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화 〉 안전불감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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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와 체리. 마블의 타노스와 DC의 조커처럼, 핵융합에 버금가는 조합이다.
한 쪽은 너무 밝아서 문제고, 또 한 쪽은 너무 어두워서 문제다. 다만 공통점이라 하면 두 사람 모두 자존감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
체리야, 자존감이 심각할 정도로 낮은 건 알 수 있어도 케이트는 의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살펴보면 그녀도 자존감이 낮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언행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루미너스와 나의 지시라면 목숨까지 끊을 수 있다. 단 한 번도 자기자신을 위로 둔 적이 없다.
물론 루미너스 같은 경우는 신인데다가 직접 은총을 내려주었으니 신봉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게 너무 심하여 자존감마저 깎여나간다는 게 흠이지.
본인의 인생을 살라고 조언을 해도 케이트는 분명 이리 대답할 것이다. 루미너스,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 자신을 위한 인생이라고.
이로 인해 체리와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건지도 모른다. 케이트는 따지고 보면 성격이 활발한 체리라고 할 수 있다.
빛과 어둠처럼, 극과 극을 달리지만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두 여자. 만약 케이트가 호위 기사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체리와 함께 지내지 않았을까.
대신 친구라고는 전혀 없던 그들이었기에 나름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가끔 가다 여유가 된다면 케이트가 체리를 기숙사로 불러 대화를 나누겠지.
조합만 본다면 이렇게 위험한 조합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 해서 진짜로 위험한 건 아니다.
체르노빌마냥 실수가 연달아 터지거나 내 쪽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참상이 발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할 일만 하면 되겠지.'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치면서 제논 일대기 26권을 집필했다. 그동안 매듭을 지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잠깐 지체되었다.
하지만 체리와의 만남을 끝으로 조교직만 제외하면 자유시간이다. 엘레나도 내 정체를 알고 나서도 전보다 많은 자유시간을 지급했다.
그렇다 해서 조교직을 설렁설렁하는 건 아니다. 나도 양심이 있는데 제논이라는 이유로 빠질 수는 없는 노릇.
대신 수업에 나설 때마다 선망을 비롯한 다양한 눈빛을 받는 건 영 익숙치 않더라. 특히 2학년 수업, 그러니까 마리의 수업에 들어갈 때다.
본인들의 동급생 중 한 명이 제논이었다. 만약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반응을 했겠지.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잭슨 그 놈이 꽤 재미있었는데.'
나는 잠깐 타이핑을 멈추고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정확히는 요즘따라 조용히 지내는 잭슨에 대해서다.
아마 모두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잭슨은 입학하자마자 리나와 세실리에게 집적거렸다가 퇴짜를 맞았다. 꽤 굴욕적이었지.
그런 그녀들이 나에게 관심을 주자 온갖 되도 않는 시비를 걸거나 행사 당시 괴상한 발언까지 꺼냈다. 릴리는 진이 아닌 제논과 이어질 거라는 희대의 망언.
원작자 앞에서 그딴 망언을 지껄이는 바람에 화가 난 나머지 조곤조곤 받아쳤다.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쳤지.
'이후로 조별 과제가 나오고······'
마리, 리나, 세실리, 마지막으로 잭슨. 가슴이 웅장해지는 라인이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웬 트롤러 때문에 독박을 쓸 뻔했으나 잭슨은 진짜 독박을 썼다. 솔직히 저 앞의 세 명이 조별 과제를 제대로 할리가 만무하다.
마리는 어느 정도 할 수 있겠다만 리나는 황녀고, 세실리는 이제 막 인간 사회에 녹아들기 시작한 마족이었으니. 그때 제대로 학을 뗐던 걸로 안다.
'지금은 눈도 안 마주치고.'
이후로 시간이 흘러 내 정체가 밝혀지고, 처음으로 2학년 수업에 들어가자마자 보였던 잭슨의 반응은 꽤 재미있었다.
내가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주자 고개를 스윽 돌려버렸으니까.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행동은 볼만했다.
그걸 보고 장난기가 돋아 한 번 놀려볼까 생각했지만 금방 관뒀다. 왠지 쫌생이 같기도 하고 조별 과제 이후로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놈이었으니.
더군다나 미쳤다고 잭슨 쪽에서 나를 건드릴 일도 없다. 날 건드리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텐데 미쳤다고 그러겠나.
또한 듣자하니 오만한 건 여전하나 여자에게 집적대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고. 조별 과제 당시 인생의 쓴맛을 알아버렸다나 뭐라나.
'그러고 보니 아이라 그년의 근황도 궁금해지네.'
조별 과제 당시 트롤러를 담당하고, 폭발한 나에게 쌍년이라는 욕설까지 들었던 여학생. 본인부터가 군 가문 출신인데 군인을 모욕하는 발언을 꺼냈던 무개념녀.
그 죗값으로 기사도 아닌 일반 병사로 입대하였으나 지금은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제국법에 따르면 아무리 고위 가문 출신이어도 2년 동안 얄짤없이 복무해야 된다.
다시 말해 그녀의 전역까지 대략 반년 정도 남았다는 뜻. 관심이 전혀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데이브나 니콜을 통해 한 번 물어봐야겠다.
'딱히 큰 변화는 없네.'
아직 수업에 전부 들어간 건 아니지만, 변한 건 거의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조교직을 수행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제논 일대기를 작성한다.
그나마 변한 거라고는 제논 일대기를 작성할 여유가 더 늘어났다는 점. 그것만 제외한다면 큰 변화는 없다.
나는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하다가 시선을 슬쩍 내렸다. 홀로그램 같은 창 속에 내가 타이핑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있다.
제논 일대기 26권의 내용은 전에 말했던 것처럼 교만, 루시퍼와의 결전이다. 반쪽짜리지만 날개를 펼치며 초월자의 권위에 발을 디딘 루시퍼.
루시퍼와의 결전은 어떻게 진행할지 모두 구상해놓았지만, 현재 제일 신경 써야 될 건 그 이후다.
분노를 시작으로, 식탐, 색욕, 질투, 마지막으로 교만. 26권까지 진행하게 된다면 토벌되는 칠죄종들이다.
그러므로 남은 칠죄종은 탐욕과 나태. 여기서 탐욕은 드워프이며, 나태는 대악마 디아볼스의 영혼을 담을 그릇이다.
탐욕이라는 칠죄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탐욕의 이름은 마몬. 나태는 벨페고르다.
'마몬의 모델은 드워프 그 자체지·'
탐욕, 그러니까 마몬이 악마측으로 전향한 이유는 몹시 간단하다. 한 번 돈맛을 본 사람은 다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마몬이 바로 그런 케이스다.
특히 드워프는 종족 전쟁 당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드워프가 제작한 물건은 물론, 건물처럼 무언가를 쌓아올릴 때 드워프만한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한 가지 안 좋은 인식이 생겨났다. 드워프는 돈만 있으면 그 어떤 무기든 만들어낸다고.
드워프는 천성적으로 뭔가를 제작하기 좋아하는 종족이지만, 제작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돈'이 요구된다.
어느 불쌍한 발명가의 말처럼,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예산과 시간이다. 이 둘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수가 없다.
때문에 드워프는 다른 건 몰라도 금전 감각 하나는 확실하며, 가끔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마찰을 일으킨다.
오죽하면 상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마키나라고 하겠는가. 드워프제는 품질을 보장할 수 있어도 거래가 매우 빡빡하다.
'그리고 본인의 창작물에 자부심이 엄청나지.'
마몬은 금전욕과 창작욕을 극대화시킨 칠죄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최대 걸작이 바로 나태였으니.
초월자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이것 하나만으로 드워프의 욕망을 자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처럼, 마몬의 최후는 비참하다. 본인의 창작물, 나태에게 잡아먹힐 운명이었으니까.
나태는 그 말처럼 평소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지만, 디아볼스의 영혼이 담겨지면서 서서히 깨어나게 된다.
깨어나자마자 하는 말은 바로 '배고파'. 그로 인해 바로 곁에 있던 탐욕을 잡아먹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이후가 관건인데······'
슬슬 완결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중요한 진의 최종 보스화가 아직 덜 짜여져 있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제논 일대기의 최종 보스는 디아볼스가 아니라 진이다. 디아볼스는 일종의 페이크 보스라고 보면 편하다.
디아볼스의 영혼이 세상에 흩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영혼을 집어삼키는 진. 본인의 친부, 식탐처럼 영혼까지 먹어버린다.
'그런데 나태를 섭취할 명분이 필요해. 아주 확실하면서도 납득이 가는 명분이.'
일단 페이크 최종 보스전은 간단하다. 디아볼스의 영혼이 담긴 나태와 싸우는 주인공 일행들. 이게 끝이다.
여태까지의 싸움보다는 솔직히 허무한 전투씬이 될 예정이나, 이후의 반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진의 최종 보스화를 위한 명분이 필요하다.
'······솔직히 릴리 말고는 없지?'
디아볼스에게 일격을 허용당하여 쓰러진 릴리. 그 릴리에게 치명적인 저주가 깃들게 되는 것이다.
디아볼스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 저주가.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 릴리라면 분명 희생할 게 뻔하니 아예 악독하게 나가야 된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악마의 씨앗이라던가. 악마의 씨앗이 발화된다면 '마족'이 아니라 '악마'가 되는 것이다.
성녀인 릴리라서 망정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악마가 되고도 남았을테지.
'해주가 불가능한 이유는 신과 비등한 권세를 가진 대악마라서.'
음. 음. 이것도 명분이 괜찮네. 독자들의 멘탈을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는 이야기야.
나는 희희낙락하면서 타자기가 아닌 노트에다가 필기했다. 대신 완결까지의 스토리가 좀 더 지연될 것 같다.
진은 앞으로 디아볼스의 영혼을 찾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닐 것이고, 제논과 메리는 릴리를 간호할테니.
이후로 고민에 고민을 거치던 제논과 메리는 릴리의 부탁에 따라 진을 추적한다. 진도 일행의 행동을 예상하여 곳곳에 메세지를 남기는 거고.
그렇게 오랜 여행 끝에 제논과 메리가 도착한 곳은······
'어디로 하지?'
이건 좀 고민되네. 이것 말고도 진이 어떤 방식으로 디아볼스를 추적했는지도 설명해야 된다.
만약 나태가 살아있다면 모를까, 그릇이 파괴되었으니 디아볼스의 영혼은 이 세상을 떠돌고 있을 터.
이걸 어떻게 추적하는지가 관건이다. 때마침 이 분야에 적격인 존재가 하나 있다.
'루미너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
신에게 직접 물어봐야지. 악마 전쟁을 겪으신 분인데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대략적인 필기를 모두 끝내고 기지개를 폈다. 기지개를 펴고는 뒤에 기립해 있던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아델 누나. 지금 몇 시야?"
"오후 3시 반이야."
"저녁까지 한참 남았네."
저녁 식사까지 시간은 꽤 많이 남았지만 입이 심심하다. 나는 입맛을 다셨다가 아델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남은 쿠키 있어?"
"아니. 재료도 없어서 구매해야 돼. 우유도 마찬가지고."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아냐. 나 혼자 갔다 올게. 괜히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게다가 케이트 씨도 불러야 되잖아."
내가 같이 간다고 하자 아델리아가 곧바로 거절했다. 아델리아 혼자서는 괜찮지만, 내가 나가는 순간 두 배로 호위해야 되니 저리 말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내가 외출한다면 케이트도 대동해야 되니 여러모로 정신력이 소비될 수밖에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악마 숭배자가 습격을 가할지도 모른다. 굳이 악마 숭배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밖에 나가는 순간 다양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바로 코앞인데 안 될까?"
"안 돼. 필요한 게 있다면 나에게 부탁해. 그러면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델리아는 내 전속 메이드지만 하녀처럼 부리고 싶진 않다. 나와 밤일까지 치룬 여자인데 사소한 것까지 명령하자니 거부감이 든다.
"그런 걸로 따지면 누나도 위험하지 않아?"
"위험한 건 똑같지만 호위가 더 힘들지. 내가 아니라 너를 신경 써야 되니까."
"쩝······ 알겠어. 그럼 갔다 와."
"응. 대신 가만히 있어야 된다. 밖에 누가 노크해도 함부로 열어주지 말고. 알겠지?"
나 어린애 아닌데. 어찌 하는 말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 같다.
이후로 쿠키 재료와 우유를 사기 위해 밖으로 떠난 아델리아를 배웅해주고,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나저나 악마 숭배자들이 진짜로 나 노리는 거 맞나?'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