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9화 〉 히르트(1)
* * *
자연의 여신이라는 이름답게, 히르트는 자연 현상으로 나에게 허락을 내려주셨다.
바람의 방향과, 새들이 동시에 비상하여 세계수 쪽으로 향하는 식으로. 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이라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자연의 여신이 직접 허락을 내렸는데, 피조물이 과연 거부할까. 당연히 세계수를 수호하는 사제들도 손쉽게 허락해줬다.
그들도 방금 전의 현상을 보고 히르트 님의 의중을 깨달았으며, 여기서 내가 부가 설명까지 하니 놀란 눈으로 쳐다보더라.
"히르트 님이 그런 식으로 대답한 건 극히 드문, 아니 악마 전쟁을 제외하면 거의 없던 일이니라! 그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게냐?"
"난 처음 듣는 거라서 와닿지가 않네. 그나저나 악마 전쟁 당시 그랬다고?"
아르웬과 함께 세계수로 걸어가고 있을 때, 그녀가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나는 방금 전 그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라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후에 이어진 설명에 따르자면, 히르트가 그런 식으로 응답한 건 악마 전쟁 당시 세계수의 씨앗을 건네줄 때밖에 없었다고.
그걸 제외하고는 인류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몬스터를 포함한 동물을 조종하여 악마와 대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건 나도 책에서 봤다.
'모든 동물을 조종하는 건 힘들었으려나?'
나는 옆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아르웬을 두고 곰곰히 생각했다.
기록에 따르자면 히르트는 자연의 여신이라는 칭호답게 세계수를 전달했으나, 그 일을 제외하고 큰 도움을 준 적이 없다.
아까 말했듯이 몇몇 종류를 제외한 동물을 조종하여 인류에게 힘을 주었으나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특히 고블린, 오크, 오우거 등등. 몬스터로 취급되는 종류는 아예 악마들과 합세했다. 그들을 개조하여 더 괴랄한 개체가 태어났다고.
오크는 피부가 붉은색으로 변하여 더욱 흉폭해지고, 고블린은 안 그래도 높았던 지능이 더 높아져 악랄해졌다.
특히 오우거가 제일 가관인데, 기록에 따르자면 엘프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아도 거뜬했다고.
다행히 지금은 자연으로 숨어들어 보기 힘들지만, 한 번 마주쳤으면 무조건 도망쳐야 되는 걸로 유명한 개체다.
'만물의 아버지라······'
문득 악마 숭배자가 자결하기 직전에 소리쳤던 말이 떠올랐다. 자연의 어머니인 히르트와 대비되는 만물의 아버지.
당장은 세계수로 향하고 있어서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지만, 훗날 성지로 가서 기록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예상하는 게 맞다면 정말 훌륭한 소재가 되어줄테니. 물론 제논 일대기에 넣지는 않고 후속작에 넣어······
콕! 콕!
"음?"
잠깐 깊게 생각하면서 걷는 도중에 무언가 내 정수리를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쾌청한 하늘만이 가득할 뿐.
혹시 내가 잘못 느낀 건가.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자 내 검지 손가락 위로 뭔가 안착했다.
"짹! 짹!"
머리 위로 올렸던 손을 내리니 웬 작고 귀여운 뱁새가 지저귀고 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세계수로 오라는 히르트의 의도인 건가. 이렇게 귀여운 새와 마주하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뱁새로구나. 경계심이 많아 사람에게 잘 가지 않을텐데."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날개를 파닥거리는 뱁새를 보고 있을 때 옆에서 아르웬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눈길로 나와 뱁새를 번갈아봤다.
"엘프한테도 잘 안 가? 엘프는 동물과 친하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잘못된 상식이니라. 우리가 자연과 친한 건 맞지만, 그렇다 해서 동물과 친한 건 아니니. 우리도 동물을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목장도 세우는 종족이니라."
평소 판타지의 엘프하면 자연친화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세상은 약간 다르다. 자연친화적인 건 맞는데 그렇다 해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엘프도 육식을 즐기고, 목장을 세워 식량을 충당한다. 무엇보다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자연을 해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신 마구잡이로 세를 불리는 인간과 달리 히르트에게 기도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고.
엘프가 자연친화적이라는 이미지가 생긴 이유는 아마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 동물과 교감하는 경우는 없는거야? 간혹 드루이드가 나타났다는 말이 있잖아."
"흠······ 그건 함부로 단정짓기가 애매하구나. 개나 고양이와 교감하는 것도 드루이드라 부른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사자 같은 맹수를 기르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 그런 면에서는 우리보다 수인이 드루이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동물을 기르는 건 종족을 불문하고 가능하겠지만, 동물과 말 그대로 교감하는 건 제아무리 엘프여도 힘든 일이다.
단 하나, 동물의 습성이 깃든 수인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동물의 본능을 알 수 있어서 교감이 더 쉬울 것이다.
나는 아르웬을 통해 여러 상식들을 배우다가 다시 뱁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뱁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웬."
"응?"
"얘 너 닮은 거 같은데?"
"무, 뭐?!"
내가 뱁새를 보여주며 닮았다고 말하자 아르웬이 크게 당황한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일단 전반적으로 몸이 하얀데다가 작고 소중한 것이, 정말로 아르웬의 이미지와 완전히 흡사하다.
귀엽기도 귀엽고. 무엇보다...
"그, 그게 무슨 말인게냐?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냥 귀엽다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우으..."
귀가 위아래로 까닥거라는 게, 마치 뱁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하는 아르웬을 보며 미약하게 웃었다가 손을 위로 올렸다.
손을 위로 올리자 뱁새도 힘차게 날개짓을 하더니 위로 향해 날아갔다.
푸드득!
"짹! 짹!"
"...안 가니?"
"짹!"
그리고 다시 내 정수리 위로 앉더라. 살짝 어이가 없었으나 귀여워서 가만히 놔두었다.
'그나저나 진짜 멀긴 하네.'
나는 뱁새를 두고 앞을 쳐다봤다. 분명 세계수는 코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길은 끝도 없다.
가는 길조차 일종의 순례라고 취급하는 건지 텔레포트 같은 마법은 사용이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도보로 이동하는 거고.
때문에 엘로디아 뒤쪽으로 나가고 그대로 걸어가는 방법밖에 없다. 문제는 그 길이 무시무시하게 길다는 것.
원근감을 무시했을 때부터 거리가 장난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멀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세계수가 위치한 주변은 전부 광활한 평야여서 더 멀리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행자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는 걸까.
나는 얼굴의 화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손부채질을 하는 아르웬을 힐끔거렸다.
이제 슬슬 진정이 된 기미가 보이니 대화가 가능할 것 같다.
"아르웬."
"무, 무엇이냐?"
방금 전 내 기습 공격으로 인해 말이 떨리는 아르웬. 귀는 여전히 위아래로 까닥거라며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줬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가 손을 스윽 내밀었다.
아르웬은 내가 손을 내밀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손 잡고 걸을까?"
"뭐, 뭐?"
"손 잡고 걷는 게 어때?"
내가 재차 권유하니 기껏 가라앉았던 아르웬의 얼굴이 도로 빨개진다.
피부가 하얗다보니 눈에 띄는 거겠다만 자주 저러니 뭔가 웃기다.
그녀는 내가 내민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작지만 섬섬옥수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체구 자체가 작은 탓에 손도 작지만 비율만큼은 나무랄데가 없다.
스윽
"하아..."
마침내 손을 맞잡자 아르웬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깍지까지 끼며 서로의 감촉을 느꼈다.
아르웬의 손은 아기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게다가 마리와 달리 크기부터 차이가 나서 손 전체를 덮는 수준이다.
"크다..."
손 대부분을 뒤덮은 내 손을 보며 아르웬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은회색 눈동자가 올망졸망하게 빛나는 것이,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어린이처럼 보였다.
외모도 그렇고 하는 행동이 행동이다보니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음에도 연하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르웬이 손을 꿈틀꿈틀대는 걸 느끼다가 빙긋 웃으며 조용히 물었다.
"아르웬은 지금처럼 다른 남자랑 깍지 껴 본 적이 있어?"
"있다. 아버지와 인간 사회에서 자주 이랬지. 아버지는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고 언제나 내 손을 잡고 다니셨다. 그때가 생각나는구나."
"아버지를 제외하면?"
"그대가 처음이니라."
아르웬은 그리 답하고 맞잡은 손이 아닌, 비어있는 손을 내 손등 위에 올렸다.
커다란 내 손이 신기한지 살살 쓰다듬기도 하고, 솟아오른 힘줄을 만지는 등. 알게 모르게 남심을 자극하는 행동을 보여줬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더 진도를 빼고 싶다. 그러나 히르트가 빨리 오라고 부탁한만큼 더이상 늦출 수는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세계수로 천천히 걸어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머리 위의 뱁새를 포함한 새들이 지저귄다.
스윽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아르웬이 슬금슬금 내 몸에 밀착하기 시작했다.
깍지를 낀 손은 슬그머니 풀더니 나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서 그치치 않고 은근슬쩍 가슴 쪽으로 당기기까지.
다른 여자들에 비해 부족하나 결코 작지 않은 감촉이 팔을 타고 전달되었다.
"...그대여."
"응."
"만약 그대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로 책 속의 엘리샤처럼 되었을까? 그게 궁금하구나."
엘리샤는 모두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 속 엘프 여왕. 그리고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연인이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지 못 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커플.
나는 아르웬의 질문을 듣고 황당해 하기보다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
제논 일대기 덕분에 2차 악마 전쟁이 수 천년 뒤로 미루어졌고, 모든 미래가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되었다.
자연히 아르웬의 운명도 그와 비슷하게 바뀌었을 터.
특히 그녀는 여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안 된만큼 2차 악마 전쟁을 겪을 뻔했다. 분명 엘리샤 못지 않게 힘든 일을 겪었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어나지 않을 미래다. 그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언자 혹은 회귀자가 절대 아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건 맞지만, 이곳과 전혀 상관없는 세계다.
"그건 나도 모르겠네. 미래는 함부로 단언할 수 없는 거니까. 엘리샤처럼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닐 수도 있지."
"... ..."
"그래도 긍정적으로 바뀐 건 맞아. 악마 숭배자의 존재가 들키고, 세계수 뿌리의 오염도 막았으니."
그리 말하여 아르웬을 바라본다. 아르웬도 때마침 나에게 시선을 돌린 참이었다.
"이제 그런 건 신경 꺼도 되지 않을까?"
"... ..."
"그런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고려해야지. 안 그래?"
"...풋."
내 대답에 아르웬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구나. 그대에게 이런 질문을 하디니.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져."
"그럼 이제 뭘 할지 정했어?"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
아르웬이 명료하게 대답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답한 걸 보면 확신을 내린 듯하다.
그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화답했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머리카락은 만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도 싫진 않은지 내 팔에 얼굴을 바짝 기대며 온기를 만끽했다. 덕분에 가슴이 더 밀착되어 흠칫했으나 익숙해진지 오래라 당황하진 않았다.
"아이작."
"응. 말해."
"그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악마 숭배자의 실수로 태어난 세계지만, 그래도 전생보다는 훨씬 행복하다.
겸사겸사 악마 숭배자에게도 빅엿을 먹이면서 아름다운 여자들과 이어지니 이보다 행복한 삶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 팔짱을 끼면서 세계수로 천천히 나아갔다. 좀처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던 세계수였으나 거리는 언젠가 좁혀지는 법.
그리하여 세계수에 거의 다 다다랐을 쯤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대도시 하나를 뒤덮을만한 규모의 세계수를 보며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내 머릿속에 아름다운 미성이 울려퍼졌다.
목소리만 듣는다면 여성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하다.
이에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위 쪽을 봐주렴.]
그 말에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세계수가 눈에 들어왔으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샤아아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한 군데로 서서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 빛은 하나의 형태가 되어 '인영'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나와 아르웬은 그 현상을 멍하니 바라봤다. 빛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만, 그 현상은 지극히 초현실적이었으니.
이윽고 하나의 인영이 된 빛이 조금씩 걷히면서 정체를 드러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머리카락.
자연의 색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연한 초록색의 머리카락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눈동자 또한 마찬가지. 별을 고스란히 담은 것처럼, 초록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다.'
풍만한 가슴과 황금 비율을 이루는 몸매. 나뭇잎으로 중요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초월적인 존재라 그런지 그 어떤 흑심도 들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 크기가 문제다.
크다. 엄청. 이상한 곳을 말한 게 아니라 키가 엄청 크다.
내가 올려다 봐야 할 정도였으니 최소한 3m는 거뜬히 넘지 않을까.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못 하며 여인을 바라봤다.
그사이, 여인은 별을 담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두 다리를 쪼그려앉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태산이 작아지는 같은 착각이 든다.
이윽고 눈높이를 얼추 맞춘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아이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