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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346화 (347/763)

〈 346화 〉 이불 밖(3)

* * *

알븐하임에서 나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며 대대적으로 공표했지만, 그 정체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다.

엘프식 공산주의와 함께 아르웬의 반응을 보자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게다가 나에게 마음까지 고백했으니 절대 모를 수가 없다.

알븐하임은, 나에게 여왕 아르웬을 선물할 생각이라고. 마족에게 결코 질 수 없다면서 본인들의 여왕을 선물할 것이다.

한 나라, 그것도 강대국의 왕을 선물하는 건 좀 무리지 않냐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선물 취급하는 건 그렇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지.

시대가 그렇다. 정략 결혼이라는 풍습이 존재하며 결혼을 외교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곳.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라 해서 정략 결혼의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아르웬으로서는 나와 이어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든든한 방패가 될 것이다.

그야말로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것과 똑같다. 본인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으며 대외적인 명분까지 충분하다.

'그래도 처음부터 선물을 주진 않겠지.'

하루는 길다. 아르웬도 다짜고짜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여러 과정을 통해 줄 것이다.

아마 하루종일 데이트를 하다가 밤이 되서야 선물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유추하는 거니 확신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알븐하임으로 향할 필요가 있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가야 된다. 알븐하임에서도 이걸 알고 있으니 분명 정예 중의 정예를 보낼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조건이 나왔다.

"나 원 참. 독점하고 싶다면 당당하게 말하지. 무슨 변명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네. 아델 언니도 동의하시죠?"

"동의합니다."

마리와 아델리아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나는 아델리아로부터 몸단장을 받고 있는 상황.

어째서 이들이 저렇게 투덜거리냐하면, 알븐하임 쪽에서 내건 조건 때문이다.

선물은 오로지 '제논', 그러니까 나를 위한 것이니 다른 사람은 올 필요가 없다.

말이 필요 없다지, 국가 차원에서 한 공표인데 나 혼자만 오라고 한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개인을 위한 선물이니 당연하다고 느껴지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의 아르웬의 의중을 곧바로 눈치챘다.

선물을 줄 때만큼은 나를 독점하고 싶으니 가급적이면 안 왔으면 좋겠다. 더도 말고 딱 이 뜻이다.

"전에 며칠 정도는 양보한다고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기껏 쌓았던 호감이 싹 날아갈 뻔했어."

"아르웬이랑 만난 적이 있어?"

마리의 투덜거림에 나는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세실리와 아르웬이 서로 가볍게 연락을 하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마리는 처음이었다.

이에 그녀는 살짝 흠칫거렸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저번에 저택에서 만났던 적이 있잖아? 그때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이유로 통신구를 받았거든. 대신 서로 사정 때문에 특수한 일이 아닌 이상 연락은 잘 안해."

"특수한 일?"

"음..."

연이은 내 질문에 마리가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가 나와 마주했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뒤이어 그녀는 피식 웃더니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상큼하게 말했다.

"지금은 못 알려주겠네. 나중에 아르웬 여왕님께 직접 물어봐. 대신 대놓고 묻지 말고 타이밍을 잘 보고."

"무슨 타이밍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첫날밤 이야기 나올 때 물으면 될 거야. 어차피 할 거 아니야?"

"... ..."

너무 당당하게 물어서 되려 내가 할 말이 없어졌다. 여태까지 내가 딴 여자와 엮일 때 질투를 하던 마리가 맞는 건가.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나 혼자 품기에는 네 그릇이 너무 커. 이곳 저곳 견제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모두를 품는 편이 신상에 이롭겠지."

"... ..."

"그대신! 누누이 언급했듯이 내가 1순위라는 거. 절대 잊지 마. 지금도 너를 아르웬 여왕님에게 잠깐 '빌려주는' 것 뿐이야. 알겠어?"

마리답다면 마리다운 말에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명성이 나날이 커지는만큼 마리의 배려심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과연 누가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른 여자에 비해서 절대 꿇리지 않는 매력의 소유자다.

쪽!

나는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잡은 뒤, 아주 가볍게 입술을 부딪혔다. 그 행위 하나만으로 우리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마리와 얼굴을 마주하니 뺨이 풋풋하게 익어있었다. 우리의 불길은 전혀 꺼지지 않고 꾸준히 불타는 중이다.

"그럼 잘 갔다 와. 너무 흥분해서 아르웬 여왕님을 고생시키지 말고."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듣겠다."

"뭐 어때? 이미 알만한 사람들인데. 그전에 아델 언니한테도 키스해주고 가."

"저, 저는 괜찮습니다."

갑작스레 불똥이 튀기자 아델리아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래도 가기 전에 키스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나는 아델리아에게도 가볍게 버드 키스를 한 뒤에 옷을 체크했다.

단출해 보이는 붉은색 예복이나, 황금색의 십자수가 새겨져 화려함까지 깃든 복장.

다른 귀족들에 입는 옷에 비해서 수수해보이지만, 내 눈에는 충분히 화려하다. 특히 황금의 실로 새겨진 십자수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원래는 십자수도 없는 옷을 입고 갈 예정이었으나 마리가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말려서 바뀐 것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가보도록 해. 알븐하임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를 부른다고 했으니 악마 숭배자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거야."

"알겠어. 그럼 그때까지 조심히 있어야 돼."

"그래서 당분간 아델 언니랑 같이 있으려고. 이참에 케이트 씨랑 같이 친해져야지."

내가 다른 여자와 데이트, 더 나아가 첫날밤을 보낼 수도 있는데 마리는 시원스러운 태도를 보여줬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태도에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그들에게 인사해줬다. 참고로 아버지는 저택에 잠깐 일을 하시러 먼저 떠난 상황.

케이트도 예배를 위해 신전으로 갔으니 인사를 할 사람은 마리와 아델리아 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잘 가~ 아참. 깜빡할 뻔했네. 이거."

가기 직전에 마리가 병 하나를 나에게 건네줬다. 병 안에는 새하얀 알약이 들어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피임약. 나는 피임약이 한가득 들어있는 약을 얼떨떨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마주했다.

마리는 연신 싱글벙글 웃는 표정이었다.

"혹시 모르잖아. 나보다 다른 여자가 먼저 네 아이를 가지는 건 무조건 막아야지."

".......엘프는 임신이 힘든 거 알지?"

"그건 아는데 혹시나 싶어서. 어차피 밤일을 치루면 그 다음부터 방에서 안 나올 거 아냐? 그러니 잔말 말고 들고 가. 만약 안 먹었다가 아르웬 여왕님이 임신하면 그때는 헤어질 각오해."

"알았어. 알았어."

역시나 이런 일에는 철저한 마리다. 사실 깜빡하고 있었는데 굳이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깜빡하고 있었지?"

"아니?"

"역시 그 거짓말 못하는 성격도 사랑스러워. 앙!"

"아악!"

얼굴 깨무는 건 언제 고치려나. 나는 치아 자국이 선명하게 났을 것 같은 뺨을 손으로 살살 문질렀다.

******

아이작이 알븐하임으로 향할 준비를 갖추는 동안, 제일 바쁜 건 아르웬이었다.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을 위한 선물로 자신을 선택한 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본인의 위상을 더욱 높여줄 수 있을 뿐더러 개인적인 사심이 듬뿍 들어있었으니까.

솔직히 사심이 들어있다는 부분이 제일 컸다. 정치적인 건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고, 애당초 고려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알븐하임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들이 강력하게 원하는데 그 어떤 지도자가 거절하겠나.

비록 아르웬이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공표가 늦어졌지만 지금이라도 했으니 됐지 않은가.

"여왕님. 가시기 전에 세계수의 샘물로 몸을 가꾸어야 합니다."

"향수도 뿌리시고..."

"여왕님은 우리 알븐하임의 상징이십니다."

"절대 가볍게 가서는 안 됩니다. 이리 오세요."

첫날밤을 보내기도 전에 쓰러질 뻔했다. 여태까지 국정만 돌보느라 엘프 특유의 고리타분한 전통을 잊고 있었다.

엘프는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만큼, 제아무리 여왕이어도 피할 수 없는 문제다.

하물며 지금은 무려 아이작에게 보낼 선물을 잘 '포장'해야 하는 상황. 원로원과 피렌을 비롯한 꼰대 엘프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고리타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닳아빠져 악습이 아니라,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진짜배기 전통. 순혈도 아닌 혼혈인 아르웬이 버틸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이러니까 출산율이 낮지...'

덕분에 엘프의 출산율이 왜 이리 낮은지 깨닫게 됐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이 행위를 밤일을 치룰 때마다 필수적으로 거쳐야 되니 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자신은 여왕이기에 수행원에 있지만, 일반 국민은 스스로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알븐하임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약간 고쳐야 되지 않을까. 때아닌 과제에 아르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진작에 해서 다행이네.'

아르웬은 아름답게 치장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확인했다. 언뜻 보면 크게 달라진 점이 없지만, 평소에 꾸미지 않아 지금이 더 나아보인다.

보통 그녀처럼 어려보이는 외모에 화장을 한다면 이도저도 안 되지만, 지금은 성숙함과 귀여움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빙긋 웃으면 소녀의 상큼함을, 부드럽게 웃으면 처녀의 풋풋함을.

마지막으로 은은하게 풍기는 향수로 하여금 후각을 자극시키고 있다.

향수 또한 세계수의 이슬로 제작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효과를 낳는다고.

마지막으로 복장. 진정한 '선물'은 밤에 준비해뒀기에 지금의 옷은 원피스형 흰색 드레스다.

하지만 수행원들도 아르웬의 강점이 어디인지 파악했던 것인지, 유형이 살짝 달랐다.

한 쪽은 막혀있으나, 다른 한 쪽은 시원하게 트여있다. 다시 말해 한 쪽은 골반의 굴곡을 선명하게 드러냈고, 다른 한 쪽은 새하얀 허벅지가 가감없이 노출돼 있었다.

가터벨트도 없다. 오직 아르웬의 뽀얀 허벅지만이 노출돼 있을 뿐.

키는 작아도, 비율 자체는 세실리 못지 않게 좋은 그녀였기에 색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부, 부끄럽긴 해도 아이작을 위한 선물이니까...'

평소에도 옆구리가 터진 옷을 입는 아르웬이나, 오늘 입은 건 왠지 부끄럽다. 다름아닌 아이작을 위한 복장이라서 그런 걸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다가 몸을 빙글 돌려 걸어갔다. 새로 신은 구두가 또각­ 또각­ 소리를 낸다.

이윽고 아르웬이 도달한 곳은 침대 쪽. 침대 위에는 아이작을 위한 진짜 '선물'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선물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헛기침을 토했다. 그리고는...

"그, 그대여. 이, 이 이불을 내려보아라. 그러면 진짜 선물이..."

털썩­

거기까지 말하던 아르웬은 갑작스레 털썩 꿇어앉더니.

쿵! 쿵! 쿵!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 하여 침대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얼굴은 사정없이 빨개지고, 길쭉한 귀는 위아래로 정체없이 흔들린다.

몇 번을 연습해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말.

'그 여자는 어떻게 한 거야?'

문득 자신에게 이 말을 가르쳐준 세실리가 떠올른다. 그녀는 무려 자기자신을 '디저트'로 묘사했다고 들었다.

이 상스러운 말을 어떻게 아이작의 앞에서 했는지 실로 존경스러울 정도다.

그렇게 아르웬이 침대를 주먹을 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여왕님. 제논 님께서 현재 도착하셨다고..."

"금방 가겠다!"

그래도 아이작을 만나는 일이 먼저다. 나중의 일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아르웬은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위의 선물을 서둘러 상자 안에 넣는 건 잊지 않았다. 자칫했다가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

"지금 어디에 있지? 직접 만나러 가겠다."

"현재 아이작 님은..."

알븐하임의 선물 공세는 이제 막 시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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