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47화 (348/763)

〈 347화 〉 선물(1)

* * *

알븐하임을 방문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헬리움은 진작부터 세실리와 친분을 맺은 덕택에 자주 왕래했으나 알븐하임은 아니다.

세실리는 활동에 제약이 덜한 공주인 반면 아르웬은 한 나라의 여왕이었으니.

아무리 시리스가 전령 역할을 한다고 한들, 그녀는 노예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령이다. 지금도 부탁만 하면 성지의 책을 공수해준다.

그러니 알븐하임에,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제논으로서 방문하는 건 어색할 수밖에 없다.

헬리움조차도 세실리 혹은 가르츠의 인도에 따라 왕래할 뿐, 제논으로서 방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이것만 해도 오묘한 마음을 가지기에 충분하지만, 알븐하임은 여기에 부담감까지 얹어줬다.

"그래서······ 누구시라고요?"

"알븐하임의 전사장 베아트리스 스타시커라고 합니다. 알븐하임 수호군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길고 화려한 금발을 귀 뒤로 넘기고, 오로라를 그대로 담은듯한 녹빛 눈동자가 청명하게 빛나는 여자가 내게 말했다.

높고 청아한 목소리가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그 안에는 호감이 실려있다. 나는 나에게 인사한 엘프를 바라봤다.

미의 화신인 엘프답게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이고, 가벼운 흰색 경장갑을 입고 있어 호리호리한 몸매가 드러났다.

허리에 찬 검을 보면 검을 주로 사용하는 걸로 추측된다. 겉모습처럼 현란하고 우아한 검술을 사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분은······?"

"전사장 하스 스톰호프입니다. 알븐하임 마법군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연두빛 머리카락을 꽁지 머리로 묶은 남자가 점잖은 말투로 인사했다.

베아트리스라 소개한 엘프 여인과 달리 가벼운 로브만 입고 있는 엘프.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어 지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가 일품이었는데, 선이 굵어서 그렇지 처음에는 여자로 착각할 정도의 미모를 갖고 있었다.

나는 서로를 전사장이라 소개한 둘을 번갈아보다가 얼떨떨한 투로 인사했다.

"바, 반갑습니다. 아시겠지만 제 이름은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 제논 일대기를 집필하고 있는 제논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두 분이 정말 전사장이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과분한 위치를 맡고 있죠."

베아트리스는 당당하게, 하스는 겸손한 투로 각자 대답했다. 서로의 성격이 어떠한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둘을 보며 혼란이 일기보다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은 내가 알븐하임으로 출발할 때부터 곁을 호위하던 인물이다.

그때는 만약을 대비하여 빠르게 텔레포트를 하느라 서로 소개할 여력이 없었지만, 알븐하임에 도착하고나서 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전사장이 제가 알고 있는 직위죠? 군인 중에 실력이 가장 뛰어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예."

"그렇긴 하다만 마법에 끝은 없는 법이죠."

간결한 대답을 하는 베아트리스와 달리 하스는 늘 겸손하게 대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질문한 것처럼, 알븐하임에서 '전사장'이라는 직위는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앉을 수 있다.

군대이다보니 무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휘력, 통솔력, 정치력, 인망 등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전사장이 될 수 있다.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간단하게 비유해주겠다. 일반적인 기사가 전술 병기라면 전사장부터는 '전략' 수준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만큼 국내외적으로 무시무시한 위상을 자랑하는 전사장인데, 나를 호위하기 위해서 두 명씩이나 파견했다.

알븐하임에 전사장이 총 5명이라는 걸 고려할 때, 군사력의 3분의 1 이상을 나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오직 호위 하나를 위해서.

'그런데 다들 젊어보이는데······'

현재 우리는 입국심사를 거치고 귀빈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아르웬 쪽에서 준비가 된다면 곧바로 위그드라실로 향할 것이다.

아르웬이 거주하는 공관, 엘로디아로 향할 수 있으나 천천히 걸어가야 된다고. 곧장 아르웬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다.

알븐하임이 국가 차원에서 나에게 선물을 줘야하니 국민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어보니 선물 또한 아르웬이 주도한 게 아니고 국민들이 자진한 거라는데······ 여러모로 엘프식 공산주의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전사장이라 소개한 두 명의 남녀를 번갈아봤다.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다들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한 명은 아예 별을 새긴 것처럼 초롱초롱거렸고, 또 한 명은 호기심이 가득하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전사장이라 무섭기까지 한다.

또한 이와 별개로 어색함마저 들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살짝 무례일 수도 있었으나 내 궁금증부터 해결해야지.

"그······ 멍청하고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해도 될까요?"

"제논 님의 질문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다행이다. 이미 엘프라는 종족 자체에 호감도를 쌓아놓아서 별 일은 없을 것 같다.

이에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인간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두 분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워서요. 전사장인 걸 보면 분명 많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닙니다. 내년이면 정확히 250살입니다."

"저는 오래 앉은 편이라 651번의 봄을 지켜보았습니다."

"··· ···"

각자 세대에 맞는 대답을 꺼냈다. 베아트리스는 신세대 엘프라 평범하게 답한 반면, 하스는 구세대 엘프 특유의 문법을 사용했다.

신세대 엘프와 구세대 엘프를 구분 짓는 시기는 300년 전의 종족 전쟁. 베아트리스는 종족 전쟁을 겪지 않았고, 하스는 종족 전쟁을 겪은 인물이다.

나는 베아트리스는 제쳐두고 역사책에 실릴법한 하스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엘프는 모 만화의 종족마냥 젊은 시절이 오래 유지되어 800부터 노화가 느릿느릿 찾아온다.

또한 구세대 엘프는 사고가 앞뒤로 꽉 막힌 꼰대들이 대부분인데 하스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엘프는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네요."

"제논 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스를 바라봤다.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라서.

뒤이어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짓더니 나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제논 님이야말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죠. 저는 신체와 영혼의 나이가 일치하지만, 제논 님은 아니잖습니까?"

"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놀랍게도 내 본질을 꿰뚫는 말이다. 덤으로 깔려있는 호의까지.

피렌 같은 꼰대들만 봐서 그런지 구세대 엘프는 나에게 호감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하지만 땀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거죠?"

"수 백번도 넘는 겨울을 보낸 저인데, 제논 님은 저보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한 것 같았으니까요. 그때는 상상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 했지만, 과연 누가, 그것도 감히 그런 상상을 하겠습니까? 마족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보며, 원로원의 부패와 무능을 정면으로 비판했죠."

음. 이쯤 되니까 할 말이 없어지는군. 따지고 보면 판타지 소설도 문화적으로 큰 발전이 이루어져야 되며, 웹소설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당장 나조차도 전생의 우주 전쟁 게임을 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나는 하스의 말에 딱히 반박도 하지 않고 쓴웃음으로 무마했다. 하스도 확신을 내렸는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러면 엘로디아에서 가서 아르웬과 만나면 뭘 하는지 알려드릴 수 있나요?"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화제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다급하게 하스가 아닌 베아트리스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내 질문을 받고 눈을 살짝 크게 떴으나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까 전부터 느꼈지만, 청렴한 목소리임에도 호쾌함이 느껴졌다.

"우리 알븐하임에서 준비한 선물인만큼 저희 쪽에서 준비했지만, 제논 님이 원하시는 건 다 들어줄 예정입니다."

"성지에 방문하는 건 되나요?"

성지는 최초의 도서관이라 불리며, 그만큼 방대한 서적이 쌓여있는 곳이다. 나 같은 독서광에게는 말 그대로 '성지'나 다름없는 기관.

여태까지 시리스를 통해 도서를 공급받았으나 이제는 당당하게 입장해도 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 질문했다.

"물론입니다. 이외에도 여왕님의······"

"흠. 흠. 스타시커 공?"

"앗."

베아트리스가 말실수를 할 뻔했으나 다행히 하스가 제지했다. 약간 실망스러웠으나 비밀인 것 같으니 묻어두기로 정했다.

그리고 성지도 성지지만 가장 궁금한 부분이 있다. 이건 아르웬조차 허락없이는 지날 수 없는 '성역'으로 유명하니까.

이에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세계수에 접근해도 되나요?"

"세계수······ 말입니까?"

"네."

악마 전쟁 당시, 자연의 여신 히르트가 엘프측에게 준 씨앗이 발화하여 성장한 성목, 세계수.

악을 조금이라도 품고 있는 자라면 접근조차 불가능하며, 이슬 한 방울로도 엘릭서의 재료가 되는 보배로운 나무.

3000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서 그 규모가 도시 하나를 뒤덮을만큼 커진 상황이다.

처음으로 알븐하임에 방문했을 때도 원근감을 모조리 무시하고 있던 걸로 안다.

하지만 세계수를 수호하는 성직자들의 허락없이는 아르웬조차 허락없이 드나들 수 없는 성지다.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물론입니다. 사제들도 제논 님이라면 기꺼이 허락해줄 겁니다."

"정말요?"

"네. 무려 세계수의 뿌리를 타락으로부터 구원해주신 분인데, 허락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용서치 않을테니까요."

다행이다. 한 번 직접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오늘 그 숙원이 풀릴 모양이다.

물론 세계수로 가서 바닥에 떨어진 잎을 줍거나 이슬을 모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한 번 보고 싶다. 모두 한 번쯤 유명 관광지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과 똑같다.

"다행이네요. 두 분은 세계수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없습니다."

"저는 연구 목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것조차 멀리서 지켜보거나 땅에 떨어진 잎을 주웠을 뿐 가까이 간 적은 없습니다."

무려 전사장인 두 사람조차 가본 적이 없단다. 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은요?"

"적어도 수 백번의 봄을 지켜본 동안에는 없었습니다. 저명한 학자들도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아마 제논 님이 최초일 겁니다."

"최초라······"

인간 중에서는 내가 최초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들뜨는 기분이다.

모든 학자들이 원하는 도서관, 성지에 방문하는 것조차 기대되는데 세계수는 오죽할까.

'근데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데······'

책에서 악마에게 유린당하다 못해 폭파시켰다고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이런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음. 이제 시간이 되었군요.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예. 엘로디아까지는 걸어서 몇 분 정도 걸리나요?"

"별로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좋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저게 뭐죠?"

"제논 님을 보기 위해서 모인 것 같군요."

레드카펫, 아니 모세의 기적마냥 쭈욱 갈라진 거리를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아카데미에서도 보았던 장면이었다. 양옆으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그걸 막기 위해 기사들이 길을 막고 있다.

심지어 아카데미처럼 특수한 기관이 아니라 수도다. 수도의 중심부가 나를 위해 길을 터주고 있는 상황.

다행히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잠잠하지,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다.

"저길 꼭 지나가야 합니까?"

"그래야 국민들이 제논 님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습격은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아르웬은 나를 수치사시킬 생각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제논 님이다!"

"어디? 어디?"

"저기 계셔! 빨간 머리 있잖아!"

"우와아아!!"

박수 소리와 더불어 힘찬 외침이 내 귀에 속속 박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난 역시 그릇이 크지 못 해.'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길을 지나쳤을까. 나는 천성이 집돌이라 이런 길을 지나치는 것조차 부끄럽다.

"한 번 손이라도 흔들어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요! 모두가 제논 님을 보러 왔잖아요."

"··· ···"

두고 보자, 아르웬.

*****

그 시각, 엘로디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르웬은······

찌릿!

"히윽?!"

"여왕님?"

"아, 아니다. 갑자기 뭔가 찌릿한 느낌이 들어서······"

느닷없이 몸이 찌릿 울리는 느낌에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지? 기분이 뭔가······'

이상하게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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