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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55화 (356/763)

〈 355화 〉 천기누설(2)

* * *

아르웬이 원하는 대로 짧고 굵은 알븐하임 생활이 이어졌다.

하루는 후들거리는 하체를 회복시킬 겸 제논 일대기도 읽을 겸 겸사겸사 쉬기만 했다.

침대 밖은 위험하다고, 나도 그녀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거리거나 침소를 둘러보는 등.

마냥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며 중간중간 아르웬과 대화도 나눴다.

"그러면 이 세상의 이름을 정하지 못한 것이냐?"

"이 세계가 아니라 제논 일대기 속 세상이지."

특히 내가 준 초고를 모두 읽은 아르웬이 이런 저런 질문을 꺼냈다. 가장 먼저 제논이 외치게 될 세상의 명칭.

본래라면 히르트의 본명을 따서 작명 할 생각이었으나 불허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을 지어야 된다.

"그대가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전혀 아니라고 본다만."

"그럼 어쩔 수 없는 거고. 혹시 추천할 만한 거 있어? 가능하면 대지와 관련돼 있는 거면 좋겠는데."

"성소에 고대어와 관련된 서적이 있다. 나중에 그걸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니라."

그러면 괜찮겠네. 고대어는 워낙 구하기 어려운 서적이어서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다보니 거의 유실되었거든. 게다가 나는 역사, 그것도 사건 중심에 관심이 있는 거지 언어는 뒷전이다.

"그나저나 루시퍼가 날개를 펼쳤다니······ 비록 악마의 힘을 빌렸다지만 설마······"

아르웬이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로 세실리의 악마화 사태가 떠오른 모양이다.

이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실리의 악마화와 엘프의 천사화는 궤를 달리 하는 분야다.

"아니. 그건 신들도 안 된다고 단정 지으셨어. 천사 같은 초월자가 필멸자로 격하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안 된다고 하셨거든."

"어째서?"

"태생 때문이래."

초월자가 되기 위해서는 초월자로 태어나야 된다. 필멸자가 초월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나도 이 말을 듣고 조금 아쉬워했으나 환생이라는 걸 겪고 나서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필멸자로 죽고, 초월자로 다시 태어나는 건 괜찮지 않을까? 라면서.

인간의 몸이 아닌 신의 몸, 즉 신체(??)로 말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진이 죽고 나서 천사로 부활하는 전개라. 흠······'

괜찮긴 해도 마족이 천사가 된다니까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천사의 후예인 엘프도 아니고 마족이 승천을 하게 된다니.

아무래도 이건 최후의 방법으로 사용해야 될 것 같다. 자칫하다간 알븐하임 쪽에서 반발이 날 수도 있었으니.

게다가 진은 디아볼스를 집어삼키면서 완전한 하나가 됐다. 그건 영혼도 마찬가지다.

과연 신들은 악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정화하고, 진이라는 인격체만 따로 분리시킬 수 있을까.

다른 차원의 나를 이 세상으로 데려와서 환생시키는 것까지는 가능해도, 이건 그 이상의 일이니 약간 조심스러웠다.

'한 번 물어봐야겠다.'

나는 아르웬을 잠깐 혼자 두고 침소 밖으로 나섰다. 전에도 말했듯이 엘로디아는 신전도 겸하고 있다.

원래라면 엘프가 루미너스를, 다크 엘프가 모라를 숭배하지만 다크 엘프가 추방된 이후로 엘프가 두 명 모두 섬기고 있다.

또한 아르웬의 말에 따르자면 다크 엘프와의 사이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다고.

어쩌면 빠른 시일 내에 그토록 원하던 다크 엘프와의 융합이 이루어질 거라며, 모두 내 덕이라며 감사를 전했다.

아무튼 신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묻기 위해 엘로디아의 예배실로 향했고······

[필멸자의 영혼을 초월자의 그릇에 담아 부활시킨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단지 그릇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니 우리가 많이 고생하겠지.]

'어쨌거나 가능하다는 이야기네요?'

[불가능하지는 않지.]

루미너스가 아니라 모라에게 질문했다. 최근 모라와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섭섭할 수도 있으니 그녀를 찾아갔다.

엘로디아에 안착된 모라의 예배실은 헬리움의 신전처럼 어두컴컴했으며 촛불만이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다크 엘프를 추방시킨 알븐하임이지만 전통에 매달리는 성정 덕분에 배척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모라가 진심으로 화를 냈지 않았을까. 나는 그리 생각하면서 모라에게 질문했다.

'그럼 영혼이 더럽혀진 경우는요? 그런 경우는 정화가 불가능한 건가요?'

[가능하긴 해. 하지만 물과 잉크가 서로 섞인 상태에서 둘을 분리해야 되니 엄청 어렵지.]

'불가능한 건 아니네요?'

[응.]

그러면 적어도 되겠네. 하지만 걱정되는 건 역시 엘프의 반발, 정확히는 불만이다.

대놓고 반발은 하지 않아도 마족이 천사로 승천했으니 불만감을 표시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엘프와 다크 엘프 측 영웅은 자기 목숨을 바쳐 세계수를 파괴했다. 만약 그들이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면 디아볼스가 더 빨리 부활했을 터.

이처럼 목숨을 바쳐 위기를 구한 영웅들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굳이 진을 꼽아서 초월자로 부활시키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킥킥.]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때 모라가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 웃음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왜 웃어요?'

[재밌는 미래를 봐서.]

'저에게 좋은 미래인가요, 나쁜 미래인가요?'

[그냥 재밌는 미래라니까?]

알려주기 싫은 모양이구나. 나는 언제 봐도 여전한 모라의 장난기에 피식거렸다.

재미있는 미래라는 걸 보면 분명 내가 곤란한 입장에 처한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루미너스를 찾아갈 걸 그랬다. 루미너스는 모라와 달리 친절해서 전부 알려줬을 테니까.

[뭐야. 그러면 내가 불친절하다는 거니?]

'그게 아니라, 장난기가 심하다는 거죠.'

[흥. 마음대로 해. 안 그래도 엄마 때문에 복잡한데 미워. 앞으로 신성력도 안 줄 거야.]

그건 좀 곤란한데요. 나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모라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성력을 못 받는 건 리스크가 크다. 어떻게든 달래줘야 될 것 같다.

'히르트 님이 축복을 주셨는데 두 분은 왜 못 주시는 건가요?'

[주고 안 주고는 상관없어. 단지 도장을 찍었다는 게 문제지.]

'도장이요?'

[응. 엄마가 너에게 줄 때 이렇게 말했잖아. '순수한 자연의 축복'을 주겠다고. 평범한 축복도 아니고 순수한 축복이야.]

뭐가 다른 거지? 내가 성직자가 아니라서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

모라도 내 생각을 읽었는지 투덜거리면서도 친절하게 하나 하나 설명해줬다.

[순수한 축복은 너에게 권능의 일부를 하사한 것과 똑같아.]

'권능이요?'

[응. 성직자가 기도하여 다른 사람에게 힘을 부여하거나, 적대자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 아니면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어 마법으로도 감지하기 어렵도록 하는 것. 이 둘은 모두 축복의 개념이라 신앙만 충분하다면 가능하나 권능은 달라. '기적'을 행사할 수 있거든.]

'··· ···'

듣기만 해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단어, 기적.

신이 명백히 존재하는 만큼 이 세상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기적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기적이 왜 기적이라 부르겠나.

분명히 불가능한 일인데 어째서인지 몰라도 가능해지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 부른다.

[루미너스 오빠가 기적을 행사한다면 죽어가는 사람조차 살리거나 절단된 신체를 복구할 수 있어. 그게 아니면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 줄 수도 있고.]

'그건 케이트도 가능하지 않나요?'

[그 애는 절단된 부위를 '봉합'하는 것까지만 가능해. 하지만 오빠의 기적은 싹이 트는 것처럼 신체가 새로 나는 거지. 감각도 마찬가지고.]

말 그대로 기적이구나.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감탄하다가 곧바로 질문했다.

'그럼 모라 님은요?'

[나는 오빠와 달리 외적인 분야가 아니라 내적인 분야에 치중돼 있어. 주로 정신 쪽이지. 폐인이 된 사람 또는 노망이 든 사람을 멀쩡히 되돌리는 식으로.]

언뜻 본다면 별 거 아닌 걸로 보이겠지만 저것도 충분히 기적이라 부를만하다.

특히 전생에서 치매는 절대 걸려서는 안 되는, 악마의 질병이라 부른다. 자기 가족조차 못 알아보게 만드는 비극적인 정신병.

두 신 모두 본인의 상징에 맞는 기적을 행사하는데, 그렇다면 자연의 여신은 어떤 기적을 보여줄까.

[엄마를 상징하는 건 너도 알다시피 자연이야. 때문에 어딜 가나 동물들에게 사랑을 받겠지. 게다가 그들과 대화도 할 수 있어.]

'대화요? 어제 뱁새랑은 이야기를 못 했는데?'

[그건 제대로 된 교감을 안 해서 그래. 권능을 하사해도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아, 그리고 혹시 '영물'이라고 알아?]

'당연히 알고 있죠.'

판타지 세상답게 이곳에는 영물도 존재한다. 대신 영물이라 부르는 만큼 발견 빈도는 매우 적다.

영물은 동물만 있는 게 아니라 식물도 포함하고 있다. 가장 큰 예로 몇 백년 묵은 산삼이다.

아무튼 하나만 발견됐다 하면 단체가 아니라 국가에서 직접 찾아 나설 정도로 희귀하고, 또 그 만큼 효능이 뛰어나다.

[신성력만 충분하다면 평범한 동식물을 영물로 진화시킬 수도 있어.]

'······그게 가능해요?'

[그게 자연의 여신이 준 순수한 축복이란다. 이외에도 네가 위기에 빠졌을 때 자연이 너를 도와줄 거야. 악마 숭배자가 제아무리 강해도 자연이 가로막는다면 너를 쫒는 건 불가능하겠지. 아무튼, 네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알다 마다. 평범한 인간을 드루이드로 승격시켜준 수준을 한참 넘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따로 설파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제아무리 인류가 강해져도 절대 못 이기는 것이 자연이다.

그런 자연이 나를 도와준다니, 솔직히 말해 쉬이 와닿지가 않았다.

'······저를 많이 예뻐해주시네요.'

[예뻐할 수밖에 없지. 네가 해준 게 얼만데.]

'하하.'

모라의 진심 어린 칭찬에 괜히 머쓱해졌다. 신에게 칭찬 받는 건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나는 이 어색함을 떨어뜨리기 위해 지체 않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그럼 세계수의 씨앗은 어떻게 하죠? 그냥 영지에 심으면 되나요?'

[··· ···]

세계수의 씨앗에 대해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오직 무거운 침묵만이 있을 뿐.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며 재차 질문했다.

'모라 님?'

[응? 왜?]

'세계수의 씨앗은 어떻게······'

[네 마음대로 해.]

마음대로 하라니. 나는 애매해도 너무 애매한 모라의 대답에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말은 내가 씨앗을 망치로 부숴도 된다는 말일까. 아니면 진짜로 영지에 심으라는 말일까.

도통 알 수 없는 말씀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쯤, 모라가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 혹시 다른 건 없니?]

'음······ 딱히 없어요.'

[그래? 알았어. 그럼 나중에 보자. 안녕!]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모라가 급히 접신을 끊어버렸다. 나는 접신이 끊기자마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앞에 세워진 모라의 석상은 그 어떤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라가 도망치듯이 가버린 것이다.

'뭐지?'

어째서 세계수의 씨앗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미래가 펼쳐지길래 나에게조차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나는 도통 알 수 없는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라가 저렇게 반응할 정도면 루미너스도 비슷할 터. 분명 세계수의 씨앗에 이유가 담겨있다.

'정말로 망치로 내려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돌아갈 때까지만 가만히 놔두자. 나는 알쏭달쏭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아르웬이 기다리는 침소로 돌아갔다.

분명 무슨 생각이 있으셔서 알려주지 않은 거겠지. 그들이 나에게 피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르웬이 기다리는 침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아. 왔구나."

"······뭐 하는 거야?"

침대에서 자기 얼굴만한 씨앗을 품에 안고 있는 아르웬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기보다는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르웬은 내 질문에 베시시 웃더니 본인처럼 정말 귀여운 대답을 꺼냈다.

"그······ 씨앗 혼자 덩그러니 놓여있으니 추워 보여서······"

"··· ···"

"히르트 님께서 주신 선물이지 않느냐? 그래서 좀 더 신경 써야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100살 넘게 먹은 여자가 한 말 치고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실실 웃었다가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라가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뒤이어 아르웬이 소중하게 안고 있는 황금색 씨앗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같이 안고 있을까?"

"가, 같이?"

"왜? 첫날밤까지 치렀으면서 나랑 같이 안는 건 부끄러워?"

"그, 그게 아니라······"

내가 안자고 권유하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아르웬.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올렸다.

아직 잠을 잘 시간은 아니지만, 평생 추억을 남길 정도면 충분하다.

이윽고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리고, 씨앗을 둘 사이에 두면서 아르웬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그, 그대여."

"쉿. 지금은 이러고 있자."

"으, 응······"

그리하여 단란한 낮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쯤.

뽀각!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우리 귀에 들어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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