을 뻗어 막강한 자금력까지 보유했으며 여기에 부자는 물론 귀족과 심지어 성직자까지 연관돼 있는 경우가 있다.
세이비어에서 한창 난리가 났던 타락한 추기경 사건처럼, 악마 숭배자의 손길은 세상 전체에 뻗어있다 해도 무방한 상황이다.
제논 일대기가 그들의 존재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제 2차 악마 전쟁이 발발되었을 것이며, 세상은 전보다 더 큰 혼란으로 치달았을 터.
반대로 말하면 악마 숭배자의 영향력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흔적이 남기 마련인데 그런 것조차 없었으니.
하지만 이제는 큰 의미가 없다. 세이비어에서 타락한 추기경이 '천벌'을 받고 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아이작의 신변을 노리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악마 숭배자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머리를 노릴 수 없다면 팔다리를 잘라 무력화시키자고.
소문처럼 예언자든, 아니면 우연이든 상관없으니 제논 일대기의 보급부터 원천 차단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벨루아 공국의 인쇄소가 첫번째 목표였다.
"이거 완전 박살이 났네."
"그러게."
두 명의 남녀가 완전히 반파된 건물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생활한 탓에 피부가 보기 좋게 탄 남자. 겉으로 드러난 팔근육과 자상이 인상적이다.
숏컷의 여자도 남자보다는 아니지만 힘든 일을 했다는 걸 증명하듯, 뺨에 자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공통점이라면 목에 걸린 펜던트.
모험가라는 걸 증명하듯이, 금색의 팬던트가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중이다.
"악마 숭배자가 자폭 테러를 저질렀다고 했었지? 앞으로 어떻게 조치하려나?"
여자가 한창 재건 중인 건물에 시선을 고정하며 팔짱을 꼈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담겨있다.
남자도 그에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걱정거리다.
그도 그럴게 지금 재건 중인 건물의 정체는 바로 인쇄소였으니까.
그것도 제논 일대기 인쇄만을 위해 머스크가 거금까지 들이며 설립한 인쇄소.
현재는 악마 숭배자의 자폭 테러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2명의 직원이 사망하고 3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조폐국처럼 나라에서 지원해주지 않을까? 정 아니면 교단에서 성기사를 파견할 수도 있겠지."
"그걸로는 부족할 걸? 악마 숭배자 중에는 마족도 있다는데 멀리서 마법을 난사할 수도 있잖아. 심지어 이번 자폭 테러도 집단이 계획한 게 아니라 개인이 한 짓이라 추측 중이고."
여자가 나름 일리 있는 말을 꺼내자 남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악마 숭배자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끼치던 악의 집단.
당연히 조직 체계가 점조직일 수밖에 없으며, 타락한 추기경 같은 최고 간부가 아닌 이상 대부분 졸개에 가깝다.
세이비어에서 본격적으로 성전을 선포했으나 1000년 이상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조직이 어디 쉽게 잡히겠나.
제논 일대기가 없었더라면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 했을 테니 그들이 얼마나 용의주도한 집단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신호탄에 불과해. 보나마나 전세계의 인쇄소란 인쇄소가 다 무너지겠지. 벨루아 공국은 지리적 특징 때문에 반드시 노려야 됐고."
"가만 보면 너 의외로 똑똑하다?"
"네가 멍청한 거야. 이 정도면 신문만 조금 읽어도 알 수 있다고."
남자를 신랄하게 까내린 여자. 그녀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를 힐끔거렸다가 칭찬 아닌 칭찬을 건넸다.
"뭐. 그런 성격 때문에 원하는 걸 얻었겠지."
"뭐가?"
"그거 말이야, 그거."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는지 여자가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남자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가 여자의 반응을 보고 뒤늦게 인지했다.
"아아. 싸인? 제논한테 받은 싸인 말하는 거 맞지?"
"쉿! 쉿! 조용히 해! 그러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남자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여자가 크게 당황하며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렇다. 남자의 정체는 아이작이 아카데미로 복귀했을 당시, 호위벽을 뚫으면서까지 싸인을 받아낸 사람이다.
자칫하다간 목숨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으며 아이작이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 싸인까지 받아내고, 모험가로서 길도 끝나지 않았기에 여유로운 인생을 즐기고 있다.
"뭐 어때. 뺏어볼 테면 뺏어보라지. 다 때려잡으면 그만이니까."
"후우······ 그것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상상만 해도 아찔했는지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제로 소문이 퍼지고나서 남자의 싸인본을 노리는 일이 많아졌다.
거리를 걷다가 소매치기를 당할 뻔한 건 기본이고, 여관에서 하루의 노고를 풀 때가 가장 위험했다.
심지어 웬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시비를 걸어서 대놓고 뺏으려는 등.
만약 남자의 실력이 출중하지 않았더라면 싸인본은 진작에 사라지고도 남았을 것이리라.
'경매에 팔자고 할 수도 없고······'
여자는 흐뭇해하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남자가 미치도록 부러웠다. 자신도 제논 일대기의 열성팬이었으니까.
하지만 뒤통수를 때리고 튈 수도 없는 노릇. 싸인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경매에 내놓는다면 필시 소문을 접한 부자와 귀족이 개미떼처럼 우르르 몰려오겠지. 물론 남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제논(아이작)에 대한 예우도 아닐 뿐더러 낙찰된다고 한들 피바람을 몰고 올 게 뻔한데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우선 길드로 돌아가자. 여기 있어봤자 의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고."
두 남녀는 재건되는 인쇄로를 쳐다보는 걸 멈추고 길드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소속된 모험가 길드는 각 나라의 수도와 대도시마다 세워져 있다.
벨루아 공국도 마찬가지. 특히 벨루아 공국은 상단 호위를 비롯한 다양한 의뢰가 쏟아지는 나라다.
당연히 모험가 혹은 용병 길드의 세력도 클 수밖에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이다.
웅성 웅성
"응? 뭐지?"
"사람이 엄청 많은데?"
길드로 돌아가는 도중, 두 남녀의 시선을 끄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어느 한 곳에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우글우글 몰려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 벨루아 공국을 자주 오가는 그들이었기에 저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나라에서 직접 기재하는 커다란 공지판이 설치돼 있는 곳이다.
국가 혹은 교단이 내린 공문을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게시판.
그 게시판 앞에 무수한 인파가 가득 메워져 있다.
"무슨 일이 있나?"
"공문이 떨어진 것 같은데? 한 번 가보자."
평소 정세에 민감한 여자가 남자를 이끌며 공지판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이 워낙 많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럴 때를 대비하여 늘 상비하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있다.
조금 비싸다는 흠이 있으나 이것만큼 유용한 물건도 없다. 이에 여자는 배낭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그건 바로 다름아닌 망원경. 보통 군대 혹은 극장에서 사용되는 물건이며 제조가 까다로워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비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유용하게 쓸 수 있기에 늘 갖고 다니고 있다.
"로이. 나 좀 올려줘."
"읏차."
로이라고 불린 남자는 여자의 요청에 지체없이 목마를 태워줬다. 여자는 순식간에 높아진 시야에 만족스러워 하며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어디 보자······"
"으음······"
여자가 망원경으로 공지판에 기재된 공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로이가 주위를 둘러봤다.
보통 국가에서 공문을 기재하면 사람이 모이기 일쑤다. 대부분 세금 관련 문제여서 일반인들도 예의주시하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모여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다. 보통 한 번 보고 마는데 굳이 이렇게 모여있다는 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터.
20대라는 젊은 나이지만, 그동안 경험한 것들이 많았기에 그리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어?"
그사이 여자가 공문의 내용을 전부 살펴본 모양이다. 몹시 당황스럽다는 반응은 덤.
이윽고 그녀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며 본인이 본 게 맞는지 여러번 확인했다.
"와······ 이 사람이 제대로 작정했구나."
"뭐가 적혀있어?"
여자, 앤은 로이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래로 내려왔다.
뒤이어 망원경을 배낭에 넣으며 방금 확인했던 공문에 대해 알려줬다.
"자세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이번 사태로 제논이 꽤 화났나 봐. 악마 숭배자의 씨를 제대로 말릴 수도 있겠던데?"
"그니까 내용이 뭐냐고. 나 답답한 거 싫어하는 거 너도 알잖아."
"성질도 급하긴. 벨루아 공국에서 내린 공문은 아니야. 제논의 편지지."
"편지?"
공문이 아니라 제논의 편지라는 대답에 로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공지판에 제논의 편지가 기재되었다니.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그의 영향력을 곱씹자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그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무려 공지판에 기재될만큼의 큰 파장을 끼친다는 의미였으니.
로이의 표정이 점차 진지해지자 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용에 대해 알려줬다.
"맞아. 보아하니 제논에게도 이번 소식이 귀에 들어왔나 봐. 단단히 마음 먹은 거 같은데?"
"그 말은······"
"자세한 건 교단이나 길드에 가서 알아봐야겠지만, 악마 숭배자를 얼마나 많이 토벌했냐에 따라 제논과 독대할 기회가 생긴다네.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면서."
"도, 독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제논과의 독대라는 말에 로이가 호들갑을 떨며 재차 물었다.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무려 독대라니.
앤도 쉬이 믿지 못할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로이처럼 가슴이 점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로이처럼 무대포는 아니지만, 제논 일대기 열성팬이라는 건 똑같았으니까. 사실 로이와 만난 것도 제논 일대기로부터 시작됐다.
그것도 제논 일대기가 파란을 몰고 오기 전부터, 그러니까 1권 때부터 만난 인연.
"잘못 들은 거 아냐. 악마 숭배자 토벌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독대할 기회를 준대. 물론 독대가 아니라 다른 걸 원해도 되고. 아마 국가와 교단 차원에서 지원을 해주겠지."
"그, 그럼 당장······!"
"잠깐 기다려. 제논은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원하고 있어. 만약 희생자가 한 명이라도 나왔다간 이번 일은 없다고까지 했으니 신중을 기울이는 게······"
앤이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면서 로이를 말리고 있을 때쯤이었다.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 공지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외침이 사람들의 귀에 들어왔다.
"누가 이딴 거에 겁 먹을 줄 알고?!"
"음?"
"뭐야?"
쫘아아악!!
누군가 공지판에 기재된 제논의 편지(정확히는 복사본)을 거칠게 떼어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모든 사람이 당황했으나, 다음에 이어진 외침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다.
"만물의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는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새끼 뭐야?!"
"악마 숭배자다!"
"빨리 족쳐! 저 놈부터 잡아!"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상황. 수많은 사람이 악마 숭배자로 추측되는 사람을 깔아뭉갰다.
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사건이 시작되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전세계에 태풍을 몰고 올 터.
냉정히 말해 제논과의 독대는 어렵겠지만, 악마 숭배자 토벌에 동기를 부여한 것만으로도 큰 업적이다.
"정말 시작됐나 봐. 우선 저건 놔두고 자세한 사항부터······ 어디 갔어."
천천히 생각하자고 말하려던 찰나, 앤은 로이가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그녀가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건······
"비켜! 이 새끼는 내가 잡아간다!"
"당신은 또 뭐야?! 내가 먼저 제압한 거 안 보여?!"
"양심은 얻다 팔아먹었냐!!"
어떻게든 악마 숭배자를 끌고 가기 위해 다른 사람을 쳐내는 로이의 모습이었다.
"··· ···"
차마 동료라 밝힐 수 없는 모습에 앤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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